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암의응전, 적병엉덩이명중,히데요시 해전금지령, 진주대첩
(1592.08.22~1592.12)
모리 요시나리가 지휘하는 일본군은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삼척에서 태백산맥을 넘어 정선, 영월, 영주, 단양, 홍천, 평창 등지를 거쳐 8월 중순에는 원주를 향하고 있었다. 당시 원주 목사 김제갑은 68세의 고령으로, 원주에는 지난 4월 탄금대 전투에 무기와 병력을 지원했던 터라 병력과 무기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에 김제갑목사는 원주에서 동쪽 30리 지점인 치악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영원산성으로 들어가 험준한 지형을 의지하여 적을 방어할 계획을 세운 후 군, 민 남녀 4천여 명을 이끌고 8월 22일 영원산성으로 들어갔다. 영원산성에는 미리 한 달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과 모을 수 있는 무기도 모두 모아서 운반해 놓았다.
8월 23일. 김제갑은 휘하 박종남에게 군사 수십 명을 뽑아 원주 남쪽의 가리령에 매복시켜 두었다가 일본군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박종남은 매복을 하지 않고 근처에서 휴식하고 있다가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쫓겨 돌아왔다.
25일 아침.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김제갑은 군민을 독려하여 활을 쏘고 돌을 굴려 일본군의 접근을 저지하며 항전하였으나, 저녁 무렵에 일본군의 돌격대 수십 명이 절벽을 타고 올라와 성 안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3천여 명의 일본군이 일제히 돌격해 올라왔다. 성 안에는 화살도 바닥이 났고, 마침내 성은 함락되었다.
이날의 전투에서 원주 목사 김제갑은 전사하였고, 그의 처도 자결했다. 그리고 둘째 아들 김시백도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연안은 곡창지대인 연백평야가 있는 곡창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진주해 오지 않은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전 이조참의 이정암은 피난길에 오른 조정을 따라가지 못하고 가족을 이끌고 항해도 해주와 평산등지를 전전하다가 8월 22일 백천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김덕성과 박춘영등의 추대로 의병장이 되어 도내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자, 백천과 연안에서 5백여 명의 군사를 모을 수 있었다.
이 때 일본군은 제3번대 구로다 군이 황해도를 점령하기 위해 평양에서 평산, 백천을 거쳐 해주로 향하고 있었다. 이정암은 분조의 왕세자 광해군으로부터 황해도 초토사라는 직함을 받고, 자신이 전에 수령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연안부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고을 사람인 송덕윤과 조광정이 1백여 명의 사람을 모으고 그를 맞이하며 “공께서는 이 곳에 전일 부사로 계실 때 많은 선정을 베풀어 그 은혜가 아직도 남아 있으니 부디 떠나지 마시고 이 곳을 지켜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당시 황해도와 평안도, 함경도 등 이북 지역에서는 평소 관원들과 조정의 탐학으로 인해 민심의 이탈이 큰 지역이었다.
이정암은 예전 연안 부사와 평산 부사를 지내면서 사심없고 공평하게 업무를 행하여 그 곳에는 아직도 그를 기리며 추앙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자 이정암은 흔쾌히 승낙하며 “내가 드디어 죽을 곳을 찾았도다” 라며 그는 부민들과 함께 해주로 향하는 일본군을 저지키로 하고 연안성의 성곽을 수리하고 군량을 모으는 등 방어 준비를 하였다. 연안성은 전쟁 한해 전인 1591년 전쟁을 예언하고 있던 조헌이 당시 연안 부사인 신각에게 전쟁에 대비하여 성을 수리하라는 편지를 보내었는데, 신각이 이에 응하여 성을 수리하고 성 안에 우물을 파고 군량과 무기를 비축하는 등 충분한 대비책을 세워두었다.
