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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라사랑연합 원문보기 글쓴이: 재원
[희망의 실마리]-전우현 교수(2012년 1월 26일)
이하는 필자가 15년 정도 이전에 생활수기처럼 메모해 둔 것이다. 필자 혼자 보기에는 별 의미가 없는 것 같고 생각의 조각 조각이나마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서 편의대로 목차를 붙이고 일부 내용을 지금에 맞게 고친 것이다. 글을 더 풍부히 하고 길이 등 모양새를 갖출 수 있지만 오히려 장황하게 되는 것 같아 짧고 긴 것에 관계없이 메모 형식 그대로 두기로 했다.
1. 다시 고통과 걱정의 시대로
우리 사회는 정치적 불안정, 경제의 불황, 공무원의 收賂와 교육계의 비리 등으로 걱정이 가실 날이 거의 없다.
필자가 고등학생인 때까지만 해도 1980년도에 이르면 수출 100억$ , 1인당 GNP 1000$을 넘어서 걱정없이 잘 사는 때가 되리라고 철석같이 믿었었다.
수출 100억$의 목표를 넘어 무역 1조 달러시대가 되고 1인당 GNP는 이미 2만달러에 가까운데도 우리는 아직도 경제의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고 한국을 추켜세우던 말도 이제는 옛 말이 되고 말았고 기술력의 부족과 비용의 상승으로 인하여 우리 기업의 국제 경쟁력은 선진국에 뒤지는 것도 모자라 신흥 공업국들에게 추월 당하는 실정이다.
60년대 이래 허리띠를 졸라매고 한국인이 땀을 흘린 결과 보리 고개를 넘었다. 그리하여 기본적인 식생활(食生活) 문제가 많이 해결되었음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나 21세기 지금 또다시 먹고사는 문제로 한숨이 가실 날이 없다. 심각한 실업, 전세값 앙등, 저출산과 자녀 보육문제 그리고 이른 나이에 맞이하는 구조조정이 가져오는 노후불안이 목하 진행중인 암덩어리다.
80년대 들어서 먹는 걱정 적어져 부모들이 한결 허리 펴는가 싶었다. 또, 꿈만 같던 마이 카 시대가 열렸다고 열광했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자녀들은 본드 흡입이나 성도덕 문란이다 폭력 소동이다 하여 골머리를 앓았다. 곧이어 오렌지족이 등장했다. 90년대 이후에는 “덜 일하고 더 먹자”는 신세대, 조금만 힘들어도 못견디는 팝콘 청년층이 나타났다. “아빠·엄마·할아버지·할머니께서 힘드셨던 이야기는 이제 듣기 싫어요, 우리는 우리잖아요”라던 철부지 세대들이 이제는 40대가 되어 우리 사회의 어엿한 기성세대로 되었다. 여러 문제가 안 생길 수 없다.
눈에 띄는 사회현상 속에는 항상 근본적인 사회심리가 도사리고 있는 법이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무기력증 속에는 어떤 사회병리의 뿌리가 있을까? 우리의 정신이 병들어 가는 것은 아닐까? 식수원인 강과 바다가 오염되거나 썩어간다면 큰 환경적 재앙이다. 그런데 온전해야 할 국민정신이 병들어간다면 더 큰 사회적 재앙이다. 국민정신의 감염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보충되거나 극복될 수 없는 탓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가난의 고통, 전쟁의 불안, 민족 생존을 위협하는 분단위기는 정치적 혁명이나 경제 정책으로만 해결되기에는 그 심연이 너무나 깊다. 또, 대통령 선거로 대표되는 현실정치의 생명은 5년이지만 사상과 교육의 길이는 100년을 넘는다. 우리는 국가적 암덩어들을 국민교육을 통해서만 수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희망을 가지자! 현안 문제들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정신이 올바로 선다면 어떤 경제적 난관과 환경의 낙후함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으로 된다.
2. 인간의 존엄함에 대하여
우리 헌법 제10조는 「모든 國民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 인간의 존엄성이란 말 앞에 다툼없이 동의한다. 그런데, 이 인간의 존엄성은 우리 자신이 인간이기 때문에 믿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실 자애(自愛)의 발로로 존엄한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 아닌가?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간교한 인간과 파렴치한 범죄인도 있다. 정상인이라면 그들에게서 치받쳐 오르는 증오를 느낄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존엄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구체적인 사회생활에서 체험한다. 사실상 인간은 천사의 고결함과 함께 동물과 같은 비열함도 함께 지니고 있다. 우리 노력은 인간이 존엄하게 생각하고 행동할 가능성이 있음을 믿고 그 방향대로 인도하고자 하려는 것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은 모두 존엄하다」는 말을 「사람의 올바른 도리를 알고 노력하는 인간은 존엄하다」는 것으로 고쳐 이해해야 한다. 이 새로운 명제에 의해서만 천태만상으로 다양한 인간사회의 모습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또, 선과 악의 구분을 행할 수 있다. 또, 사회문제 발생원인의 가장 큰 부분은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합의할 수 있다.
