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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8 - 칸무 천황(일왕)이 수도를 나라에서 평안경(교토) 으로 천도하다!
660년에 백제가 망하고 의자왕등 1만 2천명이 당나라로 잡혀가니, 좌평 정무와 도침에 복신이 부흥 운동을
일으키자.... 사이메이여왕(천황)과 나카노에 태자는 의자왕의 아들(일본서기에는 동생)인 왕자 풍에게 5천
왜군을 딸려 한반도로 내 보내 백제 왕위를 잇게하니 661년에는 사비성을 포위하고 200개 성을 수복합니다.
그런데 풍왕자를 삼국사기는 의자왕의 아들이라 하고 일본서기는 동생이라고 하는데, 또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후 귀국해 백제왕에 오른 무령왕과 동성왕의 아버지 "곤지" 를 삼국사기는 개로왕의
차남이라 하고 일본서기는 동생이라 적었는데, 삼국사기는 485년이나 지난 1145년에 편찬됐지만
일본서기는 60년 후인 720년에 편찬됐고 풍왕자가 살았던 나라이니 일본측 기록이 맞는것 같습니다.
왜국 조정은 규슈 후쿠오카로 수도를 옮기고는 전국에 동원령을 내려 배와 무기를 만들어 1천척 배에
2만 7천 왜군을 보냈으나 백강에서 당나라 수군의 화공으로 대패해 철수하니, 겐메이 여왕(천황) 은
오래토록 사용했던 왜국(倭國)에서 “해뜨는 나라 日本” 으로 국명을 바꾸고 새출발 하는데 조선(朝鮮)
은 아침 朝(조) 에 빛날 鮮(선) 자니 朝鮮 과 日本 두나라 모두 "아침해가 뜨는 나라" 란 같은 뜻입니다.
즉 한반도와의 탯줄을 잘라버리고 홀로서기를 하면서 일본(日本) 으로 고친 것인데,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왜국 사신들이 말하기를 “해돋이 와 가까운 곳이어서 그와 같이 이름을 지었다” 라고
적혀 있으며 710년 겐메이 여왕은 나라(奈良)에 수도를 건설하니 헤이죠코(平城京 평성경) 인데
9세기 까지 260년 동안 15회의 견당사(遣唐使) 를 파견하여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적극 수입합니다.
헤이조쿄(나라) 시절에 가마타리의 후손인 세력가로 대귀족 후지와라(藤原)씨는 덴무계
를 버리고 덴지계(손자)를 일왕(천황)으로 옹립하니 49대 고닌왕(천황)으로, 나라에
호족의 세력이 대두되어 백성들이 곤궁해지자.... 이를 일신하기 위해 아들인 50대
간무왕(천황)이 794년 수도를 헤이안쿄(平安京 평안경)로 옮기니 곧 오늘날 교토 입니다.
간무왕은 와케노 기요마로의 조언으로 794년에 수도를 세웠고 황궁을 주변의 나가오카쿄
로 부터 헤이안쿄(平安京 교토) 로 이전하였으니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모방하였고,
교토는 미나모토 씨가 권력을 차지해 가마쿠라 막부를 세우는 1185년까지 4백년간
정치적 중심지였으니 794년부터 1185년까지를 일본 역사에서는 헤이안 시대로 부릅니다.
(1) 헤이안쿄(平安京 교토)
400년후 1185년 부터는 비록 정치적 힘은 동쪽 가마쿠라 막부가 차지하였지만 헤이안쿄
(교토)는 황궁과 천황(일왕)이 있는 곳으로써 공식적인 수도로 남아있었으니, 사실상
1868년에 천황(일왕)의 거처는 도쿄로 옮겼지만..... 법으로 도쿄가 수도라고 명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교토를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수도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헤이안쿄(교토)는 야마시로국의 가도노군과 오타기군에 지어졌으니 이 곳은 현재 교토시의 중심부에
해당하는데... 헤이안쿄는 직사각형으로 동서로 4.5km, 남북으로 5.2km에 이르렀으니 도시 배치는
헤이조쿄 (나라시대의 수도)를 본땄으며, 북쪽에 황궁인 다이다이리가 있었고 황궁 아래 주요 도로
인 스자쿠 오지(주작대로) 가 뻗어 있었으니... 헤이안쿄 동쪽에 우쿄구, 서쪽에는 사쿄구가 위치합니다.
