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산과 위산선사
다 같이 합장하시기 바랍니다.
남전장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출가자이거나 재가자이거나 올바른 행위를 하면
올바른 행위에 의하여 그들은 “진리의 길”
청정한 진리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출가자이거나 재가자이거나
그들의 올바른 행위를 칭찬한다.
만일 그대가 좋은 벗을 만나기를 바라는가.
지혜롭고 바르면 좋은 벗을 만날 것이다.
세상의 온갖 위험하고 어려움을 잘 극복하라.
길동무 만나거든 기뻐하며 길을 함께 가라.
만일 그대가 좋은 벗을 만나지 못하거든
바르게 살고 지혜로워져라. 지혜로우면 지혜로운 이를 만난다.
온갖 위험을 잘 극복하지 못하는 친구가 있거든 그를 구하라.
그리고 마탕가의 숲에서 무리를 떠나는 코끼리와 같이
수행자여! 그대는 혼자서 그렇게 가라.
합장 내리십시오.
남전장경에 있는 부처님 말씀이죠.
재들(새) 몹시 시끄럽게 하네.
단청을 해놨더니 좋은가 봐요.
들어와서 어제 문을 활짝 열어놓고 나가라고 그렇게 했건만
기어코 안 나가고 세 마리야
그러니까 둘은 아빠 새, 엄마 새,
하나는 아들인지 딸이지 모르지만 같이 삽니다.
부처님 보면 출가자하고 재가자하고
좋은 벗에 대한 말
그리고 지혜에 대한 말씀이죠. 요약하면 그렇습니다.
진리를 가는 수행자들이나 너희들
머리를 깎은 수행자들 있죠.
너희들은 진리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청정한 진리를 성취하기위해서는 올바른 행위를 해야 된다.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그럽니다.
나는 출가자이거나 재가자이거나 상관없이
올바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다 칭찬한다.
두 번째는 만일 좋은 벗을 만나기를 바라면
진리로 보고 바르게 행하면 바른 벗을 만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바르게 하지 않으면 바른 벗을 못 만나고
내가 지혜롭고 바르게 하면 지혜로운 사람을 만난다. 그런 말씀이죠.
그 다음에는 세상에는 온갖 위험하고 어려운 일들이 많다.
잘 극복해라.
그 다음에는 길동무 만나거든 기뻐하며 함께 걸어가라.
길동무라니까 어디 여행가다 길동무 그런 건 아니겠죠.
인생살이 길동무 있습니다.
세 번째는 만일 그대가 좋은 벗을 만나지 못했다 하더라도
못하였다면 만약
지금부터라도 지혜롭게 살라.
그러면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런 얘깁니다.
그 다음에 온갖 위헌을 잘 극복하지 못하는 친구가 있거든
그를 구해줘라.
어려운 사람 있으면 구해주라는 말이죠.
그리고 또 수행자들에게 이르는 말씀입니다.
그대들은 마탕카숲에서
마탕카란 지역 이름이겠죠.
마탕카의 숲에서 무리를 떠나는 코끼리와 같이
혼자서 그렇게 가라.
아프리카 코끼리 특성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어요?
동물의 왕국 안 봤어요?
떼를 지어 다니죠.
그런데 마탕카 인도 코끼리는 혼자서 다닌답니다. 그게 특징이에요.
부처님 말씀은 항상 그 다마파다 즉
한문으로 하면 법구경
우리말로 번역하면 진리의 말씀
진리의 말씀에 보면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우리들이 가야 될 길을 이렇게 말씀 하시죠.
이제 법문 다 끝났네,
부처님 말씀이 진짜 법문이고
이제 스님들 행적을 한번 더듬어 봤습니다.
앙산 혜적선사하고 위산스님 얘긴데
이 스님들 수행한 얘길 보면 재밌는 부분이 있습니다.
먼저 앙산스님 한시가 하나 있어요.
