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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진 전쟁(A Distant War) : 전쟁의 기억은 박물관에서만 남아 있을 뿐이다.
1. 무리지어 달리는 것은 아름답다.
아름답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지금쯤 우리 산과 들에 군락으로 허드레 피어 있는 진달래꽃이 그러할 것이다. 꽃은 무리지어야 더욱 보기가 좋다. 목축시대에는 양과 같은 가축의 수가 많아야 아름답다고 했다. 아니 아름답기보다는 풍요로움의 기쁨일 것이다. 그리하여 한자의 美를 破字하면 ‘羊이 많은 큰 大’자로 표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이 많으면 아름다울까? 가령 광화문광장을 꽉 매운 시위대를 보거나 중공군의 인해전술 무리를 생각할 때 그러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베트남 사이공(호치민)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일찍, 호텔 레스토랑에서 문득 길 아래로 눈길을 돌렸을 때, 도로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부대의 끝이 없이 달리는 출근행렬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마치 메뚜기무리들이 누군가의 큰 신호에 따라 물결치듯 똑 바로, 혹은 왼쪽, 오른쪽으로 달리는 모습은 대형오케스트라연주를 방불케 했다. 혼자서 혹은 둘, 셋이서 헤드기어와 마스크를 쓰고 달리는 모습은 장관이다. 놀라운 것은 퇴근 시간에 뒷좌석에서 엄마가 젖먹이 아이에게 우유 통을 물리고 있고, 아빠는 아주 편안하게 운행하는 모습은 가족이 나들이 하는 안락한 승용차 풍경 같았다. 중앙아시아 초원을 질주하는 우리 옛 조상들의 말달리는 모습이 저러하지 않았을까? 비가 올 때에는 더욱 점입가경이라고 한다. 달리던 오토바이 부대들이 길 가장자리로 정거한 다음 우비를 꺼내 뒤 짚어 쓰고 달리는 풍경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런 말이 떠올랐다. ‘인생의 기쁨과 스릴, 그 이름은 오토바이질주, 인생의 슬픔, 그 이름은 전쟁.’이라는 표현이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을까? 그러나 그들에게 전쟁은 먼 곳에 기억으로만 있고, 그것도 이제는 박물관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1975년 4월30일 사이공을 함락하여 통일을 이룬 후, 사이공시내 중심 미국 CIA건물 자리에 1975년 9월 공산당정부는 ‘미국과 월남정부범죄전시장‘이란 이름으로 일방적인 전쟁참혹 역사를 전시하였다. 그 후 1990년 이름을 조금 순화하여 ’전쟁과 침략 범죄전시장‘으로 바꾸었다가, 미국과 외교관계를 복원한 후 1995년에는 ‘전쟁유물박물관(War Remnant Museum)’으로 개명한 것을 보면, 그간의 베트남의 대외관계 변천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이 일으킨 전쟁은 어떤 형태이던 야만적이고 참혹할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의 역사는 곧 전쟁 역사였다. 우리의 고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건국한 뒤 기원전 11년에 한나라에 복속되어 938년에 독립하였지만, 1406년에 다시 명나라의 속국이 되었고 1428년에 독립하였다. 그 후 1800년대 프랑스식민지로 전락하여 2차 대전 때 까지 통치를 받았다. 종전 후 프랑스는 다시 군대를 파견하여 호찌민이 이끄는 비엣민과 남북으로 대립, 분단되어 프랑스와 전쟁을 치렀다. 1964년부터 1975년까지는 미국과 전쟁을 치렀고, 통일 이후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즈 그리고 중국과 국경분쟁으로 마지막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바쁜 벌들에게는 슬퍼할 시간이 없다는 말과 같이, 일상으로 돌아가 치열하게 생활전선에 몰입하고 있다. 오토바이부대들의 모습이 상징하듯 그들은 정말 활기차고 생동감이 넘치는 자본주의정신의 경제주체가 되었고 베트남의 국부와 위상도 높아졌다. 통일 후 그들에게 아쉽게도 사라진 2가지 생활모습은 여자들의 고혹적인 아오자이가 없어진 것이고, 이웃사이에 훈훈한 인정을 서로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라고 한다. 자본주의의 밝고 어두운 양면을 그들이 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2. 동남아 가장 긴 강 메콩강 부근풍경