이에 이정암은 의병군을 훈련시키는 한편, 성 요소요소에 대포를 설치하고, 척후병을 보내어 일본군의 동정을 살피는 등 전투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8월 28일 구로다 나가마사 군의 선봉대 천여 명이 연안으로 진입해 왔다. 일본군의 기세를 보고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이정암에게 성을 탈출하자고 하는 자가 있었으나, 이정암은 “나와 백성들이 생사를 같이 하기로 약속했는데, 이제와서 백성을 버리고 혼자 살 길을 찾는다니 차마 그럴 수 없다. 만약 죽는 것이 두려운 자가 있다면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마음대로 이 성을 떠나라” 하였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분발하여 목숨을 받쳐 싸울 것을 굳게 맹세했다.
일본군은 곧바로 성을 포위한 뒤 사자를 보내 ‘작은 성에서 대군을 당할 수 없으니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 죽음 뿐이다’ 라며 항복을 요구하였다.
이정암은 이를 즉각 거절하고 ‘너희는 병(兵)으로 싸우나 우리는 의(義)로써 싸운다’ 라며 응전의 결의를 보냈다.
적병 한 명이 말 위에 올라타고 성 쪽으로 엉덩이를 까고 손으로 볼기짝을 두드리며, 모욕적인 도발을 하였다. 이에 무사 이출이 활을 겨냥해 쏘니 화살은 정확히 적병의 엉덩이에 명중되었다. 화살을 맞은 적병이 말에서 고꾸라져 떨어지니, 성 안에서 폭소가 터졌다.
뒤이어 오후에 일본군 장수인 듯한 자가 백마를 타고 성 주위를 돌며 접근해 왔다. 그러자 북문 수문장 장응기가 가만히 활을 들어 쏘아 그 적장의 가슴을 명중시켰다. 화살을 맞은 적장이 말에서 꼬꾸라지자 재빨리 성 문을 열고 나가 그 적장의 목을 베어 왔다. 이 일로 인해 의병들의 사기는 충천했다.
그날 밤에 일본군이 비충을 타고 성 안을 내려다보며 불화살로 공격을 하여 성 안에 불이 났으나 마침 역풍이 불어 쉽게 진화하여 더 이상의 소란은 없었다.
29일 이후 일본군은 조총을 난사하며 공격해 왔다. 이정암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일본군에게만 화살을 쏘도록 하여 화살의 낭비를 막으며 장기 항전에 대비하는 한편, 성 밑에 접근하는 일본군들에게는 솥에 물을 끓여서 부었으며, 건초로 거화를 만들어 적진에 던졌다. 이렇게 5백여 명이 지키는 연안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9월 1일이 되자 일본군 3번대 총 지휘관인 구로나 나가마사가 북산(北山)에 대장기를 꽂은 채 진두지휘에 나섰다. 본국에서 12만 석의 영주이기도 한 나가마사는 히데요시를 따라 13세 때부터 전장을 누비고 다닌 역전의 용사였다. 이 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5천여 명으로 늘어난 일본군은 성 밖의 민가를 부수고 산에서 나무를 베어 사다리를 만드는 등, 공성 준비를 하여 일제히 공격해 왔다. 일본군이 총력을 다해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안성을 수비하고 있던 조선군도 총력을 다하여 수비에 임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필사적으로 공격해 와 성이 위기에 처하자 이정암은 죽기를 각오하고 마른 나뭇가지를 쌓은 다음 그 위에 올라앉아서 그의 아들 준을 불러 말하기를 “이 성이 함락된다면 곧 여기에 불을 질러라. 내가 적의 손에 모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겠다”
이정암의 이러한 굳은 결의를 들은 군사들은 더욱 힘을 내어 분전하였고, 백성들 또한 군사들과 협심하여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치열한 격전은 그 날 밤까지 계속되었다.
9월 2일 아침이 밝으면서 일본군이 퇴각한 성 밑에는 사살된 일본군의 시체가 즐비했다. 이대춘 등이 추격에 나서 적군 수레를 빼앗고 소와 말 90여 필, 군량미 130여 석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정암이 승리를 알리는 장계를 올렸는데 ‘적이 28일 성을 포위하였다가 2일만에 포위를 풀고 돌아갔습니다’라고 하니 자신의 공을 전혀 내세우지 않은 이 장계에 조정의 많은 대신들은 ‘적을 물리치는 것은 오히려 쉬우나 공을 자랑하지 않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라며 감탄하였다.
