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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1월 26일,이여송이 지휘하는 명군 기병 3000명은 오산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그 곳은 한양에서 불과 80여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 이었습니다.
다음날인 1593년 1월 27일, 이여송의 군대는 벽제관으로 진격하였습니다.
이때 선봉대인 사대수 군은 이미 벽제관을 지나
여현(숫돌고개)까지 진격한 상황 이었습니다.
여현에서 서울까지는 불과 10여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날 오전, 사대수 군이 일본군과 교전하고 있다는 급보가
이여송에게 도착 했습니다.
이여송은 직접 수십 명의 가정(집안 노비-사병으로 해석합니다.)을 이끌고
앞장서서 달려갔고
이여송이 직접 지휘하는 3천의 정예기병은 좌우로 벌린 대형으로 이여송의 뒤를 쫓았습니다.
이여송 군이 망객현에 이를 무렵, 일본군 소규모 부대가 발견 되었습니다.
이여송은 당장 그들을 공격하였고
일본군은 저항하지 않고 여현 방면으로 도주 하였습니다.
이여송 군은 그들을 추격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전세는 급박히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조명연합군의 선봉대 였던 사대수 군은 이날 오전
고바야카와 군의 제 1부대인 다치바나 군과 전투를 치루고 있었습니다.
이무렵 날씨가 점차 따뜻해지면서 길이 풀렸고
게다가 이날은 안개가 끼고 비가 내려서 길은 진흙탕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여현(숫돌고개)에서 벽제관에 이르는 길이 좁고 지형이 험했습니다.
이때 사대수가 이끄는 명군은 대부분 기병 이었고 일본군은 보병인데다가
숫자도 훨씬 많았습니다.
결국 사대수 군은 이여송 군이 이르기 전에 붕괴 되었습니다.
1593년 1월 26일 밤(혹은 1월 27일 새벽),
일본군은 25일 사대수 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정찰대의 보고를 통해
명군이 서울 근교까지 쳐들어 왔음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전에 서울 외각에 군대를 배치하여 요격 준비를 갖추고 있던
고바야카와 군이 먼저 창의문을 통해 명군을 요격하러 출발 했습니다.
1월 27일 오전, 고바야카와의 일본군은 여현에 깃발을 배치하고
망객현과 여현 사이에 군대를 매복시켰으며
소규모 부대를 보내어 이여송 군대를 유인하게 하였습니다.
1월 27일 4시(오전 11시~오후 1시), 명군이 망객현을 지나 여현에 이르렀습니다.
이여송이 연서(서울시 은평구) 언덕과 골짜기가 뒤얽힌 지형을 보고 말하길
``이는 병가에서 꺼리는 곳이다.''
라고 하고 물러나려고 했는데 이때 고바야카와의 일본군이 나타났습니다.
이때 명군은 이여송이 좌우로 벌려진 군대를 진두지휘하는 상태였는데
이에 일본군도 군을 좌,중,우 군으로 나누어 좌,우군은 명군의 양익을 공격하고
중군은 곧장 앞으로 돌진하였는데,
이 중군의 목표는 명군 총사령관 이여송 이었습니다.
명군이 황급히 휴대하고 있던 신기전을 쏘니 일본군이 잠시 주춤하여 물러 섰지만,
곧 명군을 다시 공격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명군과 일본군이 한바탕 싸움을 치뤘습니다.
이때 명군은 대부분 기병이었고 휴대하는 무기는 짧은 검 이었는데
일본군은 대부분 보병으로서 서너 자 되는 칼과 조총으로 사납게 밀어붙였습니다.
더욱이 전장은 길이 추위에서 녹아가는 상황에서 겨울비까지 내리고 있었기에
수렁이 되어 기병들의 기동이 어려웠습니다.
일본군은 사방에서 달려들어 명군 기병을 수렁위의 백병전으로 물아붙였고
어떤 일본군 병사들은 자신 키의 2배를 넘는 대도로 기병과 말을 한번에 베어버렸습니다.
이여송은 황급히 후군을 부르게 하였지만 후군은 금방 도착 할 수 없었습니다.
점차 쓰러려 죽는 명군 장수와 병사들이 늘어났고
일본군은 이여송와 그의 군대를 2중으로 포위 하였습니다.
마침내 이여송이 힘껏 싸우다 말이 넘어지면서 진흙에 빠지자
일본군이 그를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이 중에서 금갑옷을 입은 일본군 장수가 이여송에게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런데 그 칼은 이여송이 받지 않고
이여송의 휘하 장수인 이유승이 자신의 몸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일본군을 상대하여 일본 병사 두어 명을 쓰러뜨렸습니다.
하지만 곧 총탄에 맞아 말에서 떨어졌고 일본군은 그를 덮쳐 갈갈이 찣어버렸습니다.
(혹은 이유승이 온몸으로 이여송을 덮쳐 이유승이 일본군에게 난도질 당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이유승의 분전으로 이여송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투는 2시간 동안 이어졌습니다.
어느덧 5시(오후 1시~오후3시)가 될 때,
양원이 이끄는 명군 1만명이 전장에 당도 하였습니다.
뒤늦게 도착한 명군은 화포과 화기를 갖추고 있었기에 일본군에게 맹렬한 사격을 가하였고
이에 이여백과 이령 등이 일본군의 좌,우의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내며 일본군을 협격하고
이여매가 금갑옷을 입은 일본군 장수를 활로 쏴죽이니
일본군은 주춤 하였습니다.
그동안 이여송은 일본군의 포위를 뚫고 탈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고바야카와의 일본군도 물러났습니다.
한편 고바야카와 군보다 늦게 전장에 도착한 우키다의 본대가
조명 연합군의 우측을 공격하기 위해 주막리 서쪽으로 우회 하였습니다.
