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이 거짓된 허상을 주입해 인간을 통제한다는 이 설정은 대단히 낯익지 않은가요? 바로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빅 브라더 대신에 인공지능이 들어섰다고 하면 되겠지요.
그 키 메이커를 차지하기 위한 길은 험난합니다. 워쇼스키는 키 메이커를 데려오는 그 과정을 묘사하기 위해 2백 4십만 달러를 들여 미국 알라메다 해군기지에 3.2Km에 달하는 고속도로를 직접 건설했다고 합니다. 이 고속도로에서의 추격신이야말로 이들이 가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활극이라 해도 되겠지요. 캐딜락을 몰고 달아나는 이들을 추격하는 트윈스, 결코 닮지 않았는데 메두사가 생각나는 것은 그 머리칼 때문인가요.
키 메이커를 뒤에 태운 트리니티가 오토바이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립니다. 아니 고속도로를 최고속도로 달리는 것만으로는 자극이 부족했는지 아예 역주행하지요.
역주행, 여기서 저는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모피어스와 요원이 달리는 트레일러 위에서 격투를 벌이는 장면은 그런 대로 참을 만 했지만 마주 오는 차들 사이를 전혀 흔들림 없이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모습에서는 도저히 이입이 되지 않더군요. 아마도 고속도로 역주행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아니 한계를 넘어서면 오히려 둔감해지기 때문이랄까요. 하지만 이 장면들은 이 영화에서 가장 정성을 들였을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요.
그 만큼의 무게가 키 메이커에게는 실려 있다는 그런 생각이었겠지요. 감독은..그런 의도를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은 일 아닐까요.
감독은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해 이름을 차용했고 그 이름 속에는 문화가 녹아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다시 키 메이커로 돌아가겠습니다. 두꺼운 안경을 끼고 어수룩한 모습(제게는 전형적인 중국인 아버지로 보입니다만 이 또한 할리우드가 우리에게 심은 이미지가 아닐까요. 그러나 키 메이커를 연기한 그는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합니다.) 의 그가 내뱉는 대사를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그에 따르면 아마도 권력 다툼에 희생양이 되었을, 그리고 해결책을 알고 있을 이 어수룩한 모습의 동양인에게서 그토록 의미 깊은 대사가 나옵니다.
권력 다툼이라...
하나 떠오르지 않나요? 페르세포네의 남편 말입니다. 그라고 키 메이커의 용도를 몰랐을 리 없습니다. 오라클이 알고 있는데 그, 메로빙기언(Merovingian)이 모르다니요. 그 오랜 세월동안 붙잡아두면서 메로빙기언은 키 메이커를 갖가지 용도로 활용했습니다. 한 세계를 건너뛰어 다음세계로 가는 수단으로요. 주로 방어에 치우친 것이긴 하지만..
그리고 그, 메로빙기언 또한 프로그래머이기도 합니다. 궤변, 장광설을 늘어놓기는 하지만 그는 자신이 유능한 프로그래머라는 사실을 남김없이 드러내 보이지요. 그렇다면 메로빙기언, Merovigian 독특한 이 이름은 무엇일까요? 메로빙거 왕조의 사람이라는 뜻일 테지요. 유럽의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던, 유럽이 아직 프랑스와 독일로 갈라지기 전, 로마와 게르만만이 존재하던 그 시기에 존재했던 메로빙거왕조의 세계는 고대 민속로마학자들이 “암흑”과 “야만”의 세계로 몰아 부쳤던 그런 세계입니다. 왜 그가 메로빙기언이라는 이름을 가졌는지 알 수 있지 않나요. 그가 불어를 사용하는 이유도 설명이 되지요. 감독은 메로빙기언이라는 이름을 차출함으로써 여러 가지의 의미를 불어놓고 있습니다. 물론 서양인이 가진 왜곡된 인상이지요. 그가 왕족이라는 것, 그리고 바람둥이라는 것, 그리고 암흑과 야만의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 따라서 정말로 그 이름에 어울리는 명부의 왕다운 이름이 되겠지요.
그가 레스토랑의 한 여인에게 케이크를 보내는 장면을 기억하실 겁니다.
케이크를 먹은 그녀가 어떻게 되었던가요? (메로빙기언이 허겁지겁 쫓아 나왔을 때 그는 어디에 있었지요? 누구와 있었는지는 말 안 해도 다들 아실 겁니다.)