선조는 이정암에게 가선대부 벼슬을 내리고 황해도 순찰사로 임명하였다. 이 싸움에는 충주 목사로 있다가 신립과 함께 전사한 이종장의 17세 된 아들 희건이 참전하여 전사한 아버지의 복수전을 펼쳤다. 그 뒤 연안성은 다음해 봄 일본군이 전면 퇴각할 때 까지 보전되어 충청도와 전라도 및 경상도와 의주의 피난 조정을 잇는 중계역으로의 역할을 다했다.
8월 하순에 일본군은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시키고 있었다. 한성에 주둔하고 있던 가토, 기무라 등의 병력 수만 명이 김해로 집결하였고, 약탈한 물자를 낙동강 수로를 이용하여 부산으로 운반했다.
경상 감사 김수는 이러한 일본군의 동향에 대하여 일본군이 본국으로 철수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일본군의 해상 퇴로를 차단하도록 요청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협의하여 합동으로 일본군의 해상 퇴로를 차단하기로 했다. 앞서 여러 차례의 해전으로 적의 주력은 이미 궤멸된 것으로 보고 적의 본거지를 칠 수 있을만큼 자신이 생긴 것이다.
한편 일본군은 한산도에서 이순신에게 참패한 이후 히데요시의 ‘해전금지령’ 에 따라 부산 서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간 꾸준히 전력을 증강시켜온 조선 연합함대는 이때 판옥선 81척(전라좌,우수영 74척, 경상우수영 7척)으로 늘어났다.
8월 1일부터 23일동안 전라좌수영 함대와 우수영함대가 합동해상훈련을 실시했다.
8월 8일 조정으로부터 출전 명령이 하달되었다.
8월 24일 오후 4시경 여수를 출발한 전라좌우수영함대는 25일 사량에서 경상우수군과 합류한 다음, 계속 이동하여 8월 27일에 웅천에 도착하여 적정을 수집한 결과 ‘고성, 진해, 창원 등지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이 8월 24일∼25일 밤중에 모두 철수하였다’ 는 정보를 입수했다. 조선연합함대는 이들 일본군이 본국으로 철수하려는 것으로 확신하고 낙동강 하구를 봉쇄했다. 그러나 이들 일본군은 진주성 공격을 위해 김해로 집결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8월 28일 낙동강 하구 쪽으로 항진해 나가다가 가덕도 장항포에 함대를 숨기고 사방으로 척후선을 띄워 적진을 정찰했다.
8월 29일 낙동강 하류에 도착하여 낙동강 어구를 수색하던 중 장림포에서 일본선 6척(대선 2척, 소선 1척)과 조우하여 이를 격침시키고 계속 근방을 수색했으나 더 이상 적을 발견할 수 없어 가덕도 북쪽으로 회향한 후 이순신, 이억기, 원균 3도 수사들은 마지막 작전회의를 하며 밤을 지냈다.
연합함대는 일본군이 이미 부산으로 철수한 것으로 판단하고 부산포의 일본군 본거지를 타격하기로 결정했다. 이 때 부산에는 성주에서 남하한 육군 1만여 명과 수군 8천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부산포에는 일본군 함선 430여 척이 정박해 있었다.
9월 l일 새벽 가덕도를 출발한 조선연합수군은 아침 8시경에 화준구미에서 적선 5척, 다대포에서 8척 , 서평포에서 9척, 절영도에서 2척 등 모두 24척과 조우하여 차례로 격파하였다. 이들은 모두가 일본의 부산 본영을 방어하는 척후선들로 추정된다.
