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세계는 피와 의리, 전쟁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모든 칼끝 뒤에는 언제나 돈이 있었다. 유비가 군사를 일으키고 손권이 수군을 꾸리고 조조가 천하를 휩쓴 그 이면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지갑이 있었다. 영웅들의 꿈은 피와 의리로 빚어졌지만 현실은 재물로 굴러갔다.
유비는 평생 가난했다. 스스로 왕손이라 했어도 짚신과 돗자리를 팔던 출신이었고, 천하를 외쳤어도 창고는 늘 비어 있었다. 그런 유비 곁에 한 남자가 있었다. 서주의 대부호, 미축(麋竺·자는 자중(子仲))이다.
'정사 삼국지' 촉서 미축전은 그의 가산을 이렇게 적었다.
"祖世貨殖, 僮客萬人, 貲產巨億." 조상 대대로 상업을 했고, 거느린 노복이 만 명이며, 자산이 거억(巨億)에 이른다.
서주 동해국 구현(朐縣) 사람으로, 도겸이 죽자 그의 유명을 받들어 소패에 있던 유비를 서주로 맞아들였다.
196년, 여포가 하비를 기습해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광릉과 해서 사이를 떠돌던 유비에게 미축이 한 일은 짧고 무거웠다. 누이를 유비의 부인으로 보냈고, 노객 2,000명과 금은화폐를 군자(軍資)로 내놓았다.
정사는 이 대목을 "於時困匱, 賴此復振"이라 했다. 그때가 어렵고 궁핍하였는데 이로써 다시 떨쳐 일어났다. 조조가 미축을 영군태수로, 동생 미방을 팽성상으로 추천하자 형제는 관직을 버리고 유비를 따랐다. 어딜 가든 받아들여질 만한 명성과 재력이 있던 사람이 유비를 골랐다. 미축의 선택이었다.
214년 익주가 평정되자 유비는 미축을 안한장군(安漢將軍)에 임명하고, 그 반열을 군사장군 제갈량의 위에 두었다. 219년 동생 미방이 손권에게 항복해 관우의 죽음을 초래하자, 미축은 스스로 결박하고 죄를 청했다. 유비는 동생의 죄로 형을 묶지 않는다며 그를 처음과 같이 대했다. 그러나 미축은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1년여 만에 병으로 죽었다. 영웅의 덕은 빛나지만, 그 덕을 지탱한 자리에는 늘 한 사람의 헌신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자연스레 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우리의 독립운동은 무엇으로 버텼는가.
임시정부의 깃발, 청산리의 총성, 북로군정서의 행군, 신민부의 조직, 조선어학회의 원고. 이 모든 것의 뒤에도 경제와 사람의 심장이 있었다. 그러나 강연장에서도 교과서에서도, "무슨 돈으로 누구의 손으로 그 큰일을 해냈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우리는 자주 침묵한다.
유비에게 미축이 있었듯, 한국 독립운동에도 미축들이 있었다. 신앙과 헌금, 포교망과 인맥으로 자금줄을 잇고 사람을 모은 이들. 그 한복판에 대종교가 있었다.
대종교는 1909년 음력 1월 15일, 나철·오기호·강우·유근·정훈모·이기·김윤식 등 십여 명이 서울 재동 취운정에서 단군 사화를 신앙의 줄기로 다시 세웠다. 그 일을 '중광(重光)'이라 했다. 거듭 밝힌다는 뜻이다. 나라의 명운이 기울던 시절, 이 종교는 처음부터 무기가 없는 군대였다. 1916년 음력 8월 15일 나철이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조천(朝天)한 뒤, 교단은 무장투쟁으로 방향을 틀었다.
방향을 튼 사람의 이름이 서일(徐一·본명 서기학·호 백포)이다. 함경북도 경원 출신의 사범학교 교사였던 그는 경술국치 직후 두만강을 건너 1911년 3월 만주 화룡현 청파호 일대에서 의병의 잔류 병력을 규합해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했다. 대종교에 입교한지, 3년 만에 동만주·북만주·연해주·함경도 일대에서 십만 교우를 얻었다. 그는 청년 교우들을 독립군으로 편입했고, 일반 교우에게는 군량 조달 임무를 맡겼다. 신앙 공동체가 군사 공동체로 옮겨가는 길이 그때 열렸다.
1919년 5월 중광단은 대한정의단으로 확대 개편됐고, 그해 8월 산하에 대한군정회를 두어 무장조직을 갖췄다. 10월 두 조직이 통합해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가 되었고, 12월 상해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정부'를 '서'로 바꿔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가 됐다.
본부는 왕청현 춘명향 덕원리, 사령부 본영은 서대파, 사관양성소는 십리평. 서일이 총재, 김좌진이 총사령관, 현천묵이 부총재, 이장녕이 참모장, 김규식이 사단장, 이범석이 연성대장이었다. 그 본부의 위쪽에는 서로군정서를 두고 그것과 짝을 이룬다 하여 사람들은 이 부대를 북로군정서라 불렀다.
장병의 거의 전부가 대종교인이었다. 1920년 7월 무렵 정규병력 약 1,500명, 군총 약 1,8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을 갖춘 만주 최대의 독립군단으로 성장한 그들이 같은 해 10월 청산리에서 일본군 동지대를 상대로 백운평·완루구·천수평·어랑촌 일대 10여 차례 전투를 벌이고 모두 이겼다. 서일이 임시정부에 올린 정식 보고는 일본군 전사자를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 그 외 장교 이하 사병 1,254명, 부상자 200여 명으로 적었다. 식민지 피지배 민족의 비정규군이 근대 제국 정규군에 거둔 전과로는 전례가 드물다.
