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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구원
슥 12:1-9
1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2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모든 민족에게 취하게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예루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까지 이르리라
3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을 모든 민족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그것을 드는 모든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 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4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 자를 쳐서 미치게 하되 유다 족속은 내가 돌보고 모든 민족의 말을 쳐서 눈이 멀게 하리니
5 유다의 우두머리들이 마음속에 이르기를 예루살렘 주민이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 할지라
6 그 날에 내가 유다 지도자들을 나무 가운데에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하리니 그들이 그 좌우에 에워싼 모든 민족들을 불사를 것이요 예루살렘 사람들은 다시 그 본 곳 예루살렘에 살게 되리라
7 여호와가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리니 이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 주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8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주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9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이방 나라들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슥 12:1-9 / [예루살렘의 해방과 혁신] 이 예언의 말씀은 주께서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하여 선포하신 것이다. 2) 하늘을 펼쳐 놓고 땅의 기초를 놓으신 여호와께서, 사람의 가슴 속에 생명과 영혼을 만들어 놓으신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가 예루살렘을 독이 가득 찬 술대접이 되게 하겠다. 예루살렘에 군대를 파견한 이웃 모든 민족은 그 술을 마시고 비틀거릴 것이다. 예루살렘이 포위를 당할 때에는 유다도 위기에 빠질 것이다. 3) 세계의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을 포위하려고 모이는 그날이 오면, 내가 예루살렘을 세계 만민들이 들어도 끄떡하지 않을 무거운 바위가 되게 하겠다. 그 바위를 치우려고 하는 백성들마다 크게 부상을 당할 것이다. 4) 그날에는 내가 그들의 군마들을 모조리 쳐서 놀라게 하고, 기마병들은 모두 미쳐 버리게 하겠다. 내가 유다 백성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보호해 주겠지만 세계 만민들의 군마들은 모조리 눈망울을 때려서 멀게 하겠다.'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다. 5) 그런 일을 경험한 유다의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은 확신을 증언할 것이다.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지닌 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신 그들의 하나님께 있다.' 6) 그날에는 내가 유다 백성들을 지원하여 바싹 마른 나무를 태우는 불이나 곡식더미에 퍼지는 횃불처럼 그들이 순식간에 사면의 원수들을 멸절시키도록 하겠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여전히 제자리에 남아서 더욱 평화로운 도성이 될 것이다.' 7) 그런 속에서도 여호와께서는 유다 자손들이 예루살렘 주민들보다 먼저 승리를 얻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다윗의 후손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유다 자손을 얕잡아볼 수 있는 동기나 우월감을 얻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8) 그 다음에는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도성을 보호해 주시고 그 주민들도 강하게 도와주셔서 가장 약한 사람도 다윗처럼 강한 자가 되고 다윗 왕가의 후손들은 신들처럼, 여호와의 천사들처럼 될 것이다. 9) 그 시대가 되면, 내가 예루살렘을 치려고 몰려든 민족들을 모조리 멸절시킬 것이다.
스가랴의 마지막 예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하여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주십니다. 이를 위해 먼저 12장은 경고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삼키려는 모든 민족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모든 민족에게 포위되다(1-4) 경고는 원래 무거운 짐(burden)을 뜻합니다(1). 그러므로 스가랴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게 될 말씀이 무거운 짐이요, 또한 그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도 무거운 짐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주시는 분이 바로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고,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때로 부담스러운 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져주시는 은혜의 수단입니다(시 107:19-20).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이제 예루살렘이 침략자들에게 술잔이 되고, 무거운 돌이 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2-3). 하나님은 마침내 이스라엘을 에워싼 대적들을 술에 취한 것처럼 만드시고, 무거운 돌이 되어서 그들을 상하게 만드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눅 20:17; 마 21:44). 더 나아가 그들의 말을 쳐서 눈을 멀게 하고, 그 탄 자들을 미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과 유다를 도우시다(5-9)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침략하는 모든 민족의 말들의 눈을 멀게 하고 말 탄 자들이 정신을 잃고 미치게 만드실 때 유다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전쟁에 개입하여 승리하게 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유다 지도자들을 나무 가운데 화로 같이, 곡식단 사이의 횃불 같게 하여 적들을 불사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사회는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의 세 집단으로 구분되었습니다. 다윗의 집은 왕족을 말하며, 예루살렘 거민은 관료와 제사장을 비롯한 지도층이 주된 구성원이며, 유다는 평민 계층을 말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적의 침략받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하여 약한 자가 다윗 같게 하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과 여호와의 사자 같게 하신다고 약속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과 유다를 대적하는 자들을 멸하길 힘쓰시겠다고 했습니다.