心地隨時說 菩提亦只寧
事理俱無碍 當生卽不生
우리말로 풀이 하면
마음 바탕을 때에 따라 말하거니
마음 바탕 心地는 너의 마음을
때에 따라 내가 말하노니 그런 얘기겠죠.
보리 역시 그러할 뿐이라네.
보리 깨달음 깨달음도 역시 그러할 뿐이다.
현상에나 이치에나 모두 걸릴 것 없으니
나는 그 자리가 나지 않는 자리라네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그런 얘긴데
옛날 그런 말씀 한 번 드린 적 있어요.
인도에서 어느 왕이 부처님 열반하시고 나서
살다가 보니까 허무해졌어요.
왕도 살다가 보면 허무해진 겁니다.
왕이라고 허무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대통령도 허무한 거예요.
죽을 때까지 하면 괜찮은데
하이유, 짧아요, 5년 너무 짧아
한 30년 씩 주면 되겠는데
그래서 이젠 왕이 허무해서 신하들한테 그랬답니다.
지혜 있는 신하들이여
내가 몹시 허망하도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인생이 무엇인지를 연구해 와라 그랬어요.
연구하는데 한 3년 걸렸어.
그러니까 학자들이니까
책을 두루마리로 된 걸 막 두 마차, 세 마차씩 싣고 왔어.
폐하! 저희들이 연구 한 보고서입니다.
이거 읽어 보십시오.
마차마다 한 수레씩 가져왔는데
그거 언제 임금이 다 읽고 있습니까.
임금은 도 공부하기 제일 싫어하는 게 임금이에요.
임금 자리 있으면 공부하기 싫습니다.
그래서 그럽니다.
이거를 내가 언제 다 읽느냐?
화를 버럭 내면서 요약해서 가져와라
학자들이 그 놈을 가지고
전부 각기 연구해 온 것을 모아서 요약하는데
한 또 10년 걸렸습니다.
폐하 요약했나이다.
요약한 것도 한 열권은 돼
그런데 눈이 침침해서 읽을 수가 없어요,
글씨는 작고
짐이 이제 눈도 어둡고 귀도 어둡고 못 보겠노라.
짧게 말해줄 수 있는 자 누구 없는가?
가도 또 한 3년 걸렸어요.
한 대신이 왔습니다.
뭐냐? 그러니까
인생이란 생로병사입니다. 얘기했답니다.
뭐라 그랬죠?
야, 이놈아 그 말 같으면 진즉 얘기해 주지.
인생이 뭡니까? (생로병사)
이거 잊어버리면 안 돼요.
아주 간단한 거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만약 어디 가시다가
누가 나한테 인생이 뭐예요? 물으면
두말할 것 없습니다.
생로병사입니다.
빨리 나오면 좀 이상하면 조금 생각하는 척 하다가
생로병삽니다.
그러면 끝이야.
뭐 그래 더 설명할 게 있어요.
하루는 어떤 선사가 앙산혜적선사를 찾아 갔어요.
그리고 도를 물었습니다.
‘스님 제가 스님이 돼 가지고 도를 공부 진리를 공부하고 있는데
스님께서 저에게 진리를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래? 그러면 내 곁에 있으라. 가르쳐주지.’
스님 곁에 있으면서 스님 시키는 대로 일합니다.
빨래하라면 빨래하고
밥 하라면 밥 짓고
불 때고 나무 해 오고
상추도 심고, 배추도 심고, 무도 심고, 감자도 심고,
산에서 이렇게 한 3년 살았어요.
그런데 스님이 아무 말씀 않는 거야.
그래서 하루는 조실방으로 올라갔습니다.
‘스님, 제가 벌써 여기 온지 3년이나 됐습니다.
진리를 좀 가르쳐주십시오.‘
‘그래? 벌써 그렇게 3년이나 됐나?
아 그런데 오늘은 내가 좀 피곤하다.
다음에 얘기해 줄게’
그 다음에 얘기해 준다는 게
다음이 내일인지 모래인지 글핀지 알 수가 없어
그럭저럭 스님을 또 시봉을 했는데 또 3년이 지나갔어요.
