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예수님처럼 수난을 당하시는 마리아
체스토코바(CZESTOCHOWA, 폴란드)의 성모님 이야기
폴란드의 여왕. 우리들의 어머니 체스토코바의 성모 마리아.
체스토코바의 성모그림은 그림마다 인상이 조금씩 다르다. 그 이유를 나는 모른다.
Poland의 주보, 체스토코바의 성모 마리아.
이 검은 성모자 그림은 세계의 여러 곳에 모셔져 있다. 비엔나 해방 300주년을 맞아 요한 바오로 II 교황님께서 1983. 9. 13. 오스트리아를 방문하셨을 때 비엔나의 Kahlenberg 성당을 찾아 이 성당에 모셔진 체스토코바의 성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이 그림은 공산치하 때 한 청년 무신론자에 의해 얼굴이 긁히는 상처를 입었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Austria Vienna의 Kahlenberg 성당에 모신 체스토코바의 성모자
체스토코바의 검은 성모 이콘이 그림마다 다른 이유를 알았다. 그것은 작가가 다르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이콘을 전공하시고 현역 작가로 활동하시는 Pasic수녀님이 가르쳐 주셨다. 수녀님은 2002.9.18 대구에 하루를 들리셨는데, 짧은 체재기간 동안 소수의 사람들에게 이콘에 대한 특강을 해 주셨다. 삼덕동 스승예수제자수녀회에서 귀한 저녁대접까지 받으면서 우리 부부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콘은 주님의 수의에 찍힌 영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이콘은 성서보다 먼저 생겼고 초대교회 신자들의 전례생활의 중심역할을 했다. 교회 초창기부터 주님의 모습이 박혀있는 수의를 깔로 주위를 꽃으로 장식하고 성모님과 제자들이 둘러앉아 주님의 거룩한 전례를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성당의 벽화를 통해 신자들을 가르치고 성서가 기록되기 전부터 주님의 삶을 증언하는 기록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이콘은 그림성서라 할 만하다. 이콘은 깊은 신심을 바탕으로 명상을 통해 얻은 영감으로 그려지는 것이라고 한다.
폴란드의 체스토코바 성모의 역사는 야스나 고라(JASNA GORA ; 빛의 언덕)에 있는 성 바오로 은수자회의 수도원이 공경하는 성모화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이 성화의 기원은 전설적이다. 일반 신자들은 이 성화를 성 루가의 마돈나 이상으로 공경하는데, 그 이유는 성 요셉이 성 가정을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식탁위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성화를 조사해본 결과, 5세기 내지 8세기의 것으로 판명되자 그 열기는 더욱 고조 되었다. 그런데 이 성화는 신비스런 여행 끝에 이곳에 모셔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팔레스티나에 있다가 비잔티움으로, 그 다음은 헝가리로, 루테니아로, 맨 마지막에는 베츠성(城)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1. 역사적 기록과 이 성화의 중요성
라디슬라오 오플치크 왕자가 전리품으로 이 성화를 획득하여 체스토코바로 옮겨 온 뒤, 1384년에 성 바오로 은수자들에게 넘겨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1430년에는 약탈자들이 침입하여 많은 손상을 입혔는데, 국왕 라디슬라오 야기엘로가 아우구스부르그 궁중 미술가를 불러 복원시켰다. 그런데 이 미술가는 원상 회복을 시킨 것이 아니라, 비잔티움과 서방 양식을 혼합하였던 것이다. 체스토코바의 마돈나는 "호디지트리아"로 알려진 동정 성모님의 모습인데, 이 말은 "성모 마리아가 당신 왼팔에 안고 있는 거룩한 예수 아기를 오른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모습"이란 뜻이다. 이 성화의 신비스럽고도 극적인 역사가 대중적인 공경을 불러일으키고 순례자들의발걸음을 그치지 않게 한다. 그리고 1402년에 일어난 첫 번째 기적 때문에, 이 성모상은 "병자의 구원" "자비의 어머니" 그리고 "폴란드의 여왕"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1957년까지 대개, 1,500회의 기적 이야기가 보고되어 있다.
처음부터 이 성화는 정치적 불안 시대에 살던 수도자들과 기사들 그리고 치유의 은사 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병자들, 교회의 일치를 희구하여 기도해온 신자들로부터 큰 공경을 받았다. 또 폴란드의 통치자들도 그들의 왕관과 홀을 성상 발아래 두고 동정 마리아께 선정을 서약했고, 마리아를 여왕으로 모시도록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15세기에는 금으로 된 식탁이 등장했고, 16세기에는 동정녀와 아기 예수에게 왕관이 씌워졌는데, 이것은 라디슬라오 4세의 선물이었다고 전해온다.
