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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와 애통하는 예루살렘
슥 12:10-14
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1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2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13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14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슥 12:10-14 / 다른 한 편으로는 내가 다윗의 후손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뉘우치는 마음을 가득 채워 주어서 그들이 모두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그들은 자기들이 찔러 죽인 사람을 바라보며 마치 외아들을 잃고 통곡하는 사람처럼 그를 위하여 통곡하고, 맏아들을 잃고 우는 사람처럼 모두 그를 위하여 비통하게 울 것이다. 11) 그때에 예루살렘 사람들이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는 므깃도 골짜기의 하다드림몬에서 경건한 왕 요시아가 전사하였을 때에 통곡하던 백성의 소리보다도 더욱 클 것이다. 12) 온 나라의 족속들이 따로따로 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할 것이다. 다윗 왕가의 남녀가 따로따로 울며 예언자 나단 족속의 남녀가 따로따로 울며 13) 제사장 레위 족속의 남녀가 따로따로 울고 서민 시므이 족속의 남녀가 따로따로 울며 14) 나머지 족속들도 남녀가 따로따로 모여서 울 것이다.
본 단락은 예루살렘과 유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마침내 승리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어서 궁극적인 승리는 진정한 회개로써 가능하며, 그 회개는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다(10-11) 하나님께서는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회개의 영을 부어 주실 때 비로소 외아들을 잃은 것처럼 애통하고, 큰아들을 잃은 것처럼 통곡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가문을 이어가고 상속권을 승계받는 외아들과 큰아들의 죽음은 최대의 슬픔입니다. 이 때의 애통이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서의 애통과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다드림몬의 애통은 남 유다의 16대 왕이며, 종교개혁을 통하여 여호와 신앙을 회복시켰던 요시야가 애굽과 전쟁 중 므깃도에서 전사했을 때 예루살렘 주민들이 겪은 큰 슬픔을 말합니다. 훗날 이스라엘은 메시야가 오셨음에도 알지 못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베드로가 설교할 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이 임하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고백하는 회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행 2:37-41).
백성이 통곡하다(12-14) 이스라엘의 회개는 마치 므깃도 골짜기에서 요시야 왕이 죽었을 때, 유다 온 백성이 통곡하였던 것처럼 큰 통곡과 함께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각 족속이 애통하고, 다윗의 왕족들이 애통하며, 제사장들도 애통할 것입니다. 본 단락에서는 무엇보다 이스라엘 지도계층의 참회와 애통이 먼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 멸망의 책임이 왕족과 귀족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만큼 더 큰 책임과 의무가 뒤따릅니다. 하나님 공동체의 회복 역시 지도자의 회개와 성결함이 요구됩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지도자들에게 가슴 치는 애통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 회개할 때요, 구원의 은총을 구해야 할 시대입니다.
적용: 스가랴의 예언대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셔서 오순절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처럼 지금 무릎을 꿇고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구합시다.
자신의 죄를 애통함으로써 회개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애통할 수 있는 마음을 하나님이 부어 주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세상적인 축복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애통하는 마음을 구하며 그로부터 시작되는 성령의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 설 교 >
그 날에 있을 큰 애통
스가랴 12:10-14, 마태복음 5:4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씀을 듣고도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그 때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에서 뛰쳐나와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베드로의 애통이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극복하고 위대한 사도가 되게 하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 후에 베드로는 닭이 울 때 마다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온전히 회개한 사람의 애통하는 모습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는 있지만 죄 속에 머물면 안 됩니다. 죄를 짓지만 회개할 줄 알아야 하고, 돌이키되 철저하게 돌아서야 하고, 애통하되 가슴을 찢는 애통함이 있어야 합니다. 애통이 있어야 참 회개입니다.
훗날에 우리 모두는 애통 없는 곳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용서 받고 의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애통이 없는 곳에는 진정한 사랑도 없습니다.
전도서 7:2에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7:4에는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고 합니다. 전도자가 권하는 것은 애통은 피하지 말고 사서라도 배우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시편 6:6에서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모습을 전합니다. 구전에 의하면 루터는 자신의 죄를 회개할 때 그 죄가 너무 무거워 기도하는 중에 기절하였다고 합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얼마나 애통했으면 이렇게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요를 적셨겠습니까? 가슴을 찢는 이런 애통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애통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애통은 정신적 우울증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의 애통은 마음의 기쁨입니다. 7세기의 영성가 존 클리마쿠스는 동방교회의 고전이라 일컫는 ‘영적 상승의 사다리’(The Ladder of Divine Ascent, AD 640년경 저술)라는 책에서 애통을 ‘영혼 안에 있는 황금 채찍’이라 불렀습니다. 애통은 영혼의 유익입니다. 애통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애통은 영혼의 은혜입니다.
성경은 애통하는 모습을 여러 모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옷을 찢고”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은 줄 알고 애통할 때 옷을 찢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라는 표현도 있고, “굵은 베를 띠고”라는 표현도 있고, “재 가운데 앉았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세는 성경에 다양하게 표현하지만 이런 형식과 더불어 마음을 찢는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마음을 찢는 것이 심한 애통입니다.
애통을 통해 인간의 심오한 경험을 이해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리십니다. 애통을 통해 참다운 영적 세계를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죄를 회개할 때에 어린 시절 옆집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것까지 깊이 회개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애통한 죄를 결코 범하지 않는 사람이 자기가 범한 죄를 참으로 애통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길선주목사님의 회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길선주목사님은 예수를 믿기 전에 남의 집에 재정을 맡은 집사로 있었는데 그 때 주인의 돈주머니에서 돈을 훔친 것을 공중 앞에서 회개하였습니다. 이런 한 사람의 애통이 나라 전체를 부흥의 물결로 뒤덮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성경 본문에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애통의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간구하는 심령을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애통하는 심령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면서 큰 애통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주셔야 애통합니다.
스가랴 12:10에는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리니”라고 합니다. 애통은 은총입니다. 하나님이 애통하는 마음을 주셔야 애통이 나오고 회개가 됩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마음을 부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부어준다는 말은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심은 우리에게 쏟아부어주실 수 있습니다. 요엘 2:28에는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것은 믿음으로 받아야 은총이 됩니다.
마태복음 5:4에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합니다. 애통은 벌인 것 같지만 벌이 아닙니다. 애통은 화인 것 같지만 화가 아닙니다. 애통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애통은 은혜이고, 애통은 복이고, 애통은 회복이고, 애통은 기쁨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애통하는 자는 회복합니다.
삭개오는 유대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직업인 세리라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세리는 유대인 공공의 적입니다. 열심당원들은 세리만 보면 칼로 찔렀고, 테러를 했습니다. 그의 삶에서 깨끗한 것이라고는 그가 세탁했을 돈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났을 대에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남의 것의 억지로 빼앗은 것을 4배를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회개를 촉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 주시면 회개는 절로 됩니다. 자신의 죄를 생각하면 애통하는 마음을 절로 생깁니다.