(2) 후지와라씨와 스기와라씨
후지와라(藤原)씨는 자기 마음에 드는 왕(천황)을 세우고 섭정(태정대신 → 關白 관백)까지 맡음
으로써 조정을 죄지우지하였으며, 이때 일본은 왕(천황)이 생전에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자기는 상황(上皇) 으로 앉음으로써 천황과 상황이 싸우는등 정치가 더욱 복잡해 졌는데.....
상황(上皇)이 되면 예법의 구애를 받지 않고 보다 자유롭게 처신할수가 있어 유행이 되었습니다.
후지와라씨에 대항하던 학자 출신의 스기와라는 규슈 다자이후(太宰府)로 좌천되어 죽는데....
사후에 학문의 신으로 추앙되었으니 오늘날 규슈 후쿠오카 인근의 다자이후덴만구 신사
(太宰府天滿宮 神社 : 905년 창건) 가 그것으로, 6천 그루의 벚꽃으로 유명한데 전국에
많은 말사(末社) 가 있으며 대학입시철이면 전국에서 모여드는 인파로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억울하게 죽은 왕족 및 대신에다가 수도 헤이안쿄(平安京 교토) 에 천연두와 독감의 영향으로
민심이 어수선해지자 이를 달래려고 863년 성대한 위령제가 열렸으며, 이것이 시초가 되어
억울한 원혼들을 제사지내는 전문 기관이 출현하였으니.... 곧 오늘날의 진자(신사 神社) 입니다.
한편 자신의 딸을 황후로 삼고 천황(일왕)을 세워 실권을 장악한 후지와라씨는 자신의 장원 (莊園)
은 키우면서도 율령제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귀족의 장원은 억제했으며, 가난한 농민이 세금
을 견디지 못하여 땅을 뺏기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인구 증가로 토지가 부족해지자 개간한
땅을 사유지로 인정하니 수도의 귀족들은 지방에 거대한 장원을 소유하고 대리인을 파견합니다.
(3) 칸무 왕(桓武天皇 환무천황) 의 분서(焚書)
일본에서 최초로 한일동족설을 공표한 사람은 일본 남조(南朝, 14세기)시대 기타바타케
치카후사(北白田白親房 1293~1354년)였으니.... 그의 저서 신황정통기
(神皇正統記 14세기) 에는 “옛날에 일본은 삼한(三韓) 과 동종(同種) 이라고 전해
왔으며, 그 책들을 제 50대 칸무(桓武, 781~806년 재위) 천황(일왕) 때 불태워 버렸다”
고닌왕과 백제인의 10대손 다카노노 니가사(高野 新笠)의 아들로 794년 도읍을 나라에서 헤이안쿄로
옮겨 헤이안 시대를 연 칸무천황(桓武天皇) 이 백제인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역사적
사실인데 (키타야마 시게오 北山茂夫‘王朝政治史論’岩波書店 1970) 한반도인의 피를 이은 일본
왕이 한반도인(三韓人)과 일본인이 동족이라는 사실을 기록한 옛 서적들을 왜 분서(焚書)시킨 것일까?
