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아침, '바버' 대위가 전투 결과 보고와 함께 공중보급을 요청하였을 때, 대대장으로부터 "중대는 즉시 현 위치에서 철수하여 남쪽으로 철수하게 될 대대와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때'바버' 대위가 판단하기에는 만일 그의 중대가 철수하게 된다면 '유담리'에 있는 2개 연대는 완전히 고립될 뿐만 아니라 '하갈우리'의 예비연대 및 지원부대 역시 심각한 위협을 받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에 따라 '바버' 대위는 명령의 변경을 건의하기로 하고 무전교신을 시도했으나 교신이 되질 않았다. 그는 후일 명령위반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되는 한이 있더라도 '유담리'에 있는 8,000명의 병력이 철수를 완료할 때까지 '덕동고개'를 사수하기로 독단 결심했다.
그 후 전투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유담리'의 2개 연대는 적의 강력한 압력에 봉착하였으며 '덕동고개'의 F중대는 완전히 적의 포위 속에 빠졌다. 계속되는 전투 중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 '바버' 대위도 다리에 부상을 입었으나 들것에 실린 채로 진지를 순회하면서 중대원들을 격려하였다. 이러한 '바버' 대위의 강인한 의지와 용기에 감동한 중대원들은 영웅적인 용기를 발휘하여 우세한 적의 포위망 속에서도 6일 간이나 '덕동 통로'를 확보하였다.
12월 2일 해병 제7연대 제1대대가 '유담리'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천신만고 끝에 F중대와의 연결에 성공하였을 때 220명의 중대원 중 겨우 87명만이 피로 물든 '덕동고개'를 걸어나왔다. '바버' 대위는 철수명령은 지키지 않았으나 사단 전체작전에 기여한 전공이 인정되어 후일 미국 최고훈장(Congressional Medal of Honor)을 수여받았다.
4. 교훈
중대장 '바버' 대위는 대대명령은 위반했지만 그가 직접 당면한 상황을 볼 때 '유담리'에 남아있는 2개 연대의 우군에게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될 것으로 판단하고 독단으로 유일한 철수로의 확보를 계속하였다. 적과 직접 대치하고 있는 지휘관은 그가 수령한 명령이 하달된 후의 상황 변동 때문에 시행이 어렵고 또한 명령의 수정건의를 할 수 없을 경우에는 적절한 독단행동을 취해야 한다.
■ '덕동고개' 점령
'유담리'-'하갈우리' 간을 연결하는 도로는 암석으로 된 단 하나뿐인 일차선도로이며 대략 중간지점에 '덕동고개'라는 중요한 요충지가 있고 노면은 혹한으로 인하여 눈으로 동결된 상태였다. 이 도로는 '유담리'의 2개 연대 전투단으로서는 유일한 보급로였다. 미 해병 제1사단은 이 도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덕동고개'와 그 서북방 약 3km 떨어진 무명고지에 보병 1개 중대(F중대)를 배치하여 방어임무를 부여했다. 11월 27일 11:30시 '하갈우리'의 제7연대 제2대대 F중대장('바아버' 대위)은 "'덕동고개'로 전진하여 진지를 점령하고 주보급로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F중대장은 각 소대장을 동반하고 현지에 미리 가서 지형을 정찰하고 '덕동산'의 서남방 약 1km 떨어진 '신흥리' 도로 북쪽고지에 진지를 선정했다. 저녁 때 중대주력이 도착하여 바로 진지구축을 시작하여 21:00시 경에 진지편성을 마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이 무렵 중공군(제79 및 제89사단)은 '유담리'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하고 있었고, 제59사단은 '유담리'와 '덕동고개' 사이의 도로를 차단하고 F중대진지에 접근하고 있었다.
'덕동고개' 서북쪽 무명고지는 제7연대 제1대대 C중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C중대진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28일 02:30시부터 시작되었다.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서 날이 밝았을 때는 이미 C중대는 전사 15명, 부상 44명이나 되었고 완전히 포위되어 1419고지의 중공군으로부터 감제당하고 있는 상태였다. 무전기도 파괴되어 '코르세아'전투기의 지원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60mm박격포탄도 다 소모되어 가고 있었다. 그때 28일 저녁에 제7연대 제1대대가 도착하여 C중대를 구출했다. 그러나 이 대대는 F중대 진지까지는 도착하지 못했었다. F중대도 28일 02:30시 경부터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수일 간 포위되어 분전하면서 고개를 확보하고 있었다.
