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만에 1인분의 식사를 하고 하염없이 울었다
박동해 기자 박상휘 기자 박혜연 기자 이정후 기자 2023. 5. 1. 05:30
[섭식장애를 아시나요] ①마른 것=좋은 것…사랑받고 싶었다
몸무게 줄수록 삶은 무거워져…넘어져도 다시 "변하고 있다"
[편집자주] 섭식장애를 앓는 인구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심지어 섭식장애를 앓는 연령대는 갈수록 어려지고 있는데, TV 속 앙상한 몸으로 연기하고 춤추는 연예인을 예쁘다고 생각하는 청소년들은 향정신성 의약품을 불법으로 구입하고 복용해 사회적 우려를 낳고 있다. 섭식장애의 원인은 매우 다양하지만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젊은 여성들'만의 문제로 취급한다. 뉴스1은 섭식장애를 앓고 있거나 이를 극복해나가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우리 사회가 이 질병을 어떻게 접근하고 해결해야 할지 6편의 기획물에 담았다.
(서울=뉴스1) 박동해 박상휘 박혜연 이정후 기자 = 『끼니: 아침, 점심, 저녁과 같이 날마다 일정한 시간에 먹는 밥. 또는 그렇게 먹는 일. -표준국어대사전』
일상의 끼니는 평범함 속에서 그다지 특이하지도 특별하지도 않게 일정한 시간에 반복된다. 지겹게 자연스럽기에 가끔은 지루하기도 하지만 '밥은 먹었냐?'는 질문은 한국 사회에서 하루의 평온함을 확인하는 인사말이 된다.
그러나 일상의 끼니는 13년간 섭식장애를 겪어온 이선민씨(29·여)에게 아직 낯선 존재다. 그는 지난 3월부터 '식사 연습'을 하고 있다. 일반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먹는다'는 행위는 선민씨에게 오랜 시간 공포였고 갈증이었고 우울이었다.
지난 3월16일 13년 만에 1인분의 끼니를 마친 선민씨는 식사 후 작성한 '식사일기'에 "첫 치료 끼니 생각보다 더 두렵고, 부담스러움도 덜하고, 가벼웠고, 배가 적당히 불렀다. 해볼 만해서 그냥 소화시켰다"고 적었다.
첫 식사연습으로 1인분의 끼니를 마쳤던 날 선민씨는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고 했다. "다행이면서 너무 슬펐던 것 같아요. 마음이 찢어졌어요. 아무것도 아닌 건데 내가 왜 지금까지 이래 왔지?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보다 소화하기가 쉬워서, 무엇을 두고 고통스럽게 싸워왔는지 선민씨는 생각했다. '내가 살아있고 살아간다는 것'이 중요한 것인데 남의 시선에 얽여 밥 한끼 소화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없애 온 날들이 한스러웠다.
◇ 날아오르기 위해 가벼워졌는데 삶은 가라앉았다.
올해 만 나이 스물아홉인 선민씨는 스물넷까지 직업 '무용수'였다. 무용으로 입시를 준비해 대학을 갔고 현대무용을 전공한 뒤 무용단에 들어가 활동했다. 그가 업으로 삼을 춤에는 항상 살과 체중에 대한 강박이 따라붙었다.
평생을 선민씨를 따라다닌 몸에 대한 강박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2010년 무용 입시를 준비하면서 그를 급속히 삼켜갔다. 입시반 선생님은 52㎏의 선민씨에게 '돼지 같고 뚱뚱하다'는 말을 수시로 했다. 대학에 붙기 위해 말라야 한다는 압박에 선민씨는 1년간 사과와 단호박만 먹으며 '연명'했다. 몸무게는 1년에 11㎏가 줄었다.
몸은 가벼워졌지만 삶은 더 무거워졌다. 몸무게가 줄어들수록 강박은 강하게 선민씨를 옥죄었다. 친구들과 함께하던 간식을 끊고, 다음엔 급식도 끊었다. 자연스럽게 외부와 고립됐다. 매일 몸무게를 재고 전날보다 0.2㎏를 빼는 것을 목표로 했다. 불과 200일이면 스스로를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목표였다.
대학에 가서도, 무용단에 가서도 마른 몸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이 계속됐다. 말라야 무대에 설 수 있고 말라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몸이 말라갈수록 선민씨는 일종의 기쁨을 느꼈다고 했다. 목표를 달성했다는, 스스로를 잘 통제하고 있다는 성취감이 생겼다. 체중계의 수치는 시험지의 점수처럼 작용했고 수치가 만족스러울 때마다 선민은 스스로에게 "오늘도 굉장히 잘 해냈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정상적인 삶은 멀어져 갔다. 절식을 참아내다 견디지 못하면 폭식을 하고 다시 이를 견디지 못해 구토를 하는 것이 반복됐다. 무용을 그만두고 나서도 증상은 호전되지 않았다. 하루를 온전히 먹고 다시 게워 내는 일로 채우는 날이 반복됐다. 온종일 먹을 것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몸무게에 대한 의식도 사라지고 오히려 먹고 다시 토하는 행위에만 집착하게 됐다.
