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회 회원 특별기고
‘우수토구’와 ‘프리 헉’ (박재범)
지난 오월 어느 날 아내와 나는 청계천을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우며 곧 이어
소나기가 퍼 붓기 시작 하였다. 우리는 장대 같은 빗줄기 속을 뛰다시피 걷고 있었는데 '지금 호우 주위보가 내렸으며 물이 빨리 부풀어 오를 수도 있으니 급히 밖으로 대피하라' 는 경고의 메시지가 스피커를 통해 계속 나오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도 아내가 철떡이며 하는 말 이 청계천에 빗물 나오는 구멍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 그러면 우리가 빗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장관을 목격 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해 보며 청계천의 시작인 광화문까지 그 빗물 속을 철벅이며 걸었지만 구멍을 통해 나오는 빗물 줄기는 볼 수가 없었다.
그 후 언젠가 나는 우연히 빗물구멍, 아니 그것은 구멍이 아닌 네모로 깎아 진 돌, 그 위에 '빗물 나오는 곳' 이라 새겨진 글자들을 본 것이다. 그리고 또 바로 밑에 (우 수 토 구) 라 새겨진 것을 높이 자라버린 풀잎 사이로 볼 수가 있었다. 그렇게 빗속을 허우적거리며 혹시나 기대했던 빗물 나오는 곳 을 알아냈다는 기쁨은 잠시뿐, 왜 '빗물 나오는 곳' 이라 했으면
그것으로 됐지 그 밑에 괄호 속 에 ''우 수 토 구' 라 우리말로 새겨 놓았을까.하는 의문이 일기 시작했다. 혹시 조선 족 들을 위해서 였을가. 설마 그럴 리가 있을까 싶었다. 그렇다면 옛날 빗물 나오던 곳 雨 水 吐 口를 우리말로 표기 (이렇게 한자어를 우리말 로 표기한 것을 편의상 '우리 음(音) 한자어'라 하자) 하여 '우수토구' 라 하고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빗물 나오는 곳' 이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만약 ' 빗물 나오는 곳' 을 한자(漢字)로 무엇이냐 고 물어본다면 우리말로 ' 우수토구' 라고 '우리 음 한자어' 로 대답해도 우리사회 에서는 옳은 답이 된다는 말인가
한국 T V 프로그램 중에 ' 골든 벨' 은 고등학교별 퀴즈 알아맞히기 게임 인데, 전국의 각 고등학교 들은 자기 학교의 명예를 걸고 도전 하는 것이 바로 이 프로그램 인 것이다. 한번은 청와대 뜰에서 대통령 내외 참석 하에 진행된 '골든 벨'을 시청한 적이 있었다. 주어진 문제 중 하나는 '하얀 눈에, 반딧불에 책을 읽다'를 한자로 무엇이라 하느냐 였고, 몇몇 학생들은 '형설지공' 이라 우리말 로 답을 적었고, 진행자 는 '정답 입니다.' 라고 외쳤다.
30 여년이란 긴 세월을 외국에서 보낸 내가 몇 년 전 처음으로 고국을 찾았을 때 의 이야기다. 전자제품을 하나 사려고 용산에 갔을 때 , 그곳에 있는 어느 가게의 판매원과 나는 가격 흥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판매원 에게, " 이것 좀 '싸게' 합시다." 했더니, 판매원이 하는 말이, " 고객님, 우리는 매우 '저렴' 하게 판매하고 있습니다만 고객 확보 차원 에서 5프로 ' 디씨' 해 올리겠습니다." "아니, 디씨라니?" 했더니, 그 판매원 좀 의아스러운 표정 을 지우며, "예, 활인 해 드리겠다는 뜻 입니다" 나는, "좀더 '싸게' 합시다." 했더니, "이것은 정말 '저렴' 하게 드리는 것이며 더 이상 '디씨' 는될 수 가 없습니다." 내가 이어 말하기를, "이봐요, 조금만 더 '싸게' 하자니까 그러네" 했더니, "고객님, 이건 정말 '싸고 저렴합니다" 라고 하기에, 나는, "아니, '싸고 저렴' 하다니 무슨 말이요" 하니, "예, 정말 '저렴' 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제품은 '에이에스' 도 좋습니다." "아니, '에이에스' 는 또 뭐요!"