베드로와 가룟유다는 똑같이 예수님을 배반하는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지만 두 사람의 결과는 천지차이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심히 애통하였습니다. 반면에 가룟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고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회개는 위대한 사도가 되게 하는 힘입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는 가장 존경받는 일본인 10인 중 한 사람입니다. 그의 시 ‘괴롭지 않았더라면’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만일 내가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그의 심령의 괴로움과 육체의 가시는 오히려 은혜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질을 앓다가 듣고, 보는 것과 눈꺼풀을 움직이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마비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일하러 나갈 때 성경을 펴두고 갔는데 어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그 페이지만 읽었다고 합니다. 그의 고통이 말씀을 깊이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후에 그는 목사가 되어 방송과 책을 통하여 일본인을 회개 시키는 능력 있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의 설교는 애통하고 회개하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의 설교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총으로 애통하고, 회개한 것입니다.
성령은 회개하게 하는 영입니다.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강림했을 때 그들은 “형제들아 어찌할꼬”라는 회개가 터져 나왔습니다. 깨달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사도들에게 물었습니다. 애통의 은총은 성령의 강림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라고 합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무엇일까요? 어떤 이는 예배를 방해하는 죄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회개케 하는 영을 방해한다는 뜻입니다. 결과적으로 회개하지 않는 죄는 사함이 없음을 말합니다. 회개하는 죄는 무엇이든 사함을 받습니다. 바울을 보세요. 예수님을 박해하고 예수 믿는 많은 사람을 박해했지만 그가 회개하므로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용서는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주셔야 가능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이런 하나님의 은총을 받습니다. 회개의 은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86년 어느 여름날, 아우구스티누스가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에 있을 때 “펼쳐 읽으라”는 아이의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성경을 펼쳐 로마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13:13-14의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을 읽을 때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가슴을 찢는 애통이 있었습니다. 위대한 성자가 태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애통과 회개를 통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남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애통의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주시면 위대한 인생이 탄생 됩니다. 우리에게도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주셨던 애통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모든 족속이 회개와 애통이 필요합니다.
스가랴 12:11에는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열왕기하 23:29에 기록된 사건을 말씀합니다. 선한 왕 요시야가 기원전 608년에 애굽의 바로 느고와 므깃도 전쟁에서 전사하였습니다. 이 때 온 이스라엘이 애통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떠올리며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12절에는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라고 합니다. 다윗족속과 그 아내들, 다윗의 아들 나단족속과 그 아내들, 제사장인 레위족속과 그 아내들, 레위 자손인 시므이족속과 그 아내들이 따로 애통할 것이라고 합니다. “따로”라는 말이 11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백성이 회개하고 애통하되 각자가 회개하고 애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민족과 백성이 빠짐없이 회개하고 애통하였습니다. 애통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애통하는 심령은 누구에게나 주십니다. 그 때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주시는 은총입니다.
왜 모든 사람에게 회개와 애통이 필요합니까?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야 하는 데는 예외가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애통하지 않고 구원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애통은 구원의 은사입니다. 애통은 하나님께 사랑받을 조건입니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회개와 애통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거부합니다. 자신에게는 회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첫 번째 선포가 “회개하라”입니다. 이 선포는 단도직입적인 촉구이며, 명령이며, 절실한 소리입니다.
독일의 한 작은 도시에 피아니스트가 열심히 독주회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지방신문에 광고를 냈습니다. 자신이 유명한 작곡가 리스트의 제자라고 소개까지 했습니다. 물론 리스트의 제자라고 한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는 리스트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연주회가 열리기 며칠 전 공교롭게도 리스트가 이 도시에 온다는 것입니다. 피아니스트는 큰일이 났습니다. 자신의 거짓말이 탄로 나면 음악가로서 인생도 끝장일지 모릅니다. 그는 전전긍긍하고 있다가 용기를 내어 리스트를 찾아갔습니다.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었습니다. “선생님의 이름을 도용하였습니다. 저는 많이 부족하여 감히 선생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 번만 용서하여 주십시오.” 리스트는 웃으며 “당신은 잘못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행동에 당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디 피아노를 한번 연주해보세요.” 그는 떨면서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연주하는 중간에 리스트는 그의 연주를 멈추고 고쳐 주었습니다. 그가 연주를 마치자 리스트는 “내가 한번이라도 가르쳤으니, 이제 분명히 내 제자예요. 당신의 연주가 끝나면 내가 한 곡을 연주할 테니 관객들에게 그렇게 소개하세요”라고 하였습니다. 그 연주회는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회개와 용서의 은총을 입으면 놀라운 변화가 옵니다. 우리 심령의 애통은 그 이상의 은총이 따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애통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주심은 애통과 회개를 이룹니다. 애통하는 자는 하늘의 축복을 주십니다.
성경에서 의미하는 새 것은 생명, 사랑, 치유, 회개 그리고 창조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난 인물들은 한결같이 이런 경험을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회개를 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비유에서 세리는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회개합니다. 바울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합니다.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우리 모두가 애통해야 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죄인의 회개입니다. 예수님은 특정인의 구주가 아니라 모두의 구주이십니다. 예수님 없이 구원받을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하고,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현대의 가장 걸출한 복음주의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베드로가 흘린 눈물의 연못은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실망시킨 것을 깨달을 때마다 계속 불어나 바다가 되었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죄인인 모든 인간이 애통합니다. 모든 인간의 애통의 바다는 지금도 물이 계속 불어나고 있습니다.
찬송가 487장 2절에는 “연약함 후에 강건하며 애통한 후에 위로 받고 눈물 난 후에 웃음 있고 씨 뿌린 후에 추수하네”라고 합니다. 애통은 위로를 받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이 위로를 받고 복 있는 자가 됩니다. 애통은 결코 우울증이나, 약함이나, 비겁함이나, 좌절감이 아닙니다. 애통은 오히려 기쁨이며, 웃음이며, 강함이며, 희망입니다.
결 론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것이 풍성합니다. 없는 것이 없이 모든 것이 풍성한 나라라고 하지만 그런데 없는 게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4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없는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하나님의 나라에 다시는 애통이 없고, 곡하는 것이 없고, 아픔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땅에서 애통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더 이상 애통이나, 눈물이나, 아픔이 없습니다. 애통은 이 땅에서, 이 나라에서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나라, 저 나라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애통을 은총으로 주시는 이유를 이제 알겠지요?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려고 이 땅에서 애통하게 하십니다. 애통이 없는 곳에서 살게 하시려고 이 땅에서 애통하게 하십니다. 지옥은 말할 것도 없이 애통의 장소입니다. 이 땅에서 애통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옥에서 끝없는 애통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큰 애통의 은총을 주실 그날이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큰 애통의 은총을 주시는 날이 우리의 매일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슥12:10-13:2
간구하는 성령
뜨거운 여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더운 여름에 가장 좋은 것은 시원한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어느 학교에서 방학이 되어 어린이들에게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그 숙제는 방학때 매일 일기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방학이 끝나서 선생님이 조사해보니까 하나도 숙제를 하지 않은 애가 하나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애, 너는 왜 일기를 하루도 쓰지 않았니?”. 그 애가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 바쁠 때는 쓸 시간이 없었어요. 그리고 아무것도 안 한날은 쓸 것이 없었어요.”. 어때요? 말이 되지 않습니까? 바쁠 때는 쓸 시간이 없고, 별 일 없을 때는 쓸 내용이 없고. 저는 이것을 기도와 관련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매일 기도하라고 하지만 “바쁠 때는 기도할 시간이 없고, 별 일이 없을 때는 기도할 것이 없고”.