세월 참 빠르구나, 6년 됐어
제가 살다보니까 벌써 대각사 온지 6년 됐어요.
6년도 넘었어.
스님한테 올라가서 여쭸습니다.
‘스님! 제가 여기 온지 3년 지나고 그렇게 하고, 또 3년 지나고
있어도 도를 가르쳐주시지 않으니
오늘은 꼭 저한테 도를 좀 가르쳐주십시오.‘
그런데 ‘내가 가르쳐 준 거 같은데’
‘안 가르쳐 줬습니다.’
‘아냐, 내가 도를 가르쳐 줬지 자네한테
안 가르쳐줄 리가 있겠는가? 6년이나 됐는데‘
‘저는 한 번도 도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반문을 하니까 ‘그랬나?’
‘그래? 그럼 낮잠 좀 자고’
낮잠을 한숨 주무시는데 밖에서 기다리는데 일어나시더니
‘너 왜 여기 있나?’ 그래
‘스님 한 숨 주무시고 진리 얘기 해주신다고 안 하셨습니까?’ 하니까
‘아, 그랬던가?’
그럼 일하러 가자
밭에 가서 무도 심고‘ 배추도 심고’ 산에 가서 같이 나무도 하고‘
요제나 저제나 말씀을 안 하시는 거야.
그럭저럭 또 3년 지나갔습니다.
도합 9년이 됐어요.
하루는 가만히 보니까 스님한테 속은 기분이 나거든
그렇잖아요.
그래서 오늘은 정말 스님이 나한테 진리를 말씀 안 해주면
스님을 멱살을 잡고 한 번 패대기를 치고
걸망지고 가야 되겠다. 싶어 가지고 걸망을 다 싸놓고서
스님한테 갔어.
‘스님, 제가 온지 9년이나 됐습니다.
왜 진리를 말씀 안 해주십니까?‘
스님이 깜짝 놀라는 거야 ‘그래? 내가 진리를 얘기 안 해줬든가?’
‘언제 얘기 했습니까?’
‘아 참 딱하구나, 너도’
‘네가 원하면 내가 진리를 애기 해줄게.’ 하시더니
밭에 가더니 무밭 배추밭이 있습니다.
무밭에 가서
‘봐라 요건 무다,’
‘요쪽에 가서 요건 배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확철대오 했습니다.
9년 동안 영글은 거죠.
여러분 시집살이 9년 참을 수 있겠어요.
턱도 없다.
9년은 무슨 9년이야.
3년? 3년도 못 참지. 어떻게 참나? 울화통이 터져서
스님들도 출가해서 열심히 도를 찾기 위해서
진리를 찾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냥 지내는 게 아니에요.
무 심고, 배추 심고,
스님도 농사일을 많이 해가지고 환해
지금 귀농해도 문제없어
누구 귀농할 사람 없어요.
무 심는 거, 배추 심는 거, 고구마 심는 거, 감자 심는 거,
모르는 게 없어 물어 봐 모르면 나한테
귀농할 사람 나한테 얘기해 나중에 가르쳐 줄테니까
그거 뭐야? 진리입니다.
무 인 것을 알고
배추 인 것을 아는 것이 진리에요.
새 소리 들으면서 아무도 화를 안 내.
만약 우리 예불하고 기도하고 스님 법문 하는데
사람이 옆에 가서 짹짹 거리고
막 무슨 소리 지르고 노래 부르고 다닌다면 여러분들 화나겠죠?
근데 화 안 나잖아
왜 화 안 날까요?
저 목소리는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보고
또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름답지 않게 보고
바른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즉 깨달음입니다.
여러분들 못 깨달은 것이 아니에요.
수시로 잘 깨달아, 깨닫는데 한 번씩 매해져요.
욱하면 그때부터 앞이 안 보여.
