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랑 이구 묘갈명(正郎 李絿 墓碣銘)
[생졸년] 1688년(숙종 14)~1726년(영조 2) / 향년 3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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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성상 3년 정미년(丁未年,1727, 영조 3), 고(故) 공조 정랑 이구(李絿)에게 효자지문(孝子之門)이라 하도록 명하고 사헌부 집의에 추증하였으니, 상신(相臣)이 아뢴 말 때문이었다. 구(絿)는 자가 여강(汝剛)이니 병조 판서 귀락당(歸樂堂) 부군 휘 만성(晩成)의 아들이다.
부군은 숙종조의 명신이었는데, 불행히 군흉들에게 모함을 받아 임인사화(壬寅士禍,1722년)에 옥사하였으니 온 나라 사람이 슬퍼하였다. 당시에 여강은 금오문(金吾門) 밖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울었는데 이 때문에 눈에 종기가 생겼으니, 위문하러 온 친척과 벗들도 울면서 차마 보지 못하였다.
부군의 시신을 모시고 나올 때에는 가슴을 치며 울부짖느라 숨이 거의 끊어진 적이 수 차례였는데 온 저자의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진정 효자이다.”
하였다.
장례를 치르자마자 온 가족을 데리고 춘천(春川)으로 들어갔는데 몇 차례 옮겨 다니다가 증리(甑里)에 정착하였으니 고을 사람들이 감화되어 상을 당했을 때 노래 부르지 않았다. 계모 김 부인(金夫人)은 성품이 간엄(簡嚴)하였는데, 여강은 항상 김 부인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화란을 겪은 이후에는 김 부인이 한 번 죽을 먹으면 여강이 그제야 한 번 죽을 먹고, 김 부인이 한 번 숟가락을 뜨면 여강 또한 한 번 밥을 먹고, 김 부인이 곡을 그치지 않으면 여강의 곡도 그치지 않았다. 김 부인이 그의 정성에 감동하여 감히 슬픔을 다하지 못하였다.
3년 동안 한 번도 수질(首絰)과 요대(腰帶)를 벗지 않고 남들과는 담소도 나누지 않았다. 지나치게 슬퍼하다 몸이 지극히 상했으나 그래도 목숨을 잃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4년이 지난 을사년(1725, 영조 1), 성상께서 부군의 억울함을 풀어주어 작질(爵秩)을 회복시키고 그 자식을 녹용하라고 명하였다.
여강은 익위사 사어가 되었으나 차마 다시 벼슬을 받을 수 없었다. 내가 강권하여 한번 사은하고서 체직되었으며, 다른 관직으로 옮겼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나는 인협(麟峽)에서 교외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여강은 돌아가려하지 않았다.
나는 본래 창옥병(蒼玉屛)과 금수정(金水亭)의 승경을 사랑하여 그 사이에 초가집을 지을 계획을 세웠는데, 여강은 따라가서 생을 마치고자 먼저 집을 사서 살았다. 몇 개월 지났을 때 병환이 생겨 영평(永平)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이때는 병오년(丙午年,1726, 영조 2) 6월 2일로 향년 39세였다.
여강은 평소 스스로 애통해하며 말하기를,
“선한 이에게 복을 내리고 사특한 이에게 화를 내리는 것은 천리(天理)의 법도이거늘 지금은 이러한 하늘이 없어진 지 참으로 오래되었다. 그러나 사람이 화를 초래하는 것이 하나가 아니겠지만, 또한 교만하고 사치스럽거나 각박하고 모질어서이며, 혹은 나아가는 것만 알고 물러난 것은 몰라서이다.
우리 선친 같은 경우는 평생 충직하고 후덕하며 공손하고 검소하여 조정에 있을 때나 강호에 있을 때나 한 번의 생각도 임금과 백성과 관계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높은 벼슬에 오르면 위태로움을 생각하여 몸은 비록 나아갔지만 마음은 물러났으니, 응당 인도(人道)의 화가 이를 까닭이 없다. 그런데도 이와 같은 일이 생긴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은 바로 불초자의 악행이 심하여 귀신과 하늘에 죄를 얻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매번 이것으로 자책하여 용납될 곳이 없는 것처럼 하였으니, 몸을 굽혀 하늘이 높은 줄 모르고 살금살금 걸어 땅이 두터운 줄 몰랐으며, 남을 만나면 얼굴이 부끄럽고 홀로 있으면 그림자에 부끄러워하였다. 왕왕 슬피 울부짖으며 피를 쏟듯이 눈물을 흘렸는데, 상을 마친 후에도 역시 그러하였다.
