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시에>> 2007년 가을호 게재
시에 기획연재 전문
언어 너머의 시를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문자로 재현한 시, 디카시가 날개를 달았다. 디카시는 단순한 시와 사진이 조합된 시사진(시화)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에 보다 진화된 멀티언어예술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기획연재
디카詩, 날개를 달다 ①‘고성 가도(固城 街道)’에서 ‘디카詩’를 꿈꾸다
이상옥
고성과 디카詩
나는 디카시집 <<고성 가도(固城 街道)>>(문학의 전당, 2004) 후기 <‘언어 너머 시’……>에서 아래와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지난 4월 초순부터 6월 중순 무렵까지 ‘언어 너머 시’의 노다지를 경험할 수 있었다. 고성 가도를 중심으로 한 출근길이나 퇴근길, 산책길, 혹은 연구실 어디서든지 ‘언어 너머 시’가 노다지처럼 보인 것이다. 그때마다 순간 순간 디카로 찍었다.
그 당시 나는 어머니가 편찮아서 고향 시골집에서 마산으로 출퇴근했는데, 그때 고성 가도를 오가면서 디카시 창작과 아울러 이론 정립에 몰입했던 것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시가 언어 너머에도 존재한다고 믿어왔다. ‘언어 너머의 시’는 아직 언어로 표현되지 않았을 뿐이지 완전한 시의 형상을 스스로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그것을 나는 ‘날시’라고 명명한 바 있다.
디카詩는 언어 너머의 시, 즉 날시를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문자로 재현하는 것이다. 날시가 디카로 포착되어 영상으로 액정 모니터에서 컴퓨터로 전송되어 실현되고, 그것은 다시 한번 문자 재현을 통해서 보다 온전하게 실현된다. 즉 자연이나 사물 속의 날시가 ‘영상+문자’로써 형상화되면서 ‘날시’의 ‘날’을 떼고 완전한 시(디카詩)로 드러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에서
디카시도,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것이 꽃이라고 그의 이름을 불러주니까 ‘꽃’이 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자연이나 사물 속에서 언어 너머 시가 시적 형상을 온전히 갖추고 있더라도 그것은 아직 ‘하나의 몸짓’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시인에 의해 포착되기 전까지는 시로서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가, 시인이 디카로 찍어 문자로 재현할 때(이름을 불러주는 것) 비로소 시(디카詩)로서 제대로의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비 내리는 봄날 늦은 오후
구형 프린스는 통영 캠퍼스로 달린다
차창을 스치는 환한 슬픈 벚꽃들 아랑곳하지 않고
쭉 뻗은 고성 가도街道의 가등은
아직 파란 눈을 켜고 있다
-<고성 가도固城 街道> 전문
이 시는 ‘고성 가도’를 출퇴근하면서 쓴 디카시를 묶어서 출간한 디카시집 <<고성 가도>>의 표제시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비 오는 어느 봄날 통영캠퍼스 야간 수업을 하기 위해서 가던 길에 포착한 것이다.
지난 7월 12일 이 디카시의 현장을 찾아 역시 구형 프린스를 타고 달렸다. 이 시를 쓸 때는 봄날이었는데, 벚꽃은 자취도 없고 온통 신록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 시의 현장은 고성터널을 조금 지난 곳에 위치해 있다.
그 당시 고성 터널 가는 길가에는 벚꽃들이 만발했었다. 그때, 터널을 지나기 전에 차를 멈추고 주변의 벚꽃들을 감상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강의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차를 계속 달려야 했었다. 터널을 지나니, 고성 가도의 신호등은 노란불과 파란불이 동시에 켜져 있었다. 곧 빨간 신호로 바뀌게 되는 순간이므로 빨간불이 들어오기 전에 어서 속히 달려가라는 메시지로 읽혀졌다. 이는 삶의 진실을 환기하는 소위 날시였던 것이다. 그래서 운전 중에 그 순간을 디카로 포착하고 문자 재현한 것이 바로 디카시 <고성 가도>다.
고성 공룡세계엑스포 행사장 당항포관광지, 그리고 고성장날 풍경
나는 고성터널을 지나 디카시 <고성 가도>의 현장에서 잠시 상념에 잠기다가 ‘2009 경남 고성 공룡세계엑스포 행사장’인 당항포관광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호수 같은 바다가 있는 당항포관광지
* 상족암 공룡발자국
디카시의 현장인 ‘고성 가도’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바로 당항포관광지다. 당항포관광지는 고성군 회화면과 동해면 사이의 당항만에 위치해 있는데, 임진란 때 이순신 장군의 당항포해전 대첩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당항포대첩에서 선조 25년(1592년)과 27년(1594년) 두 차례에 걸쳐 왜선 57척을 전멸시켰다. 이충무공의 멸사봉공의 혼이 깃든 이 당항포대첩지는 고성군민들이 뜻을 모아 1987년 11월 당항포관광지로 거듭나게 되었다.
