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12. 18. 놋 뱀을 바라보라 민21:4-9
현대의 기독교는 하나님을 인간의 이해와 상식이라는 틀에 가두어 두고 있습니다. 즉 자기의 틀 안에서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이해와 상식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이해와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이 있을 때 자연히 그것을 거부하게 되고 반감을 가지게 됩니다.
흔히 말하는 세대 차이라는 것도 이런 경우에 속합니다.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윤리 도덕이 자신의 상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의 상식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이해와 상식은 여러 가지를 기준으로 해서 형성이 됩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문명이 기준이 될 수 있고 환경이 기준이 될 수 있으며 지식이 기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명, 환경, 지식의 범위를 벗어난 일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지 못하게 되고 만약 그 범위를 벗어난 일이 발생하게 되면 그 일에 대하여 반감을 드러내면서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은 서로를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보고 왜 저렇게 궁상맞게 살지 하면서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가난한 자들은 부자들이 돈 좀 있다고 비싼 차를 몰고 비싼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사치라고 생각하며 그들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환경이 이해와 상식의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명이나 환경 지식이 기준이 되어서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 해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공통적으로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세대 차라고 해도 요즘 청소년들의 문화를 어른들이 이해 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것도 역시 자라온 환경이 다른 특정 세대들이 이해 할 수 없는 것이지 모든 세대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공통 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것을 본능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생명에 대한 보호입니다. 인간의 본능은 남녀노소 빈부차이 지식의 차이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동일합니다.
때문에 인간의 본성에서 벗어난 일에 대해서는 세상의 모든 인간은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살아 있는 이상 그 생명을 좀더 연장시키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하여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서 살아있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채 언제나 좀더 잘 살아보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입니다.
옷을 입어도 그 옷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옷을 통해서 자신을 최대한 돋보이도록 애를 쓰게 됩니다. 때문에 내 몸에 편하고 내 마음에 드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꼭 다른 사람에게 이 옷 어떠니? 하고 물어보게 되는 것입니다. 옷을 입었을 때 자기 보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상식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를 지키고 자기를 보호하고 좀더 멋있게 살아 보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오늘도 이 세상의 인간들은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데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이렇게 사는 것이 모든 인간들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과 본성을 뒤엎고 여기에 반대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살기 위해서 살아가는 세상에 죽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16:21)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그의 제자들은 만류하면서 이러한 일이 예수님께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라고 할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였습니다. (마16:23-26)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살아갑니다. 또 자기 생명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정한 이치이고 상식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살기 위해서 사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행동을 하게 됩니다.
교회를 나오는 것도 자기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찾는 하나님은 자기를 살려주는 하나님 자기를 지키고 보호해 주는 하나님 자기에게 도움이 되고 행복하게 해 주는 그러한 하나님을 찾는데 이것이 인간의 상식이고 자기 생각 속에 가두어둔 하나님 즉 종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생각한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들의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여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까지 하나님은 좋은 길로만 인도한 하나님입니다.
애굽의 고생에서 건져내시고 홍해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기들은 살고 원수인 애굽군대는 멸하였습니다. 아말렉 나라를 멸하고 승리하게 하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자기들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으로만 알고 편안한 삶을 살아 왔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고통과 고생으로 이어져 가는 이 길은 자신들이 가야할 길이 아닌데 왜 고난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들은 살아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하고 사는 것도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춘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욕심이고 이들이 가진 하나님의 대한 상식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4-5절을 보면 "백성이 호르 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라고 합니다.
왜 이스라엘이 이러한 말을 하고 행동을 하게 됩니까?
이들은 하나님을 잘못이해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자신들이 왜 세상을 살아가는지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바르게 알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모르면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고 자신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모세가 만들어 놓은 놋 뱀을 바라보는 것이 그들의 삶이 여야 합니다. 놋 뱀이 왜 발생하였습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망하여 범죄 함으로 하나님은 이들을 징벌하시려고 불 뱀을 명하여 이들을 물게 하였고 이 뱀에게 물린 자는 그 뱀의 독에 의해서 무서운 고통 속에서 죽어가게 되었는데 이들은 이 고통을 견디다 못해 7절의 말씀대로 이렇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 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라고 합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라고 하십니다.
놋 뱀이란 이스라엘의 고통과 죽음을 끝낸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이는 모세가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이 지혜를 모아서 만들어낸 지혜의 상징물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여 만드신 하나님의 지혜이고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바라보게 하셨고 이 놋 뱀을 바라본 자는 고통과 죽음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놋 뱀이란 이스라엘에게 고통과 죽음을 가져온 불 뱀의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 놋 뱀은 이스라엘에게 고통과 죽음을 끝나게 한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이스라엘이 놋 뱀을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이 두 가지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는 자신들에게 고통과 죽음을 가져온 것이고 그리고 하나는 자신들의 고통과 죽음을 끝낸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1. 이스라엘에게 죽음과 고통을 가져온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불 뱀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애굽에서 비참한 노예생활을 했어야 하고 뱀에게 물려서 고통을 받고 죽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본래가 죄인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서 삽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수고를 하고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땀을 흘립니다. 인간은 오직 자기의 생존과 자기의 더 나은 행복을 위해서 삽니다. 이것이 인간의 상식이고 본성이며 본능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사는 것이 죄인 된 증거요 죄인의 모습이고 상태라고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하는 것은 그들의 죄를 들추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이 언제나 조건이 좋아서 늘 행복하다면 인간의 죄의 모습이 잘 들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깨끗하고, 정직하고, 너그럽고, 사랑이 있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없고 마실 것이 없어서 생존의 위기가 올 때에 자기만을 위하는 속에 내장된 인간의 본질이 들어 나는데 왜 하나님은 자신들에게 고통의 길로 인도하느냐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죄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인도하십니다.