그 후로, 나는 매년 몇 개월씩 한국에서 보내지만, '싸다' 라고 말 하는것을 들어 본적 없으며, 대신 저렴 이라는 '우리 음 한자어' 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말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우리 음 한자어'를 몇 개 예로 들어 보자.
'켜다' 가 '점등', '끄다' 가 '소등' 이 되었고, '다리 가 먼저 얼으니 조심' 을 '결빙 우려 구역' 이라
한다던가, 담배꽁초 ' 함부로 버리면' 이'무단 투기 시' 로 되어 버렸다.
위에서 판매원 의 대화 속에 등장 했던 영어(?) '디씨' 나 '에이에스' 처럼, 우리 일상 생활속에 끼어드는 영어, 즉 ' 우리 음 영어' 의 실태는 어떠한지 살펴보자.
"―-의미 감춘 티저 광고로 잇츠 디퍼런트 후속 SKY 가 새 컨셒의 브랜드캠페인 을 선 보여 화제 ---" 이것은 어떤 광고에 대한 평{評}에서 따온 것인데, 이쯤 되면 영어 없이는 우리말로는 어떤 의사 표시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좌절감마저 들게 한다.
이렇게 홍수처럼 밀려오는 '우리음한자어' 와 '우리 음 영어' 속에서, 외래어와 외국어 구별이나
하며, 한 나라 문자가 그 나라 말을 적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다.
요즘 TV 에서 배우 선우용녀가 모델이 되어 나오는 성인용 기저귀, 이름 하여 '바디' 광고를 자주 볼 수 있다. 또 얼마 전 한국의 '더 페이스 샵' 이 뉴욕에서 크게 히트를 하고 있다는 반가운 기사를 읽은 적 있다. 여기서 '우리 음 영어'들인
'핕' 이니 '페이스'를 영어로 써보면, 'pit' 과 'pace' 가 된다. 이는 본래의 'fit' 나 'face' 와는 다른 뜻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는 전교조가 이런 디렘마 에 처했을 때 어떤 해결책을 썼는지 알아보자.
전에 부산에서 열렸던 APEC 때, 계기(契機) 수업 이라하며 미국 대통령을 추잡한 상소리로 욕하는
동영상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틀어준 게 전교조였다. 이 동영상 에는 상소리 끝마다 영자 f 로 시작되는 네 자로 된 욕을 연발하였는데, 이를
'우리 음'으로 쓰자니 '퍽' 이라 쓸 수밖에 없었고 이는 영어의 'puck' 이 되니 의도 했던 바와 다른 뜻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반미를 외치며 영어 쓰기를 싫어했던 전교조도 할 수 없이 영어를 그대로 쓸 수 밖 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생활속에 자리매김 하여가는 '우리 음 영어'들은 ' 우리음 한자어'와 함께 우리끼리만 통할 수 있는 국적불명의 언어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국제화 속에서 발전하는 사회라 할 수 있는데, 오히려 안으로 매몰되는, 마치 우물 안에서 우리끼리 개골 거리고 있는 것 같아 답답하기만 하다.
한국 사회는 정말 답답하다. 남을 배려 할줄 모르는 사회 그리고 그 속에서 각자 자기 마음의 벽을 쌓고 살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가. 이런 것이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不信)사회로 발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아파트의 벽, 마음의 벽들을 허물고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고, 서로 배려하는 아름다운 사회가 오기를 기대해 볼 수는 없을까.
지금 세계 곳곳 에서 일고 있는 Free Hug Movement 가 바로 이 것을 향한 기폭제 가 될 수 있다고 생각 한다. 얼마 전 인파로 북적대는 인사동 네거리 한 복판에 한 남자가 '프리 헉'이라 쓴 플래카드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고 서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이 움직임이 한국에도 상륙했음을 알았다.
그런데, 이 아름답기만 할 포옹을 하려는데 이를 방해 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음 영어' 이다. 'free' 는 우리말로는 '프리' 라고 밖에 적을 수가 없고, 이는 다시 영어로 'pre' 가되어 뜻은 '--전에' 가 되어버린다. '프리헉 어때요' 하고 누가 양 팔을 벌리고 닥아 오면, 포옹하기 전에 무슨 준 비 운동이라도 해야 하는 줄 알고 멈칫거리는 사람이 혹시나 있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jaebompark@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