하지만 양원이 군의 대형을 회전하여 이에 저항하였고
마침내 날이 저물어지자 일본군은 완전히 물러섰습니다.
한편 이때 최전방의 사대수 군은 완전히 붕괴되었지만
선봉군 사령관인사대수는 약 200~300명의 기병을 데리고
여현(경기도 고양시 숯돌고개)을 넘어
연서(서울시 은평구) 서쪽 평야까지 진출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일본군이 기세를 올려 앞뒤로 완전히 포위하려고 하니
사대수가 앞장서서 말을 타고 삼지창을 잡은 상태에서 북을 울려 군사들에게 퇴각을 알리고
창을 일본군 병사에서 던지면 뒤에서 기병들이 사대수가 던진 창을 다시 잡고 던지고
뒤에서 또다른 기병들이 다시 받는 식으로 돌파해 나아가니
일본군이 사대수 군의 기세에 눌려 감히 막지 못했습니다.
이리하여 사대수의 군대는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퇴각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물러서자 명군도 퇴각하기 시작 했는데
물러가던 일본군이 근처에 설치해 놓은 비루(간이 망루)에 조총수를 배치하여
퇴각하는 명군을 향해 총포를 발사케 하였고
이에 명군은 일본군의 사격을 받으며 후퇴해야 했습니다.
한편 김명원이 지휘하는 조선군은 이 전투에서 명군 뒤를 따라 진격했었는데
이여송의 진격이 경솔하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앞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리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명군이 패했다는 보고가 오니 조선군은 고양 방면으로 퇴각 하였는데
퇴각하던 도중에 팔다리가 잘리거나 얼굴이나 눈을 다친 명나라 병사들이
대오 없이 도주하는 것을 목격 하였습니다.
전장에서 퇴각한 이여송은 파주로 가다가 도중에 멈춰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전투에서의 명군 피해는
최소한 이여송이 직접 지휘 했던 정예 북방 기병 3000명 중 1500여명이 죽거나 다쳤고
이비어,마천총,이유승 등 휘하 장수 15명(혹은 용사 80여명)이 전사 했던 것입니다.
이는 조선에 파견된 명군 장수의 25%에 달하는 손실 이었습니다.
전장에는 겨울비가 크게 내려 길이 완전히 수렁이 되었으며
그 수렁 위에 명군과 일본군의 시체가 널려 있었으며
수많은 깃발과 창,칼,총포,갑옷 등이 흩어져 있었고
수렁이 된 길은 말이 나아갈 수 없어서 사람과 말이 서로 짓밟고 있었습니다.
다시 파주로 퇴각하던 이여송이 퇴각하는 대열에서 원수의 깃발을 보고 말하길
``이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보전하여 다행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여송은 이유승의 사위 왕심을 불러 통곡하며 말하길
``호남아(좋은 사내,훌륭한 사람)가 나를 위해 죽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날 파주에 도착한 이여송은 조선군에게 패전 사실을 애써 숨기려고 했지만
그날 밤 죽어간 부하들을 그리며 몰래 울었습니다.
다음날인 1월 28일, 이여송은 파주에서 임진강을 건너 동파로 퇴각 하였습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고, 길은 기온 상승과 비로 인해 이용하기 어려웠으며
일본군이 주변의 산과 들에 불을 질러서 군마에게 먹일 사료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군마에 전염병이 돌아 며칠 사이에 군마 10000여필이 죽었습니다.
1월 29일, 명군은 개성으로 거의 철수 하였고
사대수와 관승선이 지휘하는 수백의 명군만이 임진강에 남았습니다.
유성룡 등이 이여송에게 다시 진군할 것을 권하니 이여송이 대답하기를
``날이 개고 마르면 다시 진군 하겠소.''
라고 하였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백제관 전투 당시 전장 인근에
주막을 운영하는 부부가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부부는 전투가 발생하여 일본군이 유리하게 전개되자
노적봉에 쌀이 많이 저장된 것처럼 꾸미고 강물에 석회석을 뿌렸는데
잠시 후 일본군 정찰대가 와서 조명연합군의 동향에 대해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금 저 편에서 조명연합군의 대병력이 주둔하고 있답니다!
이 강에 흐르는 쌀뜨물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정찰대도 그렇다고 여겨서 보고 하니 일본군이 두려워 하였고
또한 전투에서 지친 일본군이 강물을 마셨다가 배탈이 나서 전력이 약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부부가 사대수에게 전하여
사대수의 부대가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게끔 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이 부부는 남쪽으로 내려가 권율 장군이 지키고 있는 행주산성으로 들어가서
행주산성 전투에 참전했다고 전해집니다.
첫댓글 우왕 마지막 부부굿
지금도 벽제관 건물 흔적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빌딩인지 모르겠어요. 옛날에 벽제관을 옮겼었다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 근처에 벽제관역이 지도에 나타나니까 쉽게 찾아 가실 수 있어요. 이여성과 그의 명군 기병이 지나갔던 내리막길에 지금은 큰 아스팔트길이 깔려 있습니다. 옆에 시냇물이 있고 그 옆에 아파트 단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형 양쪽은 커다란 산지대입니다. 그런데, 윗 그림과 같은 낭떠러지가 없었습니다.
저도 현지 사진을 보고 양측에 산을 끼고 그 사이에 좁은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만 격전이 벌어진 당시 서술된 자료를 보면 이여송이 깍아지를 듯이 험준한 전장의 지형에 놀랐다는 서술이 있어 그것을 바탕으로 전장에 낭떠러지를 도입했고 근처 북한산의 지형도 참고 했습니다. 그리고 벽제관 전투 당시 일본군은 인근의 산에 불을 질렀다고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