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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용기
김영삼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이어서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든 빌미를 준 자라는 이유로 내가 쓰레기쯤으로 여기는 이인제까지 이명박 대통령을 지원하고 나섰다. 얼핏 보면 세종시 원안을 고수하고 있는 박근혜 전 대표가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진 형국으로 느껴진다.
그런 박 전 대표를 바라보며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예전에 직장 다닐 때, 내 일이라면 앞장서서 방해하던 동료다.
워낙 똑똑한 친구였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서로 지닌 성품이 달랐기에 그랬으려니 싶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하긴, 매년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 천방지축 날뛰는 내가, 예산을 담당했던 그 친구 입장에서는 싫을 수도 있었으려니 싶어서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하지만 언변이 워낙 뛰어난 그 친구가 내 일에 사사건건 반대한 덕분에 한 번으로 족한 결재決裁받기를 열 번 이상 윗사람 방에 오르내려야 했으니 어찌 짜증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의異意가 있을 리 없는 지극히 당연한 일도 그 친구가 슬쩍 왜곡시켜 윗사람에게 보고하면 다시 바로잡는데 엄청 고생해야 하더라는 거다. 내 판단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증빙자료證憑資料를 준비하는 게 보통 일이겠는가.
둘만의 사이가 나쁘다고 둘만의 문제로 끝나는 건 아니다.
수없이 많은 직원들과 부하직원들, 결국 편 가르기나 다름없는 상황이 연출되는 건 자연스런 섭리라고나 할까. 둘 사이가 지나치다고 느꼈는지 누군가 동료가 그 친구와 화해술자리를 마련하고 나를 불렀었다.
그 때 그 친구와의 대화가 이랬다.
“자넨 왜 그리도 설치는 거야? 이래도, 저래도 봉급은 나오는 게 아냐? 지금 직급만 해도 우리 주제에는 고위직이야. 자네가 아무리 설쳐봐야, 더 이상의 승진昇進은 어려울 걸세. 어디 실력으로 진급하는 세상이던가?”
그 친구의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나의 일에 대한 열정이 승진을 위해 설치는 걸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거야, 너무나 억울하고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어차피 화해라는 걸 하려고 만난 자리니 솔직하게 내 마음을 알려보자 마음먹고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말을 꺼냈었다.
“자네 말대로 내 끗발로는 더 이상 승진이 불가능 하겠지. 내게 정치적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곳에는 학연조차 없으니 아무리 노력해봤자 공염불인 걸 잘 알아. 이만큼이나마 오른 게 이상하다고 여기니까.
하지만 나는 일을 하고 싶은 거야. 기왕에 이곳에 몸담고 있으니, 나를 불태워서라도 하고 싶은 일을 원 없이 하고 싶은 거라고. 승진? 그런 거 원했다면 지급처럼 저돌적으로 일하지 않지. 오히려 몸조심하면서 높은 자리 있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겠지.
자네도 알다시피 하고자 하는 일을 관철시키려고 윗사람과 엄청 많이 싸우기도 했는데 내가 승진 때문이라면 돌았다고 윗사람과 싸우겠냐고.”
솔직히 말한다면 당시 나의 기쁨은 성취감에 있었던 것 같다.
뭔가 기획하고,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여 마침내 성취한 순간의 그 환희에 중독되었을 뿐, 승진 따위를 노린 건 아니었음에도 그 똑똑한 친구 시각에는 그리 비쳤던가 싶어서 허망하기까지 했었다.
내 설명이 부족했는지 술자리 이후에도 그 친구의 해코지는 여전했는데 그가 감사실로 발령받고부터는 자체감사를 받는 일로 엄청 많은 시간을 버려야만 했었다. 심지어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워 징계까지 받을 위기에 처한 일까지 있을 만큼 못살게 굴었었다.
그런 내가 과연 김대중이 집권하고 일 년 만에 스스로 사표를 쓰고 말았다. 보수우익인 내가 김대중 정권에서 할 일이 없으리라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똑똑한 친구는 새로운 상사와 잘 어울려서 잔류殘留했고.
그러나 당시 내가 그토록 음해를 당하면서도 기어이 성사시켰던 일들은 지금도 매년 끊임없이 개최되고 있는 반면, 우리 보수적인 간부들이 떠난 후 뒤에 남았던 그 똑똑한 친구는 한직閒職으로 밀려나더니 결국 정년 전에 퇴직하고 말았다. 남긴 것 없이…….
그런데 지금 4대강과 맞물린 세종시 수정정국에 벌어지는 상황이 옛날, 직장생활 할 때의 그 똑똑한 동료를 연상하게 해주는 느낌이라는 거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의 세종시 대결이 그렇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지닌 데다 이상하게도 적개심에 가득찬 상대를 만나 자신의 소신을 펴나가는 박근혜 전 대표의 외롭고 힘겨운 행군을 이해할 수 있었던 건 내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을 거다.
