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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사과》
위를한번 크릭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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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수님의 책소개가 길지만
농사꾼도 과연 일본사람 답다라고 감탄이 나옵니다
하리안에도 농업을하시는분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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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는 사
과가 아닌 게 틀림없다. 분명 성경 본
문에 하와가 뱀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
과를 따먹기로 결심했을 때 그 열매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
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당시 사과는 먹음직도, 보암
직도, 탐스럽지도 않았다. 불과
200~300년 전만 해도 사과는 작고, 신
맛과 떫은 맛이 강해 사람들이 그냥
먹을 수 없는 과일이었다. 지금처럼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탐스러운 사과
는 19세기 이후에 나온 것이다. 그것도 끊임없는 품종개량과 농약 덕분에.
사실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사과의 거의 대부분은 농약을 쓰고 나서 개발
된 품종이다. 다시 말해 농약을 토대로 개량된 품종이다. 그 결과 오늘날의
사과는 캅카스 산맥의 야생종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달고 큰 과일이
되었다. 그리고 그와 맞바꾸기라도 하듯 오늘날의 사과는 야생의 힘을 잃어
버렸다. 농약의 도움 없이는 병충해와 싸울 수 없는 매우 나약한 식물이 되
어 버렸다는 뜻이다.
《기적의 사과》는 농약의 힘으로 만들어진 오늘날의 사과를 농약 없이 재
배하는 데 성공한 일본 농부 기무라 아키노리 씨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가 수확한 사과는 온라인 판매 3분 만에 품절되며, 그것으로 만든 수프를 내
놓는 도쿄의 프랑스 레스토랑은 1년 후 예약까지 꽉 찰 정도로 인기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10년 동안 기무라 씨는 그야말로 죽을 고생을
했다. 벌레와 병충해로 들끓는 사과나무를 보다 못해 밧줄을 들고 산에 올라
목을 맬 결심까지 한다. 생활비가 없어 낮에는 사과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카
바레에서 호객행위를 하다 야쿠자를 만나 앞니가 몽땅 부러질 정도로 두드
려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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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이 바꾼 인생
기무라 씨는 1949년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농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
의 집은 꽤 넓은 논밭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사과밭도 있었다. 따
라서 생활하는데 곤란을 겪지는 않았다.
자라서 그는 가업을 물려받았다. 형이 자위대에 입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형이 마음을 고쳐먹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가업을
이어받아야 하는 의무에서 그는 해방됐다. 하지만 그는 농사를 계속 지었다.
한 가지에 빠지면 끝장을 보는 성격인 기무라 씨는 농사에도 열심이었다.
옥수수를 대량 재배했고, 카탈로그에서 본 영국제 트랙터에 꽂혀 즉시 주문
해 몰고 다녔다. 트랙터는 눈물을 머금고 팔아 치울 때까지 그의 보물 1호였
다.
기무라 씨는 스물두 살에 중학교 동급생이었던 기무라 미치코 씨와 결혼했
다. 미치코 씨는 농가의 큰딸이어서 결혼하려면 데릴사위로 그녀의 집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가 사는 곳은 겨울에 눈이 많이 왔
다. 따라서 겨울에는 딱히 할 일이 없
었다. 농가에서는 겨울 동안 휴식을 취
했다. 그런데 기무라 씨는 그것을 견디
지 못했다. 항상 뭔가를 하지 않으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성격 때문이었다.
밭에 눈이 쌓이면 기무라 씨는 농업
공부를 했다. 마을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서 1년간 농사지으며 생긴 의문에
답을 줄 만한 책을 찾아 열심히 읽었다.