선과 악이 뒤범벅으로 섞여있는 모습에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상관없다는 어정쩡한 태도는 사회발전을 포기하는 무책임한 자세이다.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을 애매 모호하게 보지 말고 실체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하여 좋은 면을 장려하고, 나쁜 면은 도태시켜야 한다. 그래야 개인과 사회의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지만 그 가능성은 현실로 나타날 때만 빛을 발한다. 진흙 속에 파묻혀진 상태의 보석은 그 가치가 없다. 인간의 존엄성․위대함은 이 가능성을 현실의 모습으로 내보이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의 행복은 저절로 굴러 떨어지는 호박넝쿨이 아니다. 개인도 그러하고 국가, 민족도 그러하다.
3. 행복의 조건에 대하여-행복의 사회적 조건-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한다. 행복은 모든 사람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타인의 부당한 억압이 사라져야 하고 가치창조가 있어야 한다.
첫째, 행복하려면 타인의 부당한 억압이 없어야 한다.
근대 이후 세계적으로 노예제도와 봉건잔재가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암암리에 지배, 예속의 관계가 많이 존재한다. 억압형태 중 대표적인 것은 북한과 같은 폭정이다. 이러한 폭정은 제3세계에서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노예화인 폭정과 부당한 억압이 사라져야 행복의 첫 단추가 끼워진다.
둘째,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가치창조가 있어야 한다. 즉, 억압이 사라지는 것만으로는 행복의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 (정치적) 억압이 사라진 것은 본래의 인간상태(즉 자연상태)의 회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추가로 더 필요한 것이 가치창조이다. 아무 일도 행하지 않는 무(無)에서 벗어나 노동으로 가치를 창조할 때 인간은 의식주(衣食住)의 자유를 얻게 된다. 어느 누구도 이 의무에서 해방되지는 못한다. 먹고, 입고, 잠자기 위해서 누구나 재화와 서비스를 소비해야 하므로 이 가치창조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안정적인 풍요와 안락은 고통을 인내하고 황무지를 개척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여기에는 가치 창조 자체에 목표를 두는 드높은 이상 설정과 엄정한 자기관리가 요구된다.
4. 이기심과 이타심의 조화에 대하여
우리는 로빈슨 크루소와 같이 외로운 섬에서 홀로 살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국가, 민족, 지역사회 등 일정한 공동체를 이루어 그 일원으로 산다. 혹자는 국가없이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도 하지만 인류의 역사적 체험은 국가 없이 개인이 행복할 수 없음을 실증하였다.
그런데,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인간은 이기심과 이타심을 모두 갖고 있다. 논자에 따라서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옳다고 하거나 반대로 이타심을 언제나 우선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기심과 이타심은 조화되어야 한다.
이기심은 모든 인간이 본능적으로 자신을 위하려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 훈련 없이도 발현된다. 또, 본능적이기에 강압적으로 억누를 수가 없다. 어린 아이들이 물건을 독차지하려 하거나 눈을 새파랗게 뜨고 동생들에게 질투를 하는 것을 보더라도 이기심은 타고날 때부터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는 본성임에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는 이타심도 이기심에 버금가게 존재한다. 고대 중국의 맹자가 말했듯이 어려운 이웃(병든 사람이나 외로운 사람)을 측은하게 생각하고 돕는 마음이 분명히 우리에게 있다. 이타심의 기능은 이기심을 억제·조정하는 데 있다. 이기심이 지나치지 않도록 하고 이기심의 충족과정에서 파생하는 사회적 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이타심의 과제이다. 또, 이기심으로 촉발된 경쟁의 과열로 인한 삭막함을 극복하고 인간소외의 해결을 위해 안식처를 마련함에 이타심의 주된 역할이 있다.
그런데 이기심은 이타심에 비하여 훨씬 더 본능적이고 생래적이어서 이타심보다 더 강렬하다. 여기에서 이기심의 이타심에 대한 우위를 인정한다고 하여 이기적인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물론 아니다. 이기심의 부당한 충족은 공동체의 틀을 파괴하고 이기심간의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충돌을 가져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또,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는 근본적으로 달라서 대립하기 쉽다. 그러나, 공동체가 존속하려면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를 잘 조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개인의 이기주의적 본성에 부합하면서도 이타적인 태도로 공동체의 발전을 기약하는 길이다. 이기심과 이타심의 조화는 우리 개인과 사회의 행복으로 향하는 중요한 관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기심을 존중하여 그에 줒은 노력의 대가를 공정히 배분하는 반면 건전한 근로 기풍이 훼손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이기심과 이타심의 공존 조화의 길이다. 이기심을 무시하여 일에 관계없이 보수를 균등하게만 분배한다면 인간은 별도의 비밀스런 방법으로 이기심을 충족하려 할 것이다. 반면 어떤 사람이 보수를 터무니없이 많이 받아가면 타인의 건전한 근로의욕을 해칠 것이다. 이는 분배문제인데 바로 이 문제를 둘러싸고 인류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 대립, 전쟁, 폭동을 경험해왔다. 우리 한국사회도 해방 이후 주로 이 문제로 다투어왔다.