F중대장 'William E. Barber' 대위
'덕동고개'부근의 전투
'유담리'-'하갈우리' 간의 최대 요충지인 '덕동고개'는 27일 저녁부터 미 해병 제7연대 제2대대 F중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중대장 '윌리암 E. 바아버(William E. Barber)' 대위는 11월 7일에 중대장으로 임명되어 겨우 20일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는 1940년 3월에 해병대에 입대하여 공정부대의 병사로 2년 간 근무한 후 태평양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1943년 11월 소위로 임관했다. 그 후 '유황도'전투에서의 전공으로 '은성훈장(Siver Star Medal)을 받은, 전투경험을 통해서 단련된 베테랑 장교였다.
'바아버' 중대장은 '덕동고개'의 진지점령 시 천막설치를 뒤로 미루고, 즉시 진지구축을 개시하도록 했다. 복장이나 무기 손질에 대해서는 특히 엄격하고 꼼꼼했다. 이때 중대에는 제2대대 화기중대의 중기관총반과 81mm 박격포반이 배속되어 있어서 그 병력은 총원 240명이었다. 지원부대로서는 '하갈우리'에 있는 미 해병 제11포병연대 제3대대의 H포대(105mm 곡사포)가 이 중대를 직접지원하도록 되어 있었다. F중대는 고지 정상에서 북쪽을 향해서 1개 소대(2개 분대를 1선,·1개 분대를 2선)를 서쪽과 동쪽방향으로 각각 1개 소대(각각 3개 분대 병력)를 배치하여 '아치'형의 중대진지를 편성했다. '아치'의 다리 부분은 반사면이었는데, 이 부분은 중대본부와 3.5"RKT반으로 연결됐고, 그 아래 도로에 가까운 곳에 중대 지휘소와 60mm 및 81mm 박격포를 배치시켰다. 81mm박격포는 북서쪽의 암산에 대해서 시험사격을 실시했다.
그러나 '하갈우리'의 105mm포는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가는 제1자동차수송대대의 차량종대가 08:00시가 좀 지날 때까지 엔진 소리를 내며 고갯길을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하여 시사를 하지 못했다. 이때 하늘은 맑고 달빛은 밝게 비쳤으며 기온은 영하-29도였다. 이 무렵 중공군 제 79 및·제89의 2개 사단이 '유담리'에 대해 공격을 개시하고 있었다. '중공군 제59사단은 '유담리'와 '덕동고개' 사이의 도로를 차단함과 동시에, F중대진지로 육박해 오고 있었고 1개 연대는 소리도 없이 이미 F중대의 진지를 포위하고 있었다.
F중대 3소대장(맥가르디 중위)은 01:00시가 좀 지나 진지를 순찰했는데 돌처럼 얼어붙은 진지에서 수하(誰何)하는 자가 없었다. 곧 분대장을 집합시켜 호통을 쳤다. "너희들은 왜 멍청히 잠만 자고 있느냐? 눈을 크게 뜨고 경계하라!". 그후부터 분대장들이 병사들을 흔들어 깨우기도 하고 발로 차기도 하며 "정신 차려 경계하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02:00시경, 소대장이 다시 순찰을 했을 때는 각 진지에서 활기있게 수하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무렵 '유담리'방향에서도 격렬한 공방전의 총포성이 울리고 있었다.
28일 02:30시 약 1개 중대의 중공군이 갑자기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난사하면서 북, 서, 남 등 세 방향에서 F중대를 공격해 왔다. 북방으로부터 능선을 따라서 돌격해 온 중공군 때문에 북쪽을 향해 배치되어 있던 약 2개 분대의 해병들은 어느 사이에 많은 사상자(35명중 27명)를 내고 후방 돌출부에 위치하고 있던 2선 분대지역으로 철수함으로써 고지 정상은 중공군에 의해서 점령되고 말았다. 이 공격과 동시에 중공군은 서측방과 서북방으로부터도 돌격해 왔다.
