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돌이지만 무한사랑 보내"
25년간 돌에 혼 심어온 정상기씨
석가탑과 다보탑을 조각한 것으로 알려진 전설적 석공 아사달(阿斯達)은 아니지만 속리산으로 가는 초입에서 석재공장을 운영하는 정상기(76, 보은 강신)씨가 석재에 빠진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다.
공직에 입문해 부면장까지 지내다 박봉의 월급으로 먹고 살기 힘들어 농업에 투신해 농사꾼으로 자리를 완전히 굳힐 즈음 석재공장을 인수하게 됐다.
이 것, 저 것 하다 안되면 농사나 짓지 뭐 하고 대드는 것이 농업인 것과 달리 석재는 뭘 좀 알고 대들어야 하는데 아주 문외한이었던 그가 석재에 입문한 것을 돌이켜 보고는 자기가 생각해봐도 그런지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공무원을 박차고 나와 석재공장에 안착해 나름 성공한 기업인으로 꼽히고 있는 그는 투자대비 이익으로만 돌을 보지 않고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석재이기 때문에 지역과의 사랑도 석재로 나누고 있다.
지역의 크고 작은 기념비와 기념탑은 그의 석재공장을 거쳐 간 것이 부지기수다.
17일 제막식을 갖는 이천만원 상당의 삼산초등학교 100주년 기념탑도 어려운 학창시절 친구들과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전당이 돼준 모교에 대한 아낌없는 헌정이다.
큰 아들에게 석재업을 대물림 했지만 아직도 돌과 사랑을 나누고 있는 그의 돌 사랑얘기 속으로 빠져보자.

▲ 17일 제막식을 하는 삼산초등학교 100주년 기념탑을 살펴보고 있는 정상기씨.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모교에 기증하는 것이라 더욱 정성을 쏟아 제작했다.
◆석재 한 번 해봐
더 나은 삶을 위해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을 꿈꾸고 있지만 새로운 분야에 발을 담근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꿈에 그치는 것이 대부분이다.
전혀 다른 분야로 들어서는 것이 그만큼 위험부담이 따르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고 견습을 거치는 등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한 후에 겨우 담그기도 하지만 도중에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상사에게 당하고 부하 직원에게 치이는 등 직장인들이 애환을 겪어도 쉽게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연명을 하는 것이 대부분 아닌가.
정상기씨가 석재업에 손을 댄 것이 이같은 준비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은 무모한 도전으로 밖에 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박봉이지만 공무원, 그것도 부면장으로 잘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 충북도가 시행하는 5급 공무원 공채시험에 합격, 회인면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정상기씨는 보은읍, 속리산면, 내북면 등에서 공무원을 하다 1983년 내북면 부면장을 끝으로 과감하게 공직의 옷을 벗었다.
워낙 없이 살아 지식들이 돈이 없어 학업을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박봉을 쪼개 저축하며 미래를 설계했다.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임야를 매입해 초지를 조성하고 한우 20마리를 사육하고 또 사과 과수원을 조성해 운영하는 등 몸을 바지런히 움직였다. 모아지는 재미를 느끼고 있을 즈음 공직에서 퇴직하고 84년 석재사를 인수하게 된 것이다.
제2의 인생항로를 농업이 아니라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석재사로 결정한 것은 아주 우연하게 다가왔다. 친구의 소개로 석재사를 운영하게 됐는데 그 당시만 해도 보은에는 석재사가 2개 밖에 없어 잘 만 하면 괜찮겠다 싶었지만 비용이 많이 들어 부가 따라야 석물 등을 할 수가 있어 일거리가 많지 않았던 때여서 자칫하면 실패할 수도 있는 위험부담을 안고 있었다.
잘하던 농사를 접고 덜컥 일을 저지른 그가 눈앞이 캄캄한 현실로 돌아온 것은 2명의 인부가 있던 석재사를 완전 인수하고 나서다.
돌을 깨는 장비를 '고야'라고 하는데 고야가 뭔지도 아무것도 모르니 모든 게 설을 수밖에 없었고 지역에 학연이 있고 또 공직에 있었기 때문에 지인들이 많아 일거리가 들어오긴 했지만 공치는 날이 더 많았다.
인부를 살리고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사업을 잘 꾸려가야 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상주, 보령, 익산 등 돌을 캐는 산이라면 전국을 다 찾아다녔다. 돌의 재질에 대해서도 배우고 인부들에게 작업과정도 배우고 또 비문을 파기 위해 서체를 받아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그렇게 차츰 차츰 석재사의 만능이 되어갔고 정상기 표 석재에 대한 이름을 얻기 시작하면도 주문도 많이 늘고 사업이 번성해갔다.
◆기증한 기념비 만해도 엄청나
축협 본점, 보은농협 보은지점 바닥, 지금의 연세병원, 태성건설 등 건물 외벽에 화강암을 붙이거나 계단공사 등 석재가 들어가는 공정에 참여했으며 보은군의회 건물에 붙은 현판도 그의 작품이다.