적용: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술잔, 무거운 돌, 불타는 화로, 곡식단 사이의 횃불 같게 하시는 의도가 무엇인지 깨달은 바를 서로 나누어 봅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의지하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의 영적 상태에 따라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을 기억하며 우리 역시 자신을 지키는 영적인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가정과 교회로 살아간다면 영적으로 막강한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 설 교 >
이스라엘의 구원의 날
스가랴 12:1~13:1 / 피영민 목사
서 론
예언이라는 말은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예언이라고 하면 預(미리 예)를 써서 먼 장래에 일어날 일에 관한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은 예언입니다. 그러니까 ‘예’는 ‘미리 예’를 쓸 수도 있고 ‘맡길 예’를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은 하나님이 맡기신 말씀을 그대로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읽는 사람도 이것을 아침에 신문 읽듯이 그 내용과 의미를 간단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은 억지로 풀어서도 안 되는 것이고 피상적으로 이해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연구와 묵상을 통해서 가장 납득할만한 이해를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후서 3장 16절에 예언은 바르게 풀어야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전 3:16). 억지로 푼다는 것은 영어로 ‘distort’ 왜곡을 한다는 말입니다. 본래 의미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삐뚤어진 해석을 하고 자기들의 사사로운 목적을 이루려하다가 멸망하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12장부터 14장까지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날에’라는 단어가 18번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스가랴 12장부터 14장까지 예언의 핵심은 ‘그날에 일어날 일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가랴 12장 1절부터 13장 1절까지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그날에 관해서 내용상으로 두 종류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육적으로 그날에 구원받게 될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날은 이스라엘이 육적으로 구원받는 날이기도 하고 영적으로 구원받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Ⅰ. 그날은 이스라엘이 육적으로 구원받는 영광스러운 날이다.
유다는 예루살렘의 외곽 지역으로, 천하만국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했습니다. 2절에 보면 예루살렘이 사면 국민들에게 에워싸이게 되었습니다. 포위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절 후반에 보면 천하만국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려고 집합했습니다. 6절에는 ‘예루살렘을 좌우로 에워싼 모든 국민’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나라 국민들이 다 와서 예루살렘을 좌우로 포위했다는 것입니다. 또 9절에 보면 ‘예루살렘을 치러오는 열국’이라 말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들이 예루살렘과 유다를 공격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이처럼 공격을 받고 있으므로 구원받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이렇게 공격받고 있는 예루살렘을 구원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개입하셔서 예루살렘을 지키시고 원수들을 물리치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슥 12:1). 하나님은 하늘을 지으신 하나님이고 땅에 터를 세우신 하나님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시고 유지하시고 전능하신 능력이 있으시고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안에 영혼을 지으셨습니다. 영혼을 지으신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이 약하고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유다가 약해도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개입을 하시어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초자연적인 방법을 사용하실까요?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국민에게 혼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예루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까지 미치리라”(슥 12:2). 예루살렘이 포위되면 유다는 저절로 포위됩니다. 예루살렘으로 그 포위하고 있는 사면 국민들을 ‘혼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합니다. 술 먹고 완전히 취해서 해롱대는 존재와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혼취케 하는 잔’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잡아먹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열국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3절에는 다른 상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무릇 그것을 드는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 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슥 12:3). 사람이 무거운 돌을 억지로 들어올리다 보면 허리가 무너집니다. 무리한 무게를 들어 올리다 보면 허리에 장애가 오고 장애인이 되어 걷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침공한 열국들이 예루살렘을 들어 던지려고 하다가 자기허리가 다쳐 장애인이 되더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 자를 쳐서 미치게 하되 유다 족속은 내가 돌아보고 모든 국민의 말을 쳐서 눈이 멀게 하리니”(슥 12:4). 