이기심과 이타심을 잘 조화하지 못하는 예는 공무원이 뇌물을 받고 우리 사회의 불의를 조장하는 일, 직장 동료를 시기·질투하여 불공정 경쟁을 하는 일, 직장 내에서 지연이나 학연의 파벌을 조성하는 일 등과 같은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이기심만 앞세우는 염치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 공동체의 단결을 해치게 되고 또 다른 대립과 소모적인 싸움을 불러 일으켜 공동선을 해치는 악의 근원이다.
5. 국민적 자부심의 근원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경우에 국민의 일원으로서 자부심을 갖게 되는가?
자부심은 소속 집단에 대한 자랑스러운 감정이다. 어떤 집단이 그 구성원에게 기회를 주고 정당한 경쟁을 보장하며 그 집단의 발전이 그 정당성에 의존하여 개인 노력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면 그 구성원은 자신과 집단간의 일체감을 느끼며 집단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이익도 기꺼이 바치는 희생정신을 발휘한다.
국민적 자부심은 부정과 부패없는 경쟁과 정당성에 의해 조성된다. 개인은 정당한 경쟁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동시에 결과적으로는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국가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의하여 가치를 공정히 배분하는 제도적 장치를 통하여 개인의 이익추구를 배려하는 상호 작용에서 양자의 일체감도 높아진다.
6. 생존의 기초로서의 생산과 인격평등의 대인관계에 대하여
인간이 먹고 마시고 자기 위해서는 재화나 서비스가 있어야 하고 이를 생산하는 활동이 필요하다. 만약, 생산(일)하지 않고 먹는 자가 있다면 그는 타인에게 빚을 지는 것이 된다. 일하지 않고도 좋은 아파트에 살면서 자가용을 굴리고 주말에는 골프나 치러 다니는 사람을 보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허탈해지고 좌절을 느낀다. 그런데, 우리가 직업인으로서 생산(일)에 몰두하는 동기가 그저 먹고 마시고 자기 위해서 물질을 얻을 목적 뿐이라면 새로운 모습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뛰어 넘어야 한다. 일 자체에서 새로운 요소를 발견하여 개선의 실마리를 찾아내고 발전시켜야 한다. 그렇게 되면 생존의 수단을 얻는다는 목표를 뛰어넘는 것이 된다.
인간이 자연을 일부분 극복하였다고는 하여도 아직은 무지한 것, 한계에 부닥치는 것 투성이다. 일찍이 부처는 인생을 고통의 바다(苦海)라고 했다. 그는 인간의 무지와 한계에서 오는 고통을 수도(修道)로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우리가 자신의 일에 전념하여 일가(一家)를 이루는 것도 삶의 고통을 보람으로 바꾸는 것이기에 이러한 수도(修道)의 일종이라 생각한다. 발견과 창조는 우리의 무지와 한계를 극복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고 발견과 창조를 통한 생산활동은 인간해방과 자유의 밝은 빛을 선사한다.
그런데 인간의 능력은 유한하다. 그 제한된 능력을 가지고 모든 일을 다 잘 할 수 없는 것이다. A라는 일을 잘 하는 갑이라는 사람이 B라는 일에 서투르고, 반대로 B라는 일에 유능한 을이라는 사람이 A라는 일에 무능할 수 있다.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 때문이다. 이것이 오히려 인간답다. 그런데 A, B 모두 우리 인간사에 필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갑과 을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 또 누구나가 자신이 서투른 분야의 일에 능력을 보이는 다른 사람을 자연스레 존중하게 되는 법이다.
이렇게 하여 함부로 타인을 무시하기 쉬운 인간의 행태를 다스리게 된다. 서로 인격을 존중하게 되고 인격의 진정한 평등이 뒤따르게 된다. 이와 같이 공동체 안에서 자연스레 생긴 인격의 상호존중과 평등 의식은 협동과 단결을 보장하고 높은 차원의 대인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7. 이익의 충돌과 정당한 경쟁에 대하여
공동체 안에서 개인은 자기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밖에 없으므로 서로 충돌하기 쉽다. 욕심은 무한하고 이를 충족할 수 있는 재화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간의 이익 충돌은 정당한 경쟁을 통하여 해결되어야 한다. 정당한 경쟁과 정당하지 않은 경쟁을 축구 경기에 비유한다면 다음과 같다.