오후 2시쯤 절영도 앞 바다에 도착한 후, 먼저 척후선을 보내어 적정을 살피게 하였더니 부산진성 동쪽 세 곳에 470여 척의 적선 정박하고 있다는 보고를 해왔다. 3도 수사는 먼저 작전회의에서 약속하기를 ‘지금은 함대가 이미 노출되어 있으니 만일 위세를 가지고 지금 공격하지 않고 예전처럼 유인전술을 쓴다면 적의 사기를 높여주는 결과’라고 의논하고, 독전기를 휘두르고 북을 두드려 장사진을 짜고 정공법으로 공격하였다.
초량과 절영도 사이 좁은 목을 거북선을 선두로 녹도만호 정운, 이언량, 방답첨사 이순신과 중위장 권준 등이 장사진(長蛇陳)을 형성하여 종대 대형으로 통과하여 넓은 바다로 들어서자 적함 4척이 결사적으로 공격해 왔으나 돌격함대에서 집중공격을 받고 격침되었다.
이때까지 조선수군에게 연전연패한 일본군은 조선연합수군함대의 위세에 눌려 정박한 500여 척의 배에 승선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결국 일본수군들은 감히 맞서 싸우지 못하고 배를 버리고 육지로 후퇴하여 조총만을 쏘면서 저항할 뿐이었다. 조선 수군은 활로 해안의 적병을 견제하면서 총통, 장군전, 장편전, 철환 등을 쏘아 일본군 전함들을 격침시켰다. 오후 3시부터 시작하여 3시간동안의 맹렬한 포격과 충파로 적함 100여 척이 대파 혹은 반파되었다.
이런 와중에 산으로 도망한 일본군이 조선군으로부터 노획한 총통과 대완구를 조선군 포로를 이용하여 발사케 하여 조선 수군에게 피해를 입혔다. 피아간 격렬한 사격전이 전개되는 도중 이순신 함대의 우부장(右部將)인 녹도 만호 정운(鄭運)장군이 선두에서 지휘하고 있었다. 정운은 군사들에게 명을 내리길 “적에게 한 척의 큰 배가 있는데 총통을 발사하여 가장 사납다. 우리는 먼저 그 배를 쳐부수어야 한다” 하고는 군사들을 지휘하며 싸우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전쟁이 발발한 이후 이순신 함대에서 나온 지휘관급 장수의 첫 번째 전사로서 이순신은 “나의 오른팔을 잃었다”며 애석해 하였다.
정운이 전사한 후, 좌별도감 윤사공이 밀집되어 있던 일본군 선단에 화공을 가하여 함선을 소각시켰다. 오후 7시쯤 날이 저물어 더 이상의 공격이 불가능해지자 함대를 철수하여 숙영하고, 다음날 각기 수영으로 귀항했다.
4차출동에서는 적함 약 134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거두었고, 조선수군의 피해는 전사, 부상자 도합 31명이었다. 이 부산포해전이 얼마나 격렬하였는지 이순신 장군은 《부산파왜병장》의 장계에 이렇게 적었다.
“그동안 4차례 출전하고 l0여 회 접전하여 모두 승리하였으나 만약 장수와 사졸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 싸움보다 더한 싸움이 없겠습니다. 전일의 전투 때에는 적선의 수가 많아도 70여 척 미만이었는데 이번은 큰 적의 소굴속에서 500여 척과 종일토록 접전하여 적선 1백여 척을 깨트리고 적으로 하여금 겁내어 떨게 하였으니 비록 목을 벤 것은 적으나, 힘껏 싸운 장졸의 공로는 먼젓번 어느 싸움보다 훨씬 더 하였습니다.”
이번 부산포해전의 힘겨운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사한 정운은 훗날 공신록에 그 이름도 올리지 못하였는데 선조를 따라 피난행렬에 동행했던 수많은 조정 신료들이 줄줄이 호송공신으로 채택된 것만 보더라도 선조의 인사정책과 그 포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목숨 바쳐 싸운 장수들은 홀대받고 도망가는데 일조한 이들이 공신으로 대접받는 어이없는 경우이다.