세상 모든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침략하려고 말을 타고 왔다는 것입니다. 말을 타고 기병들이 온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들의 눈을 못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 탄 사람들을 정신착란이 일어나게 한 것입니다. 말은 앞뒤가 안보이고 말 탄 사람은 정신착란이 일어나 서로 치고 죽이고 해서 다 죽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 날에 내가 유다 두목들로 나무 가운데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하리니 그들이 그 좌우에 에워싼 모든 국민을 사를 것이요 예루살렘 사람은 다시 그 본 곳 예루살렘에 거하게 되리라”(슥 12:6). 이것은 사사기 15장에 사사 삼손이 사용했던 방법을 하나님이 똑같이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사 삼손은 블레셋하고 전쟁을 할 때에 무기가 없어 여우를 잡아왔습니다. 여우를 잡아다가 여우꼬리에다 횃불을 달았습니다. 횃불을 달아 여우 엉덩이를 치니 여우들이 블레셋 사람 곡식단으로 다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곡식이 다 불타 블레셋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똑같은 방법을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두목들이 횃불을 들고 다닙니다. 횃불을 들고 다니다가 외적들이 쳐들어 온 곳을 향해서 대니 열국들이 다 불타서 없어지게 되더라는 말씀입니다.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슥 12:8~9). 하나님이 예루살렘 거민 중에 제일 약한 사람을 성장시켜 다윗처럼 만들어주십니다. 다윗은 목동인데도 불구하고 블레셋의 큰 장수 골리앗을 물맷돌로 물리쳤습니다. 예루살렘의 약한 사람도 성장해서 다윗처럼 되고 다윗의 족속은 한층 더 성장되어 여호와의 사자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거민들이 다 능력을 받아 성장되어 원수들을 다 물리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다섯 가지 표현들을 모두 요약하면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개입하셔서 원수들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보호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하리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를 어떻게 할 것이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입니까? 그날을 어떤 사람들은 21세기보다 더 미래의 어떤 날이라고 해석합니다. 미래의 어떤 날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다.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에 하나님이 예루살렘과 유대인을 보호하고 세계 열국을 다 멸망하게 하실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이것은 문자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예언이고 예언은 상징적인 언어를 쓰고 있기 때문에 상징적인 해석, 영적인 해석을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구약 예언에 나타난 이스라엘 혹은 예루살렘은 신약시대의 영적인 이스라엘, 영적인 예루살렘으로 이해해야합니다. 구약의 육신적인 이스라엘이 무너진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신약의 영적인 이스라엘이지 육적인 이스라엘이 또 다시 일어난다는 것을 예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육적으로 구원받는다는 이 사건은 영적구원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예루살렘은 모두 교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6). 옛날 교부들이 ‘교회를 어머니로 갖지 아니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는 말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우리 어머니, 곧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가랴 선지자 예언에 등장하고 있는 예루살렘은 신약의 교회에 대한 예언으로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열국이 교회를 핍박합니다. 지금도 전 세계에 선교사가 가서 복음을 마음대로 증거할 수 있는 나라는 몇 나라 되지 않습니다. 다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열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교회를 핍박합니다. 지금도 힌두교 국가나 이슬람 국가나 불교 국가들이 자유를 준다하지만 실질적으로 자유가 많지 않습니다. 열국이 지금 교회를 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둘러싸서 치려하고 핍박하고 그리스도를 대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교회를 보호하시고 교회의 원수들에게 심판을 내리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교회를 건드리는 자는 하나님의 눈동자를 건드리는 자요, 무거운 돌을 들다가 중상을 입을 자요,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고 비틀거릴 자요, 정신착란을 일으킬 자요, 그가 타고 있는 말도 앞을 못 보게 될 그런 사람인 것입니다. 즉 스가랴 12장 1~10절까지는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보호해 가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건물인가요? 이곳은 교회가 아니고 예배당 건물입니다. 그럼 교회는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들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우리 각자 개인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나를 치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이 나를 돌같이 되게 하셔서 그가 허리를 다칠 것입니다. 여러분을 치려고 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진노의 잔을 내리실 것입니다. 나를 치려고 하면 하나님이 나를 강하게 해주시고 성장하게 해주셔서 원수를 이기게 해주실 것이며,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이처럼 보호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보호해주고 계십니다.