우리는 점점 기도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기도가 어려워진 이유는 우선 바쁘기 때문입니다. 바쁜 세상에 일은 안하고 기도만 하고 있으면 뭔가 시간낭비하는 것 같습니다. 기도가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기도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가장 절실히 여기는 것은 기도입니다. 미국의 갤럽 연구소에서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삶이 한 주간밖에 남아 있지 않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이 ”기도하겠다“ 였습니다. 바쁘기도 하고 기도해봐야 뭐가 달라지나 하는 생각도 있지만 사람들 마음속에 깊히 자리잡은 것은 누군가를 향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입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잘하는 기도이며 기도하면 어떤 축복을 받는가하는 것입니다.
오늘 스가랴는 이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대답합니다. 12절입니다. 슥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여기에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이란 말이 나옵니다. “심령”은 “성령”입니다. 이 구절이 성경에서 중요한 것은 스가랴는 구약의 선지자중에서 가장 먼저 성령을 예고한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성령에 대한 말씀은 자주 나왔습니다. 창세기에서 성령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사사기, 여호수아, 왕정시대에는 하나님이 사사나 왕, 제사장을 세우고 그에게 카리스마를 부어 나라를 이끌어 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신이 기드온에게 삼손에게, 사울에게 임했습니다. 바벨론 시대, 에레미아, 에스겔같은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신이 부어진 것은 고난의 시대를 이겨내기 위한 능력의 신이었습니다. “생기야, 사방에서 불어와서 죽음당한 자에게 들어가라”. 그러나 오늘 스가랴가 예언한 성령은 앞으로 오실 성령입니다. 앞으로 메시아가 오시면 그때 성령이 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성령을 요엘 선지자도 예고했습니다. 욜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여기에 요엘이 유명한 예언을 합니다. “그날이 되면”, 선지자들에게 “그날”은 메시아가 오실 날입니다. 그 날이 오면 “내가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 주리라”.
그런데 문제는 시기입니다. 요엘은 대략 주전 400년의 선지자로 봅니다. 학자들은 요엘이 주전 4세기에 활동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스가랴는 주전 520년에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니까 스가랴는 요엘보다도 적어도 150년 가량 앞섭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에서 가장 먼저 성령의 강림을 예언한 사람이 스가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슥12:10 말씀이 중요합니다. 슥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여러분은 정말 스가랴가 예언한대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오순절 다락방에 성령이 임한 것을 믿습니까? 여러분도 스가랴가 예언한 대로 하나님의 은총과 간구하는 성령이 여러분에게 충만히 임하시기를 원합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은총과 간구하는 성령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부어주시는 성령
스갸랴의 예언중에 눈에 띄는 것은 “부어준다”는 말입니다. 슥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스가랴는 말세가 되면 성령이 임할텐데 그 성령은 모든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부어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은혜주시기로 선택한 모든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감추인 뜻은 있습니다. “다윗의 집”은 혈통으로 다윗의 후손 곧 유대인만 성령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이 성령받는다는 말입니다. “에루살렘 거민”이란 말도 꼭 예루살렘 도시에 사는 자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고 그 뿌리에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따라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이란 말은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몸된 교회에 소속된 자들을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소속된 영적 예루살렘 거민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성령이 부어질 것이라는 예고가 이루어질 줄 믿습니까?
중요한 것은 “부어진다”는 말입니다. “붓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양동이에 물을 가득 채워 그것을 위에서부터 내리 붓는다는 말입니다. 해마다 이때쯤이면 더운 날, 옛날 어머니들이 자녀들 웃통을 벗기고 엎드려 뻗혀를 시킨 후 “자, 붓는다” 하고 양동이로 물을 온 몸에 쫙 끼얹습니다. 그때 얼마나 시원한지. 어머니가 손으로 때를 벗길 때 조금 아프긴 했지만 그때 그 시원한 느낌은 세월이 지나도 남아 있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라 소나기가 내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압니다. 비가 오지 않아 논이 쫙쫙 갈라지는 어느날 갑자기 예고없이 소나기가 내려 글자 그대로 양동이로 쏟아 붓듯이 비가 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얼마나 시원한지. 여러분도 그 느낌 압니까?
그래서 성경에는 이 “붓다. 붓는다”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겔 39:29, “내가 다시는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내 영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부었슴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잠1: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사32:15,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앞에서 말한 요엘도 있습니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에도 나옵니다. 딛3:6-7,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중에서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시44:3입니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다같이 ”부어주리니“. 이 말씀들의 공통점은 첫째 모두 성령이 임할 때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고 두 번째는 시제가 미래형으로 쓰였다는 것이고 그리고 셋째 성령의 임재를 하늘에서 내리는 소나기로 비유했다는 것입니다. 이 성령이 초대 교회 마가의 다락방에 임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120문도에게 오순절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성령을 받고 방언하고 예언하며 기적이 일어났는 데 베드로가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같이 “부어주셨느니라”. 이 부어주었다는 말을 예수님 자신이 설명한 예고한 적이 있습니다. 요3: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여기서 “한량없이”는 영어 성경으로 “without limit”입니다. limit이 없습니다. 한계가 없습니다. 독일의 아우토반처럼 제한속도가 없습니다. 수량도 초과하고, 질량도 초과하고, 시간과 공간도 초월합니다. “얼마든지”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영적 생활입니다.
중세시대의 성녀 아빌라의 테레사가 있습니다. 그는 영적 생활의 과정을 물로 표현했습니다. 첫째 과정은 물동이로 물을 긷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힘든 과정입니다. 모든 것을 내가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많아야 물동이입니다. 두 번째 과정은 펌프로 품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도 힘듭니다. 그러나 물은 조금 더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내가 하는 만큼만 나옵니다. 세번째 과정은 저수지에서 물이 흐르게 하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내가 하지 않습니다. 저수지에서 물이 스스로 흘러나옵니다. 쉽습니다. 그러나 저수지가 마르면 물도 함께 마릅니다. 그러나 마지막 과정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소낙비가 쏟아지는 과정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냥 하늘에서 쏟아집니다. 내가 할 일은 가만히 서 있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다 합니다. 가만히 서 있으면 온 몸이 흠뻑 적실만큼 비를 맞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수준이 이 수준입니다.
