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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신부 외 9편 *2022년 제11회 고양행주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유미애
나는 겨울 아침의 숨이야 당신의 복제된 꿈이지
60일 동안 해가 뜨지 않는 나의 나라는 늑대와 사람이 서로의 피로 몸을 덥히며 설원의 자식들을 나눠 갖는 곳
태어날 때부터 슬펐어 내 몸 어디서도 꽃씨를 찾지 못했단 말은 평생을 문 밖에 서 있게 했으니까 많은 걸 알고 싶어졌지 낯선 나로 가득한 바람의 갈기와 모든 울음의 시작인 바다의 눈, 발목이 자란 저녁에는 불빛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지 청사과를 먹는 시간을 배우고 바다 속 오로라를 본다는 시인을 사랑하게 됐으니까
우리의 별은 자기연민 중이야 수많은 결혼식을 지운 시인의 노트 밖으로 넓은 흰자위를 가진 직립인의 그림자가 흘러내려 나는 더 간절히 사라지기 위해 자꾸 태어나는 건지 몰라 옛 몸이 기억하는 내 가장 빛나는 낙하지점은 행성의 무게를 견디는 꽃나무의 발등이나 병약한 주인을 간호하는 연필심이 될까
담뱃대를 깊이 문 이누이트들은 말이 없네 다만 푸른 신의 잉크병을 찾아줄 고래를 기다리네 진눈개비 속의 피아노 소리는 새로운 별을 관측한 날의 신문을 찢으며 내 면사포를 더럽힐 텐데 태양을 의심하진 않지만 어둠이 가깝다 눈물의 레일이 끊기면 이 별의 창문 한쪽도 고래의 詩도 없을 텐데
성벽아래 양철병사가 조는 밤 눈부신 하얀 구두를 질척대며 파닥이는 붉은 꽃을 손에 쥐고 나는 지금, 당신의 101번째 몸과 접속 중이야
고양이라는 상자
고양이는 닫힌 악기다
궤적의 예술가다 고양이의 철학이 넘치는 골목에서 수직의 푸른 눈과 마주친 순간 깨닫는다 고양이는 무릎 위의 먼 세계라는 걸
이 고독하고 우월한 種은 양탄자 위의 봄볕처럼 우리를 간질이다 저녁 묘지의 베일 속에서 분열한다 천사와 악마가 마주보는 얼굴은 갈채에 목마른 신의 모조품, 호기심을 숭배하는 발톱은 세상을 할퀴며 질문한다
안과 밖이 모호한 고양이는 제 발자국을 사원으로 가진 구도자, 배회하는 밤의 광대, 모든 별을 꿈꾸고 파헤치는 우주의 부랑아다 타자의 색에 물들지 않는 이방의 음이다 고양이의 기타에 불이 켜지면 어둠의 밑바닥마다 팝콘이 터지고 벙거지를 눌러쓴 달동네 꼭대기 방은 방랑의 도시로 나간다
고양이는 흔들의자와 뒷골목이 엮은 이야기 꾸러미, 금붕어가 잠꼬대로 튀겨낸 초신성, 장미의 붉은 숨을 갈망할 때도 금간 접시 위, 생의 비린내를 탐구할 때도 고양이는 고양이 너머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양이를 연주할 수도 가질 수도 없는 것이다
녀석이 수시로 몸을 핥는 건 제 몸의 공명을 잠재우기 위한 것, 고양이는 고양이만 열 수 있는 문이다 건너편에 놓인 의문의 상자다
꽃잎의 떨림은 우주적인 것
돌이 우는 걸까? 해와 달을 포개놓은 얼굴이 있다 태초의 이야기를 품었다는 벽 저편의 사람, 바람의 숨이라 했다 파도의 음이라 들었다 얼굴을 바치고 떠도는 몸의 독백이라고도 했지만 나는 꽃 핀 시간을 찾아온 별들의 떨림이라 부르겠다
모든 첫 문장은 광물성일까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말을 털어놓을 돌 하나씩을 남기고 가는 것일까 얼굴을 들인 후 방향을 잃었다 닻을 올릴 수 없는 나의 부두엔 낱자들이 쓸려 다녔다 제 흉터를 땜질하느라 통증을 잃은 용접공처럼 나는 돌망치를 견뎌낸 바위의 뜻을 읽지 못했다