그날도 기무라 씨는 참고 자료를 찾고 있었다. 트랙터 농업에 관한 전문
서적이었다. 마을 서점을 몇 군데 돈 끝에 마침내 찾아낸 그 책은 책꽂이 맨
위 칸에 꽂혀 있었다. 하지만 까치발을 해도 손에 닿지 않았다. 조심성이 없
는 기무라 씨. 바로 옆에 놓인 막대기를 들고 트랙터 관련 책을 쿡쿡 찔렀
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책까지 떨어졌다. 집어서 들어보니 모서리가 찌그러
져 있었다. 눈 녹은 바닥의 얼룩도 묻었다. 하는 수 없이 그 책도 샀다. 그리
곤 잊어버렸다.
그 책을 제대로 읽은 건 그로부터 반년인가 1년 뒤였다. 어떻게 하다 읽게
됐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의 손에 그 책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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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맨 앞에는 ‘아무것도 안 하는, 농약도 비료도 전혀 안 쓰는 농업’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 책은 자연농법의 창시자인 후쿠오카 마사노부 씨가 쓴 《자
연농법》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농업이란 완결된 자연 시스템을 백 퍼
센트 되살린 농업이란 뜻이다. 후쿠오카는 4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이 자연
농법을 완성시켰다. 그 전까지 기무라 씨는 방제 달력에 따라 성실하게 농약
을 살포해 왔다. 하지만 아내가 농약을 뿌린 후에 일주일씩 앓아눕는 것을
보면서 자연농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책을 읽고 감명을 받는 기무라 씨는 자연농법을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1978년의 일이었다. 우선 4군데 사과밭 가운데 한 군데엔 농약을 일절 치지
않았다. 6월까지는 걱정했던 병충해 피해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7월로 접어
들자 잎에 이상 현상이 보이게 되었다. 사과 잎이 누렇게 변하기 시작한 것
이다. 반점낙엽병이었다. 병에 걸린 잎들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밭 전체의
잎들이 누렇게 변해가더니 7월 말에는 잎의 절반이 떨어져 버렸다. 가까스로
매달려 있는 잎들도 거의 다 누렇게 변했다.
잎이 떨어지자 사과나무는 열심히 새 잎을 맺었다. 그러나 힘겹게 맺은 새
잎들도 눈 깜짝할 사이에 병들었다. 농약을 한번 뿌린 밭과 한 번도 뿌리지
않은 밭은 천국과 지옥만큼이나 차이가 컸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로 접어들자 그 고목 숲 같은 밭에서 사과나무들이 일
제히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제철도 아닌데 피는 미친 꽃이었다. 잎이 거의
다 떨어진 상태에 기온까지 내려가면서 사과나무는 생리적으로 이른 봄과
매우 비슷한 생태에 놓여 버린 건지도 모른다.
다른 밭에서는 사과 수확이 한창이었다. 하지만 기무라 씨 밭에서는 가을
이 되었는데도 크지도 못하고 여전히 설익은 열매 틈에서 사과 꽃이 피어났
다. 가을에 피운 꽃은 이듬해 봄에 필 꽃망울이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이듬
해 수확도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사과나무는 잎을 잃을 때마다 새로운 잎을 맺었다. 떨어지고 또 떨어져도
계속해서 새로운 잎을 틔워냈다. 병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남
으려고 애썼다.
벌레들의 천국
기무라 씨는 농약 대신 사람들이 늘 먹는 식품 중에서 병을 막아낼 방법을
찾았다. 마늘, 고추냉이, 식초 등 효과가 있을 법한 식품 몇 개가 리스트에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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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밭이 한 군데뿐이면 그
모든 것을 시험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사과 재배는 1년에 한 번밖에 결과가 안 나온다.
그것이 바로 농업의 어려움인데, 설령 사과 재배
에 30년을 매달렸다 해도 사과 수확은 서른 번
밖에 못 한다. 기무라 씨는 이듬해 네 군데 밭
가운데 무농약 밭을 두 군데로 늘렸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큰 맘 먹고 네 군데 밭 전체에 농
약 사용을 멈췄다.
그때부터 그의 머릿속에는 병을 억누를 식품을
발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잠을 자도 꿈
을 꿔도 그 생각뿐이었다. 밀가루로 풀을 쒀서 뿌려보고, 술을 묽게 타서 뿌
려보기도 했다. 고추냉이와 달걀 흰자를 써보기도 했다.
