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했으면 정치깡패 출신 용팔이 김용남씨가 “깡패가 되려면 선배들 양말 팬티 빨고 발치에서
자야 했다. 그러나 지금 애들은 몇 명만 모이면
깡패가 된다”고 개탄했을까. 올 3월에는 ‘낙화유수’ 김태련씨와 호남 주먹계 원로 박종선씨
등 왕년의 주먹 500여명이 모여 “조폭을 정화하겠다”며 ‘정의사회실천모임’이라는 단체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들이 내건 목표는 “청년의 협객화, 건달조직의 의인화”였다.
주먹들 스스로 주먹세계의 타락을 개탄하는 시대에 김두한의 화려한 부활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1974년 육영수 여사 암살사건 때 일본대사관 앞에서 주먹들을 거느리고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시위’를 벌였던 조일환씨는 이 시대 협객의 역할을 이렇게 설명했다. “때로는 국가가
못하는 정의로운 일을 어떤 단체나 개인이 해결하고 죽음이라도 불사할 수
있어야 한다.” 정의도 명분도 의리도 없는
시대에 우리는 김두한이라는 허상을 붙들고 ‘협객’을 그리워한다.
협객시대 다룬 작품은
김두한… 이성순… 최영의… 영화·소설 쏟아질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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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일대기는 1974년 이대근 주연의 ‘실록 김두한’ 이래로 수차례 영화화됐다(김두한은 1969년 제작된 ‘팔도사나이’가 자신의 반생을 그린 영화라고 증언했으나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다른 이름으로 등장한다). 초기 작품들은 일제시대를 풍미한 단순 주먹으로 그려졌으나 90년대 ‘장군의 아들’부터 그가 독립군총사령관 김좌진의 아들로서 일제시대 핍박받는 민중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과정을 부각시켰다.
영화 ‘장군의 아들’의 바통을 이어받은 드라마 ‘야인시대’는 김두한을 더욱 신격화했다. 영화평론가 이상용씨는 “액션의 리얼리즘 차원에서 보면 ‘장군의 아들’은 정통, ‘야인시대’는 변칙”이라고 말한다. 영화 ‘장군의 아들’이 액션을 연속동작으로 찍어 사실적으로 그리려 한 반면, 드라마는 스톱모션을 자주 사용해 속도감과 박진감을 극대화하는 등
마치 만화처럼 만들었다. 내용면에서는 드라마가 김두한의 혈통이나 시대적 배경을 자세히 깔아 그가 ‘항일주먹’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시청자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드라마의 약진에 힘입어 ‘김두한’을 내건 소설들의 경쟁도 치열하다. 드라마 원작소설 ‘야인시대’를 비롯해 오세발의 ‘풍운아 김두한’, 이룡의 ‘야인 김두한’, 홍성유의 ‘장군의 아들’ 등 신작과 구간 소설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다.
한편 장호근의 ‘신무풍지대’는 1950년대 이후 2기 ‘주먹’들의 계보를 총정리해 청소년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그 밖에 김두한과 더불어 한국 최고의 협객으로 떠오르고 있는 시라소니 이성순과 ‘바람의 파이터’ 최영의(193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 가라데의 최고봉인 극진 가라데를 창시한 인물)의 일대기도 제작될 예정이어서 ‘협객’ 바람은 내년까지
영화계를 강타할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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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패란 말은 언제 등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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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폭왈짜’를 연구한 목포대 고석균 교수(역사학)에 따르면 ‘깡패’라는 말의 등장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구한말까지 기록에서 깡패란 말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일제시대 이후 쓰여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8~19세기에 사용된 말로 깡패와 가장 가까운 것이 ‘왈짜’다. 왈짜 역시
무리를 지어 주먹을 쓰는 일종의 조폭들이었는데 이들이 장터에서 의협소설을 팔기도 한 것에서 스스로 협객이 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김두한은 깡패라는 말에 대해 흥미로운 증언을 하고 있다. 동아방송과의 대담에서 그는 일제시대에도 깡패라는 말은 없었다면서 그냥 ‘어깨’라고 하거나 ‘주먹신사’, 조금 고상하게 ‘협객’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깡패’의 등장은 1953년 조병옥, 장택상씨가 주도한 장충단 시국강연장에서였다. 당시 김두한은 조박사의 국민투쟁위원회 경비를 맡았고, 이를 방해하기 위해
유지광이 지휘하는 종로파 수백명이 몰려들어 난동을 벌였다.
이때 유지광 패들은 깡통에다 모래알을 집어넣고 휘두르거나,
깡통에 휘발유를 넣어 불을 질러 위협을 했고 강연이 시작되면 깡통을 두드리면서 방해를 했다고 한다. 장충단 사건을 계기로 언론이 깡패라는 말을 널리 사용하게 됐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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