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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건(궁정동 사태)은 1979년 10월 26일,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 부장이던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 등과 당시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사건이다.
10월 26일, KBS 당진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참석 후 귀경하여,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가수 심수봉, 한양대생 신재순을 도우미로 불러 연회를 하던 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저격당하였고 곧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오후 7시경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 만 62세였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1인독재체제의 정치적 허점을 보여주였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대통령을 살해했다고 주장했으나, 권력 암투에서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차지철에 밀리는 상황에서 충동적으로 일으킨 범행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김재규는 10월 유신 때 부하들도 눈치를 챈 만큼 박정희에 대한 반감이었다고 하며 거사를 7년간 준비해왔다고 한다.[1] 당시에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 추진과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되자 미국 정부가 김재규를 통해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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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중 서영준 유석술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사형 선고를 받아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집행. 박흥주 대령의 경우는 그 신분이 현역 군인이었던 관계로 다른 가담자들보다 일찍 육군교도소 내에서 총살 집행.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당진에 있는 중앙정보부 시설에 가려 했다. 그러나 '권력의 제2인자'라 불리던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김재규를 일방적으로 제외시켰고, 그 결과 방조제 준공식은 김재규가 없는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박정희가 준공식에서 돌아오자, 차지철은 다시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 오후 6시에 서울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부지 내에 있는 중앙정보부 소속의 한 안가로 오라는 박 대통령의 명령을 전한다.
김재규는 사전에 총을 자신의 바지주머니에 숨기고 박정희와 대면했다. 그리고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박정희와 차지철을 죽일 것이라고 알렸다. 박정희와 차지철이 궁정동 안가로 들어오고, 김계원과 김재규도 연회장이 있는 '나'동으로 들어갔다. 그 시간에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호텔에서 데리고 온 심수봉과 신재순에게 보안서약서를 쓰게 했다.
박정희는 김재규, 차지철, 김계원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일행은 전통 한국식 만찬 교자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고 두 명의 젊은 여성인 심수봉과 신재순이 박대통령의 양편에 앉아서 술시중을 들고 있었다. 술을 겸한 저녁식사를 들면서 박정희는 정치 및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민중들의 대규모 소요사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재규를 질타했다. 또한 신민당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온건한 자세도 질타하였다. 평소 학생시위와 노동자 파업을 보다 확실하게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차지철도 지나치게 온건한 대응 탓에 혼란이 더욱 확산됐다고 비난하며 "반항하는 자들은 모두 탱크로 눌러버려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2] 질타를 받은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 오자마자 전화로 들어오라고 한 정승화와 김정섭이 있는 '가'동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때가 저녁 7시 10분경이었다.
다시 연회장에 가고 문 앞에서 총 체크를 하는 순간에, 차지철이 나타났다. 김재규는 총을 도로 바지주머니에 집어넣었고, 차지철은 그냥 지나갔다. 차지철은 경호원들이 있는 주방으로 내려가봤고, 연회장에 들어오는 때에, 심수봉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다시 차지철이 들어오자, 김재규는 다시 나가 박흥주와 박선호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 | 나는 각하와 차지철을 죽일 것이다. 박선호 너는 정인형(대통령 경호처장)과 안재송(대통령 경호부처장)을 처단하고, 박 대령(박흥주)은 경비원들과 함께 주방의 경호원을 모두 없애라. 이것은 혁명이다! | ” |
그 때가 저녁 7시 30분이었다. 다시 돌아와보고 나니 시간이 저녁 7시 38분이었다. 심수봉의 노래가 끝나자 이번엔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금요일 저녁 7시 41분, 신재순이 심수봉의 반주에 맞춰 '사랑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중간에, 김재규가 김계원에게 큰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 | 형님, 각하를 좀 똑바로 모십시오! | ” |
순간 분위기는 매우 싸늘해지고 다시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말했다.
“ | 각하, 이 따위 버러지 같은 놈(차지철)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정치가 올바로 되겠습니까? 너 이 새끼 차지철, 아주 건방져! 죽일 놈! | ” |
순간 김재규가 총을 쏘고 총알은 차지철의 팔에 맞았다.
“ | 무슨 짓이야? 김부장! | ” |
하고 박정희가 호통치자 김재규는 다시 박정희에게 이렇게 말했다.
“ |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 ” |
이내 김재규는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 총을 쐈다. 그 총소리가 들리는 순간, 박선호는 안재송과 정인형을 차례로 대기실에서 총을 쏴 죽였으며, 박흥주 역시 경비원들과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원들을 죽여버렸다.