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상태가 나빠졌다. 반점낙엽병은 여전히 맹위를 떨쳤
고 해충도 무지막지하게 발생했다. 그야말로 벌레들의 천국이었다.
기무라 씨와 아내, 장인과 장모는 새벽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하루도 빠짐
없이 벌레를 잡았다.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는 비닐봉지뿐이었다. 봉지 손잡
이 한쪽을 왼쪽 손목에 걸고, 그 속에 닥치는 대로 벌레를 잡아넣었다. 나무
한 그루에서 비닐봉지 세 개 분량의 벌레가 잡혔다. 그렇게 기를 쓰고 잡아
도 벌레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조금도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리고 사과나무는 전혀 꽃을 피우지 않았다. 당연히 사과는 한 알도 열리지
않았다.
흑설탕, 후추, 마늘, 고춧가루, 간장, 된장, 소금, 우유, 일본 전통주, 소주,
쌀가루, 밀가루, 식초….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 식품은 하나도 빠짐없이 뿌
려 가며 그 효과를 계속 시험했다. 농약을 대신할 만한 식품. 그것만 발견하
면 이 싸움은 끝난다. 기무라 씨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여주지 않았다. 기무라 씨의 밭은 참혹했다. 거의 모든
잎이 병에 걸려 색이 변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푸른 잎이나 가지는 해충으
로 까맣게 뒤덮였다. 땅위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
모든 사과 밭을 무농약으로 바꾼 지 3년이 지나고 4년째 접어들어도 사과
꽃은 전혀 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은 물론이고 장인
의 우체국 퇴직금도 다 써버렸다. 장인 장모까지 합한 일곱 식구가 궁핍의
바닥까지 내몰렸다. 자랑거리였던 영국제 트랙터는 물론 자가용과 사과 수송
용으로 쓰던 2톤 트럭까지 팔아 치웠다. 내야 할 세금이 밀려 사과나무에 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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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딱지가 붙은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필사적으로 돈을 긁어모
아 가까스로 경매는 철회시켰다.
전화는 이미 오래 전에 끊어졌고, 꼭 필요한 전기와 수도 요금을 내기 위
해 이리저리 돈을 구하러 뛰어다녔다. 건강 보험료를 내지 못해 건강 보험증
도 뺏겼다. 아이들 교육비도 못 냈다. 딸들의 옷과 학용품조차 제대로 사줄
수 없었다.
4년의 세월이 지나고 5년째로 접어들어도 사과 밭은 계속 악화되기만 했
다. 사람들이 뒤에서 험담을 해댔다. 기무라 씨도 자연히 남의 눈을 피해 살
아가게 됐다. 길에서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날이 밝기 전에 밭으로
나갔고, 날이 저물어 밭에서 인적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
왔다.
기무라 씨의 집에서 사과 밭까지는 도보로 두 시간 가까이 걸린다. 차도
트랙터도 다 팔아 치웠기 때문에 엔진 달린 거라곤 고물상에서 천 엔에 산
모터 달린 자전거와 2천 엔에 산 트랙터뿐이었다. 탈탈거리는 모터 자전거와
트랙터는 아내와 장인․장모가 쓰도록 했다. 사과 밭까지 왕복 네 시간이 걸
리는 어두운 길을 기무라 씨는 매일같이 걸어 다녔다. 그래도 사람들의 차가
운 시선을 받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본가와는 거의 연락을 끊고 살았다. 본가 식구들은 기무라 씨가 찾아가도
문을 잠그고 없는 척했다. 무농약 재배를 그 누구보다 강력하게 반대했던 사
람이 본가 부모님이었다. 사돈댁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다며 울었다.