'카페라타' 일등병(미국 최고훈장 수상자)
이때 2소대의 '카페라다' 일등병은 얼어서 마비된 발을 문지르려고 침낭 안에서 신을 벗고 있었는데, 중공군의 돌격 소리를 듣고 양말 바람으로 뛰어나와 호 속에 우뚝서서 소총으로 침착하게 조준사격을 했다. 10명 이상을 쏘아 넘어뜨렸을 때 소총이 작동되지 않았다. "소총을 달라"고 소리치는 그에게 호 속에 넘어져 있던 부상병이 장전된 소총을 건네 주었고, 그는 돌격해 오는 중공군을 차례차례 쓰러뜨렸을 뿐 만 아니라 또한 날아오는 수류탄을 되돌려 던지고 발길을 차내면서 분전했다.
새로운 병력을 계속 투입하여 끊임없이 수류탄을 던지며 전진하는 중공군 병사와 이를 되받아 던지며 분전하는 해병대원 간의 치열한 근접전투가 도처에서 전개되었는데 해병들은 더 이상 중공군의 돌격을 허용하지 않고 끝까지 진지를 사수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다시 진지 남쪽의 도로방향으로부터 북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60mm박격포반의 반장 이하 10명을 살상하고 중대지휘소로 육박해 왔기 때문에 중대장은 지휘소와 박격포를 경사면 위로 이동시켰다. 도로방면에서 경사면을 올라오며 공격하는 중공군에 대해서는 미리 배치한 중기관총 사격과 수류탄으로 저지했다. 60mm와 81mm박격포반의 하사관들이 모두 전사 또는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박격포는 일등병이 통합지휘하여 전투를 계속했다.
중대장 '바아버' 대위는 적탄을 무릅쓰고 각 병사들의 진지로 뛰어다니며 전투를 지휘하고 대원을 격려했다. 동측방에 위치하고 있던 1소대는 거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270도 정면에서 펼쳐진 전투는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날이 밝자 1소대는 그 주력으로써 산정을 향해 역습을 실시하여 원래의 저항선을 회복했다.
06시 30분경에 전투는 거의 끝났는데 그때까지 중대의 피해는 전사 20명·부상 54명으로 약 31%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중공군의 유기시체는 약 450구나 되었다. 이 무렵 중대의 수류탄 보유량은 극히 소량이었고 박격포탄도 10발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중대는 해병들의 사상자와 중공군 전사자가 가졌던 화기,·탄약,·수류탄 등을 주워 모으는 한편 공중보급을 요청했다.
부상자를 모두 천막에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눈 속에 구멍을 파고 그 안에 침낭을 깔아서 수용하고 교대로 난방시설이 된 천막에 들어가게 했다. 위생병은 몰핀(진통제) 주사약을 입에 물고 녹여 가면서 부상자 구호를 위해 뛰어다녔으나 혈액이 얼어서 수혈을 못 해 구제되지 못한 부상자도 있었다.
오후 늦게 해병대의 R5D기가 박격포 탄약과 위생기구를 공중투하했으나 진지밖에 떨어진 탄약도 많았다. 주변의 고지에 대해서는 '코르세아기'에 의한 지상공격과 '하갈우리'로부터 포병의 엄호사격이 실시되었다.
28일에는 '하갈우리'와 '유담리'로부터 F중대에 대한 증원부대가 투입되었는데 모두가 강력한 중공군부대에 의해서 차단되어 '덕동고개'에는 도착하지 못했다. 28일 밤, F중대의 배치는 전날 밤과 같았으나 진지에 배치된 인원수는 30%나 줄어 있었다.
'하갈우리'의 포병은 밤 중에 F중대 진지 주변의 중공군에 대해서 요란사격을 가했고 81mm 박격포는 진지 동북방의 바위산에, 60mm 박격포는 진지 북방의 안부에 대하여 사격을 가했다. 주간에 철수하여 재편성을 실시하고 있던 중공군 제59사단은 일몰 후 다시 행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22:30시 경 '하갈우리'방면에서 격렬한 포성이 들려 왔다. 중공군 제58사단이 공격을 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29일 02:15시 중공군의 한 부대가 북쪽의 3소대에 대하여 박격포 사격을 가한 후 공격해 왔다. 이어서 서북측과 서측 정면으로부터 전면적인 공격을 가해 왔다. 40명 내지 50명의 중공군이 북쪽의 3소대 진지를 돌파하여 진내에 돌입해 왔다. 진내에 들어온 중공군은 모여서 무언가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이때 해병들은 경기관총을 후방으로 돌려 이들을 순식 간에 섬멸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도 북방으로부터의 압박이 강해서 1선방어부대는 20m 정도 철수했다. 중대장은 왼쪽 무릎에 관통상을 입었으나 부하의 부축을 받아 앉은 채로 지휘를 계속했다.