"사랑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실제로 살이 빠지니 그랬고요." 선민씨는 삶을 되돌아봤을 때 섭식장애에 빠져든 원인의 밑바탕에 '외로움'이 있었다고 했다. 맞벌이하는 부모님 밑에서 어릴적부터 아역배우 생활을 했던 선민씨는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았다. 외로움은 쌓여갔고 어른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커졌다. 어른들은 마르고 날씬한 것을 좋은 것이라고 했고, 살이 찐 것을 게으르고 노력을 안 하는 것이라고 했다.
◇ 누구도 제대로 알려주지도 말리지도 않았다
선민씨의 인생에서 '마른 것'은 늘 '좋은 것'이었다. 성공한 여성들은 항상 날씬한 모습을 지니고 그것을 '자기관리'라고 했다. '다이어트'라는 단어도 알기 어렵던 어린 시절부터 날씬함이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정의하는 기본 조건이라는 것이라고 이해하게 됐다.
마른 몸은 동경의 대상이 됐고 누구도 잘못된 것이라고 알려주지 않았다. "분명히 토를 하고 오면 냄새도 날 거고 비정상적으로 많이 먹기도 했는데…. 혼자 그런 것도 아니고 남들과 다 같이 있었을 때 먹고 이상하다고 사람들도 알았을 텐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어요."
건강상의 위기를 겪고 병원을 찾아가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병원을, 성인이 돼서는 정신과 의원을 찾았지만 의사들도 섭식장애에 대한 전문적인 인식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정신과의원에서 처방받은 수면제를 먹고 선민씨는 오히려 수면장애까지 겪게 됐다고 했다. 이후 상담 치료를 해주는 섭식장애 전문병원을 찾았지만 시간당 12만원의 상담비에 부질없이 돈만 쓰는 느낌이 들어 치료를 중단했다. 우울증과 고립과 회의감에 선민씨는 처방받은 약물을 한 움큼 입안에 털어 넣고 죽음을 기도하기도 했다.
섭식장애를 겪는 환자들은 사회적 무관심과 치료를 위한 인프라의 부족으로 국내에서는 제대로 치료를 받기 힘이 든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섭식장애는 유전, 스트레스, 행동, 문화, 심리적 문제 등이 복합되어서 나타나기에 다양한 요인을 고려한 치료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국내에서 이런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은 손에 꼽을 정도다. 대학병원 차원에서 종합적인 클리닉을 운영하는 곳도 한 곳에 불과하다.
◇ 걸려 넘어져도 다시…"대단하다, 변하고 있다"
다행히 선민씨는 살아남았고 다시 회복하기 위한 길을 걷고 있다. 올해 식사치료를 병행하는 전문 클리닉을 찾게 되고 긍정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됐다. 선민씨는 식사치료를 하며 하루 세번의 식사와 세번의 간식을 먹는다. 첫날 첫끼는 성공했지만 식사를 제대로 해내기는 여전히 어렵다.
먹을 것을 게워 내고 싶어 하는 욕구가 생기고 마구 폭식하고 싶은 갈증이 머릿속에 샘솟기도 해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할 때도 있다. 식사치료 중 폭식을 하고 구토를 한 날 선민은 식사일기에 "배가 터지게 부르도록 먹고 싶었다. 살찐 게 느껴지고 너무 싫다"라고 적기도 했다.
그래도 순간순간 섭식장애의 장애물이 넘어지고 미끄러져도 조금씩 나아감을 느꼈다. 선민씨는 4월11일 충동적으로 간식을 사 먹고 구토를 한 날 "처음이다, 그다지 먹고 싶지 않은 이 느낌이. 먹다 말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그만 먹었다. 대단하다…. 변하고 있다. 배가 부르다." 그는 여전히 식사가 힘들지만 식사치료를 통해 평생 소원하던 것을 이뤘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랑 밥을 먹고 그냥 침대에 누워서 뒹굴뒹굴하다가 잠이 드는 것'이 그것이다.
선민씨는 올해 지인들과 함께 섭식장애 환자들을 위한 공동체인 '섭식장애건강권연대'도 만들었다. 그는 "이것(섭식장애)을 우리의 인생 밖에 두지 말자, 우리가 겪고 있는 거고 그만큼 우리가 인지하고 이것들을 좀 더 고민하고 사람들과 나눠보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좀 더 생각해 볼 자리를 만들어 보자해서 연대를 만들었다"고 했다. 선민씨는 스스로 소멸하는 것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길을 택했다.
이외에도 선민씨는 섭식장애를 알리고 자신의 활동을 소개하는 일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최근에는 치료기를 브이로그로 담아 유튜브에 올리고 있다. 그는 지난달 27일 올린 유튜브 영상 소개 글에서 비슷한 증상을 겪을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한 끼니만 편안하게 드셔보세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밥을 먹는다' 라는 생각만으로 맛있게…. 물론 불안하고 두렵겠지만, 막상 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쯤이야'라는 생각이 들 거예요. 다시 밥을 먹는 게 싫고, 소화시키는게 무서워지더라도 전과는 조금 다를 거예요. 스스로를 믿고, 내 몸을 믿어보는 거죠."
■ 기획취재팀(박상휘 팀장, 박동해·박혜연·이정후 기자)
potgus@news1.kr
Copyright ⓒ 뉴스1코리아www.news1.kr" target="_blank" rel="noopener" data-mce-href=" www.news1.kr"> www.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