6년간 찾아다니던 해답을 발견하다
모든 밭을 무농약으로 바꾼 지
6년째, 1985년 봄이 지나고 계절은
여름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기무라
씨는 변함없이 날이 밝기 전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밭에서 지냈다. 그
무렵 사과나무에 뿌리는 것은 거
의 식초뿐이었다. 온갖 식품을 시
험해 본 결과, 적어도 뭔가 효과가
있어 보이는 건 식초였다. 식초를
살 돈이 떨어지면 시트르산을 썼
다. 포도 주스를 만드는 공장에 찾아가면 공짜로 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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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7월 31일의 이야기다. 그의 네 군데 밭에 있는 8백 그루의 사과나
무 모두 쇠약해지고 말라갔다.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는 한, 가까스로 살아남
은 나무들도 결국 병과 벌레에 무릎 꿇고 말라 죽을 수밖에 없다. 사과나무
가 다 말라 죽으면 모든 게 끝난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대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당장 모든 걸 포기
하고 다른 사람들이 재배하는 방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기
까지 생각하면 사고는 늘 멈춰 버렸다. 굵은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생각은
거기서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미 시작
해 버린 그 일을 그쯤에서 그만둘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이제 기무라 아키
노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석양은 옅어지고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기무라 씨는 뭔가 결
심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밭 입구에 놓아둔 폐차 짐칸에 밧줄 한 뭉치가
눈에 띄었다. 사과 상자를 실을 때 묶는 밧줄이었다. 그 밧줄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사과 밭 사이로 난 길을 걸어 산으로 올라갔다. 그는 아무도 발견할
수 없는 곳까지 올라가서 죽기로 마음먹었다. 후회스럽거나 원통하지는 않았
다. 죽는 게 두렵다는 생각도 없었다. 몇 년 동안이나 등에 짊어지고 있던,
자신에게는 너무 버거운 짐을 내려놓는다는 해방감만 느껴질 뿐이었다. 얼마
를 올랐을까. 하늘엔 커다란 달이 떠올라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적당한
나무가 보였다. 들고 온 밧줄을 나뭇가지로 던졌다. 힘이 너무 셌는지 밧줄
이 손가락 사이로 휙 빠져나가더니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런 상
황에서 실수하다니, 얼마나 변변치 못한 남자인가 생각하며 밧줄을 주우려고
산비탈 길을 내려가던 기무라 씨의 눈에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달빛 아
래에 사과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던 것이다. 마치 마법의 나무처럼 그 사과
나무는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가지가
쭉쭉 뻗어 있었고, 그 가지마다 잎이 무성했다. 조건 반사처럼 누군가 농약
을 쳤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것이 사과나무인 한, 농약을 안치고는 저
렇듯 건강하게 잎이 무성할 리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기무라 씨는 정수리
에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바짝 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 나무에는
농약 한 방울 닿았을 리가 없었다. 잘못 던진 밧줄을 줍는 것도 잊은 채 정
신없이 달려갔다. 나무를 향해 달려가면서 기무라 씨는 그것이 사과나무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것은 도토리나무였다.
농약을 안 썼는데도 저 나무엔 어쩌면 저렇게 잎이 많이 달렸을까. 기무라
씨는 주머니 속을 뒤져 성냥불을 켰다. 잎을 잡아당겨 성냥불에 비춰 보았
다. 예상했던 대로 해충은 없었다. 6년간 끝없이 찾아 헤매며 찾던 답이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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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나타난 것이다. 숲 속 나무는 농약 같은 걸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지금
까지 왜 그런 사실을 신기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산기슭에 있는 사과나무나 눈앞의 도토리나무나 똑같은 공기를 마시고 똑
같은 태양 빛을 받는다. 조건은 거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
른 게 하나 있었다. 지금 서 있는 땅에는 잡초가 제멋대로 자라 발이 빠질
정도로 깊었다. 흙이 전혀 달랐던 것이다. 기무라 씨는 정신없이 발밑의 땅
을 파헤쳤다. 흙은 보드랍게 흐무러져서 맨손으로도 파헤칠 수 있었다. 풀을
잡아 뽑자 흙이 붙은 뿌리가 끝까지 뽑혀 나왔다. 그렇게 부드러운 흙을 만
져 보는 건 처음이었다. 바로 이거다, 이런 흙을 만들면 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는 흙을 입속에 넣고 있었다. 코를 찡하게 울리는 독특한 냄새가 입
안 가득 퍼졌다. 자극적이었지만,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좋은 냄새였다.
