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일기(46) - 역과 역 사이를 걷다
-김해의 <한림정역>과 <진영역>-
1. 역에서 내려 다음 역까지 걸을 때 만나는 풍경은 기차를 타고 바라보는 모습과는 분명 다르다. 원경과 근경의 구체적인 차이 뿐 아니라 풍경 속을 실제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경험한다는 것’의 느낌을 만들어준다. 그런 이유로 기회가 된다면 역과 역 사이를 걸으려 한다. 역과 역 사이 걷기에 가장 좋은 코스 중에 하나는 경춘선 코스이다. 특히 <대성리역>에서 <강촌역>까지는 북한강 줄기를 따라 걸을 수 있어 강과 산 그리고 논밭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계절의 변화 속에서 즐길 수 있다. 양산의 <물금역>과 <원동역> 사이 또한 낙동강의 풍성한 흐름과 함께 경상남도 지역의 독특한 색채를 만날 수 있어 추천하고 싶은 코스이다. 특히 <원동역> 주변은 마을과 산이 정갈하면서도 역 앞에는 사색에 빠질 수 있는 공간도 있어 ‘홀로 여행자’에게는 특별한 기억을 주는 장소라 할 수 있다.
2. 그럼에도 많은 역 사이의 길 중에서도, 가장 기억을 남을 코스는 김해의 <한림정역>에서 <진영역>까지의 길일 것이다. 이 코스에는 ‘화포천 생태 습지 공원’이라는 천연의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져있다. ‘한림정역’에서 조금 걸어 나가면 곧바로 습지공원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습지 사이에 만들어진 길을 따라가면 진한 초록색의 풍경이 끝없이 이어진다. 수없이 많은 풀과 나무가 서로의 구분없이 어우려져 있고, 그 사이로는 낙동강의 지류가 흐른다. 기차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더구나 이날은 엄청난 폭우가 내려 말그대로 자연의 진정한 실체를 온몸으로 체감한 날이었다. 눈앞을 가리는 장댓비 속을 우비를 입고 걷는 기억은, 원래 아름다운 길이지만 특별한 날씨의 변화를 통해 더 오래 남을 추억의 답사가 되었다. 폭우와 함께 울려대는 천둥과 번개의 공포는 아무도 없는 길을 걷는 여행자의 고독과 불안을 상징하는 듯했다. 안내표시를 따라 걸으면 약 1시간 30분 정도면 <진영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3. <한림정역>과 <진영역> 사이의 화포천 습지를 걷는 것만으로 이 길은 더할나위 없이 좋은 길이다. 하지만 이 길의 진정한 묘미 중 하나는 김해의 대표적인 방문지가 된 <봉하마을>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습지를 걷다보면 중간 쯤에 길이 갈라지는 표지가 나타난다. 한쪽은 진영역 쪽으로 직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봉화마을로 향하는 표지이다. 봉하마을은 습지에서 나와 이어지는 소박한 시골길을 따라 약 30분에서 1시간 정도 걸으면 위치하고 있다. 마을입구에는 ‘대통령의 길’이라 이름 붙여진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후 자전거를 즐겼던 장소가 나타난다. 노대통령은 퇴임 후 조용한 이 곳에서 평화로운 삶을 꿈꿨지만, 정치라는 괴물은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4. 노대통령을 추모하는 공간은 기념관과 생태공원 그리고 생가와 묘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념관에는 노대통령이 평소 읽고 생각했던 책들과 이야기들을 모아서 전시하고 있다. 바쁜 정치적 삶 속에서도 항상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그는 많이 읽고, 깊이 읽고, 넓게 읽는 독서광이었다. 그의 진지한 삶의 여정에는 이러한 독서 속에서 만들어진 사색의 깊이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가 잠들어있는 묘소 앞으로 갔다. 비가 와서인지 사람들은 많이 없었고 내가 묘지 앞으로 갈 때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조용히 혼자서 그의 무덤 앞에 섰다. 묘지 옆에는 그가 죽음을 선택한 바위도 보였다. 노대통령의 무덤은 소박하면서도 깊은 울림이 있었다. <종묘>에서 경험했던 죽은 자의 위엄과 고독이 그의 무덤에서 느껴진다. 묘소는 어떤 화려한 장식이나 부가물없이 오직 ‘너럭바위’ 하나만이 덩그란히 올려져 있었다. 그 무덤을 둘러싸고 넓은 공간이 침묵으로 호위하고 있는 것이다. 남방의 고인돌을 닮은 그의 무덤은 소박하지만 치열하게 살아왔던 한 인간의 진실이 담겨져 있었다. 특히 무덤 앞에 새겨진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입니다.”’라는 말은 현시대에 주는 하나의 메시지인 듯 여겨졌다.