30일 아침, 3소대(소대장 맥가르디 중위)는 역습으로 주저항선을 탈환했다. 전날 밤의 손실은 해병측이 전사 5명·부상 29명이었으며 중공군측의 전사자는 200명 이상이었다. 날이 밝은 후 F중대는 진지 주위에 낙하산을 돌려 놓아 표시를 했다. 해병대 수송기는 이것을 표적 삼아 정확한 투하로 탄약 등을 보급했다.
미 해병 제6관측기인 헬리콥터가 SCR-300과 SCR-619 무전기의 건전지를 투하했는데 동체와 기수에 총격을 받았다. 공군의 C-119기 '훌라잉 박스'에서 투하된 보급품은 진지 서방 500m 지점에 떨어졌으나 낮에는 적의 사격 때문에 회수할 수가 없어서 밤에 포병의 엄호사격을 받으면서 회수했다. 이렇게 하여 박격포의 탄약,·수류탄,·C-Ration, 및·커피 등을 수령했다. 모포와 들것도 보내 왔기 때문에 중상자들을 땅 위에 재우지 않아도 되었다.
# C-119기 '훌라잉 박스': 쌍발·쌍동의 중형 수송기, 1947년 초 취항, 적재능력 13.6톤, 62명 수송 가능, 주로 공수부대 작전용
그날 오후 중대장은 분대장 이상을 모아 다음의 훈시를 했다. "'유담리'의 제5 및 제7연대는 포위되어 격전 중에 있으며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다. 지난 28일 밤, '하갈우리'진지도 강력한 공격을 받아 포위되어 '고토리'와 차단되었다. 이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 중대가 증원을 받을 가능성은 없다. 앞으로는 보다 더 강력한 공격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인지뢰와 조명지뢰를 전방에 매설하여 진지를 강화하라. 우리는 해병대답게 싸운다는 것만을 생각하면 된다." 29일 밤은 조용했으나, 30일 02:00시경, 중공군이 영어로 소리를 쳤다. "F중대 제군은 포위되어 있다....중공군은 따뜻한 옷을 주고 잘 대우한다. 즉시 항복하라"고 했다. 이에 대해서 중대는 그 대답으로 박격포 조명탄을 쏘아 올리고 기관총탄을 퍼부었다. 30분후 약 2개 중대의 중공군이 착검을 하고 도로의 남쪽으로부터 돌격해 왔다. 중대는 주간의 공중보급 덕분에 충분한 탄약과 수류탄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박격포로 조명하고 기관총사격과 105mm곡사포의 시한탄사격, 그리고 수류탄투척으로 적을 완전히 격퇴하였다.
30일, 헬기콥터가 무전기의 건전지를 가져 왔고, 수송기가 탄약 등을 공중 보급했다. 중대는 처음으로 예비탄약을 가질 여유가 생겼다. 저녁 때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4시간 사이에 7∼8cm가 쌓였다.
중공군은 4정의 기관총을 '사북방' 바위산에 거치하여 밤 중인 01:00시가 좀 지나 사격을 가해 왔다. 중대는 박격포로 조명을 하면서 105mm포의 지원사격을 받았는데 다행히 처음에 사격한 포탄 4발이 명중하여 일거에 중공군을 격멸했다.
12월 1일, 중대장은 중공군의 공격이 없었기 때문에 중대원의 긴장이 해이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중대지역을 청소하도록 명령했다. 쓰레기와 깡통은 파묻고 부상자의 장비는 한곳에 모아 정돈하였으며, 전사자의 시체는 나란히 누이고 모포로 덮었다. 척후를 북방으로 내보냈으나 중공군의 사격으로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항공기와 박격포의 간단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은 호 속에서 이 공격을 잘 견디어 내고 있었다.