인류문명의 역사는 강 부근에서 시작되었다. 강은 생명의 젓줄이자 도시를 형성하여 고유문화를 창조하게 한 근원이었다. 메콩강은 티베트 고원빙하 녹은 물에서 발원하여, 중국의 운남성(雲南省), 미얀마-라오스-태국-캄보디아-베트남을 지나 남중국해로 흐르는 4천km가 넘는 황토색갈의 긴 강이다. 메콩강은 베트남 영토에 들어와서 다른 지류로 흩어지거나 합하면서 거대한 메콩강 삼각주를 형성하며 대양으로 나가 바다가 된다. 따라서 이 강은 베트남에 오면 강이라기보다는 바다라고 불러도 좋은 것이, 최대 강폭이 1Km가 넘는 곳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인도차이나반도의 5개 국가와 중국이 공유하는 이 강이 국제분쟁의 소용돌이에 돌입할 수 있는 것이 문제이다. 1986년부터 중국이 강 상류에 댐을 만들어 수력발전을 시작하였고 라오스 등에서도 이런 발전계획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댐 건설은 어류 등 수자원과 생태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4개국이 ‘메콩강 위원회’를 만들어 조정하려고 하나 중국이 포함되지 않아 실효가 의문시 된다. 최근에는 수력발전보다 ‘에코관광’으로 경제성을 높이는 문제도 토론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의 존재자체가 모든 면에서 이웃국가들에게 위협이 되고 있다.
그러나 메콩강은 이런 인간들의 복잡한 사정을 모르는 채 유유히 바다로 흐르고 있다. 선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노아의 홍수 때의 강물을 연상시킨다. 우리는 어떤 작은 섬의 과일 농장을 방문하여 열대과일을 시식하기도 하고, 코코넛 깨는 시연을 보기도 했다. 그리고 전통음악연주와 노래도 듣고 말미에는 아리랑합창도 감상했다. 마음 같아서는 가는 곳 마다 그들이 힘겹게 생산한 상품을 구매하여 매출을 올려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그럴 수 없어 유감이었다. 섬이지만 맹그로브 숲 사이로 흐르는 갯벌과도 같은 계곡물은 색다른 풍경이었다. 그 계곡과 같은 시내 사이로 앞뒤에서 사공들이 노를 젓는 쪽배를 타고 앉아있기란 쉽지 않은 경험이었다. 두 사람이 가운데 앉아서 체중의 균형을 잡지 않으면 바로 뒤 짚어 지기 때문이다. 다행이 그곳에는 악어가 서식하지 않기에 그리 위험하지는 않았다. 점심은 ‘피닉스 섬’의 관광전문식당에서 서브하는 ‘코끼리 생선구이’메뉴였다. 물고기머리 모습이 코끼리 코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식당에 들어가니 역겹게 절인 소금냄새가 진동했으나 한참 지나니 그 냄새에 마취가 되었는지 적응이 되었다. 섬에서의 짠 생선구이는 또 다른 경험이었다.
3. 그들의 신앙모습
둘째 날 메콩강 투어를 가기 전에 쌀 주 생산지인 ‘미토’라는 곳에 가서 베트남 최고의 미학적 사원으로 알려진 ‘빈트랑 사원’을 둘러보았다. 한자로는 永長寺이다. 이 사원은 19세기 초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양식을 조화롭게 사용하여 건축하였다고 한다. 경내에 자비로운 부처님의 웃는 坐불이 있고 臥불 그리고 서있는 부처도 있다. 사원 앞에는 예쁜 정원에는 보라색 수련과 이름 모를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고 연못이 있다. 왜 사찰에는 연못이 있을까? 불교연구가에 의하면, ‘연못은 단순한 조경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마음이 맑고 고요하면 삼라만상의 이치를 볼 수 있는 깨침의 경지가 되므로, 사찰의 영지는 수행자들에게 끊임없는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음에 이르기를 묵언으로 촉구하고 있다고 한다.’ 이 사원 안에는 불교 탄압에 항거하여 분신자살(소신공양)한 ‘틱 쿠앙 둑’ 승려의 분신광경의 대형사진과 정부의 부패에 항거하여 분신자살한 7인의 승려사진도 모셔놓고 있다. 이들의 자살이 월남패망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주장도 있어 씁쓸하였다.