이 수준을 성경은 “성령 충만”이라고 부릅니다. “충만‘이란 가득찬 상태입니다. 병이나 그릇에 물이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아구까지 차는 것입니다. 더 이상 찰 수 없는 상태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신학적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구원 성화
속죄 (우리가 진노아래 있다)
씻음 (더럽다)
죄 구속 (마귀에게 팔렸다) 예수님(+)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감
의롭다 하심 (범법으로 유죄판결)
화목 (하나님과 원수)
거듭남 새롭게 하심
성령세례 성령충만
성령님은 우리의 구원의 모든 과정에 관여하십니다. 마치 어머니가 일생동안 자녀를 잊지 않고 관여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은 죄로부터 구원받음으로 시작합니다. 죄로 부터의 구원은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데 다 전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속죄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영과 혼과 몸이 더러워졌습니다. 그래서 깨끗이 씻김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마귀에게 팔렸습니다. 누군가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사와야 합니다. 그것이 구속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하면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이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알게 하고 믿게 하고 회개하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합니다. 이때 임하는 성령을 성령의 세례라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예수님을 통해 더 나아갑니다. 그것을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통해 하나님을 닮은 수준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것은 한번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일생에 걸친 지속적인 성화의 과정입니다. 이를 위해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집니다. 한번만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생 부어집니다. 사도행전에도 2장이 성령이 임하고 4장, 10장에 계속 성령의 부으심이 나타납니다. 매일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져서 우리는 새로워 집니다. 그릇으로 말하면 거듭나는 것은 그릇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고 충만하게 하는 것은 계속 리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깨끗해져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습니까? 이제 하실 일은 날마다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날마다 성령이 부어지시기 바랍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여러분의 영과 혼이 흠뻑 적시도록 충만하게 부어지시기 바랍니다.
간구하시는 성령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겠느냐?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다시 10절을 보시면 슥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은총과 간구하는 성령”,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데 그것의 본질과 통로가 있습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부으시는 목적은 그의 은총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고 성령을 부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그 분의 일을 하려고 우리에게 성령을 붓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의 통로가 무엇입니까? “간구”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히브리어입니다. 이 두 단어가 한 뿌리에서 나옵니다. 은혜란 말을 “하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간구라는 말을 “타하누님”이라고 합니다. 하난이란 말을 작동케 하는 동사입니다. 하난이 움직이면 타하누님이 됩니다. 은혜를 은혜되게 하는 것이 간구입니다. 보이지 않은 은혜가 reality, 현실로 나타나게 하는 통로가 간구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하나님이 간구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고, 간구는 은혜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올라가는 길입니다.
롬8:26절 보시겠습니까?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여기서 “돕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성령은 우리를 도우시는 영입니다. 그란데 무엇을 통해서 돕습니까? 기도를 통해 돕습니다. “돕는다”는 말은 헬라어로 “순안티람바노마이”입니다. 이 말은 “순”, “함께”, “안티”, 대항하여, “람바노마이”, “취한다”. 직역하면 “함께 대항하여 취한다”. 의역하면 성령은 우리를 “함께 일으켜 세운다”. 성령님이 우리를 도와 일으켜 세우는 방법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죤 번연이 말한대로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기도한 후에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Before praying, we cannot do anything, after praying, we do not do anything. 기도하기 전에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기도한 후에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 기도하기 전에는 우리는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기도한 후에는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기도가 유일한 성령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외에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 기도후에 우리는 기도외에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도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거룩하기 때문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안에 계시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보통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필요를 위한 기도, 교제를 위한 기도, 능력을 위한 기도입니다. 먼저 필요를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의식주, 몸, 생계를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구한다고 기복적이 아니요 구하지 않는다고 믿음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고 우리는 하나님이 주셔야 삽니다. 또 하나의 기도는 교제를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의 필요를 구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필요를 구하는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됩니다. 기도에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입니다. 교제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주님안에 있고 주님이 우리안에 있는 영적인 삶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읽다가 또 한 가지 기도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능력을 위한 기도”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설교를 시작합니다. 설교는 성령의 능력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그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회개했습니다. 회개도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해야 합니다. 교회안에서 자기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구제, 긍휼, 사랑도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것을 버리는 능력을 받아야 가능합니다. 3장으로 오면 전도가 시작됩니다. 행3: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베드로와 요한에게 “내게 있는 것”이 없었다먼 앉은뱅이 못고쳤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4장부터는 핍박이 시작됩니다. 이로 인해 사도들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랬어도 그들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행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를 떠나니라”. 이렇게 되려면 능력이 필요합니다. 결국 그 고난을 이겨낸 사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순교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증인되고 증인되면 순교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예수님과의 교제가 영성생활의 목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성령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여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예수님과 함께 살고, 예수님을 일하기 위해 능력을 구하리라”. 다같이 “능력을 주옵소서. 성령의 능력을 주옵소서”.
지금도 제 책상에는 제가 좋아하는 웨슬리 듀엘의 시가 붙여 있습니다. 항상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이 시를 읽고 힘을 얻습니다. “성령이여, 홀연히 임하소서” (웨슬리 듀엘), ”오 주여, 홀연히 임하소서. 주의 성전이 오늘도 기다립니다. 약속하신 말씀대로 임하소서. 오늘 기도 드리는 중에 임하시옵소서. 축복의 성령이시여, 우리에게 필요한 부흥을 허락하소서. 오 성령이시여, 우리 마음에 주의 빛을 비추시고 주의 거룩하신 불길로 우리를 태우소서. 주여, 간구 하옵나니 속히 임하시어 우리를 정결케 하옵시며 성령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오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우리가 심히 곤고하여 주님 앞에 엎드렸사오니 지금 홀연히 임하시옵소서. 성령이여, 이 시간에 임하소서. 기도 하옵나니 지금 홀연히 우리에게 임하시옵소서“. 여러분도 날마다 성령을 구하시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구하고 주님과 함께 있는 것도 구하지만 이 악한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하늘의 능력을 구하시겠습니까? 하니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미국의 무디(1837∼99)만큼 교회를 부흥시킨 인물도 없습니다. 미국의 한 지역에서 무디 목사를 초청하여 전도집회를 가지려는 모임이 열렸답니다. 이때 한 젊은 목사가 일어나 말했습니다. “왜 무디만 강사로 고집합니까? 무디 외에는 설교자가 없단 말입니까? 그가 성령을 독점하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이때 사회자가 말했습니다. “무디만이 성령님을 독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성령님이 무디를 독점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망은 우리가 성령님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를 독점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려운 시대에 오직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 무디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앞에 지주 무릎꿇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견고히 서 있는 그리스도인이다”. 아멘. 기도는 은혜의 통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고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께 올라갑니다. 하나님앞에 무릎꿇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견고히 서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멘.