Ⅱ. 그날은 예루살렘이 영적으로 구원받는 영광스러운 날이다.
두 번째로 이 본문은 예루살렘이 영적으로 구원받는 영광스런 나라라는 것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영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세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첫 번째는 그 날이 되면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하나님이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영, 간구의 영을 부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은혜의 영, 간구의 영은 바로 성령입니다. 그날이 되면 예루살렘과 유다의 집에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하나님의 백성들, 신약시대 성도들에 대한 상징으로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민족적인 회심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회심은 개인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에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유대인이나 이방이나 지금은 하나님이 대하시는 원리가 동일하며 유대인 중에도 하나님의 택한 자가 있고 이방인 중에도 하나님의 택한 자가 있고 하나님의 택한 자들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어떤 시대든 다 구원받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예수님 재림 직전에 유대인들이 민족적으로 성령 받고 회심한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의 오순절 사건을 스가랴가 바라보며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나오는 사건은 10절 후반에 각 족속의 남자와 여자가 따로 통곡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진실로 회개하고 통곡을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 최후의 종교개혁가인 요시야 왕이 애굽왕 바로느고와 전투를 하다가 므깃도 골짜기 하닷 드림몬에서 죽었습니다. 그때 유다백성들이 요시야 왕을 슬퍼하면서 통곡했던 것처럼 그렇게 통곡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재림 직전에 유대인들이 그렇게 통곡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오순절 이후에, 성령 받은 이후에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다 진정한 회개운동을 하고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가 바로 우리의 구주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을 알고 깨달아 진실로 통곡하는 것, 회개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요 19:37). 예수님이 로마 군병에 의해 창에 찔려 물과 피를 다 쏟을 때에 그것은 스가랴가 예언한 것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하고 이렇게 설교 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려 사도들에게 그러면 우리가 어찌할꼬 하면서 탄식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우리가 못 박은 예수가 메시아였구나.” 이방인들도 “골고다 언덕에 못 박힌 예수가 내 죄 때문에 죽으신 나의 구주셨구나.”라고 진실로 애통하고 회개한다는 말씀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시면 인류역사에 진정한 회개운동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스가랴가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건은 13장 1절입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 13:1). 죄를 씻는 것은 사죄, 칭의를 의미하고 더러움을 씻는 것은 성화를 의미합니다. 칭의와 성화를 주는 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밖에는 없습니다. 성령이 오시고 회개운동이 일어나면서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고 거룩하게 되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스가랴가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 론
인간의 문제는 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못생기면 개성 따라 살면 됩니다. 사람의 문제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문제는 죄입니다. 하나님 앞에 똑바로 살지 못했던 죄, 이것을 그대로 가지고 가면 죄 가운데 죽어 지옥에 떨어져 영영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는 해결해야 됩니다. 죄는 용서를 받아야 됩니다. 죄는 용서를 받고 사죄를 받고 의롭다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의 궁극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죽어도 괜찮습니다. 죽어도 천국에 들어가서 부활을 하고 영생하며 살기 때문에 죄 문제 해결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아직도 죄와 허물을 씻는 샘이 열려있는 시대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지금도 흐르고 있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샘이 영원히 열려있지는 않습니다. 이 샘이 닫힐 날이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유대인만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내 죄 때문에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창에 찔려 물과 피를 다 흘리셨나이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내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진실로 회개하고 애통하는 사람은 죄 용서를 받고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그 시각 이후로 그는 천국 백성이 되어 죽어도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죄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은 그대로 살지 마십시오. 죄는 해결함을 받아야 됩니다.