셋째 날, 판티엣 초입에서 포사누이 참탑 사원을 들렀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은 기원 후 192년 말레이계통의 참족이 세운 참파왕국의 사원으로, 이들은 인도문명을 받아들여 힌두교 시바 신을 섬겼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2개 사원의 일부는 시바 신과 불의 신을 숭배할 목적으로 세워졌으며, 바다의 안전을 위해 제물을 바쳐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왕국은 한 때 세력을 떨치어 해상무역을 장악할 정도로 강국을 이루었으나, 1832년 베트남왕국에 의해 멸망 되어, 참족은 베트남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였다고 한다. 이곳을 오르는 언덕에는 빨간 꽃들이 더위를 잊은 채 아름답게 피어있고, 언덕위에서 내려 보는 탁 트인 바다와 ‘무이네’의 도시풍경은 압권이었다.
현재의 베트남은 종교자유가 보장되어 세계의 모든 종교가 들어와 있으나,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의 이념으로 인해, 선교나 포교가 금지되어있어 종교의 자유란 형식에 불과한 것이다.
4. 자연과의 교감과 치유
둘째 날 메콩강 투어를 마친 후 다시 사이공으로 돌아와, 스톤마사지를 받아 가뿐한 몸으로, 한국식당에서 오랜만에 한식으로 포만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몸이 여러모로 호사를 받은 날이었다. 그리고 밤사이 ‘판티엣’ 리조트를 향해 어둠속을 달리는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그 덕분에 리조트호텔에 도착하니 딴 세상이었다. 쉼과 치유란 이런 곳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야한다는 이야기가 친구들 입에서 이구동성으로 나왔다. 이곳은 구소련시대부터 러시아인들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는 휴양처였으며, 지금도 많은 러시아인들이 찾는다고 한다. 잘 꾸며진 정원과 긴 모래밭이 있는 해안, 푸른 색깔의 바다, 가까이 있는 골프장, ‘무이네’ 마을의 밤거리 문화 등 거의 모든 것을 갖춘 휴양도시이다. 아직은 가격경쟁력이 있어 공항 등 기반시설을 갖추면 국제적인 휴양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는 유망한 지역으로 여겨졌다. 그 다음 날 11시까지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룸메이트인 조회장은 아침 일찍 카메라를 가지고 해안으로 나가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이번 여행의 절정은 이 날이었다. 판티엣 투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오늘 일정과 저녁은 옵션으로 채워졌다. 점심메뉴는 해안가의 한국식당에서 파인애플 볶음밥이었다. 다른 한국인 투어그룹도 똑 같은 메뉴를 택하는 것을 보니 전문 관광용 식당이다. 사막으로 가기 전에 고깃배들이 오밀조밀하게 정박해 있는 어촌마을에 내려 사진을 찍었다. 한국이 젓갈용 새우와 주꾸미 등 베트남 어류의 주요수출시장이라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드디어 사막으로 가는 지프차로 바꾸어 탔다. 월남전 이후 미군들이 사용하던 차량을 개조하여 ‘US ARMY’란 표식을 그대로 두고 자랑스럽게 영업용으로 운행하는 것을 보니, 미국에 대한 반감이 없는 듯하다. 우리 일행을 태운 지프차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바닷가모래사장을 질주하였다. 그곳 해안은 얼마 전까지 새우젓을 담기 위한 공정이 진행되었던 곳이라 온통 새우젓 찌든 냄새가 바람에 진동하였다. 다시 국도를 따라 사막으로 진입하였다. 거기에서 4륜구동 바이크로 바꾸어 타고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사막질주여행의 스릴을 만끽하였다. 砂丘꼭대기에서 거의 수직에 가깝게 하강할 때에는 아찔하였다. 70이 넘은 노인네들이 즐기는 스포츠로는 무리가 있지만 그런대로 모두들 즐기는 것 같았다. 새벽이나 해질 무렵이면, 빛과 그늘이 생겨서 모래언덕에 분명한 콘트라스트를 이룰 수 있는 배경이 되어, 사진 찍기에는 좋았을 텐데 한낮이라 아쉬웠다. 스마트폰으로 찍은 모래언덕을 확인해보니 빛의 투사 영향인지 어떤 사진은 물속 같이 초록색으로, 다른 사진은 분홍색으로 찍혀 경이로웠다. 사진작가인 조회장이 바쁘게 셔터를 눌러대며 작품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오는 길에 작은 모래사막에서 어린아이들처럼 모래썰매를 타보기도 하였다. 