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꽃상여에 대한 추억
연 전 캄보이아 여행길에
그들의 장례모습을 본 적이 있다.
악대를 앞 세운 행렬은 음악연주에 춤추는 사람에
완전히 축제분위기였다.
중국 사천성 여행 시 목격한
시신을 토막내 독수리에게 던지는 조장은
보기에 너무 끔직했다.
장례 모습은 지역의 환경,
숭배하는 종교, 사생관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망자를 보내면서
저 세상에서 망자의 편안한 영면을 바라는
마음은 세상 어디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 어렸을 적만 해도 마을마다
마을 호젓한 곳에 상여집이 있었다.
어렸을 적에 상여집이 있는 곳을 지날 때는
무서워서 멀리 돌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초상이 나면 꽃상여에
망자를 태워서 저 세상으로 배웅을 했다.
상여는 망자가 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기 전
잠시 잠간 머무는 공간이다.
상여는 화려 화사하다.
옛 여인들은 꽃가마 타고 시집와서
이 세상을 하직할 제는 꽃상여 타고 저승으로의 여행을 떠났다
꿈에 상여를 보면 재수가 좋다거나
좋은 일이 생긴다는 이야기가 있듯
우리에게 상여는 두려움의 존재보다는
친근하고 신성한 존재였다.
지방에 따라,
상여를 만드는 장인의 솜씨에 따라 상여의 꾸밈은 다르다.
공통점은 화려를 극하는 원색을 사용하여 눈부시게 치장을 하고
망자를 저승으로 안전하게 편하게 모시고, 영혼을 수호하기 위해
상여의 전후 좌우에 꼭두를 장식하였다.
상여를 자세히 살펴보라.
여러 가지 인물상과 신령한 동물상이 상여를 장식하고 있으니,
이들을 꼭두라고 한다.
<꼭두>는 가장 빠른 시간이나 가장 윗부분을 뜻한다.
또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사전적 의미는 그러하고 간단히 말하면
<꼭두>는 상여를 장식하는 나무로 만든 형상으로
망자를 이승에서 저승으로 안전하게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꼭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인물상 꼭두와 동물싱 꼭두다.
꼭두는 저 마다 깊은 의미와 역할을 갖고 있다.
동물꼭두의 대표격인 용과 봉황은 신령스러운 동물이다.
봉황의 날개와 볏이 불꽃처럼 하늘로 날아가 영혼을 인도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신령스러운 봉황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떠나는
망자의 영혼을 안전하게 지켜준다고 여기기도 했다.
봉황을 조각한 봉황꼭두는 상여의 앞뒤에 장식되었다.
용은 어떤 역할을 할까.
용이 새겨진 용수판을 상여에 장식하면
나쁜 기운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상여의 앞뒷면을 장식하는 용수판은
청룡과 황룡이 서로 뒤엉켜 있는 형상이다.
이 용들의 엄정한 위엄으로 망자의 앞 길을 막는
잡귀를 물리친다는 상징으로 상여의 앞뒤에 장식했으리라.
상여를 장식하는 꼭두인물상은 또 어떤 역할을 할까?
꼭두 인물상은 사람을 닮았지만
인간이 아닌 초월적 세계와 연관된 이미지다.
곧 인간 세상과 초월적 세계를 연결해주는 존재인 것이다.
상여에 장식된 꼭두인물상은 네 가지 역할을 한다고 한다.
첫째, 저승으로 건너가는 여행자를 안내하는 일을 한다.
둘째, 캄캄한 길을 갈 때 주위의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
셋째, 여행 중 거추장스러운 허드렛일을 믿음직스럽게 해낸다.
넷째, 마지막으로 저 세상으로 떠나는 영혼을 달래주고 즐겁게 해준다.
이러한 임무를 하는 네 종류의 꼭두들은
저마다 독특한 몸짓이나 얼굴 표정을 하고 있다.
길 안내를 하는 꼭두들은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길을 안내하기 위해 용이나 말을 타고 있다.
사악한 기운을 물리쳐주는 꼭두들은 초월적인 힘을 과시하기 위해
대부분 험악한 표정을 짓거나 무서운 무기를 들고 있다.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꼭두들은 힘든 일, 귀찮은 일도 마다않는다.