12월 1일 밤, 중공군은 산발적으로 장거리포 사격을 가해 올 뿐 별다른 공격은 없었다. 이날 밤 '유담리'로부터 1개 대대(제7연대제1대대)가 대대장(레이몬드 데이비스 중령)의 지휘하에 쌓인 눈을 밟으며 적 진지를 돌파하여 F중대를 구출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2일 아침, 구원대대가 접근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된 중대장은 대대장에게 필요하다면 안내병력을 내보내겠다는 뜻을 무전으로 송신했다. 제1대대장은 그 기분을 이해하겠으나 그럴 필요는 없다고 응답해 왔다. 2일 11:15시, 제1대대는 F 중대의 진지에 도착하여 중대를 구원했다.
F중대는 5일 동안 밤낮으로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불과 220명의 병력으로서 중공군 제59사단의 맹공을 견디어 냈고 적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던 것이다. F중대의 피해는 약 47%로서 전사 26명·부상 89명, 행방불명 3명이었으며 특히 장교 7명 중에서 부상당하지 않은 장교는 1명뿐이었다.
F중대 진전, 진내에서 발견된 중공군이 유기한 시체는 1,500구에 달했다. F중대는 '덕동고개'를 고수함으로써 약 1주일 간 중공군 제59사단의 주력 2개 연대를 끌어들이므로서 '유담리'진지에 대한 중공군의 압력을 완화시킨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중공군은 병력의 우세만을 믿고 "인해전술(Human Wave Tactics)"로 이 작은 방어진지를 돌파하려고 용감하게 돌격을 되풀이했으나 끝내 돌파할 수가 없었다.
방어작전 성공요인
F중대가 최후까지 건재하여 그 목적을 달성한 요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특히 중대장 '바아버' 대위의 강인한 의지, 적절한 지휘, 전대원의 왕성한 사기와 단결, 필승의 신념, 보·포·항공의 효과적인 화력지원의 협조체제, 및 충분한 보급 등은 빼놓을 수 없는 점일 것이다.
'바아버' 대위와 '카페라다' 일등병에게는 미국 최고훈장(Congressional Medal of Honor)이 수여되었다.
"장진호 전투"의 영웅: 윌리암 E. 발버 대위(제7연대 제2대대 F중대장) 이때 제2대대 F중대(중대장 Capt. William E. Barber)는 '덕동고개'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전멸의 위기 속에 있었으나 중공군의 공격을 5일 6박 동안 6회에 걸쳐 격퇴하면서 진지를 사수하여 사단을 구했다. 이 계속된 전투에서 F중대는 중공군 1.000명을 사살 혹은 부상을 입히는 큰 전과를 올렸다. 전투가 끝난 후의 F중대의 병력은 220명 중 보행이 가능한 인원은 82명뿐이었다. 이때 '유담리'일대에 8.000명의 미 해병대 병력이 갇혀있었다.
이때의 F중대 중대장의 용감하고 탁월한 전투지휘의 공로로 미국의 최고훈장(Medal of Honor)이 중대장 '윌리암 E. 발버' 대위에게 수여되었다. '윌리암 E. 발버 대령(예')은 2002년 4월 19일 캘리포니아 주 Irvine 자택에서 항년 82세로 타계했다.
이들, 미 해병대의 한국전의 영웅들은 이미 80대 중반에서 고인이 되었지만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은 이들의 자유와 정의, 그리고 대한민국을 위한 영웅적인 헌신을 길이 기억하여야 한다. Capt. William E. Barber
Capt. William E. Barber
US Marine Col. William E. Barber was awarded the Medal of Honor for his actions in the Battle of Chosin Reservoir during the Korean War. With only 220 men under his command, Barber held off more than 1,400 People's Republic of China soldiers during six days of fighting.
Despite the extreme cold weather conditions and himself suffering a bone fracturing wound to the leg, Barber refused an order to leave his position fearing that a retreat would trap 8,000 other Marines. Barber and his limited number of men killed over 1,000 enemy troops; only 82 of his men were able to walk away after eventually being relieved.