아무 것도 안 보여
인제 그거를 없애야 돼
앙산스님과 위산스님, 이 사이는 스승하고 제자인데
위산스님이 스승이고 앙산스님 제자인데
위산스님은 771년에 태어나서 853년에 돌아가시고
앙산스님은 807년에 태어나서 887년에 돌아갔으면
앙산스님 80년 사셨네요. 그 때 당시에도
두 스님이 재밌는 대화가 있어요.
하루는 위산이 앙산과 함께 산에 갔습니다.
뒷산에 갔어, 뒷산
뒷산 가가지고 찻잎을 땁니다.
찻잎을 따면서 하루 종일 찻잎을 따면서
위산스님이 제자인 앙산에게 그럽니다.
‘나는 그대의 말소리만 들리고 그대의 모습은 보지 못하니
너의 모습을 한 번 보여 줘라‘ 그랬어요.
차 따면서 두런두런 얘기도 하고 그랬는데
스승이 위산스님 그러는 겁니다.
나는 그대의 말소리는 들었는데 네 모습은 본래의 모습은 뭐냐?
함 보여줘라
그러니까 ‘앙산이 차나무 가지를 잡더니 흔들어 보였어요.’
이게 내 모습입니다. 하고 보인 거야.
그러니까 위산스님 그러는 겁니다.
‘네가 용은 쓸 줄 알지만 체는 모르는구나.’ 그랬어요.
용이 뭐에요? 용
한자를 쓰면 쓸 用잡니다.
네가 씀은 알겠으나
너의 근본 모습은 아니다. 그랬어요.
그게 네 근본 모습이 아니다 그랬어요.
여러분들 가만히 자신을 반조해 보십시오.
내 모습의 본 모습이 뭔지.
내 본 모습이 뭘까요?
여기 앉아 있는 이 모습?
요 모습?
어떤 모습이면 좋겠어?
부처님 모습?
가서 참구하십시오.
이게 오늘 숙제입니다.
그러자
앙산이 말하기를
‘스님은 체를 말하지만
스님이 말씀하신 체는 스님이 잘못 알고 계십니다.’ 그랬어요.
스님이 용은 알지만 체를 모른다고 하니까
도리어 앙산이 스님이 체를 말하지만
스님이 체를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 얘기에요.
그렇게 하고나서 그 다음에 이제는
위산이 그럽니다.
‘너는 이미 삼십 방은 맞았어야 됐다.’
그러니까 매를 맞아야 되겠다. 이런 말입니다.
네가 하는 짓이 알지 못하고 스승한테 아무렇게나 말하는데
체 용을 모르니 너는 맞아야 되겠다.
이 산이 어떻게 생긴 모습인지
세상에 어떻게 내가 나왔는지를 모르니
너는 이미 나한테 삼십 방을 맞아야 되겠다. 그랬어요.
그 다음에 앙산이 한 여름철을 제방에서 나고서
스승인 위산스님에게 또 왔습니다.
그러자 하루는 위산이 물었습니다.
‘이번 여름철은 어디서 지냈느냐?’ 물으니까
‘스님! 저는 저 지방에 다니면서 땅도 일구고
씨를 한 바구니나 뿌려놓고 왔습니다.’
무슨 씨 뿌렸을까요?
보리씨를 뿌렸다. 그런 말이죠.
깨달음의 씨앗을 뿌렸다.
그러니까 위산이 말하기를
‘헛되이 보내진 않았구나.’
그러면서 스승에게 물었어요. 앙산이
‘스님께서는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위산이 말하길,
‘낮에는 밥 먹고, 밤에는 잤다.’
여러분들도 친구가 궁금해서 전화하면
한 시간씩 붙들고 있지 마세요.
어떤 때 무슨 일 있어가지고
요즘이야 뭐 전화
옛날에 절 한참 하고 할 때 바쁘잖아요.
전화하면 삐삐삐 전화 받는다고 전화 못 받아
한 시간 후에 걸어도 또 통화중 두 시간 후에 해도 통화중이야
나 그런 사람 봤어요.