‘신황정통기’ 의 저자 기타바타케 치카후사가 분서(焚書) 사건을 지적할수 있었던 근거로는 9세기 초엽
‘코우닌시키(弘仁私記)’ 였다고 보는데..... 9세기의 일본왕인 사가(嵯峨, 809~823년 재위) 천황(일왕)
의 지시로 성립된 기록으로 칸무천황(일왕)이 명령을 내려 책을 불사르게 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이후 한일동족설은 에도(江戶)시대(1603~1867년)의 도테이칸 (藤貞幹 1732~1797년)
을 비롯해서 메이지 (明治) 시대(1868~1912년) 의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
1839~1931년), 일제 군국주의 치하에서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 1871~1939년),
가나자와 쇼사브로(金澤庄三郞,1872~1967년) 등의 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돼 왔습니다.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는 “고대에 고구려·백제·신라등 삼한(三韓)과 중국대륙 및 남양방면으로 부터
끊임없이 씨족(氏族)으로 집단 이주해왔다. 그들은 도호쿠(東北)지방 변경지대며, 이즈(伊豆) 7개
섬에 이르기까지 흩어져 토착(土着)해 살았다. 또한 당시 는‘일본(日本)’ 이라는 이름도 없었던 시대
였기 때문에 이주해 온 사람들은 부락민 또는 씨족의 구성원으로 다른 집단들과 뒤섞여 살게 되었다. ”
“그런 가운데 그들 속에서 유력한 호족(豪族)이 나타나게 되고 본국으로부터 유력한 씨족
들이 계속해서 건너옴으로써 차츰 중앙정권을 이루기 위한 다툼이 생기게 되었다고
보는데..... 특히 바로 코 앞에 있는 한국으로 부터 이주해온 사람들이 호족을 대표
하는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坂口安吾全集’ 第12卷 講談社 1983)
(4)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1,182 씨족
660년의 백제 부흥군에 3만 2천 왜군을 파병한 스이코 여왕이 백제 왕족의 피를 이었다는 사실은
스이코여왕의 남편 비다쓰(敏達, 572~585년 재위)천황이 ‘백제인 왕족’ 이었다는 사실이 815년
사가 천황(일왕)의 명으로 칸무천황의 제5왕자 만다친왕(萬多親王 ) 이 편찬한 ‘신찬성씨록(新撰
姓氏錄)’ 에 나오는데 ‘신찬성씨록’ 에는 1,182씨족의 가계(家系)가 일목요연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교토(京都)등 게이키(京畿) 지방 씨족을 황별(皇別, 황실의 자손)・신별(神別, 일본 신의 자손)・
제번(諸蕃, 도래인의 자손)으로 분류한 30권이니... 왕족은 황별(皇別)로 335씨족이고 신별
은 진무천황 이전에 있었던 씨족으로 천신강림 때 천신 246씨족과 천손 128씨족에 토착
지기(地祇)30씨족등 404씨족이며 제번(諸蕃)은 도래인으로「백제」104씨족, 「고려」41씨족,
「신라」9씨족, 「가야」9씨족, 「한」 163씨족에 어디에도 분류되지 않은 117씨족이 있습니다.
제번(諸蕃)중 한국인은 326씨족이며 천신과 천손등 신족(神族)이라고 하더라도 한반도 사람들이 주축임
을 알 수 있으며, 또 황별인 왕족은 두말할나위 없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정복왕들의 계보로 제번으로
구별된 귀족 계보에는 한반도 사람들이 대종을 이루는 가운데 소수의 중국인 계보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
교토대 교수 우에다 마사키는 30여년 전에 “백제왕이 왜의 후왕(侯王)에게 ‘칠지도(七支刀)’ 를 하사했다”
고 밝혀 일본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킨 당사자로, 815년 일본 왕실이 편찬한‘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에
왕족 30개 가문중 12번째에 씌어진 ‘大原眞人’은 “제30대 비타쓰왕은 백제 왕족” 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서기 815년 일본 왕실이 편찬한‘신찬성씨록’황족 항목에서 백제 왕족인 대원진인(大原眞人,
오호하라 노마히토)의 계보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으니 원문과 번역을 보자면....
‘大原眞人. 出自諡敏達孫 百濟王也. 續日本紀合.’(오호하라 노마히토(大原眞人 대원진인)
의 출신은 비다쓰(諡敏達)천황의 손자이며 백제 왕족이니라.‘속일본기’기록에도 부합한다.)
원문에서‘시비다쓰(諡敏達)’의 시(諡)는 왕의 시호이므로‘비다쓰천황’을 가리키는 것이며 원문
의 ‘백제왕’ 이란 백제왕족을 가리키는데 일본 역사서는 ‘백제왕족’ 을 ‘백제왕’ 으로 일관해
기술해 왔으니.... 즉 오호하라 노마히토(대원진인) 는 비다쓰 천황(일왕) 의 친손자이며
백제 왕족으로 ‘속일본기’ 라는 왕실 편찬 역사서(서기 797년) 에도 부합한다고 적시하고
있으니 우에다 박사는 이 대목이 “비타쓰 천황이 백제왕족 출신임을 말해주고 있다” 고 말합니다.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교수는 일본의 대표적인‘신찬성씨록’연구가인데 그 역시“비다쓰천황은 백제인
이다”라고 단정하고 있으며‘일본서기’에 비다쓰천황이 제30대 천황으로 기록되어 있고 생부인 킨메이
(欽明, 539~571년 재위) 천황은 제29대 왕인데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신찬성씨록’에 등장한 일본
천황중에 백제왕족이라는 혈통 계보가 완전히 드러나있는 사람은 비다쓰천황 한사람 뿐이라는 점 입니다.