다른 듯 닮은 우리는 두 세계의 벽 앞에 있었다
손 안의 돌멩이를 굴리면 뿔들의 부딪침 같은 바람의 스침 같은 울림이 있었다 뭍의 끝에서 시작된 그의 피리소리가 나를 불러낸 걸까 발밑의 바다가 전복된 듯 꽃의 서랍 한 칸을 엎지른 듯 알 수 없는 물체들이 달리고 피어나고 피 흘리며 지워져갔다 사냥터가 완성되고 있었던 것
나를 내던진 벼랑 너머가 그리워질 때쯤 나는 털이 무성한 시절의 가운데 있었다 아픈 시간의 만조를 벗어나, 한 음절의 비명과 한 구절의 물고기를 베끼며 노래하는 서체가 되었다 돌 속의 꽃잎을 건져 허공으로 띄운 그 저녁
내 눈 속의 얼굴이 빙긋 웃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서로의 이야기꾼이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야기로 만든 커다란 공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진 하나의 공이란다
네가 왜 백야의 순록처럼 서 있는지 묻지 않을게 어른이 된 내가 아가미의 상상력을 잃어간다는 슬픔과 같을 테니까 네 숨에서도 툰드라의 이끼와 타클라마칸의 바람 냄새가 느껴지니까 난로 위의 물이 끓으면 겁 많은 아이의 등잔이 흔들리고 할머니의 뜨개바늘은 빨간 입술 딸깍이며 외로운 눈사람을 부르는데
괴성이 몰고 온 폭설의 밤, 마을을 지켜보던 거구의 그림자가 있다 했다 이듬해 봄 그 자리엔 처음 보는 꽃이 피어나고 그를 닮은 작은 사람이 인간들 속에 섞이게 되었다는데
공이 기울어지지 않는 건 눈사람이 살아있어서란다 흰 그림자가 지치지 않는 한 우리는 피고 지며 나아갈 수 있지 제 눈물로 키운 꽃씨를 쥐고 또 다른 마을을 향해 달리는 눈사람, 빛을 다 써버린 별은 소리도 냄새도 없단다 그때가 네 눈물이 필요한 순간이지 눈 내리는 문장이 짧아지고 있구나
순록의 눈은 물고기의 배를 가르던 반달칼의 춤을 보여주는데, 물고기의 뼈로 만든 바늘은 깨끗한 뿔과 설원의 괴수와 우리의 귀를 잇고 있다는데 공의 그늘 한 쪽이 입술과 입술을 덧댄 말의 솔기를 덮을 때쯤, 뭉툭해진 바늘을 물려주며 얘기할 수 있을까 꽃잎과 눈의 감촉과 큰 물고기를 먹던 저녁을
눈송이가 파수병처럼 활을 쏘아 올리는 밤, 나는 다시 춤을 추지 깊은 동굴에 숨어 인간의 발자국을 깁는다는 그의 숨소리는 멀지만 또 한 덩이 녹아내린 겨울 이야기의 끝은 알 수 없지만
눈사람
가장 깨끗한 주검일 거라고 세상은 떠들었다
겨울의 유골은 외딴집 문 밖에서 발견되었다
제 죽음의 비밀을 밝혀달라는 듯
뭉개진 입으로 문패를 닦고 반쪽 귀는 굴뚝 밑에 열어두고
심장을 꿰뚫는 눈구멍은 누군가의 발소리가 턱 밑에서 멈출 때까지
투명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벽보가 붙어있던 자리에서 문명의 비린내가 진동했다
따뜻한 밤을 기웃대다 몇 번이고 스스로를 잃어버린
하반신을 녹여 마른물고기에게 길을 열어준
사람, 검시관은 추측했다
발자국이 회오리를 파놓은 희미한 형체를 중심으로
털신 한 짝은 북쪽 더 먼 곳으로
짚풀 모자는 꽃피는 남쪽으로 달아나고 있었을 거라고
올 풀린 장갑과 때 묻은 열망이 굴러다녔을 가방
앙상한 손이 끝까지 잡고 있던 퍼즐의 밑그림은 무엇일까
검시관이 마지막 겨울을 양동이에 담고 불을 지폈다
다시 술렁이는 그의 분신들, 우리는
담장 아래로 흘러간 얼굴을 위해 한 삽
바깥 창에 못 박혔을 영혼을 위해 또 한 삽을 펐다
나눠 꽂은 이어폰 속 알 수 없는 노래에 박자를 맞추며
녹아내리는 팔 다리 한 쪽씩 검은 침묵 속으로 던져주며
코끼리
꽃 필 무렵의 코끼리는 순수다 제비꽃으로 가득한 눈은 최초의 세계다