어린 소녀들이 안내하고 운영하는 작은 자영업이라, 그들의 빠른 기업가정신에 놀랐다. 그다음 일정은 ‘요정의 샘’이란 계곡 물속을 맨발로 걷는 체험이었다. 계곡 언덕은 석회석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놀라운 것은 그 석회석 위에 황토층이 남아 있는 모습이다. ‘요정의 샘’이란 그곳지역이 아무리 가물더라도 석회석 바닥에서 나오는 샘물은 그친 적이 없다는 사실에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더운 날씨에 물위를 시원하게 맨발로 걷는 쾌감이 있는 것은 물밑이 황토색모래로 쌓여있기 때문이다. 사막질주 후 친구들과 사모님들이 피곤하셨는지 썰매타기와 계곡걷기에는 몇 사람만 참여하였다. 리조트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한 후 저녁장소로 이동하였다. 점심장소였던 ‘무이네’의 한국식당이었다. 그날 저녁은 옵션으로 씨 푸드 바비큐의 풍성한 성찬이었다. 다양한 해산물인 꽃게, 새우, 조개류, 다금 바리 활어 회와 매운탕, 그리고 하이라이트인 바다가재와 포도주 한 잔으로 미각을 한껏 자극하였다. 여행의 즐거움을 거창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미지의 낯선 곳에서 기억에 남는 문화를 만나기도 하고, 보기도 하고, 미식을 즐기며, 치유와 회복을 할 수 있으면 더 이상 바랄게 없을 것이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라이브카페에서 필리핀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를 맥주한잔으로 감상했다. 한국관광객들을 위해 ‘아파트’를 불러 보도록 계속 요청했으나, 아무도 선 듯 나서지 않았다. 우리의 엘비스 프레슬리인 조회장도 목청이 조절되지 않아 사절하였다. 내심으로 내가 한번 불러 볼까 생각도 했지만 국제적으로 분위기를 망칠 것 같아 참았다.
5. 플랜테이션과 와인캐슬
셋째 날, 포사누이 참탑 사원을 들른 후 와인캐슬을 갔다. 투자규모에 비해 경제성도 떨어지고 관광 상품으로써 매력이 없는 사업으로 보였다. 프랑스가 베트남 식민지 경영시절 호치민의 동쪽지역의 해발 1,500미터 고지대인 ‘달랏’을 휴양지로 선정하여 이곳에서 와인을 만들어냈다. 이곳은 커피생산으로도 유명하다. 이 지역은, 도시의 이름이 들어간 ‘달랏 와인’(Vang Dalat)을 상표로 내건, 베트남 유일의 포도주 생산지가 되었으나 상품성은 없다. 그리하여 이 와인 캐슬은 샌프란시스코 북쪽의 나파밸리(Napa Valley)와인을 소개하고 있다. 결국 자국에서 생산되는 와인이 아니라 외국상품을 소개한다는 것은 난센스이다. 더욱이 와인켈러도 에어컨으로 유지하고 있어 저장환경이 부적합함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넷째 날, 호치민으로 돌아오는 길에 끝없이 펼쳐진 고무나무 농장과 ‘용과’과일 농장을 보았다. 고무나무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러한 나뭇잎 모양이 아니었다. 고무나무에서 추출되는 라텍스의 품질이 우수하여 국가전략산업으로 육성한다고 한다. 따뜻한 기후조건으로 베트남은 커피와 과일생산지일 뿐 아니라 이러한 전략자원이 국부형성에 일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고무나무에서 라텍스채취 작업을 하려면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할 텐데 그들은 과연 어떻게 할까? 대부분의 플랜테이션농업은 노예무역을 기반으로 하였다. 서구열강들이 그들의 식민지에서 사탕수수, 커피, 목화 등을 대량재배하기 위해 아프리카로부터 노동력을 대체할 노예가 필요했다. 이런 비참한 노예무역은, 영국이 증기기관을 발명하여 산업혁명을 시작하면서부터 노동력수요가 감소하게 되자, 멈추게 되었다. 플랜테이션이란 아프리카 흑인들에게는 지옥이었고, 영국의 ‘윌버포스’와 같은 크리스천정치가는 평생을 노예무역폐지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으나 정부를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나 기계가 노동력을 대체하자 노예무역은 스스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일에는 변화의 때가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뒤엎으려는 것은 순리가 아니다. 국도 옆으로 늘어선 가옥들 앞마당에 파파야나무들이 줄지어 있는 풍경이 부러웠다. 그리고 고무농장 앞 길거리에서 찐 강원도 찰옥수수(?) 한 자루는 별미였다.