지금은 오는 22일 청사 준공식을 갖는 보은군 선거관리위원회의 상징표어가 될 천하우락재선(天下優樂在選 : 하늘 아래 근심과 즐거움은 바로 선거에 있다) 비를 제작 중이다.
그렇게 석재로 이름을 얻기 시작하자 그는 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돌을 가지고 봉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북면 이원리에 있는 석성국 의사 묘지의 석물 기증이 1호다.
묘지 둘레석과 망두 등 석물 일체로 시가로 따지면 1천500만원 대에 이르지만 그는 일제강점기 나라를 위해 순국한 의사를 추도하는 마음으로 아낌없이 석물을 기증했다.
이를 시작으로 보은중학교 건물 앞 화단에 설치된 '조국은 너희를 믿노라' 라는 문구의 석물을 기증했고 보은자영고 교정에 입지역행(立地力行) 석물을 세웠고, 삼산초등학교 교정에 교가탑을 설치했으며, 동광초등학교 교가탑, 지금은 폐교돼 인라인롤러 구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학림초등학교 교가탑을 설치했다.
내북면 봉황리 이승칠 의사 의결비와 제단, 보은중학교 교문에 화강암을 붙이고 학교 문패를 기증하고 우회도로 소공원에 우리는 봉사한다라는 라이온스 탑을 기증 설치하고, 보은읍 교사리 춘수골 한천교씨 송덕비를 기증하고 보은읍 교사1리 향교골 마을자랑비, 산외면 신정리 장승 제단 일체를 기증했다.
그리고 삼산초등학교 100주년 기념탑을 기증한 것이다. 금액으로 치자면 어림짐작으로 5천만원대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특히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설치된 탑은 구하기도 쉽지 않은 자연석으로 설치했다. 아주 고가에 판매도 할 수 있는 규모이지만 그는 자신이 졸업한 모교에 기꺼이 기증한 것이다.
그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도 않고 가진 게 있다면 단 하나 돌이기 때문에 돌로 사람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니까 좋다"고 말했다.
그의 이같은 행동에 주민들과 동문회에서는 감사패와 공로패로 고마움을 전하지만 오히려 주민들이 주는 공로패 감사패를 부담스러워 할 정도로 겸손하다.
"아들도 아버지에게
직접 돌을 다루는 석공의 인생을 배운다"
◆늦은 나이에 풍수지리학 공부
지지리도 가난했던 그의 가족들은 탄부면 구암리에서 살다가 아버지의 고향 경북 김천으로 갔다가 해방되기 전 다시 보은(향교골)으로 돌아와 온전한 보은인으로 살았다.
동기들보다 최고 4살 많은 나이에 초등학교를 다녔다. 가정형편으로 봐서는 학교도 못갈 처지였지만 고등학교까지 간 것이도 감지덕지였다. 월사금(月謝金 : 다달이 내던 수업료)을 내지 못해 수업 도중 쫓겨나 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등 눈물겨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래도 성적은 반에서 1, 2등을 다툴 정도로 우수했던 그는 "대학진학을 하고 싶었지만 대학은 꿈도 꾸지 못할 처지여서 고등학교 졸업장이라도 받게 해준 부모님이 너무 감사하다"며 "그 덕분에 공무원 밥이라도 먹었을 수 있었고 지금 이렇게 머리를 써가며 사업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고 작은 것에 만족해했다.
공부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있던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업과 연관이 있는 청주 서원대학교가 개설한 평생교육을 통해 4년간 풍수지리학을 공부했다.
좌향, 입관,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 등 풍수를 볼 정도의 능력이 된다. 묘지에 쓰이는 석물을 주문해서 설치할 때 풍수적으로 상황을 분석해 설치하기도 하는 그는 식품공학과를 졸업한 아들에게 사업자를 넘기고 뒤로 물러나기 위해 하나하나 가르치며 대물림을 시작했다.
그래도 25년간 생명이 없는 돌에 혼을 불어넣어온 그이기 때문에 아들도 아버지에게서 직접 돌을 다루는 등 석공의 인생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 보은군 선거관리위원회 청사를 준공하면서 상징물이 될 비석을 제작하고 있는 가운데 정상기씨(가운데)가 아들(왼쪽)과 함께 돌에 글씨 새기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10톤이 넘는 무게가 주는 중압감에 선관위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돌 일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수년 간 연마에 연마를 계속해야 하는 등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아들도 그것을 알기에 서슴없이 아버지의 길로 들어섰고 빛날 작품을 만들기 위해 돌과 씨름하는 일을 즐거워하는 것을 보니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란 느낌이 강하게 전달됐다.
자기가 하는 일에 자긍심을 갖는 두 부자의 즐거운 인생을 탐닉하는 시간이었다.
첫댓글 도성이 얼굴좀 잘나오게 하지 ㅋㅋ 살짝 가린 느낌이 드는데ㅋㅋ
기사보고 연락했더니 찍는줄도 몰랐다는데 ㅋㅋ 암튼 보은사람들에서 2면을 활용해서 썻더라.. 대박이야
도성이 얼굴이 안보여 ㅋㅋ
^ㅇ^ 제수씨는 이기사 보셨나??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