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 9월 20일 수 척의 이양선(異樣船)이 인천 앞 바다에 나타났다. 이 함대는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蘭芝島)에 닻을 내리고 수십 명의 해병이 식수 보급을 명목으로 보트에 분승하여 해로를 탐측하면서 강화도의 초지진(草芝鎭)에 접근했다. 강화해협을 경비하던 조선수비병은 수 차례 경고했지만 이들은 듣지 않았고, 이에 조선수비병은 포격을 가했다. 이에 이양선 함대는 오후에 제물포 맞은편인 영종진(永宗鎭)에 대해 보복 공격을 하게 된다. 해병 수십 명이 영종진에 상륙하여 살육, 약탈, 방화를 자행한 뒤 철수하였다. 이 이양선은 일본으로부터 온 ‘운요 호’로서 이것이 일본의 조선침략 단초로 행해진 이른바 ‘운요 호 사건’이다.
조선 연안에 이양선이 출현한 것은 물론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양선은 18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 무렵만 해도 조선정부는 이양선을 그다지 큰 문제로 삼지 않았다. 그래서 초기에 조선 정부에서는 배가 성했을 경우 이들에게 식수와 식량을 보급해주었고, 배가 난파되었을 경우는 그 선원들을 중국까지 호송해주었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들어 양상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1866년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면서 약탈을 저질렀다. 이에 평양군민이 이 배와 무력 충돌하여 배를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이어 1868년 독일인 오페르트가 아산만에 상륙해 통상을 요구하면서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러한 서양 민간인에 의한 도발이 빌미가 되어 서양의 함대가 직접 쳐들어오는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같은 사건도 벌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거듭되는 서양 이양선의 도발에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고 무력항쟁의 의지를 불태우게 되는데, 그러던 중 이번에는 서양이 아닌 일본의 선박이 나타나 무력도발을 저지른 것이다.
미국 페리 제독의 압력에 의해 개항을 하게 된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일본 정부는 이 과정에서 기존의 무사계급의 불만을 살 수 밖에 없었고 이러한 불만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서 대외 침략을 추진하게 된다. 그리하여 일본은 1874년 5월 대만정벌을 단행하였고 뒤이어 일본의 이러한 대외침략의 화살이 조선으로 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은 청은 조선에 자문(咨文)을 보내 이를 경고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이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만정벌을 수행한 뒤 나가사키에 주둔중이며 장차 조선을 정벌하려 한다. 프랑스, 미국도 조선과의 관계가 미해결상태로 있기 때문에 조선이 서둘러 프랑스, 미국과의 통상 관계를 체결한다면 일본이 고립되어 감히 군대를 움직이지 못하고 따라서 한반도의 안보가 보장될 것이다.”
일본은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조선의 개항에 나서게 된다. 대원군의 실각 사실이 일본에 전해지자 일본은 모리야마를 급히 부산에 파견하여 조선의 정세를 탐지하도록 했다. 이에 모리야마는 부산에 도착하여 부산훈도 현석운과 국교 재개를 위한 교섭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이 제출한 국서(國書)의 서식이 종래와 다르고 대마도주 무네 씨의 직함이 다르다는 이유로 국서의 접수를 거부했다.
조선이 이렇게 일본과의 국교 수립에 소극적인 입장을 취한 표면적인 이유는 이러한 외교상의 형식문제 때문이었지만 실제로는 당시 조선 내에서 거론되고 있었던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때문이었다. 즉 일본은 서양과 통교한 후에 서양과 마찬가지로 오랑캐가 되었다는 것인데 일본의 배후에 서양이 있음을 경계한 것이었다. 실제 일본은 조선에 대한 개항교섭에 있어서 자신을 개항시킨 미국의 권고와 지도를 받고 있었다.
이렇게 외교교섭이 난항에 빠지게 되자 일본 내에서는 즉각적인 조선정벌을 주장하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된다. 그리고 한편 조선에 파견되었던 모리야마도 강경한 외교노선을 주장하는 건의서를 제출했다.
이에 의하면, 첫째 조선은 지금 내홍(內訌)이 심하고 만약 대원군이 재 득세하면 또 다시 쇄국정책이 강화될 것이므로 쇄국양이당이 세력을 만회하기 전에 무력을 사용하면 조선개항은 성취될 수 있다는 것과, 둘째 일본 군함 1-2척을 파견하여 해로를 탐측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이면 일본이 대한교섭에 유리한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이러한 모리야마의 건의를 받아들여 1875년 5월 초 운요호와 제이정묘호 등 군함 2척을 부산에 파견했다. 운요 호가 5월25일 부산에 입항하자 현석운은 왜관을 방문하여 이에 항의했지만 함장 이노우에는 이를 무시하고 동해안으로 북상하여 영흥만까지 순회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그 뒤 운요 호는 남해와 황해를 거쳐 강화도로 접근하여 마침내 운요호 사건을 발발케 한 것이다.
일본은 운요 호 사건을 빌미로 하여 1876년 2월, 조선에 군함과 함께 전권대사를 파견하여 협상을 강요했다. 이에 조선정부도 국제 관계의 대세에 따라 일본과 수호통상관계를 맺기로 하고 신헌을 강화도로 파견하여 일본의 전권대사인 구로다 기요타카와 협상케 한다. 협상의 결과 두 나라 사이에는 12개조로 구성된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는데 그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 1조,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제 2조, 양국은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교제사무를 협의한다.
제 5조, 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허여한다.
제 7조, 조선은 연안항해의 안전을 위하여 일본 항해자로 하여금 해안측략을 허용한다.
제 10조, 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
제 11조, 양국 상인의 편의를 꾀하기 위해 추후 통상장정을 체결한다.
즉 제 1조 조선이 자주국으로서의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하는 조항은 조선에 대한 청국의 종주권을 부정함으로써 일본의 조선침략을 용이케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를 위해 조, 일간의 역사적 교린관계를 근대적 불평등 관계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제 5조는 부산이외에 원산과 인천을 개항하게 함으로써 단순통상 이외에 정치, 군사적 침략의도를 내포한 것이며, 제 7조는 조선연해 측량권을 얻음으로써 군사 작전시 상륙지점을 정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밖에 개항장 안에 조계(租界)설정 영사재판권 인정 등의 조항이 명시되어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침략의 속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 조약에 따라 그 해 7월 다시 일본과 조일수호조규 부록 및 무역장정이 체결되는 데 이를 통해 개항장에서의 일본 거류민, 거주지역의 설정, 일본 화폐의 유통, 조선 국내에서의 일본 외교관의 여행자유 등이 허용되었다. 이러한 제반 조약 내용은 명백히 조선에게 불리하게 되어있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러한 불평등 조약은 일본이 미국과 개항할 때 강요받은 것이었는데 조선과의 조약에서는 거꾸로 이를 조선에 강요하였던 것이다.
강화도 조약은 여러 가지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 중에서도 조선은 강화도 조약을 통해 세계를 향해 문호를 개방하여 서양의 신문명을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열강침략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이러한 열강의 침략 첨병으로서 조선에 진출하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