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2:15)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다툼만 하게 되고(14절), 듣는 사람들을 망하게 할 것(14절)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매사에 그렇듯이 진리를 전하는 자에게도 분별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말씀들을 올바르게 <나누고 구분> 하는 일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그 말씀이 유대인에게 하신 말씀인지, 이방인에게 하신 말씀인지...
또는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인지, 교회에게 하신 말씀인지...
또는 개인에게 하신 말씀인지, 회중에게 하신 말씀인지...
직분자에게 하신 말씀인지, 일반 신자에게 하신 말씀인지...
구분해야 되는 데, 구분하지 못하게 되면 괜히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언쟁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논쟁은 망령되고 헛된 말이라고 했고, 심지어 악성 종양이라고 까지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부활>을 예로 들었습니다.
당시에 후메내오와 빌레도 같은 사람들은 <부활은 이미 지나갔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렸다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면, 더 이상 믿어 봤자 소용이 없을 테니까 믿을 필요가 없겠지요.
아마도 디모데는 바울의 교훈을 따라 부활은 앞으로 있을 것이며, 소망을 가지고 살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옥신각신, 갑론을박, 좌충우돌 하는 사이에, 듣는 자들의 믿음이 얼마나 많이 흔들리고, 무너져 내렸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해로운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부활 문제 뿐만 아니라 많은 문제에 있어서 분별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논쟁의 분야가 무엇인지, 범위가 어디까지 인지, 시점이 어디까지 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 언약에 관계된 것이냐 새 언약에 관계된 것이냐?
율법이냐 복음이냐? 행위냐 믿음이냐? 이스라엘이냐 교회냐? ...
육신적 의미냐? 영적 의미냐? 육적 할례냐 영적 할례냐?
여기서 일일히 다 열거할 수 없지만...
<육적 할례를 말하는 것이냐 영적 할례를 말하는 것이냐?>를 예로 본다면,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롬2:27-29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이 말씀을 보면, 표면적(육신) 할례를 받은 자는 유대인이 아니고,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라야 유대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서도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빌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할례는 항상 <이면적(마음의) 할례>만을 뜻하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때로는 육신의 할례를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빌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행16:3 "바울이 떠나고자 할 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여기 나오는 바울이 받았다는 할례, 디모데에게 주었다는 할례...이것들은 이면적(마음의) 할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육신의 할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받아야 돼? 안받아야 돼? 하면서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신의 할례라면 받을 필요가 없지만, 마음의 할례라면 받아야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할례를 의미하는 지를 먼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것입니다.
그것은 문맥 전후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구원(소테리아)이라는 단어를 많이 언급했습니다.
대 부분, 우리가 알고 있듯이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죄와 그 형벌로부터 받는 구원, 즉 영적 구원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약 성경에 나오는 모든 구원을 <영적인 구원>만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행27:20 "여러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소테리아)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행27:34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여기에 나오는 <구원>은 영적 구원이 아니라, 풍랑으로 부터의 구원, 즉 육적인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같은 단어일지라도 그것이 육신적인 것을 말하는 지, 영적인 것을 말하는 지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해석학자들은 성경을 해석할 때는 먼저 문자적, 또는 역사적인 해석을 할 것을 권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을 때, 도무지 뜻이 통하지 않는다면, 영적인 해석을 시도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면, 문자적 해석 우선주의인 것입니다.
문자적 해석은 일차로 통과하는 관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되면 영적인 해석도 시도해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순서를 밟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모두 육신적이며,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도 영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것도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쪽을 부인하고, 다른 한 쪽만 인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성경해석에도 <균형>이 필요합니다.
아무튼 잘 분별하는 것은 필요하고, 또 중요합니다.
아무쪼록 우리 주님께서 여기 있는 모든 분들에게 말씀에 대한 지혜와 분별력을 주시옵길 ...
첫댓글 수도 듣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