교회는 바로 예수 믿어 그 피로 씻음 받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 세상 권력자가 교회를 해치려 해도 이 세상 부귀와 모략을 가지고 교회를 해치려 해도 해치려 하는 그 자만 중상을 당하고 허리가 부러지고 미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눈동자처럼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죄를 용서받지 못한 사람은 예수 믿고 죄 씻음 받고 의롭다함을 받아 구원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살 때에도 성령이 함께하셔서 삶을 살다가 천국에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교회를 사랑하시고 주께서 명하신 복음전도에 함께 협력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슥 12:6-9 / 김태영 목사
오늘 스가랴 12장의 내용은 그 날에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호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1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을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자이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우리 영혼의 주인이십니다. 창조자요 모든 것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보호자 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기도 하며, 좀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보호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에 대한 보호의 약속입니다. 또한 계속해서 언급하는 ‘그 날’은 바로 디데이가 아니라 브이데이, 승리의 날입니다. 창조주가 되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약속은 승리의 날까지 이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약속이 무엇이며, 승리의 날까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그의 백성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위해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을 자신들의 힘으로 삼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들을 위해 그 능력의 손을 움직이십니다. 1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주변 백성들에게 ‘혼취케 하는 잔’과 ‘무거운 돌’이 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혼취케 하는 잔이란 이스라엘을 먹어버렸는데 삼키고서 보니까 자기들이 취해서 비틀거리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공격을 하고 보니 이득을 본 것이 아니라 손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적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함으로 자신들의 힘을 자랑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자기 발등만 찍혀서 상처 입고 물러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똑똑하고 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보호자가 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5절 말씀에 보면, 유다의 지도자들이 마음속으로 예루살렘 거민들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나무 가운데 화로 같게 하며, 곡식 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하겠다고 합니다. 이는 그렇게 불같은 기세로 적들을 파멸시키고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공격하려고 들어온 적들은 오히려 넘어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도리어 능력을 힘입어 불같은 기세로 승리를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하나님만을 자기의 힘으로 삼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자신의 힘으로 삼고,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승리자가 되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약한 자를 우선적으로 합니다.
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은 물론이고 유다의 변두리지역까지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유다의 변두리 지역을 보호하시고 다음에 예루살렘을 보호하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우선순위가 바로 약한 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거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차별 없이 동일하게 보호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는 약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의지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강한 자는 보호하시지 않는 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도 보호하시지만, 그 우선순위에 있어서 약자들부터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고아나 과부, 나그네와 같은 약한 자들에게 관심을 보이십니다. 우리 역시도 평소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관심을 가지고 약자들을 돌보고 살피는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양보하십시오. 베풀어 주십시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가 없는지 살펴보십시오. 도움을 베푸는 것은 얼마나 가졌는가? 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웃의 눈이 되어 주고, 힘이 되어주는 삼락가족들이 되어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통로로 서기를 소망합니다.
3.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애통하는 자를 위한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신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간구라는 것은 단순히 간절한 기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애통하는 회개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죄인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복,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은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애통하는 마음만이 정결케 하는 길로 인도하며,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도록 이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통해야 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찌른 그를 바라보며 그가 누구인지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찌른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대적과 도전은 조롱하고 멸시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패역함의 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의 영을 얻은 자들은 자신이 찔러 못 박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애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이 없이는 참된 애통함과 회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12-14절 말씀을 보면, 모두가 애통하는데 따로 한다고 합니다. 애통함은 각자의 내면에서 따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잘못에 대한 자각과 뉘우침에 대한 고백 그리고 상한 심령으로 애통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회개하는 자를 보호하십니다. 애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깨끗하게 씻겨 주시며, 놀랍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애통하는 자를 끝까지 책임져 주십니다. 이것이 진정한 보호입니다. 애통함으로 진정한 회복과 변화를 이룰 뿐만 아니라 진정한 회복과 변화의 자리인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통로로 서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창조주가 되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약속은 승리의 그날까지 변하지 않고 계속되어집니다. 신실하신 하나님만을 자신의 힘으로 삼고, 그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를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약한 자를 우선적으로 보호하시듯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있는 우리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약한 자들을 우선으로 하는 삶을 살며, 애통함으로 진정한 회복과 변화를 이끌어가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 날에
스가랴 12:1-9 / 이장우 목사 / 늘푸른교회
봄이 완연하게 온 것을 보게 됩니다. 각종 꽃들이 피어나고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이런 자연의 변화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십니까? 우리가 평소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이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행복하게 사는가를 관심 두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타난 모든 것들이 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당연하게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4장에 보시면,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 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는 것처럼 너희가 이 징조들을 보면서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고 하십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봄이 와서 꽃이 피고 잎사귀를 내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이 가까이 올 것을 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우리의 뜻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어짐을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유지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결론 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서 그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서 세상만 바라보는 사람은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아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3절을 봅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이란 보이는 모든 세계가 나타나진 것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가 된 것입니다.