(5) 간무천황(일왕) 의 생모 화신립은 백제 무녕왕의 후손
2001년 일본 아키히토왕은 생일을 맞아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간무덴노(桓武天皇 환무천황)
의 생모(화신립) 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 인연을
느낀다" 라고 말하니 궁내청 관리들은 당황했고 오직 아사히 신문만 이 사실을 보도 했습니다.
일본의 제50대 천황인 간무 덴노(桓武天皇 환무천황) 는 나라에서 교토로 수도를 옮기고 헤이안 시대
(794~1185년 교토)를 연 성군으로 789년에 “속일본기(續日本紀)”를 편찬했는데, “속일본기”
내용 중에 "일본 기내(畿內 교토등 수도권) 지역 인구의 80% 가 백제인"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태후의 성은 화(和·야마토)씨이고 이름은 신립(新笠·니이카사)이다. 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
의 아들인 순타태자다. 황후는 용모가 덕스럽고 정숙하여 일찍이 명성을 드러냈다. 고닌(光仁)
천황이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혼인하여 맞아들였다.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都慕王 주몽)
이라는 사람은 하백(河伯)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인데 황태후는 곧 그 후손이다.”
皇太后 姓; 和氏, 諱; 新笠. (…) 后先出自百濟武寧王之子純陀太子. 皇后容徳淑茂 夙著聲譽. 天宗高紹
天皇 龍潛之日 娉而納焉. (…) 其百濟遠祖都慕王者 河伯之女感日精而所生 皇太后卽其後也.
(6) 교토(京都)의 히라노 신사와 백제신
일본 교토시 기타구(北區) 히라노미야모토쵸(平野宮本町) 에는‘히라노신사(平野神社)’가 있는데, 이 신사
는 고대 부터 백제인 천황가의 신사이니.... 백제인으로 50대 칸무 천황(일왕)이 8세기 부터 그의 백제
조상신(祖上神)들을 모시고 궁중 제사를 지내온 유서 깊은 터전이니 한국의 백제신을 모신 신사 입니다.
교토라는 문화유적 도시가 생긴 것은 50대 칸무천황(일왕)에 의해서니 칸무천황은 794년에 교토
땅을 새로운 왕도로 삼고 나라에서 나가오카경(長岡京)을 거쳐 천도해 왔는데, 교토의 새
명칭을 헤이안경(平安京 평안경) 이라 칭하고 백제신의 신사도 이곳으로 옮겨 모시게 한
것이니 히라노 신사야말로 장장 1,200년이나 이어온 참으로 유서 깊은 명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 해마다 4월 2일에 히라노 신사에서 성대한 제례 행사가 거행되었으며 또한 역대 천황가의 황태자
며 공주, 조정의 대신 이하 고관 등은 해마다 2월과 11월의 상신일(上申日, 첫원숭이날)을
제일(祭日)로 정해‘니이나메사이(新嘗祭)’라는 백제신 제사를 모셨다”라고 저명한 국학자 니시
쓰노이 마사요시(西角井正慶, 1900~1971년) 교수는 밝히고 있습니다 (‘年中行事辭典’ 東京堂 1958).
이 제사는 10세기초 율령세칙인 ‘엔기식(延喜式)’ 에도 기재돼 있는데 8세기 부터 히라노신사에서
제사를 모셨던 백제신(百濟神)은 “이마기노카미(今木神, 백제 성왕)를 비롯 구도노카미(久度神,
성왕의 선조)· 후루아키노카미(古開神, 백제 비류왕과 근초고왕)· 히메노카미(比賣神, 백제인
화씨 부인, 즉 칸무천황의 모후) 이며, 이 신들은 뒷날 헤이케씨(平氏)의 씨신(氏神, うじかみ)이
되었다” 고 다카야나기 미쓰토시(高柳光壽) 교수가 밝히고 있습니다 (‘日本史辭典’ 角川書店 1976).
참고로 칸무 천황(일왕) 의 생모 화씨 부인은 왜 왕실에서 백제조신(百濟朝臣) 이라는 벼슬을
지낸 화을계(和乙쫺, 야마토노 오토쓰구) 공의 딸이니... 화을계 조신은 백제 무령왕(武寧王,
501~523년 재위) 의 직계 후손으로 백제에서 왜 왕실에 건너와 봉직했으니 당시는
백제 왕실의 왕족 다수가 왜 왕실에 와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벼슬하던 것이 관례였습니다.