김재규가 총구를 차지철 쪽에 조준했고 차지철은 계속 김재규에게 저항하는데 김재규가 총을 쏘려고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이 작동이 되지 않았다. 그때 정전이 되었으며 김재규는 연회장을 빠져나가 1층 로비로 갔다.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박선호가 나타났고 김재규는 총을 박선호의 총과 맞바꿨다.
박선호는 탐색하러 갔고, 김재규는 연회장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그때는 심수봉과 신재순이 박정희를 부축하고 있었다. 차지철은 화장실에 숨었다가 다시 나왔고, 경호원을 찾으러 나가려는 순간에, 다시 김재규가 들어와 있었다.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장을 던져 총을 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김재규는 피하고 차지철의 배를 향해 총을 쐈다. 차지철은 그대로 엎어졌다. 김재규는 박정희 앞으로 다가와 총을 겨누었고, 심수봉과 신재순은 도망가 어디론가로 숨었다. 김재규는 그들이 도망가고, 총구를 박정희의 머리에 겨누더니, 이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박정희의 사인은 머리에 총을 맞은 것이 아니라 가슴에 맞은 것이었으며 머리에 맞기 전에 이미 사망했다.
김계원은 연회장의 대기실에서 사건을 지켜봤으며, 정승화와 김정섭도 20여발의 총소리에 조금 의아하게 여겼다. 김재규는 나가서 정승화와 김정섭과 같이 차를 타고 육군본부로 갔으며, 김계원은 박정희의 시체와 같이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가서 박정희를 살려내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김계원은 청와대로 들어오자마자, 국무총리 최규하에게 박정희의 저격범은 김재규라고 말했고, 최규하와 함께 육군본부로 가서 정승화와 국방부 장관 노재현을 만나 범인은 김재규라고 다시 말했다.
궁정동 안가에서는 경비과장 이기주가 박선호의 명령을 받고, 경비원 김태원을 시켜 쓰러져 있는 사람 모두를 확인사살시킨다. 꿈틀거리던 차지철도 이렇게 죽어버렸다.
한편, 정승화는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에게 김재규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고, 10월 27일 오전 0시 40분경에 김진기가 김재규를 체포하자, 정승화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불러 이를 헌병감 김진기 준장에게 인계받아 김재규를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이후 김재규는 동빙고동에 있던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가혹한 고문과 수사를 받았다.
“ | 너, 각하와 차지철에게 무슨 짓 했어? 어? 너 쇠파이프 맞아야 될려나 보다. 너 미쳤니? 네가 장애인이라서 그렇게 함부로 행동하는 거야? | ” |
라는 심한 욕도 들어야 했으며 쇠파이프로 맞고, 전기고문, 물고문까지 당했다. 결국 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이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아, 1980년 5월 24일 당시에 서울 서대문에 위치하던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김재규는 재판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 | 나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습니다. 나는 민주회복을 위해 그리 한 것이었고,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그리 한 것이었습니다. 아무 뜻도 없었습니다. | ” |
10.26 사건이 일어난 후 이듬해인 1980년에 재판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5월 24일에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2004년에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 김재규 부장에게 명예회복을 시도하는 등 10·26 사건에 대한 재평가 시도가 있었다. “안중근과 같은 의사다”와 같은 주장도 있으나 [3] [4]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한 그의 묘지와 추모비는 박정희 추종세력에 의해 훼손된 상태이다.[5]
김재규는 10월 유신 때 부하들도 눈치를 챈 만큼 박정희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고 하며 거사를 7년간 준비해왔다고 한다.[1] 한편, 1심 최후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
” |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김재규에 의하면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고 한다. 또한 김재규에 의하면 차지철은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도 ‘옛날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가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말을 했다 한다. 이어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암살을 했다고 주장했다.[4]
이러한 이유로 2004년에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 김재규 부장에게 명예회복을 시도하는 등 10·26 사건에 대한 재평가 시도가 있었으며, "안중근과 같은 의사다" 와 같은 주장도 있다.[6] [7]
한미 연합사령부 부사령관 류병현 장군은 26일 자정 무렵에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William H. Gleysteen, Jr)을 찾아와 "박대통령에게 사고가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당시 류병현 역시 사태 파악이 안 된 상태였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불가능했다. 글라이스틴은 통신보안이 철저한 전화선을 이용하기 위해 미국 대사관으로 달려가 워싱턴에 있는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와 국무부에 이 사실을 알렸다. [8]
10.26 사태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9]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했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9]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하기 위해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장에 오르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군부 내 파벌 갈등으로 인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12·12 사태를 일으켜 군부를 장악했다. 신군부 세력은 민주화 여론을 탄압하고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한편 사건에 연루된 심수봉은 전두환이 집권하던 시기에 가수로서 활동을 금지당해야만 했다. 신재순은 더 이상 대한민국에서 살지 못하고 미국으로 이민갔다.
원본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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