축구 경기는 키퍼를 포함하여 각 팀 11명의 선수가 손을 사용하지 않고 공을 상대방 골대 안에 집어넣으면 점수가 나고 많은 점수를 낸 팀이 이긴다. 각 팀의 성패는 누가 점수를 많이 내느냐에 달려있어서 선수의 지상목표는 많은 점수를 내는 데 있다.
만약 경기의 규칙도 심판도 없다면 축구 경기자는 공을 손으로 들고 뛰기도 하고 경기자 수를 11명보다 많이 늘리는가 하면 상대 선수를 발로 차는 등의 난폭한 방법으로 골인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려 할 것이다. 이렇게 한 쪽에서 난폭하고 신뢰를 배반하는 행위를 감행한다면 상대팀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는다. 곧이어 그와 유사하거나 그 이상의 난폭한 방법으로 대항하고 목표를 달성하려 할 것임에 틀림없다.
결과적으로 경쟁 아닌 극한 투쟁으로 발전하여 각 팀은 상대 선수에게 크나큰 부상을 입힌다. 또 한편 예기치 않은 보복 공격을 상대방으로부터 당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에너지를 과도하게 낭비하는 축구경기를 해야 한다. 물론 경기가 끝난 후에도 승패의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적대감정은 그대로 남는다.
그에 비하여 정당한 경기는 어떠한가?
각 팀 경기자 11명이 전∙후반 각각 45분씩 공을 손으로 잡지 아니하고 상대방을 발로 차지 않는 등 규칙을 지키면서 최선을 다하여 골인을 시키려고 노력한다. 승리라는 목표를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면서도 규칙을 지키고 승패라는 결과에 복종한다. 경기 후에도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
인생의 다른 경쟁도 이와 같다. 공정하고 정당한 경쟁이 보장될 때만 개인의 노력을 장려하고 공동체의 발전을 촉진할 수 있다. 운동경기가 아닌 사회생활에서는 정당한 경쟁에 필요한 규칙과 심판자가 축구경기처럼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대체로 우리가 바라는 사회 생활에서의 정당한 경쟁은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지불 즉, 과다하지도 과소하지도 않은 가치배분이다.
이는 달성불능의 목표가 아니다. 다만 이 정당성의 필요성을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뼈저리게 느끼고 인성교육에 이를 반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이를 파괴하는 삐뚤어진 구성원이 나오게 된다.
8. 증오(분노)의 승화에 대하여
사랑은 인간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성현들은 한결같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것을 가르친다. 심지어 원수까지라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한다.
그런데 증오(분노)는 어디에서 오는가?
증오(분노)는 첫째 질투심에서 오고, 둘째 경멸감에서 나온다. 질투심에 의한 증오는 자신의 욕구의 위협에 대한 감정 즉, 자신보다 뛰어난 자에 대한 미움이다. 그리하여 만약 이것이 걸러지지 않고 발현되면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가해가 된다. 이러한 증오는 정당화될 수 없다. 정당화될 수 없는 공격행위는 부메랑처럼 즉각 반격을 초래하고 소모적인 야욕의 투쟁고리로 순환할 것이다.
한편 경멸감에서 오는 증오는 추악함이나 나태함 등을 배척하는 감정이다. 추악함과 나태함은 노력하지 않는 태도에서 나타난다. 유혹에 쉬 굴복하고 불의에 타협하며 이상을 포기하는 자세는 노력하지 않는 자의 자세이다. 노력하는 사람이 추악함과 나태함을 배척하는 경멸감은 비난할 수 없는 감정이다. 추악함과 나태함을 경멸하는 마음은 아름다움과 성실을 사랑하는 마음의 반대측면인 까닭이다. 우리는 바람직한 것을 사랑하는 만큼 어쩔수 없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미워한다.
악을 증오하는 감정 또한 악에 대한 경멸감에서 나온다. 선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악을 미워하는 감정도 필요하지 않은가? 잘못된 마음, 썩은 마음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사회질서가 바로 설 수 있겠는가? 모든 치유 수단을 다 시도한 다음에도 썩어가는 상처부위는 극심한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절단해야 한다. 신체의 온전함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상처 안의 고름 또한 짜내서 없애야 한다.
흔히 이해심과 넓은 아량은 미덕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해심 많은 아량이 미덕으로 되는 것은 이해심과 아량으로 썩은 부분이 치유될 수 있을 때이다. 썩은 부분이 더욱 썩어감에도 아량으로 감싼다는 것은 불의에 대한 정의의 패배이다. 사회 공동체의 입장에서는 불의와의 타협은 공동체 발전의 포기에 지나지 않는다. 흔히 조화라고 이르는 것은 정당한 주장간에 충돌이 있어 이를 조정하려는 것이지 정의와 불의 사이의 타협이 아니다.