이젠 잊힌 문이다 미세한 주름들은 코끼리의 내면, 압축된 시간을 풀어 아픈 별의 하루를, 백 년을 읽는다 고도를 낮춰 함께 걷는 별빛이, 날개를 접고 땅에 정착한 선조들의 입김이라 생각한다 눈꺼풀이 열릴 때마다 당신이 오고 이야기의 톱니가 돌고 동풍이 도착했을 테니, 조련사도 관객도 없는 구름 위에 집을 지을 거라 한다
일생을 탐구해도 풀지 못할 비밀들, 신은 코끼리 떼가 날아가는 광경을 보며 인간을 만드신 걸까 그러나 지금은 사색의 귀를 펼쳐 활강하는 코끼리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없다 순수는 멍 들었고 코끼리는 때때로 찌그러진 공처럼 울어야 했으니까
우리가 밀림보다 무거운 도시를 업고 달려가는 것이 어딘지 알지 못하듯, 코끼리는 제 안에 묻은 태아의 이름과 자신의 배설물로 이룬 초록을 친친 감고 서커스의 혼돈 속을 흘러간다 아름다운 상아가 코끼리의 祕文이란 것을 아는 당신이라면 관측할 수 있겠지 별들이 힘을 모우는 순간 무언가를 낳고 있는 늙은 코끼리의 눈
선조들의 영혼이라 믿는 운석들이 행성의 뺨 위로 눈물방울처럼 떨어지고 끊어진 봄날의 이야기를 잇 듯 순결한 핏덩이가 다시 찾아온 저녁이라면
꽃나무라는 정거장을 가진 새
재킷을 벗는 저녁이면 거울 앞에 서는 새가 있다 유리에 머리를 부딪치며 무수한 의문 부호를 만드는
나무 하나를 그린 후에야 잠이 들 수 있었다
내 안의 어둠을 쪼는 새들이 늘어갔으니까
그 울음소리를 이륙시킬 한 뼘의 숲이 모자랐으니까
스스로의 감옥에 갇힌 나는 푸른 허공을 갈망했다
모습을 바꾸며 완성되는, 달의 발코니에 닿고자 매일 나를 내던졌다
휘파람과 왈츠를 모르는 내 부리, 너무 일찍 슬픔을 배운 걸까
하루 동안의 꿈과 하루 동안의 절망이 벼랑을 만들었다
꽃나무라는 정거장이 폐쇄되고 딸기덤불의 문장이 지워졌다
신의 예언과 바람의 서사로 엮은 내 몸은 일찍이 기적이라 불렸고
세상의 의미는 높은 곳에서 더 높은 곳으로 옮겨갈 뿐이었으니
나는 깃이 닳은 발자국을 부정하며 나를 몰아갔다
구름을 관찰하던 언덕을 파헤치고 고성의 문을 부수며
허기의 활주로를 달리던 어느 순간 나는 멈췄다
내가 만든 사막에 들어 늑골 가득 별을 안은 밤, 내 눈은
누더기를 걸친 채 거울을 깨고 있는 자신을 보고 말았으니까
작은 꽃잎에 누워보았다 둥근 꽃의 안쪽에는 비상과 추락을 반복하던 핏자국이 있고 노을빛과 빗소리가 담긴 의자가 있다 나를 뒤집으며 버둥대던 하루가 지고 초이레 달이 반쪽 얼굴을 깁는 동안
나는 빈 의자에 앉아 접혀있던 발의 먼지를 털었다 나를 노래할 입술을 달고 우리를 위해 춤출 에나멜 구두를 신고 흔들리는 잠, 비대칭의 숲 밖으로 걸어 나갔다
노트
흰 눈썹의 소년은 고향으로 가는 엽서에 실려 있을까? 아랍상인의 피리소리를 잃은 뱀처럼 북극성을 놓친 탐험가의 자석처럼 어두워졌을까
그러니까 그곳은 나무 끝에 열린 태양 아래서 짐승과 인간이 뒹굴며 컹컹대는 유쾌한 마을이었지만 욕심 많은 족장이 이야기를 금지시킨 후 죄인이 생겨났다 까막눈 족장에게는 황금물고기가 있고 물고기에게는 수족관을 지키는 소년이 있고 소년에게는 가냘픈 손이 있었다 물고기는 밤마다 족장에게서 훔친 이야기를 소년에게 들려주었다 낮 동안의 구화를 나뭇잎에 옮기는 소년의 손은 아름다웠다 이파리에 닿는 연필의 사각거림은 어느 악기에서도 들을 수 없는 소리였으니까 벌레 먹은 잎에는 괴물에게 시집간 소녀와 신발을 빼앗긴 두족류와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살았다