그들의 얼굴은 맑고 밝은 표정이 담겨 있다.
꼭두들 중에서 가장 즐거운 형상은 여행자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꼭두들이다.
이들은 여행자들의 마음으로부터 슬픔을 걷어내기 위해
묘기를 부리거나 악기를 연주하면서 망자를 달래준다.
사람이 죽으면 초혼을 한다.
죽음이 확인되면 지붕 꼭대기에 사람이 올라 가
고인이 평소 입던 웃옷을 들고 북쪽을 향하여 옷을 흔들며
망자의 이름을 부르며
" 000복!, 000복!, 000복!"하고
세번 부르는 절차가 그 것이다.
옛 풍습에 상주는 죄인이다.
그래서 짚토마에 무릎꿇고 앉아야하고,
삼베로 제조한 굴건제복을 하고
대지팡이를 집고 문상을 받는다.
지팡이에도 격식이 있다.
부친상에는 대지팡이요, 모친상에는 오동나무 지팡이였다.
아버지는 자식을 기르느라 속이 썩어 속이 비어서 대지팡이요
어머니는 자식들이 애를 태워 속이 차서 오동나무 지팡이였다.
보통은 3일장을 하지만
사는 가세에 따라 5일장 7일장을 하기도 하였다.
상여는 12명, 혹은 24명이 멘다.
상여의 행렬은 앞에서부터
악사, 명정, 만장기, 상여, 상주, 복재기, 조객 순이다.
상여꾼들은 고장 특유의 선소리를 주고받으며
망자가 영원히 잠들 장지로 나아간다.
요령을 든 인도자가 선소리를 구슬프게 선창하면
상여를 멘 상여꾼들이 구슬프게 후렴을 한다.
요령꾼의 선소리는 망자를 추억하고,
지친을 떠나보내는 상주들을 위로하고,
인생의 허무함을 읊는 서사시요,
한 편의 장중한 음악이다.
선소리를 몇 가지 들어보자.
먼저 전남 나주지방의 상여소리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데
어디 죽고 싶은 인생이 있고,
저승길 가고 싶어 가겠는가.
죽음에 대한 원망과 슬픔이 짙게 배여있다.
“어널! 어널! 어허이,어화널”
“어널! 어널! 어허이,어화널”
“못 가겠네, 못 가겠네, 고명당 하직하고 못가겠네”
“어널! 어널! 어허이,어화널”
“이제 가면 언제 올라나, 언제 올 줄 모르겠소!”
“어널! 어널! 어허이,어화널”
“무정하네,무정하네, 염라대왕이 무정하네!”
“어널! 어널! 어허이,어헝이, 어화널”
다음은 경남 고성지방의 선소리다.
가사가 좀은 낭만적이고 시적이다.
죽음에 대한 체념과 담담한 수렴을 가사에 담고 있다.
“어화널! 어화널! 어이가리 넘차, 어화널!”
“어호! 어호! 어이가리 넘차, 어호”
“뒷동산의 접동새야, 너도 나를 기다리나!”
“어호! 어호! 어이가리 넘차, 어호”
“뒷동산의 접동새야, 너도 나를 기다리나!”
“어호! 어호! 어이가리 넘차, 어호”
“두견 접동아 우지마라, 나도 너를 찾아간다!”
“어호! 어호! 어이가리 넘차, 어호”
이별은 슬픈 것이다.
그것도 영원한 이별인 초상이야 말할 것 있는가.
상여꾼들이 주고 받는 구슬픈 선소리에 맞춰
출령대며 나아가는 꽃상여 행렬을 보노라면
저절로 비감하여 눈물이 난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죽어서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인가?
상여는 길 떠나기 전 먼저 자기가 살던 집에
머리 숙여 마지막 인사를 한다.
아! 진정 마지막인가 하는 생각에 상주들의 슬픔은 극에 달한다.
곡소리가 집 안팎에 낭자하다.
집을 한 바퀴돌아 인사를 한 후 정든 집을 이별한다.
상여행렬의 대장은 요령잡이다.
상여의 진퇴, 행렬의 속도, 등 모든 것을 결정한다.
요령잡이의 상여소리는 구성지고 구슬프다.