당항포관광지에는 이충무공 기념사당, 기념관, 대첩탑 등의 기념물이 있으며 호수보다 잔잔한 당항만을 따라 긴 해안로 동백숲, 모험놀이장, 해양레포츠시설 등 각종 가족놀이 시설이 있다. 그리고 공룡알, 어패류화석 등을 전시한 자연사관, 야생화와 어우러진 자연조각공원 및 수석관으로 구성된 자연예술원, 1억년전 물결자국, 공룡발자국화석 등은 다목적관광지로서의 면모를 골고루 갖추고 있다.
오랜만에 들른 당항포관광지는 공룡세계 엑스포 때문에 더 많이 정비가 된 것 같았다. 당항포관광지는 이제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관광지로 도약하고 있다.
당항포관광지를 둘러보고는 차를 계속 몰아 다시 고성 가도를 달렸다. 갑자기 고성읍 구시장을 둘러보고 싶어서였다. 백석의 <고성 가도(固城 街道)>의 첫 구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백석은 1936년 3월 5일부터 3월 8일까지 <<조선일보>>에 <남행시초(南行詩抄)>를 4회에 걸쳐 연재했는데, 7일 연재한 것이 바로 <고성 가도(固城 街道)-남행시초(南行詩抄) 3>이다.
고성(固城)장 가는 길
해는 둥둥 높고
개 하나 얼린하지 않는 마을은
해발은 마당귀에 맷방석 하나
빨갛고 노랗고
눈이 서울은 곱기도 한 건반밥
아 진달래 개나리 한창 피었구나
가까이 잔치가 있어서
곱디고운 건반밥을 말리우는 마을은
얼마나 즐거운 마을인가
어쩐지 당홍치마 노란저고리 입은 새악시들이
웃고 살을 것만 같은 마을이다
-백석, <고성 가도(固城 街道)-남행시초(南行詩抄) 3> 전문
백석은 1935년 그의 나이 24세 때 어느 날 친구 결혼식 피로연에서 평생의 구원의 여인으로 일컬어지는 통영 출신으로 당시 이화고 학생이었던 ‘난(蘭)’을 만나 그만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래서 백석은 난을 생각하며 통영을 들르고 인근인 고성도 지나게 된 것이다. 그때 노래한 것이 바로 <고성 가도>다. 이 시는 1936년경의 고성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백석이 사랑에 빠진 상태로 노래한 고성의 풍경은 이채롭기만 하다. 개 하나 얼씬 하지 않게 고요하지만, 조만간 있을 잔치를 준비하는 듯 마당귀 맷방석에 빨갛고 노랗고 곱디고운 건반밥(약밥)을 말리는 마을 주변에는 진달래 개나리가 한참 피었다. 그의 눈에 비친 마을은 평화롭고 즐겁기만 하다. 그래서 그에게 고성은 당홍치마 노란 저고리 입은 새악시들이 웃고 살 것만 같은 마을 이미지로 너무나 아름답게 각인된 것이다.
아마, 백석은 사랑하는 ‘난’과 함께 치르고 싶은 혼인잔치를, 평화롭고 아름다운 고성 마을에서 꿈꿨을지도 모른다. 마을의 잔치가 자신과 난을 위한 것이라는 시적 환상에 빠져 흐뭇했을 법하다.
* 상족암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한려수도
* 고성 구시장 풍경
백석의 시에서 노래한 고성장 가는 길 풍경은 이제는 자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고성이 소읍이지만 차량이 즐비하고 도로변에는 현대식 건물들이 죽 서 있었다. “개 하나 얼린하지 않는 마을”이라는 시 속의 마을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고성읍내 외곽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고성 구시장은 어느 정도 옛날 정취가 남아 있을 것 같았다.
역시나 구시장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변한 것이 없었다. 좁은 골목에 전을 펼쳐 놓은 아주머니들이 채소며 과일, 고기 등 잡다한 것들을 파는 모습은 아직 시골장의 모습이었다. 구시장을 잠시 돌아보고는 일정이 빠듯해서 그만 마산으로 급히 돌아오고 말았다.
짧은 일정이어서 아쉬움이 컸지만 디카시의 현장인 가성 가도를 다시 달리며 지난날을 추억할 수 있어 좋았다. 백석이 아름답게 노래한 내 고향 고성, 이 아름다운 고성, ‘고성 가도’를 오가며 나는 디카詩라는 디지털 시대 새로운 시를 꿈꾸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