정결하게 하시는 성령
기도를 통해 성령이 임할 때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오늘 말씀 13:1입니다. 슥13;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여기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나옵니다. 스가랴는 주전 520년,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한 사람입니다. 그가 성전을 제건하고 쓴 책이 스가랴입니다. 스가랴는 보이는 성전 재건도 증요하지만 영적 성전 재건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습니다. 영적 성전 재건을 한 마디로 하면 성령으로 사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와 더러움을 씻는 성령의 생수로 가능합니다. 성령으로 기도해야 할 이유, 성령의 능력을 사모해야 할 이유는 능력 자체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성령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영입니다. 어느 신학교에 한 학생이 입학했습니다. 큰 마음먹고 기도도 많이 하고 입학했는 데 기숙사 사감이 화장실 청소만 시킵니다. 3개월을 하다가 너무 힘들어 사감을 찾아 갔습니다. “사감님, 제가 이 학교에 온 것은 신학, 성경, 설교학을 배우려고 온 것이지, 화장실 청소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너무 힘듭니다. 바꿔주세요“ 이때 사감이 학생을 빤히 쳐다보고 말했습니다. ”자네가 여기 온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네.“ 그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말은 오늘 지금까지 제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더 좋은 수단을 찾지만 하나님은 더 좋은 사람을 찾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찾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11절부터 봅니다. 슥12:11-14,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여기에 ”애통“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입니다. 그 애통도 어떤 특정한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자손, 나단의 족속, 그들의 아내, 레위족속 시므이 족속, 그 아내“, 무엇을 말합니까? 애통에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로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예수 안믿는 교회밖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는 믿고 교회는 나오는 데 말씀앞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자리에는 앉아 있고 말씀은 듣는 데 그 말씀을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안 받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사도행전 사람들을 아십니까?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자 행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했습니다. 왜 사람들은 마음에 찔렸을까요? 사람들이 마음에 찔린 이야기를 하려면 상당히 자극적인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다른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다는 이야기를 한 것 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렸습니다. “마음에 찔렸다”는 이 말은 헬라어로 “카타뉘소”입니다. 이 말은 본래 “말발굽에 움푹 패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말이 발을 힘차게 내 딛으면 땅이 움푹 패입니다. 나무를 차면 살점이 뚝 뚝 떨어집니다. 엄청난 힘입니다. 그 발로 사람을 차면 거의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이 “카타뉘소”, “찔린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밖에서는 그렇게 못해도 교회에 오면 그렇게 해애 합니다.
38절입니다. 행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성령님이 원하신 첫 번째는 ‘회개’입니다. 헬라어로는 ‘메타노이아’. ‘길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까? 40절을 보십시오. 행2: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여기 ‘패역’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패역’은 헬라어로 ‘스콜리오스’, 이 말은 ‘곧다’의 반대 개념으로 ‘비뚤어졌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비틀어진 길을 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이 비틀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비틀어져 있습니다. 세상이 어두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둡기 때문이 세상이 어두운 것입니다. 그러니 최소한 교회와서 말씀을 들을 때는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리 그래함이 말했습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분의 손을 내게서 거두시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성령님입니다. 모든 좋은 은혜는 여기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통로가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시138:3입니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예루살렘의 통곡
스가랴 12:10-14 / 이근호 목사
이스라엘은 특수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주변 나라들은 이 이스라엘의 특수성을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자기 나라와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다고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수하게 만드시게 된 연유는 다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려준 그 언약으로 인하여 오늘 본문에 나오는 족보들도 나열되게 된 것입니다.
언약이 보여주는 면면들은 지상의 인간들이 도저히 구상될 수가 없는 요소들로 채워지게 됩니다. 즉 언약을 인간들이 지켜낸다는 것을 애초부터 불가능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화와 문명들은 인간들 손에 의해서 제조되고 나타난 것들입니다. 바로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시고 하나님 구원의 특수성을 드러내려고 하시는 겁니다.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해가시는 겁니다. 방주가 그 예가 됩니다. 방주는 특수한 배입니다. 그것은 방주 이후에 주어지는 특별한 사태를 감안해서 건조된 배이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 인간들이 이미 경험한 바를 감안해서 만든 배가 아닙니다. 따라서 인간의 분석과 의미 해석을 차단할 수가 있습니다.
방주 못지 않게 이 이스라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나라에서 언약을 응축담아 사건이 터지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일종의 이스라엘을 하늘을 들어올리는 고리 역할을 하는 지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 고리 안으로 바늘에 실 꿰듯이 언약의 능력이 들어와서 저절로 빠져나가면 그 와중에서 예루살렘은 언약에 속한 도성이 되어 구원받습니다.
세상의 일반적은 큰 종교들은 이런 언약이 없습니다. 모든 게 인간들의 자기 성과급 따라서 구원이 결정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사람을 건져 올리는 고리도 친히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그것을 꿰는 든든한 밧줄까지 하나님께서 조치해주십니다. 그런데 언약을 외부에서 관찰하고 선택을 감행한 제 3의 지역을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노아에 탑승한 노아 가족 중 하나가, 노아보고 말하기를 “아버지, 제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은 이 세상에 큰 비가 오기 전에 방주라는 배를 만들고서는 그 안에 들어가서 살았데요”라고 말하면, 노아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바로 그 가족이 우리야”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보고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아예 말씀 속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봄 철의 꽃이 피고 질 때에 그것은 감사하는 제 3의 지역에 있는 꽃은 따로 없습니다. 본 꽃들이 직접 화사하게 피고, 실제로 핀 그것들이 시들어버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그러합니다. 인간이 말씀을 관찰하고 지키기로 각오한다고 해서 말씀이 성취되는 게 아닙니다.
말씀 성취성은 자기 백성을 직접 그 말씀 속에 집어넣어서 그의 말씀 자체가 말씀이 의도하는 바를 보여주는 관계에 돌입시키므로서 진행됩니다. 사는 게 곧 말씀이게 합니다. 하나의 꽃이 되게 합니다. 피기도 하지만 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유유자적할 수 있는 제 3의 지역을 부여받은 적이 없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될 이유 때문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육신은 허황된 것에 매료됩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되고 싶은 바를 자꾸만 창작하고서는 그것을 현실이라고 우기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서 자연스럽게 말씀의 세계 는 환상이니, 허구니 라고 하면서 비난하게 됩니다. 자기 영구 보존하기 위한 몸을 위하여 제시된 현실이 과연 진정한 현실일까요?
육신들의 이러한 횡포와 폭력으로 인해 하나님이 죽게 됩니다. 그 분이 바로 10절에 나오는 ‘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죽으시므로서 구원의 특수성이 성취가 됩니다. 구원의 고리에 실이 꿰이는 겁니다. 이 죽음은 단순히 자살이 아닙니다. “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아가 자기 몸에 유발한 왜곡한 이미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멀리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나라의 모습을 TV에서 미리 보고 그곳에 가기로 작정을 했다고 칩시다. 그 풍광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곳에 아직 자기가 담겨있지 않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결혼 기념으로 그 나라에 가겠다고 부부가 나선다면 그 때부터 TV에서 봤던 낭만은 사라집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 새는 것처럼, 공황 떠날 때부터 집에 돌아올 때까지 싸우기 마련입니다. 이는 그 풍경 속에 자신이 포함되어버리면 자신으로 인해 아름다움이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바로 이런 문제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군대에서는 보편적인 군기를 위하여 선임자들이 신입병에게 무리한 불친절을 안깁니다.
“똑바로 안해? 그렇게 설명했건만 시킨 대로 제대로 못해? 이 굼뱅이를, 이러고서 나라 지키겠어?”라고 다꾸칩니다. 그야말로 개무시하는 겁니다. 왜 무시해야 합니까? 그것은 그들이 군에 오기 전에 각자 스스로 잘 나가는 존재라고 여기면서 자기를 바라보는 관점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 국한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군대 질서라는 새로운 관점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기존의 모든 가치를 강제로 허물 필요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 관점의 최종점은 하나님 자신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테러당해 죽으시는 그 관점을 자기 백성들이 갖추기 위해서는 성도의 일생이 이 관점에 맞추어 돌아가도록 조치되어야 합니다.