“말없이 소리없이 떠나는 님은 어디로 가나
북망산천이 멀다해도 대문 밖에 저승이다
산을 넘고 물을건너 산촌으로 들어가니 슬프기 한이없다.
산절로 수절을 하니 산수간에 나도 절로
인생에 마지막 길이 허무하기 짝이 없다.
이팔청춘 소년들아 내이말을 들어봐라
늙었다고 웃지말고 망령이라 웃지마라
이내 이몸 넑어지면 싹이나나
움이나나 죽어지면 그만이다.“
상여가 장지를 향하여 가는 동안
미처 상가를 찾지 못한 빈객, 조객은 상여뒤를 따라간다.
상여는 망인이 살아생전 친히 지내던 사람의 집앞이나
자기 소유 전답의 마지막을 지나칠 때 잠시 쉬는데
이때 길거리에서 제를 올리고,
빈객 조객은 마지막으로 문상을 한다.
바로 노제다.
망자가 차마 고향 산천,
사랑하는 처자식을 두고
떠나지 못하겠다는 듯
상여가 가다가다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요령꾼의 구슬픈 상여소리가 늘어진다.
그러면 사위나, 망자의 친구 가
망자의 저승길 노자가 든 봉투를 놓아준다.
그제야 마지못한듯 상여는 다시 움직인다.
요령꾼은 상갓집의 가세와 상주들을 가늠하여
망인의 노잣돈을 상주들에게 뜯는다.
이는 슬픈 상례중에도 상주와 망인을 위로하는 놀이요,
이렇게 모아진 돈은 대개 마을 청년회 등의 공동자금이 된다.
가기 싫어도, 진정 가기 싫어도
한번 떠난 저승길은 되돌릴 수 없는 것.
요령꾼의 소리는
상여가 망자의 유택에 가까워 갈수록 구슬퍼진다.
“여보시오 벗님네야 이내말씀 들어보소
한두 사람이 밀지라도 수십 명이 미는 듯이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는 날을 일러주게
어제오늘 성한 몸이 저녁나절 병이 들어
인삼녹용 약을 쓰니 약덕이나 입을 손가
무인 으니 냉수로다 혼미하여 나 죽무인 불러
굿을 하니 굿 덕이나 입을 손가
맹인 불러 경 읽으니 경덕이나 입을 손가
실낱같은 이내몸이 태산 갇은 병이 들어 부르나니
어머니요 찾으니 냉수로다 혼미하여 나 죽겠네
정신차려 오나 오는 날을 일러주게
우리인생 한번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살아생전 놀고 가세 노세 노세 젊어 노세
늙어 병들면 못 노나니
인생 일장춘몽 아니 놀지 못하리라.“
망자의 꽃상여 전송은 딱 유택까지다.
지친도, 친구도 딱 유택 앞 까지만 동행이다.
저승길엔 동행이 없다.
홀로 왔다 홀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마나 먼 저승 길을 홀로 떠나야 한다.
모든 것 내려놓고 빈손으로 간다.
살아서 그토록 쥐고자 했던 부와 명예가 무슨 소용인가?
모두가 티끌이요, 바람인 것을.
세상사 아귀다툼이 참으로 가소롭지 않은가?
우리 세대는
마지막 여행을 꽃상여로 호사를 누리기는 가능치 않다.
시골에 간들 꽃상여가 아직 있는 마을도 몇 곳이나 있을지?
마을에 나이든 노인네들 뿐이니
상여를 멜 장정도,
망자와의 별리가 아쉬워 만장 한 장 보낼 사람도,
상여를 이끌 요령꾼도 없다.
세월 앞에 영원한 것은 없다.
아름답던 옛 풍습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장례식장이 새로 생겨났고
장레지도사란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고
상조회사가 호황이다.
망자가 한 세상 살던 보금자리서 상례를 치르지도 않는다.
상제는 굴건 제복 버리고 신사복에
웃음으로 문상객을 맞고, 배웅한다.
꽃상여는 이제 박물관이나 가야 볼 수 있고
전통장례는 무형문화재로 박제되어
구경거리로 공연되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시대의 변화는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법!
할아버지, 아버지가
꽃상여 타고 마지막으로 산 고개 넘어 가시던
그 모습은 기억속의 향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