철창이 늘어가고 족장의 배가 터질 듯 부풀자 태양이 시들었다 물고기는 어느 큰 비 내린 날 족장을 삼키고 빗줄기를 따라갔다 비유를 잃어버린 마을은 사라졌다 물고기도 슬픈 손도 잊혀갔다 세간에는 귀신 형상의 낡은 노트가 떠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잡고 보면 썩은 잎이 만든 무덤뿐이더라 했다 그러나 유령의 목격담은 멈추지도 숨죽지도 않아서 또 다른 부족의 입과 귀를 간질이며 마을을 꽃 피웠다 가짜 같은 진짜, 진짜 같은 가짜가 들려주는 풍문의 노트 속 첫 번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먼 바닷속 마을에는 이야기를 뱉어내고 사라지는 물고기가 있지 조개껍데기에 쓰인 붉은 문장을 가리키는 늙은 손은 낯설지가 않단다
아가미 소년
낮은 등에 푸른 잎을 그려준 사람이 있다
삶을 감각하는 건 생김새가 아니라고 비늘을 닦던 때가 있었다
운석들이 하강하는 밤, 미치광이풀의 뒤꿈치가 단단해질 때
검은 아가미는 분홍입술이 되는 연습을 한다
여름나무 풋볼 어린왕자, 몸 밖으로 달아나는 글자들
지느러미를 접고 초식지에 내리면
땅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36초, 뿔이 뛴다
아가미를 얻기 전의 아비들이 쫓았다는 사냥감이다
빛나는 종아리와 수염고래의 눈을 가졌다고 숨통을 끊지 못하는데
늘 숨이 가쁘다고 풋내기 사냥꾼은 고백하고 싶었다
가시 꽃 붉은 젖 냄새가 세포 속에 살아있어
수증기로 빚은 새도 동쪽에서 오는 햇빛도 포기할 수 없다고
젖 없는 아비는 강보를 안고 가시담장 촘촘한 외딴집까지 헤엄쳤다는데
그를 닮은 발등을 돌로 내리칠 때마다 째깍거리며 좁혀오는
36초는 뭍에서 물로, 뿔을 깎고 물기둥을 헤치며
끊임없이 그림자를 바꿔달고 달려야 하는 그런 시간
밑줄 그은 단어들을 놓치고 비춰보는 돌거울에는
그 사람이다 피를 다 말린 제 여자를 그믐달로 돌려보낸
노루가 뛰는 달밤이라고 자주색 미치광이가 피는 계절이 왔다고
거울을 팽개치고 참았던 숨을 뱉는 늙은 물고기다
63호는 매몰된 섬, 그곳에 있었다 꼬리 잘린 아비와 복사뼈 아린 어미가
월광곡
달도 음표도 모르는, 막걸리 한 잔이면 천형의 노역도 마다 않던 아비는 골짜기를 몇 번이나 태우고도 달의 수호신이 되지 못했다
우물에 비친 미래를 물으면 눈에서 눈이 쏟아진다 물 밖으로 튕겨나갈 듯 부릅뜬 물고기들, 밤이면 달의 손이 내려와 건반을 두드렸다 손톱 밑에서 초록이 자라고 잔가지들은 곡선으로 너울거렸다
나는 종종 베토벤이라 불리는 나무 아래서 꽃을 좇으며 나를 놓치며 계절의 막간을 옮겨 다녔다 숯장수의 장화는 나무의 음을 실어 나르는데 충실했다 흉터자국이 많은 가지일수록 울음이 깊다 했다 나무의 영혼을 얻기 위해 숯장수의 귀는 세상의 소리를 지운단다
가마에 불이 들어오면 나는 마을을 돌며 고드름 핀 굴뚝마다 불의 씨앗을 던져 넣었다 젖은 악보를 끼고 지붕을 오르던 날, 아비가 독수리계곡으로 사라진 후 나는 톱밥 속으로 뛰어들던 꽃들의 행방을 묻지 않게 되었다
빈 장화는 어둠을 껴안은 채 고요하고 나비 떼 어지럽던 내 귀가 더 이상 꽃의 계단이 되지 못할 때, 늙은 베토벤의 손을 잡으면 짧은 숨이 터졌다 물고기는 언제나 먼 호수로 가는 티켓을 쥐고 제 심장이 녹기를 기다린단다
다시 길을 묻는 저녁, 뺨에 쌓인 눈을 치우면 달의 손가락이 젖은 머리칼을 잡았다
유미애
경북 문경 출생. 2004년 《시인세계》로 등단. 서울문화재단 젊은 시인을 위한 지원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창작지원금 수혜. 시집 『손톱』, 『분홍 당나귀』 등. 제6회 풀꽃문학상 젊은시인상, 제11회 고양행주문학상 수상.
첫댓글 문경의 자랑입니다.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