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고향 마을 30리 허(許)에 국보(國寶) 제 187호 봉감모전오층석탑(模塼五層石塔)이 있다.
국보가 없는 군(郡)이 있는 지 모르지만 이 탑이 아니었다면 영양군(英陽郡)에는 하나도 없을 뻔 했다.
사진 : 봉감 석탑일대 원경
안동일대 탑과 물
안동 일대 탑은 대개 물 가에 있다는 글이 있다. 필자가 본 탑이라고는 몇 안 되니 판단할 수 없으나
안동 신세동 탑과 이 봉감석탑은 물가에 있다.
사진 : 봉감 석탑일대 근경
봉감모전오층석탑(模塼五層石塔)
사진 : 국보 제 187호 봉감 모전오층석탑(模塼五層石塔)
소재지 : 경북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 391-5
비례가 균형 잡히고 장중하다. 필자는 서울에서 컸으나, 고향에서 학교 다닌 족형(族兄)들 이야기로는
역사선생님이 이런 훌륭한 유물은 하루 빨리 문화재로 지정되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곤 했단다.
1977년 문화재 정도가 아니라 국보(國寶)로 지정되었고 볼수록 그럴 만 하다.
봉감은 동네 이름, 모전(模塼)은 벽돌(塼)을 본뜸, 석탑(石塔)은 돌탑이다.
곧 돌을 벽돌같이 깎아 만든 오층 탑이란 뜻이다.
돌을 왜 벽돌같이 깎았을까?
탑의 건립시기는 통일신라 시대로 추정한다. 당시 동아시아의 문화중심은
중국으로 곧 신라인이 아는 문명의 전부였다. 문화의 변방은 중심부를
본뜨게 되어 있다. 당시 중국의 중심은 황하 유역으로 나무도 돌도 없는
곳으로 유일한 자재는 흙을 구워 만든 벽돌이었다. 따라서 중국은 벽돌탑-
전탑(塼塔)을 많이 세운다. 이것이 신라 보기에 근사하니 카피 뜨고 싶으나
벽돌이 발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돌로 벽돌탑 흉내를 낸다. 흉내를 내면
처음에는 뭔가 어색하다. 옛날 시골다방에 가면 서울을 어지간히 따라 해도
왠지 촌티가 나는 식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세련된다.
그러면 자랑스러운 고유 문화가 완성되니 예술의 역사는 이런 것이다.
왜 처음부터 독자로 못했느냐 하려면 지금 유럽이나 미국의 문명을
따라 하지 못해 안달하는 짓 그만두고 이야기 해야 한다.
분황사탑 (芬皇寺塔)
탑을 보고 바로 머리에 떠 오르는 것은 경주 분황사 탑이다.
분황사 탑도 모전석탑(模塼五層石塔)이다.
사진 : 분황사탑 국보 30호. 저 유명한 분황사 탑에 못지 않은
아니 더 아름다운 탑이 고향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우리 집안이 이쪽에 옮겨 온 것은 탑 세운 뒤 거의 700년 뒤니
필자의 조상이 세웠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분황사 탑은 지금 3층만 남았으나 원래 9층일 것으로 추정한다.
분황사 탑에는 감실 옆에 인왕상(仁王像), 기단부 귀퉁이에 사자상이 있으나
봉감 탑에는 아무 것도 없다.
사진 : 봉감 석탑 감실(龕室). 원래 부처님이 들어 있었겠으나
오랜 세월 방치되는 동안 누군가 가져가 버렸을 것이다.
봉감탑 정면과 절터
탑만 외로이 있었을 리 없고 탑 뒤로 약간 높은 밭이 절터인 것 같다.
평평한 자연석 2층 기단 위에 탑신은 5층 이다.
아래 쪽에 화강암으로 조각한 문설주(門柱)와 감실(龕室)이 있다.
정교한 돌 조각은 유럽에 많이 있고, 남미 잉카 문명의 돌벽은 회 반죽
하나 쓰지 않았음에도 신용카드 한 장 끼울 수 없을 만큼 치밀하다.
그러나 그곳 돌은 물러서 가공하기 쉬우나 우리나라 돌은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데 그런 질료(質料)를 가지고 대단한 솜씨를 부렸다.
남이포와 선바위
탑에서 약 오리 떨어진 곳에 남이포와 선바위가 있다.
사진 오른 쪽은 일월산에서 발원 한 반변천, 왼 쪽이 필자 마을 앞을
지나 온 청계천이다. 여기서 물이 합쳐 봉감 모전오층석탑 앞을 지나
청송 진보 쪽으로 흘러 간다.
남이포에는 남이 장군과 얽힌 전설이 있다. 옛날 이곳에서 용의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남이 장군이 한칼로 내리쳐 이들을 없애고 남은 흔적이
선바위라고 한다. 남이 장군이 이곳에 왔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우리 나라
도처에 남이가 붙은 지명이 많이 있고 모두 남이 장군이 어쨌다고 한다.
블로그 구룡초부님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