골로새서 1:16절에 보시면,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까지 다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사람들의 소원대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계시하고 있고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을 받아서 증거 한 사람들이 선지자들이요 예언자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봅니다. 1절에서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고 합니다. 경고란 무거운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1절을 증거 하기 위하여 위의 성경 세 곳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여호와의 말씀대로 온 우주만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하늘을 펴시고 땅을 터를 세우시고 사람의 심령을 지으신 분이시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을 지으시고 그 안에 영을 지어 넣으신 분이 여호와이십니다.
2-3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국민을 혼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까지 미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날을 예언하여 3절에서 “그 날”이라고 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 속에 심령을 지으신 분이 그 날에 이루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그 날이란 여호와의 말씀이 성취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이 스가랴 12-14장에서 그 날이라는 말씀이 많이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에서만 다섯 번(3,4,6,8,9)이나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선 그 날에 있을 일을 살펴봅니다. 3절에서 그날이란 예루살렘이 무거운 돌이 되게 하여 다른 국민들이 그 돌을 들다가 크게 상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가볍게 여기고 공격하려고 왔다고 오히려 망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하만국이 예루살렘을 치려고 모이겠지만 그러나 4절에서 그 날에 모든 말들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자를 미치게 하고 그 말의 눈을 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그렇게 되면 유다의 두목들이 심중에 말하기를 예루살렘 거민들이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고 할 것입니다. 왜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까? 자기들이 행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의 목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11장 16절에서 자기 양들을 잡아먹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적들이 물러가고 승리가 주어진 것을 보고서 여호와로 말미암아 이렇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그 날에, 유다 두목들로 하여금 나무 가운데 화로 같이 곡식 단 가운데 횃불 같게 하여 그 좌우에 에워 싼 모든 국민을 사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은 그 본 곳 예루살렘에 거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8절에서 그 날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셔서 그 약한 자가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여호와의 사자와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9절에서 그날에, 예루살렘을 치러오는 열국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쓴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그 날이 언제입니까? 유대인들은 지금도 문자대로 이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구약의 모든 말씀을 다 이루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에 아직도 이런 구약의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날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이제부터 찾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기 3: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 계속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도구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지하여야 되는지를 보여주시는 싸움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과 병거를 의지하면 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나가면 승리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보여주실 뿐 아니라 출애굽에서도 광야에서도 가나안땅에서도 계속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한 예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봅니다. 골리앗은 키가 3미터가 넘은 거인으로서 창과 칼과 방패로 무장하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직 얼굴이 붉은 소년으로 아무른 무장 없이 다만 물맷돌을 들고 나간 것입니다. 다윗이 의지한 것은 물맷돌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었습니다. 골리앗을 향하여 너는 창과 방패로 나아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간다고 하면서 물맷돌을 날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싸움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한 데서 온 승리인 것입니다.
이러한 전쟁을 통하여 계속하여 하나님은 그 날의 구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를 7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 거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장막이란 성안에 살지 못하고 성 밖에서 텐트치고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성 안에 사는 사람들보다 보잘것없고 약한 자들입니다.
우리나라도 성 안의 사람과 성 밖의 사람들이 구별되었습니다. 서울에 살면 사대문 안에 사는 지 밖에 사는 지에 따라 그 사람의 신분이나 경제적인 차이가 난 것입니다. 능력 있고 실력 있는 사람들이 성 안에 살고 가난한 농민이나 노동자들은 성밖에 살았던 것입니다.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은 성곽의 보호를 받지만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은 성벽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날에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면 성 밖에 있는 자들의 영광이 성 안에 있는 자들의 영광보다 결코 못하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그 날에 약한 자가 다윗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을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의 사자와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60:22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그 작은 자와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나라가 어떤 나라이겠습니까?