7월 27일의 영천 전투에서 일본군이 조선의 의병에게 영천성을 빼앗기자, 경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8월 1일에 양산의 일부 병력을 경주로 이동시켜 방어력을 증강하였다. 하지만 8월 2일 경주를 지원하기 위해 이동중이던 일본군을 김호 의병군이 경주 노곡 부근에서 격퇴시키는 등 경상좌도 일대에 의병군의 활동이 활발해 지기 시작했다.
박진은 개전 초 동래성과 밀양에서 일본군에게 패퇴하였지만, 이각이 처형된 뒤 경상좌병사에 임명되었다.
경상좌도의 의병활동에 자극을 받은 박진은 경주성 탈환을 목표로 권응수의 의병군과 관내 16개 읍병(邑兵)을 통합하여 경주판관 박의장의 관군을 선봉으로 하여 8월 20일에 경주성을 포위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 성 주변의 민가를 불태워 연막을 만들어 일본군의 시야를 가린 후 일제히 공격하였으나, 언양 방면에서 증원된 일본군이 배후에서부터 공격해 와 영천 의병장 정세아, 정의번 부자와 정세아의 막료 최인제, 이득룡 등 6백여 명을 잃고, 안강의 본진으로 후퇴하였다.
박진은 경주성을 탈환하기 위하여 새로운 공성 기구를 개발을 모색했다. 이 때 화포장 이장손이 새로운 무기를 발명하였는데, 이것은 쇠조각과 화약을 섞어서 둥그렇게 만든 다음 표면을 쇠를 입혀서 이것을 대완구포로 발사하면 5, 6백모를 날아가서 땅에 떨어졌다가 잠시 후에 폭발하는 것이었다. 박진은 이것을 비격진천뢰라 명명하고 이를 이용하여 경주성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9월 8일 해가 지자 박진은 선봉대 1천여 명으로 경주성을 포위하고 본대를 이끌고 성에 접근했다. 성에는 후쿠시마가 지휘하는 일본군 제5번대의 일부인 수천 명의 병력이 있었는데, 이들은 조선군의 야간 공격을 알아차리고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일본군은 성 위에서 조총을 쏘아 조선군의 접근을 저지하고 있었다.
박진군은 은밀히 성 밑에 접근하여 준비해 간 비격진천뢰 수 발을 성 안으로 발사했다. 일본군은 이상한 물건이 날아들자 모여들어 만져보면서 구경했다. 그 때 갑자기 원구가 폭발하였다.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30여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이어서 제 2, 3 탄이 계속해서 폭발했다. 일본군 수백 명이 낙엽처럼 떨어졌다. 성 안은 그야말로 생지옥으로 변했다.
박진은 여기에 더하여 화차(火車)도 동원하여 일본군의 조총에 대응사격을 하며 총 공격을 가하였다.
그날 밤 일본군 잔여 병력은 모두 성을 버리고 서생포 방면으로 후퇴했다. 박진은 비격진천뢰 몇 발로 경주성을 탈환하고 양곡 1만여 석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 진주 대첩
경상 우도 일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던 김면 의병군은 낙동강을 이용한 일본군의 보급선을 수시로 공격하는 한편, 거창 일대로 진격해 오던 일본군 제7번대 별동대 1,500여 명을 금산과 거창의 중간 지점인 우척현 고개에서 격퇴시키는 등 맹위를 떨쳤다.
이러한 김면 의병대의 활동에 진주목사 대리였던 진주 판관 김시민은 진주성을 비워둔 채 1,000여 병력을 이끌고 합류하여 8월 3일에 타카가게의 제7번대 별군(別軍)을 상대로 사랑암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다.
하지만, 진주성의 방비가 허술한 것을 눈치 챈 일본군은 창원과 진해의 병력을 이동시켜 사천을 거쳐 진양으로 진격하였다. 일본군의 이동보고를 접한 김성일은 즉시 김시민을 복귀시키는 한편, 곤양 군수 이광악으로 하여금 응원케 하고 자신도 직접 진주성으로 이동하였다.