(7) 히라노 신사의 존재가치
일본의 고대 왕도 교토 히라노신사는 일본 천황(일왕)이 한국의 피를 이어오고 있음을
웅변하는 뜻 깊은 장소이니.... 백제왕과 왕족을 모신 이곳에 역대 일본왕들이 방문
해 백제 성왕의 신전 앞에 머리 숙여 제사를 지냈으니, 히라노신사에서 제사를 모신
마지막 일왕은 쇼와 일왕(昭和·1926~1989 재위) 으로 아키히토왕의 아버지 입니다.
쇼와 일왕은 1940년에 히라노 신사를 방문해 제사를 지내고 기념식수도 했는데 히라노
신사의 신관인 오사키 야스히로씨는 “쇼와 천황께서 기원 2600년(서기 1940년)을
기념해서 몸소 소나무를 심었다”며 자랑스럽게 이야기 했으니, 소나무 앞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진 나무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紀元二千六百年(昭和 15년) 天皇階下御手植松’
히리노신사에서 간행한 ‘히라노신사유서략기(平野神社由緖略記)’를 보면 과거 백제왕 신전에 제사
를 모신 일본 왕들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으니....‘덴겐 4년(天元·서기 981년) 3월에 엔유 천황
(圓融天皇·969~984 재위)이 이곳에 직접 행행(行幸) 한 이후로 계속해서 역대의 천황들이 행행
했으며 태황태후(太皇太后) 며 황태후(皇太后), 황후(皇后) 의 행계(行啓)도 그 예가 적지 않습니다.
가잔왕(花山天皇 ) 은 985년에 벚나무를 식수함으로써 벚꽃(사쿠라)의 명소로도 이름이 높아졌고 에도
시대(江戶·1903~1867) 에 히라노신사는 ‘히라노의 밤벚꽃놀이’ 로 친숙하게 됐는데, 벚꽃나무는
500여그루를 헤아리며 진종(珍種)이 많아서 유명하니 벚꽃축제인 앵제(櫻祭)며 신행제(新幸祭)가 해
마다4월10일에 거행되며 추수를 감사드리는‘햇곡식감사제’ 신상제(新嘗祭)는 11월 23일에 거행됩니다.
히라노신사는 백제인 간무천황 (桓武天皇·781~806 재위) 에 의해 794년에 처음 세워졌으니
‘히라노쓰쿠리(平野造り)’ 로 불리는 신전 건축양식이 높은 평가를 받으며, 일본 신전건축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됐지만 도쿄대 마치다코이치 교수가 저술한 ‘국보 중요문화재 안내’ 는
히라노신사의 유래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고, 간략하게 건물에 대한 설명만 몇줄 있습니다.
(8) 백제 무령왕릉 참배한 일본 왕자
조선왕조 말기의 영친왕비(英親王妃) 고(故) 이방자(李方子) 여사는 생전에 “일본 왕실에서도 숭늉을
마신다” 고 말했으니...“지금의 천황께서도 숭늉을 마시다마다요. 그분도 조선 사람이 아닙니까.”
이 여사가 가리킨 ‘그분’ 은 쇼와 일왕이다. 한 일본 학자(오비린대학 神田秀一 교수)는 “전두환
대통령 방일때 만찬회에서 쇼와 일왕도 자신의 조상이 백제인이라고 발언했다” 고 밝힌 바 있습니다.
도쿄의 황거에 왕실 제사 담당관 아베 스에마사씨는 아키히토 일왕이 매년 11월23일
밤에 백제신(韓神)을 위한 제사 축문을 낭창(朗唱)하며 신상제(新嘗祭)를 지낸다
는 사실을 말했으니.... EBS 광복절 특집 방송으로 방영됐는데 우에다 마사키
박사는 “비타쓰왕의 후손인 대원진인(大原眞人) 은 백제 왕족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일본 왕실의 아사카노미야 왕자는 2004년 8월 무령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충남
공주를 찾은 바 있으니.... 일본 왕자는 1300년전 일본 왕실에서 만든 왕실
제사용 향로(香爐)와 귀중한 향(香)을 무령왕릉(武寧王陵) 안에서 피우며 제주
(祭酒)와 제사용 과자 등 제물을 진설하고 무령왕의 영전에 머리 숙여 참배했습니다.