1655년, 야스나 고라의 수도자들이 스웨덴의 침략을 기도로써 물리친 다음부터 순례자들이 수 없이 몰려왔고, 성모님의 발현으로 적을 격퇴하였음에 감사하였다. 이 때문에 폴란드 의회는 이 축일을 수도자에게 감사드리는 날로 선포하였고, 1764년에는 폴란드가 성모 마리아께 은혜 입은 것을 영원히 갚아야 할 것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18세기에는 폴란드가 독립을 잃게 되었는데, 이때 성모님은 모든 항쟁의 수호자가 되셨고, 민중들은 마리아를 해방과 국가 통치권의 수호자로 열렬히 모셨다. 그러므로 침략자인 러시아는 순례를 금지시키고, 이 성상을 제거하려고 애썼다. 이 때, 그들을 비웃는 희화를 비롯하여 성모님께 더욱 매달리기를 호소하는 책자들이 쏟아져 나왔고, 또 체스토코바의 성모 성당이 최초로 건립되었다. 지금은 전 세계 270여 개의 성당들이 이 성모상의 이름으로 봉헌되어 있는데, 미국에만도 27개 성당이 있다.
단체 순례는 14세기부터 시작되었고, 17세기경에는 순례자들의 수효가 연간 4-6만이었으나, 1717년에는 200,000명이 한꺼번에 몰려들기도 하였다. 그 후 19세기에 이르러 폴란드가 자유를 잃게되자, 야스나고라 수도원은 폴란드 애국주의의 중심이 되었으며,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국민들이 나찌에 항거하며 이 수도원까지 행진하여 그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 성모님과 성당은 폴란드 국민의 힘의 원천이다. 이리하여 폴란드는 천주의 성모님께 봉헌되었는데, 폴란드의 신앙은 체스토코바의 성모 손에 달렸다고 국민들은 인식하고 있다.
공산 치하에서도 폴란드 정부는 이 성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온갖 교통수단을 차단하여 순례를 방해하였다. 그러나 1979년, 한 해에만도 바르샤바까지 도보로 걸어온 순례객들의 수효는 4만 명이 넘었다. 이런 여행자들 중에는 미국의 케네디 형제들, 라 피라, 알도 모로 등등이 유명하고, 이탈리아의 "일치와 해방" 운동 단체들이 순례하여 폴란드 국민들에게 큰 감명을 주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야스나 고라 수도원은 폴란드의 영적 수도로 인정받고 있다. 여기서 폴란드 교회의 시노드, 주교회의를 비롯하여 각종 대회 및 전국적인 심포지움이 열린다.
2.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
크라코우 수도 대주교인 카롤 보이띨라 추기경이 1978년 10월 16일자로 요한 바오로 2세로 교황 위에 오르면서부터, 체스토코바의 성모 성지는 세계의 이목을 받기 시작했고, 더욱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1979년 6월에 순례하신 다음부터는 세계 도처에서 순례자들이 모여들고 있다. 그 당시, 교황은 체스토코바의 성모 신심은 자신뿐만 아니라 폴란드 전 국민의 심중에 깊이 자리하고 있으며, 전체 교회에 대한 감도와 신앙의 표상이 된다고 선언 하셨다. 그리고 야스나 고라의 "블랙 마돈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1979년 6월 4일).
A. "폴란드의 아들을 베드로좌로 부르신 사실은 이 성지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이 곳은 큰 희망의 땅이며, 나는 이 성상 앞에서 수 없이 기도하곤 하였습니다"
B. "야스나 고라의 성모는 모든 영혼들에게, 모든 가정에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모성적 사랑을 알려 주십니다".
C. "체스토코바는 교회 안에 성모님이 임재하심을 알리는 상징입니다. 천상 어머니께서 분명히 여기 이 자리에 계십니다. 어머니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 계십니다. 마리아는 만인을 위해 그리고 당신을 뵈오러 순례의 길을 찾아 든 모든 이와 함께 계십니다...".
D. "흰옷을 입고 계시는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여, 나는 다시금 당신의 모성적 사랑과 배려 앞에 나 자신을 바치나이다. 나는 온전히 당신의 것입니다. 나는 당신께 전 교회를 -세상이 마칠 때까지- 봉헌하나이다! 모든 인류를 어머니께 봉헌하나이다! 나의 모든 형제 자매들과 전 인류를, 모든 나라를 어머니께 바칩니다... 어머니여, 우리를 받아주소서! 어머니시여, 우리를 저버리지 마십시오! 어머니여, 우리를 인도하소서!
- 마리아 사전 - 최정오 역편 / 마리아회 감수.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