다만 자신에게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차마 책망하여 자결하지 못하고 마음이 썩어갔는데 얼마 동안은 죽음에 이르지 않았다. 죽음을 앞두고 손수 편지를 써서 나에게 집안일을 부탁하였는데, 그 편지에 이르기를
“5년 동안 구차하게 산 것도 참으로 많이 산 것이니, 편안히 잠든 것처럼 돌아가 어버이를 모시겠습니다.”
하였으니, 진정에서 나온 말이었다.
아! 주부자(朱夫子)가 일찍이 화를 입은 집안 자제의 처신에 대해 말하면서 벼슬하지 않는 것이 올바르다고 하였으니, 여강의 마음으로 벼슬하지 않은 것이야 언급할 가치도 없다. 그 지극히 원통하고 답답한 마음이 하늘에 호소하려해도 방법이 없어 죽은 뒤에야 그쳤으니, 여강의 효성은 어찌 효자로서 지나친 경우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아마도 당세 사람들이 효에 자진(自盡)한 여강을 보고서 자식 된 도리의 중함을 알았을 것이니, 여강이 수립한 바가 또 어찌 하찮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 여강이 지금까지 죽지 않았더라도 토죄하고 복수할 기약을 알 수 없어 하늘에 사무치는 애통함만 더했을 뿐이니, 살아있은들 또한 무엇을 하겠는가.
다만 여강은 한창 각고의 노력으로 공부하여 이치를 궁구하고 몸을 닦는 것을 궁극적인 법도로 여겼는데, 하늘이 수명을 늘여주지 않아 다만 하나의 선한 행실로만 이름이 났으니 안타깝도다. 여강은 됨됨이가 자상하고 단아하였으며 총명함이 남달랐다.
태어난 지 한 해가 되기도 전에 달력의 ‘지도(之圖)’ 두 글자를 알았으며, 장성해서는 문사가 풍부하였는데 특히 시와 변려문에 솜씨가 있었다. 정유년(丁酉年,1717, 숙종 43)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나라의 풍속이 장원한 사람을 중히 여겼으나 근래에 반드시 모두 제대로 된 사람을 얻지 못했는데, 여강에 대해서는 사론(士論)이 흡족하게 여겼다.
이듬해에 별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조만간 문과에 급제할 것 같았으나 결국 그렇게 되지 않았다. 처음에 세자 세마에 제수되었다가 종부시 주부에 조용되었다. 신축년(辛丑年,1721, 경종 1) 공조 좌랑을 거쳐 외직으로 나아가 평강 현감(平康縣監)이 되었는데, 얼마 뒤 시사가 크게 변하여 곧장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모부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유순하고 자애로워 부녀자의 덕이 있었으니, 부친은 영의정 수흥(壽興)이다. 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관찰사 시선(是先)의 따님으로 7녀를 두었는데, 사위는 급제한 민백상(閔百祥), 사인 정채(鄭寀), 민백겸(閔百兼)이고 나머지는 모두 요절하였다.
귀락당(歸樂堂) 부군의 묘를 수성(隋城)에서 한천(寒泉)으로 이장하였으니, 여강의 유지를 따른 것이다. 여강은 처음에 고양(高陽)의 향동(香洞)에 안장하였다가 따라서 이장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상례에는 슬픔을 위주로 하니 / 喪而主哀
천리에 근본한 것이네 / 本於天理
남들은 혹 미치지 못하는데 / 人或不及
그대는 너무 지나쳤네 / 君則過已
어찌 생명을 손상시키려 했겠는가마는 / 豈欲滅性
실로 자초한 것이네 / 實惟自致
효자라고 쓰니 / 書以孝子
나의 명 부끄럽지 않으리 / 我銘無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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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종제 …… 묘갈 :
저자가 이구(李絿, 1688~1726)를 위해 쓴 묘갈문이다.
[주02] 몸을 …… 몰랐으며 :
두려워 불안해하여 몸 둘 곳을 모른다는 뜻이다.《시경》〈정월(正月)〉에 “하늘이 높다고 하나 감히 몸을 굽히지 않을 수 없으며,
땅이 두텁다고 하나 살금살금 걷지 않을 수 없노라.[謂天蓋高, 不敢不局, 謂地蓋厚, 不敢不蹐.]”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03] 이치를 …… 여겼는데 :
《주자어류(朱子語類)》권8에 “세간의 온갖 일은 잠깐 사이에 변화하여 없어지는 것인 만큼 모두 가슴속에 담아 둘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다. 오직 이치를 궁구하고 몸을 닦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인 법도라고 하겠다.[世間萬事, 須臾變滅, 皆不足置胸中. 惟有窮
理修身, 爲究竟法耳.]” 하였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