내가 승진 때문에 설친다고 비난을 받았듯이 차기 대선을 노린 술수라는 터무니없는 음해陰害까지 당하면서도 굳건하게 소신을 굽히지 않는 박근혜 전 대표의 그 용기와 뚝심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도 당시 내 소신이 옳았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차기를 노리는 술수?
수도권 표를 버리고 충청도 표를 얻으려는 미련한 술수도 있던가. 그 따위 단세포적 논평이 국민들에게 먹힐 거라 생각하다니…….
나는 세종시 문제에 있어서 박근혜 전 대표의 소신 행보에는 차기 따위의 정치적 계산은 없다고 확신한다. 이렇게 소신을 지키는 것이 보통의 용기로는 어림도 없다는 걸 내가 알듯, 아무리 큰 힘으로 야비하게 음해하더라도 결국 진실은 드러날 수밖에 없음을 믿기에…….
경선에 깨끗이 승복했고 이명박을 위해 나름 노력했음에도 곧 이어 불어 닥친 공천학살에 끊임없는 해코지를 당하면서도 굳건히 버틴 박근혜 전 대표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었을까.
지난 대선 때, 박 전 대표가 한나라당 집권이라는 대의를 위해 충청권을 다니며 세종시 추진을 약속하며 유세를 했던 노력에 지독한 배신으로 되돌려 준 사람이 이명박 대통령이었음에도…….
그건 진실을 바탕으로 한 자신의 신념이었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아무리 지저분한 음해를 가해도 박근혜 전 대표의 국가와 국민을 위한 신념에 의한 고군분투孤軍奮鬪는 날이 갈수록 그 빛을 더하는 이유가 진실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세종시 계획 자체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나 같은 옹고집 영감조차 이명박 대통령 식 수정안이 옳지 않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었으니 다른 국민들도 박근혜 전 대표의 진심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차라리 이명박 대통령께서 세종시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니 수정이 아니라 아예 폐기처분廢棄處分하겠다고 했더라면, 아니, 수정이라도 좋으니, 사전에 국민들을 납득시킬 노력이라도 선행하고 추진했더라면 내가 누굴 지지하든 상관없이 폐기, 혹은 수정안에 찬성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행정분할 그 자체만은 그리 찬성하지 않기에. 하지만 지금 식의 수정안을 반대하는 건 수정하기 위한 방법이 너무나 많은 무리수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과연 이명박 대통령이 그리도 무리한 방법으로 공약까지 파기하며 악착 같이 세종시 계획을 수정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결코 자연스럽지 못한 대통령의 무리수에 밀려드는 느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여전히 박근혜 전 대표를 죽이려는, 아니,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명박 대통령은 한 마디로 박근혜 전 대표가 두렵기에 그리하는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렇다면 왜 박 전 대표가 두려울까? 진정 양심으로 국정을 운영함에도 박근혜 전 대표가 두려운 걸까? 하늘을 우러러 결코 양심에 거리낄 것 없이 국정을 운영하는데도?
아닐 거다. 뭔가 비양심적인 그 무엇인가가 있기에 차기 권력자가 두려운 게 아니겠는가.
박근혜 전 대표로서도 그동안 온갖 협잡挾雜으로 자신을 죽이기에 혈안이 되었던 대통령을 상대로 이처럼 정면으로 항거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소신행보는 정치적 모험冒險을 각오해야만 가능하다.
이명박 대통령의 근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그분이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씨,
그에 더하여 이인제까지 동원되는 언론플레이를 몰라서 신념을 지키고자 항거하는 것일까.
민주당 전략기획위원장인 전병헌 의원이 ‘여론조사를 통한 여론조작’ 의혹까지 보고할 만큼 치사한 이 대통령의 근성을 몰라서? 아니다. 박근혜 전 대표의 용기는 불의와 타협할 수 없다는 양심에서 출발한다.
세종시 문제가 어떻게 귀결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되더라도 박근혜 전 대표의 양심은 빛이 바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이라는 거대한 힘에 맞서는 것만으로도 박 전 대표는 이 시대에 보기 힘든 훌륭한 정치인이다.
말 한 마디에도 신중하기 짝이 없는 분이기에. 그래서 그분이 한 말은 일단 믿을 수 있기에. 이 시대에 믿음만큼 소중한 가치가 다시없기에.
은혜를 원수로 갚는 건 개인적인 개념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정치도의政治道義마저 팽개친 것으로 보이는 이명박 대통령이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들 보다 더 싫어질까 걱정되는 오늘이다.
글쓴이 : shinwo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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