불의라는 추악함과 뒤범벅된 고결한 정의는 향기를 잃고 회복되기 어려운 타락의 길로 접어들기 십상이다. 만약 인류 역사에서 추악함을 미워하고 제거하려는 노력이 없었다면 발전이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인류는 쉴 새 없는 고통의 수레바퀴를 반복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악을 경멸하는 증오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이라 할지라도 역시 질투에 기인하는 증오와 같이 상대방의 감정적 반발을 유발하기 쉽다. 따라서 악을 경멸하는 증오도 증오의 대상인 악행이 약화하고 도태되는 구조를 확립하는 것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이는 추악하고 나태한 가치관을 지니고서는 도저히 보람을 느낄 수 없도록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 합의하는 것으로 가능해진다.
9. 사랑, 그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에서 가치를 창조하여야 하고 타인에게 부당한 위해를 가하지 말고 정당한 경쟁에 의하여 순위를 가려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인 룰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공동체의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거기에다 나태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나약해지지 않도록 항상 자신을 추슬려야 하기 때문에 쓰라린 고통이 따른다. 스스로 선택한 고독과 고통이 싫다면 상황에 피동적으로 이끌려 다니는 삶을 살게 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러한 삶은 또다른 고독과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또, 그러한 소극적인 태도는 우리의 선대가 겪어온 좌절과 굴종의 삶을 반복하게 만들 수도 있다. 우리 대한민국의 새로운 세대는 좌절과 굴종에서 받는 고통보다 자신의 일에서 가치를 창조하는 고독과 고통을 기꺼이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행복을 추구하는 위와 같은 노력과정은 좀 메마른 것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사랑이 필요하다. 인간은 결코 일의 노예가 아니고 가치 창조와 보람만으로 행복해질 수는 없다. 사랑은 우리 자신의 유한성을 타인에 대해서도 느끼는 동류의식이다. 또, 진정한 존경과 예의에 터잡은 감정이다. 사랑의 본질은 사랑하는 사람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울만큼 고차원적이다. 특히 아가페의 사랑은 이해관계에 의해 발동되는 것이 아니니 가장 아름다운 감정이다.
사랑은 우리들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전제한 것이어서 타인에 대한 관용을 수반한다. 우리 인간이 악함과 선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선함의 중요한 부분을 사랑이 차지한다. 사랑이 없다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거칠고 메마를 것인가? 이웃에 대한 사랑 없이 성취만으로 행복해질 수는 없다.
10. 규범(법)에 대하여
사람은 이타적이고 희생적이기보다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되기 쉽다는 것은 생물학적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인생 경험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대체로 인정한다. 사람의 마음은 자기 자신에게 유리한대로 하고 싶어하는 데다가 그 마음이 변화무쌍하기조차하다. 아침에는 된장국이 좋았다가 저녁에는 보기 싫고 불고기를 먹고 싶어한다. 어제는 갑이란 사람을 좋아하다가 오늘은 을이란 사람을 더 마음에 들어하기도 한다.
그 변화무쌍한 타인의 마음을 믿고 모든 것을 의지하였다가 그 마음이 어느 날 갑자기 변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어찌 되는가?
그 반면 사회, 국가의 규범이란 물건은 사람의 마음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지속적이다. 그리하여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훨씬 더 굳건한 보상을 받는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 믿고 의지해야 할 큰 집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전체의 규범 즉 법이다.
11. 친절에 대하여
친절은 타인에 대한 기본적인 의무이다. 그리고 우리 공동체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사람이 살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윤활유이다. 불친절한 말 한 마디에 마음이 상하고 타인에 대한 감정이 적대적으로 표변한다.
별로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1997년 8월 무더운 날에 있었던 일이다.
피부에 가려움증이 생겨 근처 개인병원을 찾았다. 진찰 받고 주사 맞고 약을 받아든 후 문을 나서려다 「대머리 증상 상담」이라고 쓴 것을 보고 다시 의사에게 물어봤다. 당시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고 단골 이발사까지도 걱정하던 터였다. 머리카락을 보이며 “이렇게 머리카락이 빠지는데 묘약이 없을까요?”라고 물었더니 “그 정도는 괜찮은 거요...생긴대로 살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나는 다시 “전문의 의사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떡합니까?” 그랬더니, 이 양반이 벌컥 화를 내면서 “전문의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요. 모르니까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 거지.”라고 내뱉었다.
그 의사 선생님도 어릴 적부터 똑똑하다고 칭찬 듣고 공부 잘해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의과 대학을 다녔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지각 있고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되는 사람일 게다. 그런 사람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전문직으로서의 오만함 때문인가, 일에 너무 지친 탓인가? 한 마디의 불친절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마음을 심어줄지를 다시 한 번 각자 생각해 보면 좋겠다.