김시민이 도착하기 전에 곽재우가 의병군을 이끌고 들어가 지키고 있어서 일본군은 진주성 촉석루 앞까지 왔지만 남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김시민, 곽재우 군이 성문을 열고 강을 건너 공격하여 일본군을 격퇴시키고 추격을 계속한 결과 사천, 진해, 고성까지 모두 수복할 수 있었다. 이에 조정은 김시민을 종 5품 판관에서 정 3품 목사로 파격 승진시켰다.
일본군은 초기의 승승장구하는 기세가 여름 이후부터 차츰 전세가 불리해 지기 시작하였다. 해상에서 이순신 함대로 인해 보급이 어려워지고, 육상에서는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보급로를 위협하였고, 전력을 회복하기 시작한 조선 관군의 반격 등이 그 원인이었다. 전세가 서서히 조선쪽으로 기울자 일본군은 호남지역을 장악하여 전세를 만회할 목적으로 호남 진입의 관문인 진주성에 대한 공격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진주성은 지리적으로 호남에 이르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서 만약 이곳이 무너지면 바로 호남전역이 적의 칼날 앞에 놓이게 된다. 이때문에 진주성을 둘러싼 조선과 일본의 대결은 피아간의 사생결단으로 이루어진 격렬한 전투지가 되었다.
목사 김시민은 취임 후 곧 진주방어를 위하여 병기의 제작은 물론 수성군을 맹훈련시켰다. 화약무기의 중요성을 깨닫고 염초 510근을 제조하였는데 이는 일본군의 제조 방법을 입수, 모방한 것이었다. 그리고 새로이 총통(銃筒) 70여 자루를 제작하여 수성군에게 총통 사용법을 연마시켰다.
진주성 공략에 나선 일본군은 한성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총대장 우키다의 명령으로 가토 기요마사(加藤光泰), 기무라(木村重玆), 하세가와(長谷川秀一), 나가오카(長岡忠興), 오카모토(岡本重政) 등의 정예 병력 2만여 명이 김해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공격준비를 마친 일본군은 군사를 둘로 나누어 9월 24일 김해성을 출발하여 창원으로 진출했다. 일대(一隊)는 노현으로부터, 다음 일대는 웅천으로부터 발진하여 안민현을 넘어 창원에 진입하였다. 창원을 방어하고 있던 경상 우병사 유종인은 관군과 의병을 규합하여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지만 병력, 무기 양면에서 열세였고 경상우도 몇 개 마을의 군사가 일본군의 진군 경유지인 논현에서 방어하려고 했지만 중과부적으로 패전하고 말았다.
9월 25일 유숭인은 그 동안 해체되어 각기 타지역으로 흩어진 군졸들을 다시 수습하여 창원읍성(昌原邑城)을 수복하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불리한 병기와 병력의 열세로 인하여 대패하고 말았다. 조선군의 저항을 물리친 일본군은 곧장 창원성으로 진격하여 그 곳에서 민가를 분탕질하고 나서 사화촌으로 물러나 그 곳에 주둔하였다.
유숭인 군을 격퇴한 일본군은 그 기세를 이어 다음날인 25일 마산을 거쳐 곧장 함안까지 진출, 함안에서 약 1주간 부대를 정비한 후 10월 3일 다시 부대를 둘로 나누어 진주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이 무렵 경상 우감사(右監司) 김성일은 일본군 대병력이 진주성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 목사 김시민으로 하여금 관민을 모아 방어태세를 강화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남원에 집결해 있던 임계영 등 의병들을 진주로 이동시켜 진주성 방어를 지원하게 했다.
일본군의 공세가 임박해오자 진주목사 김시민과 판관 성수경 등이 3천 8백여 명으로 진주성을 방어하고 전라 의병장 최경회, 경상 의병장 곽재우 등과 김준민, 최강, 이달, 정기용, 심대승 등이 이끄는 관군과 의병들이 성 외곽을 방어하기로 하였다.
이때 창원성에서 후퇴해온 경상우병사 유종인이 성 안으로 들어가 함께 방어할 것을 요청하자 진주목사 김시민은 직책상 상급자인 유종인이 합세할 경우 지휘체계에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이를 거부하자 유인종은 때마침 이곳에 도착한 정득설, 주대정 등의 관군 400여 명과 합세하여 진주성 남쪽에서 방어 임무에 들어갔다.
