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보라 연기자
"온몸을 던져 만들어내는 연극 무대박수가 터진다. 이런 행복은 연기생활 30년에 처음이다… 눈에 드러나는 정치만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길은 얼마든지 있다. 연예인이 화려한 TV가 아니라 소박한 연극 무대서 새로 태어나는 것처럼"
한 분야에서 30년 이상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하면 누구나 말을 한다. 그 분야에선 최고가 되어 있을 거라고.
하지만 난 최고가 아니다.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땐 정말 큰 기대와 꿈을 가졌다. 경쟁자들보다 미모와 기량이 뛰어나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그런 대스타를 꿈꾸었다. 어느 정도 그 꿈에 가까이 갔고 난 많은 혜택과 스포트라이트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고 운도 따랐지만 어찌됐든 한때나마 내 실력 이상의 대우를 받았다. 그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난 나의 '존재의 가치'를 왜 새롭게 생각하게 됐을까.
끊임없이 일하며 다른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연기생활을 해왔지만 왠지 모르는 허전함을,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을 지금에야 왜 느끼는 걸까. 지금 최고가 아니라서….
난 늘 내가 최고라고 자부하며 스스로를 격려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얼마 전부턴 30년 이상 해온 연기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방황 아닌 방황을 해왔다. 난 항상 TV나 스크린 속에서만 내 모습을 찾곤 했다. 그게 연기자로서 최고로 인정받는 길이라 여겼다.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연기를 펼칠 기회는 점점 줄었다. 난 그게 세월의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변해가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연기자로 살아남기 위해 캐릭터와 배역의 변화가 필요했고 그 변화를 아픔 속에 선택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들은 "왜 그렇게 변했어? 예전엔 그래도 잘나갔잖아?" "꼭 그런 배역까지 해야 되니?"…. 걱정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빈정대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젠 나를 한때나마 화려했던 인기 배우로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저 TV에서 '철없고 재미있는 아줌마', '못된 시어머니'로 인식될 뿐이다.
그러던 중 뜻밖에 연극 섭외가 들어왔고 흔쾌히 승낙했다. 방황하던 나를 새롭게 일깨워준 것이 바로 이 연극 무대다.
왜 진작 연극 무대에서 내 연기를 맘껏 펼칠 생각을 못했을까. 역시 경제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연극한다면 춥고 배고프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니까. 다른 많은 분야들은 놀라운 성장과 더불어 여유로움마저 가져왔는데 연극은 아니었다. 연극 무대만큼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를 못 느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그런데도 많은 연극배우들이 무대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지금 내가 연극 무대에서 느끼는 것과 다르지 않을 듯하다. 무대 위에서 연기할 때면 항상 나는 '새로운 나'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무대에 서면 흥분과 설렘, 쾌감, 성취감, 행복감 등 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그 어떤 직업에서도 이 많은 것을 동시에 만족시키기란 쉽지 않으리라. 눈속임은 설 자리가 없다. 나 자신의 온 마음과 온몸을 던져 만들어내는 무대는 즉석에서 관객들에게 전달되고 또 그 자리에서 반응이 터져나오는 그 매혹적인 힘을 어디에 견주랴. 많은 연극인들이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무대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을 것이다.
연극 무대를 통해 나 혼자만 변한 것이 아니다. 나를 대하는 내 부모, 내 자식, 내 남편도 나를 그저 TV드라마에 나오는 연예인 또는 매일 대하는 그냥 '그 사람'이 아닌 진정한 '연기자'로 인정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껏 깨닫지 못했던 소중한 것을 내게 일깨워주었다. 난 성인이 된 후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본 기억이 없다. 왜 그랬을까? 그리 어려운 일도, 돈 드는 일도 아닌데…. 아버지는 10년 전에 돌아가셨으니 하고 싶어도 못하고 엄마한테는 쑥스러워서 못한다. 이런 내가 변한 것도 연극 무대를 통해서였다.
연극 속에서 엄마를 저 세상으로 보낸 뒤 딸은 그제야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나도 이런 후회를 남기지 말자는 생각에 맘속에만 묻어 두었던, 내 자식에게는 수없이 했지만 정작 내 부모님께는 한 번도 못한 "엄마 사랑해"란 말을 수많은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대 위에서 전했다.
매번 연극의 막이 내리면 나는 많은 관객들로부터 박수를 받는다. 연기자로서 느끼는 이 같은 행복감은 처음이다. 어느 누가 진심어린 박수를 이렇게 매번 받을 수 있겠는가. 연기자로서 외부로 드러나는 것에만 매달려 왔던 나의 어리석음은 연극 무대를 통해 작은 깨달음으로 바뀌었다.
요즘 선거 때문에 말들이 많다. 누구의 지지율이 어떻고, 누가 누구보다 낫고…. 많은 출마자 중 혹시 내가 그랬던 것처럼 외부로 드러나는 것을 위해 나선 사람은 없을까. 내가 너보다 똑똑하고 잘났으니 더 높은 자리에서 더 많은 권력과 명예를 가져야 한다고….
국민들을 위해 진심으로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면 꼭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리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눈에 드러나는 정치가 아니라도 진실로 국민을 위하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 연예인이 TV와 스크린 속의 화려함이 아닌 소박한 연극 무대에서 진정한 연기자로 사랑받으며 새롭게 태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나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박수를 보낼 수 있는 그런 '소박하면서도 내면이 단단한' 사람을 찾고 싶다.
출처 : 조선일보 2010.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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