(9) 가나(假名)문자의 탄생:
히라가나(平假名) 는 한자의 초서체를 모방한 것으로 노예(奴隸) 의 노(奴) 는 누의 음을 가진
누(ぬ)로 사용하며.... 가타가나(片假名)는 하나의 음가를 표시하기 위해 한자의 한 부분을
골라낸 것으로, 노예(奴隸)의 노(奴)는 누(ヌ)자가 되었으니 두가지 다 “누” 음을 가지게 됩니다.
(10) 장 원(莊園) :
수도 대귀족이 지방에 대규모 장원(莊園)을 소유하게 되자, 소귀족들은 지방의 국사(國師)로 임명
되면 수입을 보장 받을수 있기에 경쟁이 치열하여 대개는 국사에 임명되면 대리인을 보내는데
수령이라 부르며, 어떤 악착같은 국사도 대귀족 소유의 장원은 세금징수를 못하니 어찌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1068년 후지와라씨의 외손이 아닌 고산죠왕(천황) 이 등극하여 장원을 정리합니다.
상황(上皇)으로 물러나서도 원청을 설립했고 후임 일왕(천황)들이 정책을 유지했지만 상황(上皇)들
이 개인사치와 절을 호화롭게 꾸미는데 재물을 탕진하고 귀족들도 호화사치의 극을 이루었으니
백성들의 살림은 어려워져만 가는데.....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는 평민들이 무거운 세금을 감당할
수 없어, 고려나 조선시대 처럼 절에 들어가거나 유력자에게 재산을 바치고 노비로 전락하게 됩니다.
(11) 무장 승병(僧兵)의 대두:
승려는 조세와 부역이 면제되었으므로 11세기 무렵 부터 절로 들어가는 농민들이 급증하니
그들은 종교 수련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으며 마침 절에서도 사원의 토지와
재산을 지킬 “무력”이 필요했으므로 이들이 필요하게 되어 오직 무장 수련하게된 것입니다.
특히 교토 북쪽 히에이(比叡 비예)산의 유서깊은 절인 “엔랴쿠샤(延曆寺 연력사)”
등은 조정의 국사와 무력으로 싸우기도 하고, 히에신사의 신여(神輿)
받들고 조정으로 몰려가서는 항의하는 강소(强訴) 가 수십회에 이르렀습니다
(12) 사무라이 (부시 武士)의 등장:
“사무라이”는 사부라우모노(가까이서 모시는 자) 라는 말이 그 어원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싸울아비”가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억지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지만.... 헤이안 시대
지방의 호족은 선조로 부터 물려받은 토지로 고향에서는 물자와 군사를 동원할수 있는 등
유력자로 군림했으나 서울에 올라오면 귀족의 신변을 보호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던 것입니다.
금석물어(今昔物語)에 보면 비와호 쓰루가의 무장 도시히토가 수도에서는 후지와라노 모토쓰네
의 경호원에 불과했으니 과히 명예로운 칭호는 아닙니다만, 그러나 수도의 귀족과 연줄이
닿아야 지방에서 세력을 늘릴수 있었으니 고쿠닌(國人)으로서는 감당할만한 자리라고 봅니다.
(13) 헤이케(平)씨에서 비롯된 무사정권
교토 히라노신사에 모신 백제신들이 헤이케씨(平氏) 씨신이 되었다는 설이 있으니 헤이안(平安)
시대 후기 무장(武將)인 다이라노 키요모리(平淸盛, 1118 ~1181년)도 칸무천황(일왕) 처럼
백제인의 후손이라는 설인데... 다이라노 키요모리눈 겐지씨(源氏) 가문의 무장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 1123~1160년) 를 무찌르고 왕조(王朝)국가의 군사력을 장악했던 무장 입니다.
12세기 일본 무사 국가는 다이라노 키요모리에 의해 시작됐던 것이니 이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1192년 왕도(王都)인 헤이안경(平安京, 지금의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동쪽 가마쿠라(鎌倉) 땅에
무사정권(武士政權)을 세웠으니, 이것이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인 이른바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였는데 그 당시부터 천황가(天皇家)는 실권을 빼앗긴 채 다만 상징적 존재로 머물기 시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