성도도 육신들을 갖고 있기에 ‘하나님의 죽음’은 그저 환상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으로 봐서 가장 현실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맏이의 존재감입니다. 부모가 자신의 모든 가치와 의미와 명예와 영광을 다 쏟아 붓는 그 지점은 맏이의 존재입니다. 맏이만 잘 된다면 그 어떤 비참함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육신의 본성입니다.
그렇다면 맏이의 존재가 ‘하나님의 죽음’을 한탄 허구적 사실로 가리고 있는 바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해서 예언하시기를 “그날에 하나님이 죽음을 보고서는 마치 너희들이 맏아들이 죽은 듯이 애곡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죽음‘이 결코 허구니 비현실이 아니라 유일한 현실이요 구원의 고리임을 알리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각자 회개하는 이유는, 각자 중요시 여기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 모든 곳에 구멍이 뚫려서 자신들이 귀하게 여긴 그것으로 인하여 진정한 현실인 ‘하나님의 죽음’이 가리워졌음을 인정하게끔 한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귀하지 않고, 절대적이지도 않는 것을 바라보며 사는 저희들을 용서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이스라엘 나라가 특수한 나라입니다. 어떤 특수한 나라가 되었느냐 하면 분명히 남들 보기에는 사람들만 모여 있는 곳인데,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있다고 우겼고 거기에 대해서 다른 민족들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니들이나 우리나 내가 보기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기는 인간들, 그저 결혼해서 낳은 자식들과 함께 있을 뿐이지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도저히 못 믿겠다 그럴 때, 이스라엘의 특수성이 뭐냐 하면 여기에 나단 족속, 다윗 족속, 레위 족속, 시므이 족속 하는 것이 있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그냥 족보가 아니고 이런 족보가 나타나게 된 이유는 야곱이 하나님께 받았던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을 야곱 언약이라고 하는데, 그 야곱 언약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러한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노아라는 영화에 보면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방주를 만드는 구조같은 것들이, 잣나무로 만드는데 그 구조가 전에 있던 어떤 배들하고는 구조가 다릅니다. 특수성을 갖고 있어요. 그 방주를 가지고 노아 언약이라고 하거든요. 노아 언약.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언약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본인들이 특수한 운명, 특수한 인생을 살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조치를 해주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라고 되어 있어요. 예루살렘이라는 곳도 역시 특수한 구조입니다. 방주 안에 전체가 특수한 구조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도 특별한 인물인 것처럼 이스라엘 전체를 방주라고 봅시다. 같은 언약이니까. 방주나 이스라엘이나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발생된 것이기 때문에 같은 걸로 봐주면 그 안에도 아주 특별히, 특수한 장소가 뭐냐 하면 예루살렘 이라는 곳 이예요.
이 예루살렘에서 누가 죽느냐면 그가 죽어요. 10절에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가 누구냐면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의 특수성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 지상에 와서 살해당하는 그 지점이 예루살렘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죽고 그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삽니다. 죽고 사는 것, 마치 바늘에다 실이 들어 갔고. 실이 들어간 그걸로 끝인 줄로 알았는데 다시 나오므로써 그 실이 박혀 있는 옷감은 위로 들을수가 있죠. 고리를 만들어서 고리에 꿰고 튀어나올 때, 예루살렘은 바짝 들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인간이 천국가는 방법은 우선 언약을 줘요. 언약을 주고 그 언약은 인간이 이룰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와서 그 언약을 스스로 성취하므로써, 언약을 성취했다는 그 조건이 구비되면 그게 들어 올라가는 거예요. 언약이 서류입니다. 서류에 싸인을 하면 합격통지서가 맨 그 통지서예요. 언약을 통해서 바짝 들어 올리면 예루살렘이 하늘로 올라가고 예루살렘이 이 땅에 내려오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진다는 요한계시록 21장에 그 말씀이 나오는 겁니다.
다른 종교, 불교나 맹자, 공자, 힌두교나 이슬람교 같은 것을 보면 이게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고 자기가 닦은 도 만큼, 죽어서 뭐 혜택이 없겠는가 뭐 성과급이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나옵니다. 어느 종교든,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다 그래요. 성과급에 따라서 구원이 되고 안 된다는 겁니다. 요즘 여기에다 기독교를 자꾸 집어넣고 싶은 생각이 자꾸 드네요. 주님의 피로 구원받는데, 왜 자꾸 성과급이 왜 들어가는지. 아마 피를 믿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교회가 안 되니까 다른 종교처럼 성과급을 집어넣어서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가짜로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언약이 이루어지는데,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죽는데, 자살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보면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찔렀습니다. 예루살렘 주민이 하나님을 찔렀고 찔러진 그 하나님을 그들이 다시 바라보게 된다는 겁니다. 하여튼 특수한 종교예요. 이 복음이.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보면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스가랴서에는 예루살렘이 애곡한다 했는데 여기는 땅의 있는 모든 족속이 애곡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는 나중에 예루살렘이 붕괴되면서 온 각처로 흩어지면서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흩뿌려지기 때문에 언약의 조치가 개인에게, 이스라엘이 아니고 전체에 다 퍼지는 겁니다.
자, 여기서 하나님의 이러한 사실을 들었으면 그냥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여기서부터 좀 난해한 것이 그냥 이 말씀을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고. 성경말씀을 그냥 믿어버리면 지식이 되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직접 우리가 찌른 자 경로속에 들어가야 됩니다. 누가 찔렀대가 아니고 내가 찔렀습니다 라는 체험을 평생 동안 해야되는 거예요. 가로수에 꽃이 피었잖아요? 꽃이 피었다 말이죠. 꽃이 피었을 때, 우리는 “아! 꽃이 피었구나!” 라고 압니다. 그러나 우리한테 주목을 받는 꽃 자체는요, 자기도 자기를, 옆에 있는 꽃을 감상할 입장이 못 돼요. 자기는 실제로 핀 꽃이여야 되고. 해봤자 일주일도 못 갑니다. 다시 시들고 꽃이 떨어져요. 져버립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꽃은 내가 꽃을 피웠다는 것을 감상할 수 있는 제 3의 지역에 꽃이 없어요. “어? 꽃이 폈네?” “누가 보는데?” “핀 꽃을 내가 볼 수 있네.” 라는 그런 꽃은 없듯이. 본인이 피고 본인이 폈다고 우길 때, 다시 본인이 지는 겁니다. 꽃도 마찬가지이지만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사람이라는 것은 나를 관찰할 제 3의 자리가 없어요. 우리는 죽어야 되고, 죽어가야 되고, 죽어 가면서 다시 펴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내가 다른 자리에 있으면서 내가 믿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내가 믿습니다 이렇게 할 자리가, 따로 내 자리가 없어요.