그래서 전봇대 위에 올라갈라다 말았어
간단히 물으면 너 어떻게 지냈나 하면
낮에는 밥 먹고 저녁에는 잤다.
3초면 말하면 끝납니다.
그렇게 이제는 하니까
앙산이 그럽니다.
‘스님께서도 헛되이 보내진 안하셨군요.’
그 스승에 그 상좌죠.‘
위앙종이 있습니다. 위산 앙산
앙산이 스승이 돌아가시고 난 후
또 밑의 앙산의 제자가 두 스승님을 생각해서 종파를 세웠는데
그것이 위앙종입니다.
지금도 중국에는 위앙종이 아주 왕성합니다.
위앙종, 임제종.
조주종은 근데 없어요. 없는 것 같아
그리고 인제 그 후에
어느 날 위산하고 앙산하고 함께 산 구경을 갔습니다.
하루는, 산 구경을 가서
위산이 그럽니다. 앙산에게
‘물질을 보는 것은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죠.
눈으로 봅니까? 물질을
여러분 눈으로 본다고 그러잖아 다
야 눈으로 못 보냐? 그러잖아
눈으로 어떻게 봐
한번 물어볼게요.
여러분들 집에 버스나 전차를 타려고 나오면서
집 앞집에 붙어 잇는 간판 10년 동안 보는데 압니까?
집 상호 이름 알아요?
모르죠?
관심이 없으면 맨 날 눈 뜨고 다녀도 안 보입니다.
절대 안 보이게 돼 있어
그런데 내 물건은 그렇게 잘 찾습니다.
눈 감고도 찾아
왜?
마음으로 보니까
위산이 앙산에게 말하기를
‘물질을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앙산이 되묻기를
‘지금 스님은 물질을 보는 것을 마음으로 보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저 앞에 소나무가 있는데
소나무는 스님께서 어느 소나무가 스님이 보신 마음입니까?’
하고 물었어요.
참 묘한 질문이죠.
여러분들도요 절에 와서 스님 법문 듣는다고 이렇게 듣고서도
허허허 이렇게 듣다가 가서 그냥 없어져 버려, 얼마나 아까워요.
딱 메모를 해 놨다가
아 여름철에 오대산 설악산 가 가지고
처사님하고 아들하고 딸하고 길가면서
저 소나무가 참 좋구나, 눈으로 보느냐? 마음으로 보느냐? 물어
그러면 애들이 응? 엄마가 이상하게 묻네.
한 녀석은 마음으로 본다고 하고 한 녀석은 눈으로 본다고 할 거 아냐.
그래 마음으로 본다.
저쪽 저 소나무는 네가 어떤 마음으로 봤느냐?
그러면 애들의 머리 사고가 늘겠어요? 안 늘겠어요?
늘죠.
엄마 그거 어디서 배웠어요?
절에 가면 배운다.
그렇게 불교를 가르치는 겁니다.
어떤 처사님들은 그래요.
보살님들은 안 그러는데
또 여기 우리 두 처사님들은 안 그러시고
저 밖에 저쪽 처사님들 보면
산에 등산 가잖아요.
등산화 벗기 싫거든 법당 밖에서 이거(꾸벅)는 어디서 배웠는지
세 번 하고서 그냥 간다.
그저 내가 몽둥이만 있었으면 그냥 쫒아가서 한 삼십 방을 날리겠구먼,
아니 일부러라도 할 건데
기왕 간 김에 떡 양발 벗고 발 벗고 신발 벗고 법당에 들어가서
그 산중에 스님들 뭐 먹고 살어.
아니 그 뭐야
옛날에는 세종대왕도 괜찮았지만 요즘 세종대왕 뒤로 밀렸어요.
그 위 것으로 하나 쓱 꺼내서, 스님이 두 장 꺼내라 하나
한 장 떡 꺼내서 넣고 절하고 와
그 복이 어디로 가요? 다 나한테 오고 자손한테 가지
안 그래요? 그래요?