남보다 뒤쳐지게 해서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발견하도록 하십니다. 물론 망하는 자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죄를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자기백성은 자기의 죄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의 죄를 발견하고 자기는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더럽고 흉하고 이세상의 그 누구보다 삐뚤어져 있는 흉악한 죄인임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고통받고 죽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 드려야 합니다. 지금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고 고통받고 망해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지금 불 뱀에게 물려서 고통 속에 죽어 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벌써 애굽에서 출애굽 할 때에 애굽과 함께 망하고 끝날 인생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은 자신들을 대신해서 희생된 유월절 어린양 때문입니다.
어린양의 희생으로 죽음의 자리에서 그 죽음이 넘어가고 생명이란 엄청난 은혜를 주어 졌습니다. 이 때에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의 흉악함과 무서움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애굽의 죽음이 자기들의 죽음이고 어린양의 죽음이 자기들의 죽음입니다.
죽음 외에는 그 무엇도 자신들에게 돌아 올 것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다면 이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인간들에게 돌아올 분 복은 죽음 외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 고난 비참한 죽음을 한탄 하지말고 이러한 저주를 몰고 온 인간의 죄를 볼 줄 알고 두려워하고 한탄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 뱀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과 이로 인해 만들어진 놋 뱀은 우리 죄가 가져온 결과입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사람은 자신은 이미 죽은 자인 줄 알게 됩니다.
지금 당하는 고통과 자신의 속에서 일어나는 갈증이 죽은 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인줄 알고 자신이 사는 길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놋 뱀을 바라보는 것만이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의 길인 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시하는 남들이 보기 싫어하는 놋 뱀을 바라보게 됩니다.
2. 놋 뱀은 이스라엘에게 죽음과 고통을 끝낼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9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라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 불 뱀에게 물려서 무서운 고통을 받고 죽어 가는데 아무런 인간의 수단도 없이 그냥 장대 위에 높이 달린 놋 뱀을 바라보는 것으로 이 무서운 죽음에서 살아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빅 뉴스 거리가 줄기 세포 이야기입니다.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으로 큰 관심거리고 세계적인 관심거리입니다. 줄기 세포를 만들어 주사바늘로 투입을 하면 반신불구가 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도 일어나 걷는다는 것입니다.
간이 녹아 내린 사람도 이것을 투입하면 간이 새롭게 재생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은 세포를 다시 재생시켜 건강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하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게 되고 국가적으로 엄청난 이익이 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이 초 관심거리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은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니라 바라만 보면 됩니다.
바라만 보면 그 무서운 불 뱀의 독이라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죽음에서 살아나게 됩니다.
단순히 어느 한 부분이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끝나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통받는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아닙니까?
죽음이란 권세에 매여 두려워 떨고 있는 자들에게 죽음으로 사랑을 빼앗기고 슬퍼서 울고 있는 자들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이 아닙니까?
이것이 범죄로 저주받은 인간에게 복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놋 뱀을 누가 바라보게 되겠습니까?
불 뱀에게 물려서 죽어 가는 자입니다.
불 뱀에게 물려서 고통받는 자입니다.
즉 자신이 죄인 인줄 아는 자만이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죄가 이렇게 무서운 형벌을 초래하게 되었음을 아는 자만이 놋 뱀을 바라보게 됩니다. 자신이 죄인 인줄 모르고 죄의 무서움도 모르고 죄로써 주어진 자신의 죽음을 모르는 자는 이 놋 뱀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 놋 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요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십자가에 우리의 죄가 있고 그리고 죄로써 주어진 죽이란 죄의 비참함과 무서움이 담겨있고 이 죄 값을 끝내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창조 해 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도 담겨있습니다.
이 십자가에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용서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것을 아무것도 없고 날마다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어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인간의 죄가 무엇인가 왜 인간이 죄인인가 하는 것이 십자가에 있고 그 죄로 주어진 저주라는 형벌도 십자가에 있고 그 죄가 가리움을 받고 용서받는 것도 십자가에 있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십자가에 나가서 죽는 것도 자신의 영광으로 여기고 기쁘게 받아 드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서 산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의미를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도덕적으로 나쁜 짓을 하는 것 이것을 죄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처럼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않는 것 이것이 죄입니다. 이러한 죄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인 하나님의 무서움 진노가 십자가 위에 쏟아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날마다 죄인임을 확인하며 또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보고 우리의 죄로 주어진 심판의 무서움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고통이나 죽음도 당연하게 받아드리고 순응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날마다 보아야 하는 것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이고 능력이며 사랑입니다.
그의 아들을 희생시키시면서 우리를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우리가 영원히 받아야할 심판을 끝내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들이 십자가의 피 흘림으로 용서가 되고 하나님의 의가 되고 그의 아들이 되고 그분의 몸이 되고 나라가 된 이 엄청난 축복과 은혜를 보아야 합니다.
날마다 바라보면서 이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 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알기에 감사하며 그 분을 붙들고 자랑해야 합니다.
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무엇을 감사하고 무엇을 위하며 자랑하며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해답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밝히 바라보면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음을 알게되고 용서가 여기에 있고 영원한 행복과 소망이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죄인이요 죽은 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만 바라보고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놋 뱀을 바라 볼 때에 그들은 죽음의 고통에서 자유 함을 누린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인간들은 마치 불 뱀에게 물려서 고통 속에 죽어 가는 거와 같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서 만들어진 놋 뱀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