주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난 그 자리가 남의 자리가 아니고 나의 자리로 개입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들어가야 돼요. 들어가게 되면 구경할 입장이 못 되고 주님의 뜻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죽어야 되고 주님의 뜻대로 하늘나라에서 다시 살아냐야 되는 겁니다.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결국은 내 이야기로 될 때만 우리는 방주 안에 같이 들어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방주 안에 여덟 식구 있으면서 노아 아들이 하는 말이 “아버지 제가 이야기 해드릴까요? 어떤 가정이 있는데 갑자기 비가 와서 방주 만들어 가지고 그들이 살았대요.” 라고 남의 이야기 할 수가 없어요. 너다 너. 지금 우리야 우리. 우리가 그 이야기라니깐.
말씀을 자꾸 읽으면 안되고요. 말씀 속에 들어가 있음을 소급해서 믿어야 돼요. 또 말씀에 들어갈려고 하지 마세요. 들어갈려고 한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소급해서 믿어야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환상이 있어요. 어떤 환상이냐면은, 사실은 이 환상이, 제가 환상이라고 했지만 이게 실제가 되는데요. 마귀가 성경속에 있는 이야기를 전부 다 환상으로, 자꾸 그건 허구야, 환상이야, 헛된거야 믿지마, 그런거 보지마, 그런데 가지마, 들리게 하지도마, 자꾸 이렇게, 하나님이 죽었다가 살았났다는 이것이 실제인데 그게 실제 아니고 지금 내가 탱탱하게 살아있다는 거 이것을 자꾸 실제라고. 죽는 것은, 죽음이라는 것은 아직 없어. 이게 실제라고 우기게 만드는 그런 요소가 아주 강렬하게 작용합니다.
그래서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설명하기를 예루살렘이라는 이 지역이 어떻게 인간으로 바뀌느냐는 그 작업을 예수님께서는 해주시는 겁니다. 상당히 내용이 어렵죠. 어렵기 때문에 제가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TV에서 그리스나 이태리 스위스, 하여튼 경치 좋은데를 보거든요. 독일이나 미국 같은데 경치 좋은데를 보면 굉장히 아름다워요. 그러면 부부간에 “여보 이번 결혼 20주년에는 우리가 저기 가자? 알프스에 가자.” 라고 해서 알프스에 가면 너무 멋있고 아름답고 모든 스트레스가 다 풀리고 하겠죠. 그런데 막상 알프스 비행기 타고 갔다 오면은요 갈 때부터 싸우고 올 때까지 싸웁니다.
왜냐하면은 우리가 TV이에서 봤던 알프스에는 내 몸이 없어요. 그리고 옆에 있는 자기도 없어요. 둘이가 없어요. 그냥 제 3의 지역에서 보니까 아름답게 보이는데, 막상 여행을 하게 되면 이 몸이 같이 가요. 가게 되면 집구석에 있는 그 몸이나 알프스에 있는 그 몸이나. 집구석에 있는 바가지가 거기 가면 안 샐까요? 스위스 알프스에 가서 싸우는 거예요. 그 아름다운 풍경이 없어요. 아름다움이 안 생겨요. 16년 동안 해도 아름다움이 안 생겨요. 그게 왜그러냐면 인간의 몸의 한계가 그렇습니다. 자기 몸에서 말씀속의 세계 못 들어가요. 들어갈 수가 없어요. 마치 말씀속이 알프스 같애. 너무 좋아. 천국이 너무 좋아.
그런데 막상 본인이 본인 자체가 말씀속에 있다고 생각 안 하고 성경 말씀속을 따로 구상을 만들어 놓고 이렇게 그림을 그려 놓고 “야, 성경속의 세계 참으로 아름답다!” 아름답기는 뭐가 아름다워요. 성경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본인 사는 세계가 성경 세계 거든요. 그러면 주님께서 이 육신의 문제, 하여튼 이게 천국이고 좋다고 하는데 내가 거기 가면 천국 버려요. 내가 가면. 그래서 천국도 살고 안 버리게 하는 방법은 이 몸에서 뭔가를 따로 끄집어 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루살렘의 지역이라는 곳에 살더라도 그 지역과 내 몸이 따로 논다는 것. 예루살렘에서 발생되는 사건과 내 몸이 살고 싶은 예루살렘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거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한 가지 좋은 예가 있는데요. 이게 뭐냐 하면, 남자들은 다 압니다. 군대를 가게 돼요. 군대를 가게 되면 지가 사회에서 잘 나간다, 뭐 좋은 집안의 애다, 뭐 각자 자기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가 다 있고 있잖아요? 그런데 훈련소에 딱 들어 가면은 조교들이 이런 이야기 해요. “이것들이 굼벵이처럼 똑바로 못해 그것밖에 못하지? 내가 그렇게 가르쳤건만 너희들이 이것밖에 못해?” 이러거든요. 그러면 훈련병들은 “아니 뭘 가르쳤는데?” 뭘 가르쳤는데? 군에서 아무 것도 안 가르쳐 줘요. 무조건 이것들이 그렇게 가르쳐 줬는데 아무 것도 못 하고 이 굼벵이들 똑바로 해 똑바로 하라면서 막 패고 이런다고요. 친절하게 아주 사근사근하게 납득이 가도록 그렇게 선임병이나 조교들이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윽박질러요. 정말 일을 할려는 것이 아니고 일을 망칠려고 작심을 했어요. 조교나 선임병들이.
왜 그렇게 합니까? 각자 잘난척을 하기 때문에. 이 사회에 있을 때 전부 다 자기들이 똑똑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서 선임병들은 완전히 머리 깎아 놓고 몰아 넣고서 가르쳐 주지도 않았어요. 이 느림보 굼벵이들아! 무조건 굼벵이들이라고 시작을 하는 거예요. 개무시 하는 겁니다. 이 개무시가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이예요. 똑바로 못 하지? 그렇게 가르쳤는데. 뭐 성경 말씀 봐도 모르는데 어떻게 똑바로 해요? 주님 혼자 잘하시는데. 주님 혼자 알고 있고, 조교 혼자 알고 있는데. 사회생활 하다 뒤늦게 군에 온 사람한테 좀더 나긋나긋하게 그저 친절하게 “사회에서 계시던 아저씨들 그 동안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앞으로 가이소.” “뒤로 가시옵소서.” “아니되옵니다.” 이렇게 합니까? 평소에 가정에서 부모한테 이쁨 받는 것처럼 그렇게 해요? “이러다 나라 지키겠어? 이런 돌대가리들이 군에 오다니” 그 사람들 서울 대학 나오고 아이큐 높아요. 이 돌대가리들이!! 이렇게 해줘야 해요. 그래야 권위가 먹혀요. 그래야 통솔이 되고 그래야 질서가 잡힙니다.
