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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寒士의 문화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寒士정덕수
오로지 죽고싶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 걸 어쩌나!
인생. 비단길이냐, 진흙탕 가시밭길이냐를 가름하는 일은 이미 내 인생의 전반부에서 결정났다. 대한민국이라는 이상한 정서가 지배를 하는 나라가 아니라면 부단한 노력으로 스스로 자신이 목적한 바를 이룰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학벌만능주의 국가며, 영어를 모국어를 버리고라도 배워야 출세를 할 수있는 모순된 국가다. 거짓말일 거 같으면 당장 스스로 대졸이라는 학력을 지녔더라도 밖에 나가서 직장을 구해보면 깨닫게 된다. 그것도 아주 절실하게 말이다.
국졸이라는 학력으로는 아무리 이상이 높고 지니고 있는 다양한 재능과 기술이 있더라도 취직을 할 수 없다. 할 수있는 일이란 것도 요즘 그 직업을 지닌 이들의 입장을 고려해 붙였다고 하는 환경미화원(청소부)이나 막노동판의 날품팔이(좋게 말해 건설역군이다.)외에는 없다. 물론 부모에게 농지라도 물려받았다면 농사를 천직으로라도 하겠다. 하지만 그렇게 물려줄 농지를 지닌 부모가 자식을 무지렁이로 만들지는 않았을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스스로 노력을 하지 않았다.
내게 이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스스로의 노력이란 것이 이 나라에서는 얼마나 부질없는 행동이란 걸 모르는 자들이 하는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는 말이다.
쉽게 이야기를 하자.
노래 ‘한계령’의 노랫말이 된 시 한계령에서를 쓴게 내 나이 18살이다. 이미 선반(쇠로 원형의 공작물을 만드는 기계)을 다룰 줄 알았으며, 전기와 산소용접을 하고 농기계를 정비할 줄 알고, 봉재에 대해서도 미싱과 다양한 봉재공장의 기계를 사용할 줄 알던 나이였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원통 금강운수 영업소에서 소장이 회사에서 직원이나 직원가족, 경유지의 유지에게만 주던 무임승차권을 주게 만들었을까. 금강운수가 원통에서 정비를 할 때 용접이나 타이어의 펑크를 떼우는 일을 내 손을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 할 정도로 노력 했고 기술을 습득했다.
그 무렵이 TV에서 의류광고라면 위크엔드나 반도패션이나 광고를 하던 시절이다. 코리투살이란 콧물감기약을 선전하고, 아이미라는 조미료가 처음 나올 때다. 아마도 나이가 많은 이들이나 기억을 할 ‘진일’, ‘유신’, ‘아세아’가 지금 ‘대동’이나 ‘국제’ 이상의 신용을 갖추고 농촌현대화의 선두에서 활동을 할 때인데, 대동은 이미 석유를 연료로 사용하는 농기계도 내?고 있었다. 그러나 방앗간 기계(발동기)에 익숙한 시골에서는 디젤을 연료로 사용하는 진일이 더 좋은 평을 받고 있었지만 당시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슬그머니 유신과 아세아로 이름이 변경되는듯 하더니 국제상사로 넘어갔다고 했다. 그러곤 얼마 후 10·26이 발생하고 국제도 이름만 국제일 뿐 기업주는 뒤바뀌게 됐다. 삼성이나 럭키금성이 그 이후에 회사의 이미지를 바꾸거나 개명을 했으며, 이고약이 고름을 짜는덴 특효약이던 시절의 이야기가 됐다.
한계령은 바로 그 시기에 쓴 글이다. 16살이던 1979년 10월 27일 새벽 난 원통의 정육점 냉동고를 연결하는 동파이프를 수리하려고 용접기를 끌고 이른새벽 나갔다. 그곳에서 새벽 먼동이 트고도 햇살이 시장통을 비쳐들 때서야 박정희씨가 경호원과 비서진들의 총격전 속에서 빗나간 탄알을 맞고 사망한 걸 알았다.(이 부분에 대해서 왈가왈부 하지 말라. 당시엔 그렇게 보도를 했고 그게 전부인 줄 알던 시절이다.) 그러고도 만 2년 뒤에 한계령을 썼으니 참 세상일이나 세월과는 무관하게 내 살길만 찾으며 살아온 것이다. 광주와 사북을 빼면 정말 세상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을 게 분명한 내 삶이다.
고향이란 곳은 이젠 흉물스러울 정도로 빈집들이 많고 젊은층은 찾기 어려울 정도인 세상으로 변모해 있다. 그런 와중에도 왜 청소부 자리 하나도 차지하지 못하느냐고 물을 것이다.
“시인인데 이런 일 하겠어? 다른 일 찾아봐!”
이게 현실이다.
정말이지. 이젠 딱 이젠 그만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콱콱 막혀오는 숨통을 틀 재주가 내겐 없다. 그러니 그냥 이 순간에서 이대로 명줄을 놓으면 딱 좋겠다.
다만 저 어린 것들 때문에 목숨을 스스로 끊을 수 없다. 내 스스로 명을 다하는 일이란 게 실상 어려운 일이 아니란 걸 잘 안다. 눈에 밟히는 저 어린 것들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할 뿐이다.
저 어린 것들도 아는 눈치다. 아빠의 행동이 여늬날과 조금만 달라도 지 어미가 내게서 받는 느낌과는 다른 느낌이 드는 모양이다. 두 녀석이 입고 즐거워하는 옷을 주머니를 털어 마련해 주니 아빠 한복은 왜 안 하냔다. 엄마와 외할머니를 뵙고 오라하니, 아빠는 옷이 없어 안 가냐고 한다.
삶이란 게 다 이렇겠지 싶다. 그런데도 명절이라고 형제들을 만나면 구구절절 이야기들이 많다. 스스로의 앞가림이나 잘 하면 족한 형편에 남의 사는 모습엔 무에 그리 관심이 지대한지 눈물이 왈칵 솟을 지경이다. 세상 사는 일이란게 늘 그렇다는 건 진작 배웠다. 이젠 형제들을 만날 생각을 접었다. 그나마 신새벽 산을 올라 종일 채취한 나물을 넘긴 물건값이나 빌려간 몇 푼 돈을 갚지못한 이들이 보낸 술이나 과일 같은 선물을 보며 위안 삼아본다.
곧 10월이다. 어느 집안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나도 시제를 지내야 한다. 시제를 지내는 조상님들의 묘소에서 형제는 안 만나도 집안은 만나야 하는데 걱정이다. 한가위나 설이 걱정인 사람은 시제를 한 번 참여해 보면 자연스럽게 깨달음을 얻을 게다.
아, 교회에 나간다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제를 왜 지내는지 모른다면 가르쳐 주겠다.
‘예수는 독생자요. 독생자 예수가 아들은 차지하고 자식을 두지 않았는데 어찌 하나님의 자손이 자넨가? 분명 할아버니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손이고 자식이 아닌가.’
여하튼지간에 내가 시제를 모셔야 하는 지백호할어버님이나 포은할아버님, 사예공할아버님께서 이 못난 후손을 보시면 뭐라 나무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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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寒士의 문화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寒士정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