6. 호치민 시내풍경 단상
긴 버스여행은 호치민에서 멈추었다. 하노이 국수인 ‘분짜’는 중식 메뉴였다. 서울에서 즐겨먹는 ‘베트남 쌀국수’ 유례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프랑스 식민지배시대의 산물이라고 한다. 프랑스인들이 먹다 남은 고기 뼈를 육수로 하여 쌀국수를 만들었다고 한다. 마치 우리의 배고프고 어두웠던 ‘60년대에 부대찌개나 꿀꿀이죽을 연상시켰다. 어느 나라나 경제발전의 단계에서 고난을 겪는 세대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젊은이들의 사고구조는 우리와 달리 건전하다고 한다. 시골에서 도시로 돈 벌기 위해 올라온 많은 젊은이들의 꿈이 고향의 낡고 허술한 집을 헐어버리고 새집을 지어 부모님을 편안하게 모시는 것이라고 한다니, 이 나라의 미래에 희망이 보였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한번 쯤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이야기이다.
복잡한 시내를 짧은 시간에 주마간산으로 돌아보았다. 지금은 ‘통일궁’인 대통령궁을 지나갈 때는 씁쓸한 기분이었다. 종전이 임박할 때 어떤 월남공군 헬기조종사는 하노이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도중에 회항하여 대통령궁에 폭격을 하는 반역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베트남 수산 업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큰 손이 되었다고 한다. 사이공 함락 1주일 전에 미군이 당시 티우대통령의 망명을 돕기 위해 대통령궁 옥상에서 헬기 수송 작전을 전개했을 때, 대통령이 가지고 간 금괴가 2톤가량이라고 하니, 월남의 멸망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과연 우리의 군인들은 어떠한가? 그들이 전시에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을까? 북한의 핵전쟁위협에 노출 되었음에도 대피훈련 한번 하지 않는 정부는 우리국민을 개돼지로 보는 것이 아닐까? 베트남전쟁박물관에서 본 사진 한 장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미군이 터뜨린 네이팜폭탄에 놀라 어린 소녀가 벌거벗은 몸으로 울면서 달려가는 모습이다. 이 사진은 그 당시 AP통신 종군기자가 ‘라이프’지에 게재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으며, 미국의 반전운동을 촉발시킨 기폭제였다. 그런데 이런 현실이 우리의 무방비에 노출된 손자손녀들에게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왜 이 나라 정부는 전쟁에 대비하지 않고 평화무드만 선동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베트남의 건국의 아버지이자 신격화된 우상인 ‘호치민’이 ‘사이공’의 이름으로 바뀌어버린 현실은 우리를 섬뜩하게 한다. 만일 북한이 통일을 한다면 ‘서울’이 ‘김일성’으로 될 수 있음도 가능한 추측이다. 평소 호치민은 검소한 지도자였다고 한다. 그는 독신으로 살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운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1969년 9월2일 통일을 보지 못한 채 그는 사망했다. 평소 그의 유언으로 알려진 몇 가지 부탁한 일들은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 중 시신을 화장하여 베트남 남, 중, 북에 뿌리라는 것과, 전쟁 과부와 고아를 국가가 잘 돌보라는 것, 반대파 정치범들에게 가혹하게 처리하지 말라는 것, 그리고 공산당의 단결과 전쟁 후 국토 재건에 힘쓰라는 것 등으로 알려져 왔다. 그 당시 미국 좌파단체가 발행한 호외에는 호치민의 유언시가 영어로 번역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산들은 영원할 것이며, 우리의 강들도 그러할 것이고, 우리의 인민들도 그러할 것이다. 미군침략자들은 패배할 것이고, 우리는 우리 국가를 재건하여, 열배나 더 아름다운 나라로 만들 것이다.’ 현재의 베트남이 과연 그의 유언대로 이루어졌는지는 각자의 판단이다. 그러나 그의 동상은 베트남 전국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국가의 우상으로 만들어졌다. 