우리가 성경 보기 전에 똑똑하고 잘났고 종교 연구하고 영어 공부하고 과학 공부하고 기술있고 자기나름대로 열심히 돈 벌겠다고 자부하는 인간들이예요. 그래가지고는 천국에 못 갑니다. 천국에 못 가요. 완전히 개무시 당해야 되고 완전히 모든 것을 박탈 당해야 됩니다. 잘난척하는 것을 다 빼앗겨야 해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스스로 개라고 여길까요? 그것도 모자라요.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손에 하나님이 살해 당하는 것입니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만들어 버려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인간이 몸의 특징이 눈을 뜨면 자기 중심이 되거든요. 그래서 천국은 눈 뜨면 안 보이고 눈 감으면 보이는 곳이 천국이게 하시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으매 항상 우리는 변명들을 하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몸 육신의 탯줄을 끊어 버려요. 원천을 끊어 버립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10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애통하기를 어느 정도 애통이냐면 독자를 위하여 애통해라. 독자라 하는 것은, 자식이죠. 그것도 기둥입니다. 집안의 기둥. 그러면 부모들이, 보통 결혼하기 전에 아가씨들 보고 공장다니라고 하면 사람을 보통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가씨 어디 다니느냐고 하면 공장다닌다고 말을 못할 정도로 부끄러워요.
그런데 일단 결혼했다 40대 50대 아줌가 되면 공장이고 뭐고 일만 시키면 다 가요. 왜? 자식 때문에. 이미 자신의 권위와 체면은 자식 있음에다 다 털어 넣었거든요. 자식만 잘 되면 나는 개같은 취급을 받아도 괜찮아. 자식에다 올인한 겁니다. 자식이 그것을 알 리가 있습니까? 자식이 그것을 알면 인간 다 되었게요. 모릅니다. 하여튼 모든 것을 다 줬어요. 니한테는 한 푼도 없다고 해놓고 죽을 때는 다 주고요. 자식들이 그 말 절대로 안 믿거든요. 유자식 상팔자 보세요. 믿지도 않아요. 안 준다고 해놓고 다 주고요. 호적에서 뗐다고 해놓고 유치장 제일 먼저 찾아가고. 부모들이 새벽기도 나오면, 우리는 새벽기도 없지만 기도하는 내용이 뭡니까? 그저 자식 위해서 합니다. 자식. 자식 위해서. 가끔 남편 위해서 기도하는 아줌마도 있지만 그건 남편을 경유해서 자식을 위하여. 남편 사업 잘 돼서 내가 낳은 자식을 위하여. 자식이 잘 된다면 어떤 무시도 다 감수하고 어떤 호사도 다 포기할 정도로 자식을 위해서 다 합니다. 그 인간의 모든 의와 존재의 가치. 내가 살아 있는 이유는 자식이 있으매 내가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러나 꽃은 살아 있는 이유가 폈다와 지기 위함입니다. 꽃이 갑자기 피는 것은 지기 위함입니다. 질 때에 그 처절함과 처참함을 극도로 강조하기 위해서 반짝 피게 해요. 꽃도 그렇지만 인간도 자식을 위하여 자식 잘 되는 것을 보람과 낙으로 여기면서 살다가 만약에 그 자식한테 누가 건드렸다 이러면 용서가 안 되죠. 그 점은 가족의 끈끈한 정으로 그것을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대전을 가는데 기차 안에서 굉장히 시끄럽게 휴대폰을 해요. 내가 보기에 외국에서 살다가 온 한국사람 같은데, ktx안에서 휴대폰을 못 하고 밖에서 해야 하는데 그것을 잘 몰랐나 봐요. 제가 5분을 참다가 이야기 했어요. 좀 밖에 나가서 해라. 그래서 그 어른도 예하고 밖에 나가서 했고. 그 전에 아내도 여기서 하면 안된다고 했고. 자기가 뭐 듣지도 않고 했어요. 그러고 난 뒤에 대전쯤 내릴 때 되니까 옆에 있는 큰 딸이 “아저씨 말 그리 하면 안 되죠?” “뭘 그리 하면 안 되는데?” “죄송하지만 밖에 나가서 휴대폰 좀 해주실렵니까?” 플리즈(please)예요. 죄송하지만. 누가 죄송한대요? 옆에 떠든 사람이 죄송하지. 그 아가씨는 뭐만 생각하냐면 우리 한 가족인데 우리 가족을 건드린 그것이 기분 나쁜 거예요. 그것을 만회해 볼려고 하는 거예요. 남이야 시끄럽든지 말든지. 그저 내 가족, 우리 아버지를 왜 건드리냐 이 말이거든요. 자존심 상한다 이거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했어요. “우리 서로 상쇄합시다.” 당신 시끄러운 것 하고. 지금 곧 나가야 하는데. 대전 도착합니다 하고 방송 나왔는데 어디서 이야기 할데가 없어서. 진작 이야기 했으면 이야기 하겠는데 대전 다와서 뿔따구 나서 그렇게 이야기 해요. 아, 이것은 가족이 진리구나. 가족 앞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르는구나.
그 맏아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끊어버릴 때 인간은 살 이유가 애초부터 잘못되었다. 설정이 잘못되어 있는 거예요. 내가 사는 이유는 내가 낳은 자식을 위해서 올인한다 라는 설정 자체가 무엇을 가리게 했느냐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와서 살해 당했다는 그 사실을 가리게 만드는 우리 육적인 본성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 그들만 언약속의 예루살렘이 되게 하십니다. 말씀 속에서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올인 하는 것, 이게 만약 큰 아들이 애를 먹이면 둘째 아들에게 올인 하게 합니다. 하여튼 우리의 존재 가치를 다 쏟아 놓는 그곳에다가 주님께서 건드려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죽었다는 사실을 뽑아내는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방주 안에 이미 살고 있다는, 말씀 속에 살고 있는 언약 백성인 것을 깨우쳐 주는 식으로 작업하겠다는, 이것이 주님께서 예언하신, 예고하신 그 예언입니다. 스가랴서를 통해서.
그러면 12절, 13절부터 어떻게 하느냐. 이것도 따로 하고 저것도 따로 하고. 따로 하는 것이 뭐냐 하면 그 당시에는, 옛날에는 회개를 그 대표가 했어요. 제사장들이 그 일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금식하고 있고 제사장들이 대표를 한 이유가 회개한 이유를, 그들이 언약을 알기 때문에 대표로 했는데 나중에는 모든 사람이 다 언약을 알게 될 것이고, 십자가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사항이고, 따라서 그 때는 각자각자 중요시 여기고 인생의 목표가 개인 개인마다 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자식에다 올인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뉴질랜드 사업에 올인하는, 하여튼 뭐 사람마다 자기가 올인하는 것이 있을 거예요. 모든 게. 어떤 사람은 자기 몸에다 올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거는 일방적으로 목사님이 이런 것은 회개합시다 이럴 필요가 없어요. 각자각자 본인이 최고로 귀하게 여기는 것, 제일 자기 자존심과 명예를 뽑아내는, 마지막 남겨 놓은 어떤 의미가 있을 거예요. 그 의미와 하나님의 죽으심을 바꿔치기 당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울지 않더라도 회개하는 예루살렘 주민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맏아들 죽었다고 애곡하듯이 실제로 그 죽음 내부에 우리의 존재 의미가 그저 맏아들 죽었다고 희생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서 같이 죽고 하나님 때문에 같이 사는 그 천국 백성의 의미가 있음을 언약적으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