12. 남을 존중할 필요성과 봉건문화에 대하여
간혹 남의 일을 아니꼽게 생각하고 훼방을 놓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없지 않다. 동물세계에서도 다른 개체의 영역을 존중하는데 하물며 인간세계에서 이를 잘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물론 온 천하를 모두 가져도 부족하다고 생각함이 사람의 본능이기에 인간은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게다.
그러나, 타인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를 그의 영역으로 존중하지 않으면 문화와 문명의 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병폐가 특히 집안, 문중질서라는 봉건적 집단주의 규범하에서 행해지는 예가 꽤 많음은 우리의 경험이 증거하는 바다. 이러한 괴롭힘에서 개인이 자유롭게 되어야 창의적인 재능을 발휘하고 그 힘을 더 큰 공동체인 국가나 민족을 위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13. 연고주의에 대하여
우리의 정신 문화가 아직도 합리적인 공동체 생활에 적합하지 않은「씨족적 연대 관념」에 터잡고 있다면 빨리 고쳐야 할 일이다. 조국이나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일가 친척에 대한 유대가 더 강하다면 어찌 대의를 위해 일할 수 있을까? 일가 친척에 대한 무한대의 애정과 연민을 요구하는 것은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쉼없이 개척해나가야 하는 현대생활에는 잘 맞지 않는다. 밝고 지혜로움을 구하려면 어두운 것, 어리석은 것과 결별해야 한다.
일가 친족 단위, 나아가서 지역단위, 학교단위의 연대주의는 더 큰 단위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과 충돌할 수 밖에 없다. 마음의 뿌리깊은 귀속은 하나이지 여럿으로 나누기 어렵기 때문이다(“마음은 중립을 모른다”). 이러한 혈연주의, 지연주의, 학연주의는 우리의 정치나 경제에도 많이 나타나고 있어서 더욱 염려스럽다.
14. 시간의 절약에 대하여
시간을 아끼자. 절약하기에 열흘이 걸리는데 낭비하고 방탕하기에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는다. 열흘 동안 수고하여 소중한 시간을 절약해 두었다고 하여도 폭탄주다, 뭐다 하여 하루 동안 방탕하게 쓰면 그 회복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 힘겹게 절약된 시간은 한꺼번에 소진되고 만다.
15. 깨끗한 부자(淸富)에 대하여
사회 공동체의 발전은 공동체 구성원이 자기 분야에서 도전하고 끊임없이 분투할 때 이루어진다. 이 노력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숭상해야만 사회가 더욱 크게 발전한다. 그렇지 않고 시기 질투가 이 노력을 저해할 때 발전의 동력을 잃게 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노력에 비해 지나치게 많거나 적은 대가가 주어지는 나쁜 현상 이외에도, 못 가진 자가 가진 자를 사리에 벗어나게 못살게 구는 나쁜 풍조도 없지 않다.
사리에 벗어난 시기와 질투는 타인의 정당한 노력의 대가조차 탈취하려 시도한다. 자신의 나태와 무능함을 타인의 발목을 잡아당기는 것으로써 극복하려는 치졸함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이는 노력의 가치를 부정하고 힘써 일할 동기를 약화시켜 사회 전체의 발전을 지체시킬 것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기독교를 국교로 숭상하여 성경에 나오는 「악마」의 존재를 누구나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가부터 유럽의 각 지방마다 생사람을 마녀로 몰았다. 이들을 잔혹하게 처형하는 이른바 「마녀 사냥」의 폭풍이 몰아쳤다. 마녀로 지목된 사람은 흔히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종교재판소의 재판관은 그녀의 무고함을 확신하면서도 시기, 질투를 하는 다른 여자들 세력이 두려워 마침내 마녀라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수고의 대가로 정당하게 부자가 된 사람을 다 나쁘게 보지는 말아야 한다. 졸부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깨끗한 부자(淸富)』는 존경받아야 한다. 『깨끗한 부자(淸富)』마저 마녀사냥을 해서는 누가 부자가 되려고 밤새우고 땀흘려 일하겠는가?
16. 개인 인성의 중요성에 대하여
각기 다른 인품을 지닌 구체적인 사람들이 이 사회의 핵심적 구성요소이다. 그런데 일상 생활에서 만나는 많은 타인에게서 삶의 기쁨과 희망을 얻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쓰라린 상처를 받기도 한다. 수많은 사람을 대하면 그 사람만큼이나 다양한 장단점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구체적 생활 과정에서 타인의 무례하거나 도리에 벗어난 행위에 의해 상처를 받고 이 상처는 타인에 대한 적대감이나 인간의 존엄성 자체에 대한 의심으로 발전한다.