William Barber also earned a Purple Heart in the Battle of Iwo Jima during WWII and a Legion of Merit citation during Vietnam.
Barber was born in Dehart, Kentucky on November 30, 1919 and was a graduate of Morgan County High School located in West Liberty, Kentucky. Barber died in Irvine, California April 19, 2002.
Medal of Honor Citation
Rank and organization: Captain U.S. Marine Corps, commanding officer, Company F, 2d Battalion 7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Chosin Reservoir area, Korea, 28 November to 2 Dec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West Liberty, Ky. Born: 30 November 1919, Dehart, Ky.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as commanding officer of Company F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Assigned to defend a 3-mile mountain pass along the division's main supply line and commanding the only route of approach in the march from Yudam-ni to Hagaru-ri, Capt. Barber took position with his battle-weary troops and, before nightfall, had dug in and set up a defense along the frozen, snow-covered hillside.
When a force of estimated regimental strength savagely attacked during the night, inflicting heavy casualties and finally surrounding his position following a bitterly fought 7-hour conflict,
Capt. Barber, after repulsing the enemy gave assurance that he could hold if supplied by airdrops and requested permission to stand fast when orders were received by radio to fight his way back to a relieving force after 2 reinforcing units had been driven back under fierce resistance in their attempts to reach the isolated troops.
Aware that leaving the position would sever contact with the 8,000 marines trapped at Yudam-ni and jeopardize their chances of joining the 3,000 more awaiting their arrival in Hagaru-ri for the continued drive to the sea, he chose to risk loss of his command rather than sacrifice more men if the enemy seized control and forced a renewed battle to regain the position, or abandon his many wounded who were unable to walk. Although severely wounded in the leg in the early morning of the 29th,
Capt. Barber continued to maintain personal control, often moving up and down the lines on a stretcher to direct the defense and consistently encouraging and inspiring his men to supreme efforts despite the staggering opposition. Waging desperate battle throughout 5 days and 6 nights of repeated onslaughts launched by the fanatical aggressors, he and his heroic command accounted for approximately 1,000 enemy dead in this epic stand in bitter subzero weather, and when the company was relieved only 82 of his original 220 men were able to walk away from the position so valiantly defended against insuperable odds.
His profound faith and courage, great personal valor, and unwavering fortitude were decisive factors in the successful withdrawal of the division from the deathtrap in the Chosin Reservoir sector and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Capt. Barber, his intrepid officers and men, and the U.S. Naval Service.
Medal of Honor Citation
PFC Cafferata
Following the Battle of Chosin Reservoir in 1950, President Harry S. Truman awarded the medal to PFC Cafferata during ceremonies at the White House, November 24, 1952.
The citation reads: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 Rifleman with Company F, Second Battalion, Seventh Marines, First Marine Division (Reinforced),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in Korea on 28 November 1950.
When all the other members of his fire team became casualties, creating a gap in the lines, during the initial phase of a vicious attack launched by a fanatical enemy of regimental strength against his company's hill position, Private Cafferata waged a lone battle with grenades and rifle fire as the attack gained momentum and the enemy threatened penetration through the gap and endangered the integrity of the entire defensive perimeter.
Making a target of himself under the devastating fire from automatic weapons, rifles, grenades and mortars, he maneuvered up and down the line and delivered accurate and effective fire against the onrushing force, killing fifteen, wounding many more and forcing the others to withdraw so that reinforcements could move up and consolidate the position. Again fighting desperately against a renewed onslaught later that same morning when a hostile grenade landed in a shallow entrenchment occupied by wounded Marines, Private Cafferata rushed into the gully under heavy fire, seized the deadly missile in his right hand and hurled it free of his comrades before it detonated, severing part of one finger and seriously wounding him in the right hand and arm.
Courageously ignoring the intense pain, he staunchly fought on until he was struck by a sniper's bullet and forced to submit to evacuation for medical treatment. Stouthearted and indomitable, Private Cafferata, by his fortitude, great personal valor and dauntless perseverance in the face of almost certain death, saved the lives of several of his fellow Marines and contributed essentially to the success achieved by his company in maintaining its defensive position against tremendous odds. His extraordinary heroism throughout was in keeping with the highest traditions of the United States Naval Serv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