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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
2023년 4월 12일 주님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13-35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항상 끼어드시는 분
말을 하다가 중간에서 끼어들면 기분이 나쁩니다. 또 왜 남의 말에 참견하느냐고 신경질을 부릴 수 있습니다. 그것도 누가 끼어드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내가 미운 사람이거나 사사건건 참견하는 사람이 끼어들면 그건 정말 기분이 나쁩니다. 그러나 내가 곤경에 빠져 있을 때, 나를 구하기 위해서 은근 슬쩍 끼어드는 사람은 정말 기분이 좋고 대환영입니다. 무슨 일을 하다가 정말 힘이 들 때, 표 안 나게 도와주면 정말 행복합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워 지쳐 떨어질 지경이 되었을 때, 외롭고 서러울 때, 걱정거리가 태산 같을 때, 아주 복잡한 문제를 도저히 풀 수 없을 때, 누군가에게 모두 기대고 편히 잠들고 싶을 때, 해결할 방법이 없을 때 누군가 끼어들어 나를 구해줄 사람을 간절히 바라기도 하고, 기대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다른 사람은 인복(人福)이 많은데 나만 그런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억울해 하면서 살았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에서 그렇게 은근 슬쩍 끼어드는 분을 아주 정겨운 표현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날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괴로워하면서 돌아가고 있는 제자들에게 끼어들기를 하시는 예수님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한 스타디온은 185m이니까 60스타디온이면 약 11,100m쯤 되는 거리 정도 될 것입니다. 약 30리가 되는 거리죠. 30리는 장정이 두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성경에서 이 거리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이 거리를 걸어가는 동안에 주님과 같이 걸어간 그 거리가 얼마나 행복하고 인생 전부를 표현하는 것인가 생각하면 두 시간 반 거리가 얼마나 황홀하였는지 상상할 수 없는 거리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과의 동행,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정말 사랑하고, 함께 있고 싶은 분과의 동행은 언제 생각해도 가슴 벅찬 일입니다. 지금 그 거리라고 한다면 아마 걸어갈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차를 타고 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길이라고 한다면 더 먼 길이라고 하더라도 같이 걸어가려고 할 것이고 죽더라도 따라가야 하는 길입니다.
엠마오라는 마을은 지도에 나와 있지 않다고 말하기도 하고, 옛 지명에 있다는 말도 있지만 이 거리를 걸어가면서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자세히 들려주시는 꿈과 같이 아름다운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같이 걷는 이 행복한 길을 우리는 항상 꿈꾸며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흠숭하고 사랑하며, 생명이요, 길이며, 희망이신 그분과 같이 걷는 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부활을 상상이라도 하였다면, 또한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나타날 것처럼 생각되어 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열심히 토론하면서 가는 길에 예수님이 끼어듭니다. 말씀이신 그분이 항상 먼저 끼어드십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관심을 표현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 분을 느끼지도 못하고 마음에 새기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릴 때가 많습니다.
나에게 오시는 주님은 항상 그렇게 아주 가까이서 우리와 동행하고 싶어 하십니다. 나는 언제나 외롭다고 합니다. 친구가 없다고 말하기도 하고, 말 상대도 없다고 불평합니다. 말 상대를 찾아 두리번거립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곁에 오신 주님은 의식하지 못하고 삽니다.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을까요? 우리는 성령을 받았음에도 왜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보는 우리의 관점이 문제일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인간의 눈으로 식별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형언도를 받고, 피곤에 지치고 매 맞고, 가시관 쓰고, 상처투성이에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으로 뇌리에 박혀 있을 것입니다. 그런 눈으로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의 눈에서 편견과 고정관념을 버려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시각을 달리해야 합니다. 그 시각을 부활 신앙의 시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합니다. 부활 신앙은 예수님의 부활을 함께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본당 신부님은 부활 주일에 그러셨습니다. “이제 주님의 부활을 믿으며 무조건 행복하십시오. 행복하게 사는 것이 부활을 사는 삶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3,1-10
그 무렵 1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2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
3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
4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5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6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7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8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9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10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다.
축일4월 12일 성 요셉 모스카티 (Joseph Moscati)
신분 : 의사, 과학자
활동 지역 : 나폴리(Napoli)
활동 연도 : 1880-1927년
같은 이름 : 모스까띠, 모스카띠,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성 요셉 모스카티(Josephus Moscati)는 1880년 7월 25일 이탈리아 베네벤토(Benevento)에서 판사인 아버지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로사 사이의 아홉 자녀 중 일곱째로 태어나 6일 만에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1884년에 나폴리로 이사하여, 1888년에 첫영성체를 하였다. 1897년 나폴리 대학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하던 모스카티는 어려서부터 깊은 신앙과 친절한 성품을 지녔는데, 대학 시절에도 학업에 열중하면서 기도에 충실하여 매일미사 참례를 하였다.
1903년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치고 의사로서 바쁘고 고된 생활을 시작한 그는 정성껏 환자들을 돌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돌보는 데에도 깊은 관심을 가짐으로써 교회를 떠나 있던 많은 사람들을 신앙생활로 다시 돌아오게 하였다.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었는데, 이들을 무료로 진료하였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이들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나폴리의 중심가에 자리 잡은 그의 진료소에는 그에게서 진료와 마음을 위안을 받으려는 환자들이 줄을 이었다.
이처럼 과중한 활동 중에도 모스카티는 의학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아 32편의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1911년에는 나폴리 대학의 화학생리학 주임교수로 임명되었고, 또 빈(Wien)과 에든버러(Edinburgh)에서 개최된 국제 생리학 회의에 이탈리아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한편, 1906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였을 때는 즉시 피해 지역으로 달려가 위험을 무릅쓰고 인근 병원의 환자들을 옮기는 작업을 거들었으며, 1911년 콜레라가 창궐하였을 때에는 이 전염병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병원의 책임자로도 활약하였다.
1919년 40세도 안된 나이에 불치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의 책임자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된 모스카티는, 1927년 4월 12일 병원에서의 오전 진료를 마치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오후에 자신의 집에서 환자를 진료하던 중 갑작스런 발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나폴리 각계각층의 시민들은 달려와 “의사 성인, 쥬세페 모스카티가 죽었다”고 애도하였으며, 그를 추모하고 그의 전구를 비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제주 누오보(Giesu Nuovo) 성당에 안치된 그의 무덤은 항상 꽃으로 덮였다. 그로부터 4년 뒤 모스카티의 뛰어난 덕행과 전구를 통한 기적적 치료에 대한 증거와 증언을 수집하기 위한 교구 차원의 조사가 시작되었고, 성년(聖年)인 1975년 11월에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식이 거행되었고, 1987년 10월 25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요셉 모스카티 (Joseph Moscati)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
항상 끼어 드시는 분,
당신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