정치·경제·사회·문화 현상은 물론 우리 삶을 지배하는 환경이지만 이 환경을 창출하는 것 또한 우리 자신이다. 우리 공동체 내에 인격파탄자가 감소되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한다. 가증스런 성폭행범, 잔혹한 연쇄살인자 등 인격 파탄자가 저지른 행위의 책임을 사회에만 돌릴 수는 없다. 어떤 이상 사회도 이런 자를 다 교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개인 인성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청소년기에 형성된 인성이 거의 죽기까지 계속되고 사회 생활, 인간관계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데서 알 수 있다. 만 20세 전후에 거의 틀을 갖추는 인성은 그 이후 특별한 체험이 없이는 거의 본질적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20세 이전의 인성 교육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한국 사회 문제의 해결을 바로 한국인의 정신적 역량으로 해결해야 한다면 우리 어린 학생의 인성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17. 발전지체의 정신적 요인에 대하여
우리나라를 이만큼이라도 발전시켜온 동기는 굶주림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즉, 우리는 지금 여기까지 굶주림에 대한 공포를 연료로 하여 달려 왔다. 그 공포가 사라진 지금 더 이상의 발전이 어려워지고 소비, 향락에 탐닉한 면이 있다. 또, 남의 나라가 피땀 흘려 이룩한 문화를 창조적인 고민없이 수입해서 쓰다가 전통문화의 장점마저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하나 둘씩 잃어가는 것도 염려스럽다.
우리 공동체의 발전법칙은 『배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원리』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배가 강을 거슬러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노를 젓는 힘이다. 이는 자기 분야에서 가치를 창조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강물이 아래로 흐르는 자연적인 힘에 더하여 배를 뒤로 젖는 잘못된 뱃사공이 있다면 배가 뒤로 물러날 것이다.
노를 앞으로 젓는 것은 사회 내에서 창조, 개척하는 힘이다. 강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 내리는 것은 (자연)환경의 도전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만약 노를 앞으로 젓지 않는다면 강물의 흐름에 따라 배가 아래로 밀려 퇴보할 것이다. 이는 사회 구성원이 창조, 개척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그런데 노를 거꾸로 젓는 비뚤어진 뱃사공이 있다면 강물흐름에 더하여 배를 하류로 삽시간에 밀리게 한다.
사회에서 노를 거꾸로 젓는 행위에 해당하는 것은 나태와 범죄이다. 또, 부패한 정치, 부동산 투기를 일삼는 기업과 함께 사치, 향락에 영혼을 빼앗기는 개인의 가치관 문란도 여기에 포함된다. 노를 뒤로 젖는 것은 우리 공동체에 가장 유해한 것으로 공동체의 건전한 근로 기풍을 파괴한다. 정치 권력과 기업의 도덕성의 문제는 워낙 많이 논한 주제이다.
그 바람직하지 못한 행태가 바로 잡아져야 한다는 것은 국민들이 모두 찬성한다. 한편 우리의 배를 뒤로 몰아가는 개인 가치관의 혼란, 이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고 그 행위가 뚜렷이 구체화되지 않지만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하는 암세포와 같다. 이는 공동체 구성원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기에 정치나 경제 현상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이다.
올바른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정치, 경제적 반대자가 거꾸로 입장이 바뀌어 정치 권력자나 경제적 결정자가 되었을 때는 과거의 독재자나 탐욕스런 기업가 못지 않게 올바르지 않은 행동 양식을 구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정치, 경제의 구조와 제도가 해결하지 못한다.
이러한 정신상태의 황폐함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 없이 우리 공동체의 목표를 제도개혁으로만 설정하는 것은 귀중한 노력을 헛되이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발전과 퇴보의 갈림길에서 건전한 민족정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우리 앞날은 캄캄하다. 우리 후손은 우리가 그랬듯이 또다시 우리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18. 근로의 가치 경시에 대하여
최근 어려워진 취업난, 조기 퇴직 등의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근로 자체를 신성하게 보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하여 근로가 자신의 인격을 실현한다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근본적으로 개인과 사회가 더 기회를 갖게 된다. 근로의 가치가 그 대가인 재화 획득과 사회적 지위의 보장에만 있다고 본다면 매우 짧은 생각이다.
필자가 한 때 공사장 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만나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노동 가치를 평가 절하했다. 다른 일을 할 능력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내몰렸다고 여기고 있었다. 객관적 사실은 그러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자학자괴(自虐自愧)는 자신과 공동체 모두에 좋지 않다. 물론 사회의 모든 이들에게 노동 자체의 가치, 신성함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우리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이를 설명해 나가고 자신 스스로가 실천해야 한다.
특히 어린 학생들을 이 지 침대로 가르쳐야만 한다. 이런 생각이 한 사람 두 사람에게 깃들기 시작하면 마침내 우리 공동체 전체의 이념으로 될 것이다. 만약 근로자가 노동 자체에서 보람을 느끼지 못하거나 사용자가 노동자를 수단으로만 취급한다면 노동은 고통으로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노사협조는 더욱 어려워질 게다.