이때 곽재우는 목사 김시민이 병사 유숭인을 진주성에 입성시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감탄하기를 ‘이런 계책은 족히 진주인의 복이다(此計足以完城 晉人之福)’ 라고 크게 칭찬하였다.
일본군의 선발대 1만여 병력이 10월 4일에 진주 동쪽의 마현에 도착하여, 5일부터 본격적인 진주성 공성전을 대비하여 진주성 주위의 지원부대를 제압할 목적으로 가장 먼저 유종인의 관군을 공격하였다. 성 안으로부터 일체의 도움을 받지 못한 유숭인 군은 적의 대군을 맞아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족으로 2천여 병력이 모두 전멸했다.
10월 6일 아침 일본군 주력 부대가 도착하여 남강을 도하하여 진주성 동, 서, 북 3면을 포위하였다. 성을 포위한 일본군은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일대는 동문 밖 순천 당산 위에 진을 치고, 일대는 봉명루 앞에 진을 치고, 남은 일대는 별동대로 삼아 봉명루 앞의 부대와 수시로 합세하면서 전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이기로 하였다. 성을 포위한 일본군은 그러나 성 외각의 여러 의병 부대가 배후를 위협하고 있었으므로 곧바로 공격을 시작하지 못하고 대치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에 성밖의 곽재우, 심대승, 최강, 이달 등이 일본군의 배후에서 소규모 병력을 이용하여 횃불을 들고 뛰어다니며 각(피리의 일종)을 불어 심리전을 전개, 진주성 내의 조선군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한편 김시민은 장전(長箭) 100여부를 요청하고 하경해는 야음을 이용하여 남강수로로 진주성에 보급하는데 성공하였다.
일본군은 이틀이 지난 8일 아침에 이르러서야 비로써 진주성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일본군은 사다리와 나뭇단을 쌓아 놓고서 성벽을 넘으려 하거나, 3층 누각으로 된 수레 위에서 성을 향해 조총사격을 가해왔으나, 성 안에서는 군민들이 총통과 궁시를 쏘아 일본군의 접근을 막았으며 돌을 던지고 끓는 물을 끼얹어 일본군의 공격을 격퇴시켰다.
이날 밤 고성 현령 조응, 진주 복병장 정유경이 군사 500여 명을 이끌고 남강 건너편 진현에 나타나 횃불을 올리고 수비군을 응원하였다. 일본군은 1차 공격이 실패한 것이 진주성 외곽에 분산되어 있는 지원부대들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다음 날인 9일 낮부터 공격군을 다수의 소부대로 구분 편성한 후 진주성 외각에 있는 조선군 지원부대들을 공격하여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이러한 병력 분산 작전은 도리어 의병부대들에 유리한 결과를 가져와 단성현 쪽에 있던 일본군을 의병장 김준민 군이 격퇴하였고, 살천 방면에서는 한후장 정기룡과 조기형이 일본군을 패퇴시키는 등 일본군 각 부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김성일의 응원요청을 받고 온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와 임계영 의병군 2,000명이 도착, 성안 수비군과 호응하면서 밖에서 일본군을 견제하였다. 전세가 점차 불리하자 일본군은 계략을 사용해 성 밖의 요소 요소에 복병을 배치한 후 그들 진영에 불을 밝혀 놓고 병기와 물자를 실은 수레를 철수시킴으로써 퇴각을 가장하면서 성 안의 수비군을 밖으로 유인하려고 하였다.
진주목사 김시민은 이러한 일본군의 유인술책에 넘어가지 않고 성의 수비를 더욱 견고히 하였다. 수비군이 속지 않자 일본군은 10일 새벽에 모든 병력을 집중하여 진주성 동문과 북문에 대한 공세를 가하여, 밤을 지새워 성 안팎에서 조선군과 일본군 사이에 사투가 벌어졌다. 이 때 목사 김시민은 동문 북격대에서 전투를 총지휘하였고 판관 성수경은 동문 옹성에서 독전하고 있었다. 이날도 수성군은 진천뢰와 질려포를 발사하였으며 혹은 큰 돌을 투척하여 일본군의 접근을 막았고, 불 붙은 짚단을 던지기도 하고, 끓는 물을 성 아래로 내려 부었다.