또 그가 부리는 부하들을 보십시오. 그 부하들이 삭제될 뻔한 프로그램들이라는 사실도 얼마나 매트릭스를 잘 알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는 누구일까요? 오라클도 알고 있는 그는?
혹 그 역시 해커가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선택된 “그”의 후보자가 아니었을까요?
“그”가 되기에는 능력이 부족한 해커? (네오 역시 해커였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더욱 많은 힘을 갖고 싶어 하지만 역부족인? 이제는 밤의 왕이 되어버린?
그야 말로 자신이 왜 있는지 모르는 그런 고통스러운 존재가 아닐까요. 한낱 쾌락만 좇는 가벼운 존재가 되어버린..
그러나 키 메이커는 다릅니다.
능력은 있으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키 메이커는 자신이 소용 닿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말하지요.
I don't know why I'm here. But I know what I have to do. And I do what I'm meant to be. (제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꼭 이런 대사는 아니었겠지요. 이런 뜻이었다고 생각되기에 그냥 영어로 옮겼습니다.)
내가 왜 여기 와 있는지는 모르되 자신은 해야 할 일을 알며 자신의 가치는 거기서 끝난다고 말입니다. 그 말은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는 모르되 자신의 쓸모는 안다는 뜻일 겁니다. 쓸모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면서도 자신은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 인생에 충실히 살아온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아마도 우리는 도구에 지나지 않을 자신의 생을 소중히 여기기보다는 그 도구를 휘두르는 사람이 되고 싶어 안달하면서 살아오지 않았을까요. 그러다가 결국은 쓸모 있는 도구가 되어 소용에 닿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키 메이커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프로그램일까요? 왜 여기 있는지 모르되 자신의 가치는 안다는 말에서 미루어 짐작해보십시오. 페르세포네가 했던 말, 삭제될 뻔한 프로그램들을 잡아두고 있다고 한 그 말을 기억해보시기를...
이제 키 메이커와 오라클의 역할을 생각해보지요.
그런데 한 가지 의문, 오라클은 사람일까요? 아마 눈치 채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오라클은 네오를 도와주는 걸까요? 키 메이커는 정말로 네오를 돕고 있는 것일까요?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한 모든 행동은 네오를 source로 안내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키 메이커는 이 영화에서 그토록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훨훨 날아다니는 다른 주인공에 비견한다면 답답할 정도지요. 그가 표현하는 인물은 두꺼운 안경과 어수룩한 표정 그리고 옷차림 그리고 동양인이며 그가 내놓는 대사들. 가장 결정적인 것은 키 메이커, 열쇠 만드는 사람이라는 점이지요. 생각해보십시오. 매트릭스는 기계가 좌지우지 하는 사회이면서 네오는 그런 구식 설정이 필요 없는 해커입니다. 하긴 구식이 어울려 있는 것이 눈에 띄지요. 유선 전화기라던가 공중전화, 게다가 열쇠로 문을 열어야만 하는 그 상황.. 게다가 키 메이커는 언제나 열쇠를 잔뜩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런 설정을 했을까요? 어울리지 않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인식에서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우리는 언제나 문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통과과정이지요. 그 문을 여는 것은 열쇠입니다. 따라서 그 열쇠를 만드는 사람은 다른 세계를 열어주는 사람이지요. 아직 우리는 그런 과정 생략을 용납하고 싶지 않아 합니다. 우리는 문을 통해서 미지의 세계의 문턱을 넘지요. 미래로 들어가지요. 키 메이커의 역할은 바로 그것이지요. 문을 통해 원천으로 안내하는 일!
첫댓글 키메이커처럼 미지의 세계 문턱을 넘을 수 있는 키를 가지면 모든게 풀리나요? 문제는 이런 키가 아니라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우리의 탐욕과 비겁이 아닌지.... "왜 태어났는지 모르나 내가 해야 할 일을 알며..."의미심장한 말 같습니다. 좋은 글에 감사~~~
자물쇠 없이 사는데 익숙한 자연인에게는 키는 필요없는 물건이지요 현대는 안 만들어도 될것 잔뜩 만들어 놓고 그걸 다시 푼다고 생야단이고 ... 난 그냥 살래요 대문없이 자물쇠없이 열쇠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