하나의 문제가 더 있다. 일단 우리 사회 상층부에 진입하게 되면 더 이상 높은 가치 창조를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경향이다. 이는 우리 공동체의 발전 지체라는 나쁜 결과를 낳는다. 창조적 능력을 일반 대중보다 빼어나게 지닌 이들마저 상층부 직업 취득 이후의 창조적 작업을 게을리하는 결과는 우리 사회에 참으로 치명적이다. 바로 이 점에서 근시안적 교육 목표(대학 합격, 국가시험 합격, 좋은 회사 입사 등)의 쓰라린 결과를 우리는 실망과 슬픔으로써 다시 한번 더 뼈저리게 경험한다.
19.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의 무익(無益)함에 대하여
인간의 본래 성품이 선한가 악한가에 대해서는 견해가 나뉜다. 오랜 역사를 두고 치열하게 논의된 이 문제는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중요한 이슈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 선이냐 악이냐를 따지는 어려운 문제에 답을 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인간의 본질적인 성품은 생존 본능에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앞서야 한다고 본다.
보통 100년 안되는 인생을 부여받은 우리 인간은 생명 형성부터 사망에 이르는 사이에 끊임없이 본능적 욕구를 충족시키려 애쓴다. 그리하여 필자의 견해로는 선이나 악이란 것은 생존 욕구의 과정에서 특징적으로 돌출된 예외적 형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선하기만 한 사람도, 악으로만 똘똘 뭉쳐진 사람도 매우 드물다. 사람은 원래 생존 본능에 따라 이리 저리 뛰어 다닌다는 것을 간파해내야 한다. 인간은 주린 배를 채우고 싶어서 낚시와 사냥을 하고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해 종교에 귀의한다. 이를 성선설, 성악설로 설명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공동체 안에서 생존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우리에게 있어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를 판단하기보다 공동체가 정해둔 바람직한 규칙(즉 법규범)을 지키는 사람과 그 규칙을 위반하는 사람을 판단해내는 것이 더 필요하다. 규칙을 어긴 자는 벌을 받아야 하지만 규칙 범위 내에서 욕구를 충족하는 사람은 칭찬받아야 한다. 예를 들어 남의 쌀 가마니를 훔치는 행위는 벌을 받아야 하지만, 열심히 노력한 대가로 쌀 한 가마니를 버는 것은 장려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가지지 못한 자 = 선한 사람, 가진 자 = 악한 사람’이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기 욕구에 따라 잘 살고 싶어 열심히 일하여 재산을 가지게 된 것이 왜 악한가? 인간의 생존욕구에 따른 노력과 분투, 그리고 가지게 된 결과물의 사회적·정치적 평가에 대해 성선설, 성악설은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생각건대 이 점에서 계급혁명을 지향하는 운동은 그 출발부터 재산유무에 따른 무리한 선악의 전제를 하였다. 재화를 갖지 못한 것 자체가 선한 상태일 수 없고 이를 가진 자가 악한(惡漢)일 수가 없는데도 말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빈부의 차이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부당한 방법으로 축재하고 노력에 비해 너무 많은 대가를 받아 가는 행위를 묵인하려는 것도 물론 아니다.
다만, ‘가지지 못한 것 = 선한 상태, 가진 것 = 악한 상태’라고 단순화한다면 이는 시기·질투심의 선동, 사회적 조작에 지나지 아니한다는 점을 명백히 하려 할 뿐이다. 성선설, 성악설에 의해 인간의 본성을 논하기보다 인간 존재의 모순, 다양한 본능을 긍정하고 노력하는 선(善)이 게으른 악(惡)을 이기도록 공동체를 잘 발전시키자고 제안하는 현실적인 선악론(善惡論)이 어떨까?
20. 선행(善行)에 대하여
비록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구체적인 사람들과의 접촉에서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선, 악의 개념보다 생존욕구라는 점에 많은 이들이 동의해 주리라 믿는다. 이 생존욕구가 노동을 통하여 발현되고 그에 대한 적정한 보상이 주어지는 구조가 가장 이성적인 사회요, 밝은 앞날을 기약하는 체제이리라.
선행은 바로 이와 같은 사회적 의식구조 위에 서 있어야 더욱 빛을 발한다. 돈이나 시간이 쓸 데 없이 남아 돌아서 기부를 하거나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선행은 더욱 소중하다. 생존욕구의 충족과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고도로 발달된 인간의 실천이 선행(善行)으로 이어진 것이기에 더 훌륭한 가치가 있다.
이러한 선행은 인간의 본능을 긍정하며 본능을 충족하는 가장 정상적인 방법인 노동의 가치를 숭상하는 바탕 위에 서 있다. 그러면서도 정상적인 노동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이들을 소외시키지 않으려는 아름다움 마음씨이기에 더욱 값어치가 있는 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