이제 해야 할 일은 자연을 되찾아주는 일이었다. 밭의 풀은 이미 베어 버
린 후라, 잡초 대신 콩을 뿌렸다. 팔다 남은 찌꺼기 콩을 싸게 사왔다. 다 자
란 콩을 뽑으면 뿌리에 작은 알갱이가 빽빽이 붙어 있었다. 뿌리혹박테리아
의 서식처였다.
앞니와 맞바꾼 사과나무
다음 해에는 봄부터 콩을 뿌
렸다. 콩이 허리 높이까지 자
라 사과밭이 정글처럼 변했다.
사과나무는 조금씩 건강해졌
다. 그 무렵부터 기무라 씨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생계
잇기가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
이다. 파친코, 카바레를 전전하
며 호객행위를 했다. 그러다
지역 야쿠자와 맞닥뜨렸다. 상
대방의 정체를 몰랐던 기무라 씨는 그들에게 호객행위를 했다. 그러다 잡혀
가 앞니가 부러지고 와이셔츠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았다. 그 일을 계기로
그는 그 일을 그만두었다.
콩을 뿌린 지 3년째, 모든 밭에서 농약 사용을 멈춘 뒤로 8년, 드디어 밭에
일곱 송이의 사과 꽃이 피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두 개가 열매를 맺었다.
그해 늦가을이 되어 낙엽이 질 때까지 사과나무에는 잎의 3분의 2이상이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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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그리고 이듬해. 맨 처음 그 광경을 본 사람은 옆 사과 밭의 주인인 다케야
긴조 씨였다. 자기 일도 아닌데 그는 탄성을 내질렀다.
‘저 친구, 마침내 해냈군.’
축하라도 한마디 건네고 싶어 기무라 씨를 찾았지만 없었다. 이리저리 헤
맨 끝에 논에서 그를 발견했다. 기무라 씨는 남에게 빌린 논에서 일하고 있
었던 것이다.
다케야 씨의 말을 듣고 기무라 씨는 한걸음에 사과밭으로 달려갔지만 정작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웃 밭 농기구 창고 뒤에서 고개만 살짝 내밀
었다. 정말 하얀 꽃이 보였다. 밭 한가득 하얀 사과 꽃이 피어 있었다. 몇 년
동안이나 꽃을 피우지 않던 사과나무들이 일제히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기무라 씨는 그날 몇 번이나 꽃을 보러 갔는지 몰랐다. 저녁엔 축하하려고
술을 들고 가서 사과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 부어줬다. ‘고맙다, 꽃을 피워
줘서 고맙다’ 하면서. 물론 그도 마셨다. 어쨌든 그렇게 기분 좋은 꽃구경은
그 후에도 그 전에도 없었다. 술을 마시고 사과나무 아래 드러누워 한없이
꽃을 올려다보았다. 사과 꽃이 이토록 아름다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가을 기무라 씨는 탁구공만한 크기의 사과를 산더미처럼 수확했다.
사과 열매를 크게 만들려면 꽃을 솎아내 열매 수를 적절히 줄여 주는 꽃따
기 작업이 필수다. 그 꽃따기 작업을 어중간하게 해버린 것이다. 9년 만에
핀 꽃이 아까워서였다. 크기는 작아도 당도가 높았기 때문에 사과 주스 원료
로 팔았다. 한 상자에 사과 20킬로그램을 채워 주고서 받은 돈은 160엔. 밭
의 수확물을 다 합해도 수입은 만 엔이 채 되지 않았다.