5.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특별한 사건이었다. 별다른 정치적 세력이 없던 인권변호사가 국민들의 지지를 획득하여 대통령이 되었던 일은 우리의 민주적 역량이 강화되던 시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가 사망한지 20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우리 사회는 다시 엄청난 퇴행의 위험과 마주하고 있다.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극단적인 ‘반공’의 어두운 이념적 공세가 다시 대통령을 비롯한 부역자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반공’이라는 하나의 절대적 이념 아래 국민들에게 치명적인 해악을 가했던 이승만 대통령과 백선엽 장군을 국가의 영웅으로 만들려하고 있으며, 위대한 독립투사인 ‘홍범도’를 격하시키고 말살시키려는 시도를 거리낌없이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라는 가치를 특정 집단의 특권과 이익을 지속시키려는 의도로 오남용하면서 모두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 우리가 오랫동안 쌓아올렸던 민주적인 절차와 제도의 변화가 다시 소수의 독단적인 행위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지금, 중요한 것은 노대통령의 말처럼 ‘깨어있는 사람들의 집단적 행위’가 필요하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경계할 것은 퇴행을 이끄는 극우적 세력들도 또한 그들 스스로는 ‘깨어있다’는 말을 남발하고 있으며, ‘자유와 공정’이라는 민주적 가치를 제멋대로 개념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단어와 개념의 원래적 의미와 적절한 적용을 회복시키는 철학적 작업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6. 공교롭게도 세차게 내리던 비는 봉하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사그려졌다. 덕분에 그의 묘소를 참배할 때는 불편하지 않게 그의 묘소 앞에 설 수 있었다. 민주주의의 위대성은 다양성과 관용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많은 사람들의 자유가 확산되도록 설계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무현은 그것을 강조했고, 특권 계층의 독점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으로는 실패했고 조롱 속에 비참한 죽음을 맞아야 했다. 그만큼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극우적 세력의 힘이 강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 실체가 지금 윤석열 정부의 탄생과 그것을 지속시키는 움직임에서 분명하게 파악된다. 윤석열은 최근 아주 중요하면서도 정확한 말을 했다.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념’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반공’과 ‘자유’를 내세웠다. 하나의 독단적인 이념을 통해 수많은 다른 생각을 잠재우고 탄압하려는 독재적 망령이 도발한 것이다. 하나의 사고가 지배하는 사회는 반민주적인 전제사회이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도 ‘실용적 삶’을 넘어선 국가의 방향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노무현 묘소의 ‘민주주의’와 ‘깨어있는 시민’은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사실과 시민들이 그 주체임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7. 봉화마을에서 진영역까지 길 안내는 조금 부실했다. 새로운 길을 가려다 길을 잘못들었다. 잘못된 길은 길을 연결시키지 못했다. 고생고생하며 숲풀을 헤쳐 겨우 진영역에 도착했다. 방향을 상실했을 때의 우리에게 닥칠 현실을 체험하게 해준듯했다. 이런 실수를 통해 정확한 방향을 찾아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한다. 그 길을 따라갔을 때 길은 아름답고 평화롭다. <한림정역>과 <진영역> 그리고 ‘봉화마을“을 만날 수 있는 이 코스는 아름답다. 다만 정확한 코스를 찾았을 때 발견할 수 있다.
첫댓글 - 역에서 역으로!!!
- 역사로부터 배우는 정치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