그런 거를 처사님들한테 가르쳐 줘야 돼
퍼런 거 나오다 깜짝 놀래가지고 밑에 누가 율곡선생님 꺼내지 말고
아이 이왕 잡힌 거 뭐 하려고 깜짝 놀라긴 놀래
그렇게 이젠 어떤 것으로 보십니까? 그렇게 하니까
위산이 답하기를
네가 마음을 본다면 어찌 나무가 보이겠느냐?
나무를 보는 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네가 본 나무는 네 마음이고 내가 본 나무는 내 마음이다 이 말이에요.
쉽게 얘기해서
여러분들도 써 먹어야 해요.
저 나무는 요렇게 보고 조 나무는 조렇게 봤어
그런데 사람들 마다 인식의 차이가 있다고 그러잖아
좀 유식한 말이죠.
인식의 차이
사람 사람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어
그 사람 마음은 요렇게 생기고 내 사람 마음은 요렇게 생겼어요.
그러니까 뭐라고 그래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서로 마음을 존중해라
서로 그 사람들의 생각을 존중해라는 거예요.
그게 민주적 사회에요.
그러니까 위산 앙산이 저 산에 가서도
산을 보면서도 나무를 보면서도 이와 같이
세상을 이야기 하고, 진리를 이야기 한 거에요.
진리라고 해서 절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죠.
바로 어디에 있어요?
마음속에 있습니다.
다음엔 또 더 재미있어요.
앙산이 되물었습니다.
‘그러면 스님께서 마음을 본 후에 나무를 본다 하실 것이지
왜 나무를 본 뒤에 마음을 본다고 합니까?’
이왕이면 마음을 본 뒤에 나무를 본다고 하지
나무 다 봐 놓고 마음으로 봤느냐 뭐로 봤느냐 하느냐?
질문하는 거예요.
요 얘기는요 능엄경에 부처님께서 자세히 써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스님들은 어쩌면 이 경전의 얘기를 자세히 알고 하시는 얘기죠.
자 어느 날 부처님께서 능엄경에 보면 이럽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이층 누각에 떡 계셔
계시면서 아라한에게 묻습니다.
‘아라한아 너는 저 창 밖에 멀리 있는 숲을 보고 있느냐?’
‘예,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가까이 있는 저 창을 먼저 보느냐?
먼 곳에 있는 숲을 먼저 보느냐?’
유도 질문합니다.
‘세존이시여, 가까이 있는 창문을 보고
그 다음에 멀리 있는 숲을 봅니다.’
‘그러면 저 창문보다 더 가까이 있는 네가 보고 있다고 하는 눈은
네가 볼 수 있느냐?’ 물었습니다.
아라한이 콱 막혔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 스스로 여러분 눈 볼 수 있습니까?
못 보죠.
제일 가까이 있는데 왜 못 봐
먼데 있는 것은 보면서
우리 그런 속담 있습니다.
제 눈 속에 있는 제 허물은 큰 것은 모르고
남의 허물은 조그만 것이라도 안다.
비유해서 그런 말 있죠.
내 눈은 눈일 뿐이에요. 거울
부처님께 여쭙기를
‘세존이시여! 그러면 눈은 무엇입니까?’
‘눈은 거울이니라.’ 부처님께서
세상을 비쳐보는 거울일 뿐이야.
그러면 제가 본 저 창이나 숲은 누가 봤습니까?
마음이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세상을 보는 것은 눈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겁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빚에 쪼들리고 가정불화가 있고
친구하고 싸우고 세상 살기가 싫었어.
그래서 농약을 한 병 사가지고 한강 다리에 올라갔습니다.
그 사람 마음하고 내 사람 마음하고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다르겠죠.
그래서 세상은 마음은 하나도 같을 수가 없습니다.
내 부모 형제 아들딸도 전부 마음이 제 각각입니다.
마음을 하나라고 칩시다.
하나도 뭉쳐지지 않습니다.