이듬해엔 꽃따기를 해서 사과가 조금 커지긴 했지만 농약을 써서 키운 사
과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는 무작정 오사카로 사과를 갖고 갔다. 그리
고 오사카 성 공원 한쪽에 좌판을 펼쳐 놓고 팔았다. 저녁때까지 목이 쉬어
라 무농약 무비료를 호소했지만 사과는 거의 팔리지 않았다. 겨우 몇몇 사람
이 사주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기뻐서 준비해 간 종이 봉지가 미어질 정
도로 사과를 가득 담아 주었다. 그런데도 싣고 온 사과 열 상자는 거의 대부
분 남아 있었다. 집으로 다시 보내고 싶어도 운송비가 없었다. 차를 가지고
온 감 농가에 다 가져가라고 했더니 흔쾌히 받아 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
다.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후였다. 종이 봉지가
미어질 정도로 사과를 담아 건넨 손님 중 한 사람이 보낸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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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맛있는 사과는 처음 먹어 봤습니다. 보내 주세요.’
편지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런 식으로 사과를 사겠다는 손님이 늘어났다.
기적의 사과가 만들어낸 기적
1991년 가을, 태풍이 기무라
씨의 마을을 휩쓸고 지나갔다.
사과 농가들은 치명적 피해를
입었다. 사과가 거의 다 떨어졌
을 뿐 아니라, 사과나무까지 뿌
리째 뽑혔다. 그런데 기무라 씨
의 밭 피해는 아주 가벼웠다. 다
른 밭에서 뽑힌 사과나무가 날
아올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었
는데도 80퍼센트 이상의 열매가
가지에 남았던 것이다. 사과나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뿌리가 보통 사과나
무보다 몇 배 깊이 뻗어 있다는 이유뿐만이 아니었다. 기무라 씨의 사과는
가지와 열매를 연결하는 꼭지가 다른 나무보다 훨씬 두껍고 단단했다.
2006년 12월 7일 NHK 다큐프로그램 「프로페셔널-프로의 방식」에 ‘사과
농가 기무라 아키노리 씨’ 편이 방송되면서 일본 열도에 ‘기적의 사과’ 열풍
이 불었다. 방송이 나간 후 ‘기무라 씨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다’ ‘기무라 씨
의 사과를 꼭 한 번 먹어 보고 싶다’는 사연이 담긴 7백 통이 넘는 메일과
편지가 NHK로 몰려들었다. 기무라 씨의 집으로 하루 동안 350건의 주문이
폭주하기도 했는데, 현재 기무라 씨의 개인 거래 고객은 2700명이 넘는다.
20년이 지난 지금 기무라 씨의 사과는 농약을 친 것과 비슷할 정도로 크고
탐스럽다. 맛은 훨씬 좋다. 사람들은 어느새 사과 심까지 우걱우걱 깨물어
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서는 놀라곤 한다.
한창 어려울 때 기무라 씨는 여러 번 한밤중에 일어나 아무도 모르게 사과
밭을 찾았다.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사과나무를 정성스럽게 어루만지며 제
발 힘 좀 내달라며 속삭였다. 그런데 몇 년 후 놀라운 일이 사과 밭에서 일
어났다.
아무리 정성을 기울여도 말라 죽는 사과나무는 있기 마련. 그런 나무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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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살펴보던 기무라 씨는 기묘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말라 죽은 사과나
무는 일정하지 않았고, 장소에 따른 규칙 같은 것도 없었다. 강한 사과나무
는 살아남고 약한 사과나무는 말라버렸다. 그런데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도미노를 쓰러뜨린 것처럼 한 줄의 사과나무만 전멸했던 것이다. 기무라 씨
는 지금까지도 그 일을 뼈아프게 후회한다. 기무라 씨가 말을 건네지 않은
사과나무들이 한 그루도 남지 않고 말라 버린 것이다.
이시카와 다쿠지, 《기적의 사과》, 김영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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