공산당 지도자들은 그를 신격화하여야 나라를 쉽게 통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이름으로 국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고, 그들의 이념대로 국가를 경영하는 하는 도구로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건국의 아버지인 이승만 대통령과 경제부국의 초석을 만든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관이나 동상조차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이 부끄럽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에펠이 설계했다는 중앙우체국과 베트남인들만이 미사를 드릴 수 있다는 노트르담 성당, 그리고 우리의 광화문광장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광장도 들러 보았다. 어디를 가도 활기가 넘치는 사람들과 거리의 표정이다. 그들은 전쟁의 기억을 박물관에 유폐시킨 채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공산주의의 위대함을 선전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시내 관광이 끝나고 또 한 번의 마사지를 받았는데, 마치 마사지를 대량으로 제조하는 공장과 같은 분위기였다. 저녁은 강위의 시끌벅적한 선상에서 준비한 소박한 메뉴였다. 바로 야시장을 보러나갔다. 어린아이에서부터 할머니들에 이르기까지 좌판을 목에 걸고 관광객들에게 조잡한 잡화제품을 팔고 있는 모습은 조금 측은하게 보였다. 한편으로는 그 모습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자본주의 맹아를 보는 듯했다. 북한의 ‘장마당’이 혹 저런 풍경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이제 4박5일의 일정이 끝나고 내일 아침엔 공항으로 출발 할 것이다. 호텔에 돌아오니 뭔가 아쉬움이 남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한 번도 우리끼리 술을 마실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소주마시기를 거절하지 않는 三李(광주, 동수, 준하)를 홀아비 방에 불러서 소주 세 팩으로 여행을 결산하였다.
7. 후기 : 우리들 이야기
이번 7반 반창회 부부여행은 여러 가지로 나에게 뜻이 있었다. 우선 이 패키지를 기획한 반장 내외분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처음 만난 사모님들이지만 며칠 함께하니 좋은 이웃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같이 부부관계가 다정하고, 또한 친구들이 마나님들을 너무 깍듯하게 위하는 것에 감동을 받았고, 그러하지 못한 나 스스로 반성을 많이 하였다. 이제 우리의 겉 사람이 후패하게 되는 나이에 와있다. ‘인생은 그 연한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니,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서 가나이다.’라는 지혜자의 말씀을 체험하는 순간에 와있고 우리의 주인에게 돌아갈 때가 그리 멀지 않았다. 그러할지라도 ‘인생의 기쁨, 그 이름은 친구들과 여행하기, 인생의 슬픔, 그 이름은 전쟁’이라고 여기고, 미지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찾아가보는 것이, 남아있는 즐거움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 친구들 모두 건강을 유지해야한다.
베트남전쟁은 우리 경제발전의 한 획이자, 많은 전상자를 초래한 슬픈 역사이기도 하다. 이 전쟁에 참전했던 학철, 양수 두 친구들로부터 재미있지만 슬픈 이야기도 간간이 많이 들었다, 이 두 사람에게는 이번 여행이 남다른 감회를 가져왔을 것이다.
보트피플이 되어 망명했던 난민들이 부를 축적하여 베트남으로 되돌아와 많은 투자를 했다고 한다. 호치민에게 묻고 싶은 의문은 이러하다. ‘왜 전쟁했는지 모르겠네요? 혹 자본주의로 회귀하려고 전쟁을 한 것이 맞나요?’
동행(Fellow Travelers)한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조잡하고 지루한 이야기를 너무 길게 늘어놓아서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