성 동쪽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일본군 만여 명은 야음을 이용하여 구북문 밖까지 돌격하여 왔다. 그들은 장제를 소지하거나 방패를 메고 와서 성벽을 넘었다. 갑작스러운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수성군들의 전열이 무너지려 했지만 전 만호 최덕양과 군관 이납, 윤총복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선전하자, 달아났던 병졸들이 다시 모여들어 동문 옹성과 마찬가지로 일본군을 막았다.
격전 중에 주장 김시민이 이마에 총탄을 맞아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김시민이 쓰러지자 곤양 군수 이광악이 지휘를 맡아 뒤를 수습하였다.
16일 아침이 밝아오자 일본군은 더 이상의 공격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였는지, 군사를 수습하여 전사자들의 시체를 모아 화장하는 등 철수 준비를 한 후 오전 11시쯤 전면퇴각하였다. 총탄에 피격된 김시민은 결국 상처로 인해 전사했다.
이것으로 전세는 일본에게 더욱 불리하게 되었고, 조선은 보급창고이자 최대의 곡식창고인 전라도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임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 장기화 되는 전란
개전 첫 해인 임진년(1592년)이 끝나가는 12월 말경, 전라도 감사 겸 순찰사인 권율은 휘하 병사(兵使) 선거이, 소모사 변이중, 조방장 조경, 의병장 임희진, 변사정, 의승군장 처영 등과 함께 정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근왕을 위하여 북상하였다.
이 당시, 일본군은 6만여 명이 한성에 주둔해 있었고, 평양, 개성 등 주요 지역도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어서 의주에 있는 조정에 물자의 조달이 어려웠다. 또한 일본군의 주둔지역에서는 민가에 대한 일본군의 약탈이 심하여 백성들이 산 속으로 숨는 등, 경기·황해도 일대가 적에게 유린되고 있었다. 이에 전주에서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을 저지하고 있던 권율은 한성 탈환을 위한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북상하였던 것이다.
권율은 용인전투에서 남도 근왕군 5만여 명이 궤멸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한성까지 곧 바로 진격하지 않고 수원의 독성산성으로 들어가 지키기로 했다. 이 때 한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총대장 우키다는 권율 군이 독성산성에 주둔하고 있으면 한성의 후방 연락이 위협을 받을 뿐만 아니라, 관서, 관북으로의 보급 추진도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권율 군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우키다는 한성에서 2만여 병력을 차출하여 수원에서 오산, 관천, 용인 등지로 통하는 도로를 차단하고 독성산성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권율 군은 소수 병력으로 타격조를 편성하여 수시로 일본군의 측방을 교란했다.
권율 군이 야간에 기습 공격과 매복작전으로 일본군의 작전을 방해하자 일본군은 적극적인 공격을 펴지 못하고 성 안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막아 독성산성을 고립시키려 했다. 권율 군은 야간에 제방을 막고 있던 일본군을 기습하여 급수원을 재개시켰다.
이 때 전라도 도사 최견이 의병을 모집하여 권율을 지원하러 올라오는 등 증원군이 속속 산성으로 투입되는 것을 본 일본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한성으로 철수하였다. 수일간의 전투에서 농락만 당한 일본군은 추운 겨울 날씨에 더 이상 지구전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성 이남의 경기 지역은 일본군의 활동이 제약받게 되었으며, 경기 일원이 수복되어 갔다.
한편 북쪽에서는 명의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평양 북방에 집결하는 한편, 전국 각지에서 조선의 관군과 의병이 일본군을 압박하는 가운데, 길고 길었던 임진년이 저물고 두 번째 해인 계사년(1593년)이 밝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