세상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나라입니다. 오직 메시아가 오셔서 이루어 내셔야 할 나라인 것입니다. 그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구약에서 그날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부분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그 날이란 특정한 한 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모든 일들을 다 포함하여 그날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 날을 이루어내셨는가 하는 것은 신약에서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안의 사람이 성 밖의 사람보다 더 영광스럽지 못하게 되는 나라, 약한 자로 이루어지는 나라, 이런 나라가 도대체 어떤 나라입니까? 이 세상의 힘을 원하는 나라와는 정 반대되는 나라가 바로 예수님이 이루시는 그 날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바로 그 날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 그날이란 종말론적인 그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가 다 그날에 속하는 것입니다. 초림하시고 역사적인 시간으로 2천년이 지났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묵시적인 시각으로 보면 아직 그 날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약의 예언도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약한 모습으로 가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란 정말 미련하고 어리석고 저주 받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골로새서 2:9-15절을 봅니다. “봉독” 이 세상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속입니다. 그 속임이란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인 것처럼 말합니다. 이것을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닙니다. 육적인 세상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나와서도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과 권세를 구한다면 그것은 그 날 안에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날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약하심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정사와 권세를 폐하여 버리고 십자가로 승리하신 세계가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12:9-10절입니다.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직 재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그 날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날 안에 있다는 것은 예언자들의 예언처럼 약한 자의 모습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세상이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는 그 날 안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12:32). 세상의 헛된 힘들에 속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늘에서 머무시기를 바랍니다.
조물주 하나님의 모략적인 역사
슥 12:1-9
서 론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의 영혼을 지으신 조물주의 능력을 가지셨지만 언제나 모략적인 방법으로서 역사하시므로 참된 신앙을 가진 자 외에는 두려워하고 낙심하게 되는 일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완전하시니만큼 잠잠히 계셔서 당신을 의심 없이 믿고 끝까지 순종하는 자를 들어 쓰시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모략적인 역사가 있다.
1. 천하 만국으로 사랑하는 자를 치게 하심 (2-3)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통하여 영광을 받고자 하실 때에 원수의 세력을 강하게 일어나도록 하셔서 사랑하는 자를 치게 하시는 것은 사랑하는 자를 통하여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가도록 하기 위한 방법이다. 누구든지 세상에서 아무런 소망 없이 될 때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싸우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진실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시고 통치권을 맡기는 것이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을 모아서 새로운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한 작정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처음부터 완전하게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완전 역사를 믿고 의지할 때에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모략을 알고 원수의 세력을 무서워하지 않고 나가는 사람은 진노의 날에 다 함께 보호를 받도록 해 주신다.
2. 원수들의 눈이 멀도록 하심 (4)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처음에는 당신의 사람을 아무런 소망이 없게 보이도록 하시지만 홀연히 역사하시되 원수의 세력을 다 눈먼 사람같이 되게 하셔서 원수들이 스스로 망하도록 하신 것이다. 지금 과학적 유물론 사상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고 있지만 유물론 사상이라는 그 자체가 눈이먼 자들과 같다. 그러므로 공산당이 아무리 강한 것 같아도 눈먼 소경과 같은 사람들이니,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3. 사랑하는 자로 승리케 하심 (5-6)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을 승리케 하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고 매우 쉬운 일이다. 예를 든다면 불이 섶을 사를 때에 섶이 많을수록 불은 더 강하게 일어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사람이 역사하는 일은 원수의 세력이 많을수록 강하게 일어나므로 많은 원수를 이기는 것은 불이 섶을 사르는 것과 같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4. 구원을 베푸심 (7)
이 구원이라는 것은 영. 육이 아울러 받는 구원을 말한다. 이것은 한 사람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적인 구원을 하나님께서 베풀되 공평한 구원을 베풀어 하나같이 영광을 누리도록 하시는 것이다.
5. 종을 하나님같이 들어 쓰심 (8-9)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에게 도저히 역사할 수가 없는 난국을 당하게 하시는 것은 당신의 사랑하는 종을 신과 같이 들어 쓰고자 하시는 모략적인 방법이다.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면서 모세를 신과 같이 썼고, 아합의 마음을 강퍅케 하면서 엘리야를 신과 같이 썼다. 이와 같이 인간 종말에도 천하 만국을 악하게 하시면서 당신의 사랑하는 종을 신과 같이 역사하게 하시므로 세계 통일의 역사를 하게 하여 새 시대를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결 론
우리가 가장 억울하고도 두려운 일을 만나게 되는 것은 가장 영화롭고도 아름다운 일을 가져오게 하실 하나님의 모략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국제적으로 오는 유물론 공산 정책을 무서워 말고 담대히 나갈 때에 하루아침에 승리하는 역사가 반드시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