각각의 마음이 좋은 겁니다.
자, 그렇게 물으니까
위산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나무를 봤으면 그뿐이지 그가 말을 듣는가?
못 듣는가 알아서 무엇 하겠는가?’
나무를 보았으면 되지
나무가 내 마음을 알아주든 말든
이게 엉뚱한 대답을 하고 있어요. 제자가
그러니까 앞과 뒤를 잘 모르면 다른 말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자, 마지막으로 달마스님 법문 한마디하고 끝내겠습니다.
달마스님 그럽니다.
‘강물은 원래 조그만 샘물에서 발원하여
끊이지 않고 흐르고 흘러서 물이 넘실거리는 강물이 된다.’
무슨 말이죠?
이 세상에 작은 물결도 모이고 모이면 큰 넘실거리는 큰 강물이 된다.
그런 소리입니다.
여러분들이 불교를 자랑해야 됩니다.
불자들은 스님들이 잘못 가르쳐 놔서 자랑할 줄 모릅니다.
어디 가서 요즘 장관 국회의원들이 종교관이 있는데
불자들은 종교는 아무 것도 안 써
표를 의식해가지고
자랑할 줄 밖에 몰라 그게 뭐 불교야
불교는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종교란이 없어도 찾아가지고
괄호 열고 종교 해가지고 불교 써야 돼
나는 불교인이야.
세상에 기독교인이나 회교인들은 나는 회교인이다.라고? 자랑하죠.
저 혼자 대놓고 자랑합니다.
그런데 불자들은 자랑할 줄 몰라
자랑해야 됩니다.
어디 가서 자랑하십시오.
나는 부처님을 믿습니다.
불교 진리를 믿습니다.
그렇게 자랑해야 됩니다.
파도를 이루게 되면 만약 어떤 사람이
물질의 근원을 끊으면 그 물줄기가 끊어진다. 그랬어요.
만약 그 파도가 그 흐르는 물줄기가 번뇌라면
번뇌의 물줄기를 끊으면 그 파도는 끊어지게 되어있죠.
저 바다가 넘실거리고 파도를 치지마는
만약 바다에도 바람이 없다면 파도는 없습니다.
설마 바람이 없으면 파도 정말 없을까요?
없습니다.
인도하고 사우디아라비아하고
그 호르무즈해협이라고 하는 해협이 있습니다.
걸프만 그러죠. 인도양
인도양 북쪽에 5월 6월 한 두 달간은
정말 바람이 한 점 없어서
바다가 명경지수 같이 호수 같답니다.
물결이 전혀 없어
물결이 없으면 좋을까요? 안 좋을까요?
옛날에 돛단배를 몰고 잘못해서
바람 한 점 없는 바다에 갇히게 되면 그대로 죽음입니다.
꼼짝 못해요.
그러고 보면 어쩌면 바람은 우리를 살리는 큰 운동입니다.
‘해탈을 구하는 사람은 삼독를 정계해서, 삼취정계를 능히 이루어서
보리도를 이루어내야 한다.’
진리를 깨달아야 된다. 그런 말이죠.
여러분들이 더운 날에
내일, 모레, 토요일 날 또 절에 오셔야 되는데도
오늘 잊지 않고 부처님 전에 와서
예배하고 기도를 하는 것은
안 온 사람 집에서 밥 먹고 잠자면 뭐해요?
이렇게 부처님께 와서 기도하고 가면
기도의 공덕이 있습니다.
또 내 아들딸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엄마들
매일같이 잊지 말고 요 기도 끝나고 108배하고 가십시오.
아셨죠.
예 해놓고 절 안하고 가면 큰일 납니다.
스님 말 안 들으면
스님은 부처님 대신으로
부처님 하시고 싶은 말씀 내가 전해드리는 건데
부처님 말 안 듣는 거야.
그러니까 108배를 하시고 공양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법문 마칩니다.
성불하십시오.
장산 합장
(불기2556년 6월 미타재일 대각성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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