신앙이 결속을 낳았고, 결속이 청산리의 승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승리가 곧 안식은 아니었다. 청산리 직후 일본군이 간도 전역에서 한인을 학살한 경신참변, 1921년 6월 자유시참변, 그해 9월 마적의 습격으로 부하들이 죽자 책임을 통감해 자결한 서일의 죽음이 1년 안에 잇따랐다.
이 갈래는 북간도에서 시작됐지만 흐름은 그곳에만 멈추지 않았다. 같은 시기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의 신흥강습소(뒷날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주도한 이회영·이시영·이동녕·이상룡, 그리고 그곳에서 길러진 청년 사관들이 청산리의 또 한 축을 이뤘다.
신흥무관학교에서 양성된 박영희·백종렬·강화린 같은 장교들이 북로군정서의 사관연성소 교관으로 파견됐다. 이회영과 이시영, 이동녕은 모두 대종교인이었다. 서간도의 군사기지와 북간도의 종교 공동체가 청산리에서 한 줄기로 만났다.
청산리 이후 흩어진 부대를 다시 모은 것도 대종교 인맥이다. 1925년 3월 영안현에서 김혁(중앙집행위원장)·김좌진(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조성환·정신·박두희 등이 신민부(新民府)를 결성했다. 신민부는 목릉현 소추풍에 성동사관학교를 세우고 졸업생 500여 명으로 부대를 편성했다. 김혁·조성환·정신·박두희 모두 대종교인이었다. 청산리에서 신민부로 이어지는 무장의 계보는, 사실상 대종교 신앙 공동체의 군사적 연장선이었다.
여기까지가 총을 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대종교의 미축들은 총만 들었던 것이 아니다.
상해 임시정부의 골격을 짜고 운영한 사람들 가운데도 대종교인이 무겁게 박혀 있었다. 박은식(2대 대통령)·이시영·이동녕·신익희·조소앙·박찬익·민필호·유동열. 그 명단은 길다. 1919년 2월 길림에서 발표된 무오대한독립선언서, 즉 기미독립선언서보다 한 달 앞선 그 선언은 39인 서명자의 다수가 대종교인이었다.
김교헌·김동삼·김좌진·여준·신팔균·신채호·조소앙·박찬익·이상룡·이시영·이동녕.
임시정부 수립 이전에 이미 만주에서 독립을 천명한 인물들의 신앙이 어디로 모여 있었는지 그 명단이 말해 준다. 그리고 대종교의 투쟁은 무장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말을 지키는 싸움이기도 했다.
주시경의 문하에서 한글 연구의 뼈대를 세운 김두봉은 조완구와 함께 대종교에 입교했다. 김두봉이 27세에 광문사에서 펴낸 '조선어문전'은 한글 문법 연구의 초석이었다. 권덕규·이극로·정열모·이병기·최현배. 조선어학회의 핵심에 대종교의 그림자가 깊다. 1929년 시작된 '큰사전' 편찬은 1942년 조판 교정 단계에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중단됐다가, 해방 뒤 경성역 창고에서 행방불명되었던 원고 26,500여 장이 발견되며 재개됐고, 1957년 한글학회의 이름으로 끝내 완성됐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진 시점이 의미심장하다. 1942년 10월 1일, 정태진 체포로 시작된 조선어학회 사건의 불씨가 채 사라지기도 전인 같은 해 11월 19일, 일본 경찰은 만주 영안현 동경성에서 대종교 교주 윤세복 이하 간부 25명을 일제히 검거했다. 임오교변(壬午敎變)이다. 두 사건의 매개가 무엇이었느냐. 윤세복과 이극로가 주고받은 '단군성가'와 '널리 펴는 말' 원고가 일경의 손에 들어간 것이 빌미였다. 만주의 대종교와 국내의 조선어학회가 같은 사건의 두 얼굴이었다는 뜻이다.
그날 검거된 25인 가운데 권상익·이정·안희제·나정련·김서종·강철구·오근태·나정문·이창언·이재유 열 사람이 액하감옥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사했다. 대종교는 이들을 임오십현(壬午十賢)이라 부른다.
그중 안희제는 백산상회(백산무역 주식회사)를 운영하며 상해 임시정부에 막대한 자금을 비밀리에 댔던 인물이다. 나정련과 나정문은 대종교를 중광한 나철의 장남과 차남이었다. 강철구는 강우의 아들로 부자 2대가 항일에 투신한 가문이었다.
신앙 공동체의 머리가 무장조직에서 무너지고, 그 머리의 마지막이 사전 편찬자들과 함께 검거된 이 동시성은 우연이 아니다. 일제가 같은 한 묶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일제는 대종교의 죄목을 "조선 고유 신도를 중심으로 단군문화를 다시 일으켜 조선 민중에게 조선 정신을 배양하고 민족자결의식을 선전하는 교화단체이니만큼 조선 독립이 그 최후 목적이다"라고 적었다. 종교활동이 곧 독립운동이라는 판결이었다.
말이 살아남았기에 민족이 살아남았다. 나라가 없을 때 말이 나라였고, 그 말의 뿌리에는 단군의 자취를 붙든 사람들의 신앙이 있었다. 삼국지의 미축이 금으로 유비의 길을 세웠다면, 대종교의 미축들은 신앙과 말과 사람으로 민족의 길을 세웠다. 청산리의 총성과 사전 원고와 백산상회의 회계장부는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같은 한 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결이 다른 투쟁이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으로 시작한다. 그 역사와 전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망국의 시절 총도 없이 단군의 이름을 붙들고 말과 믿음으로 민족을 지켜낸 사람들이 있었다고 답해야 한다. 그 이름들을 더 이상 잊은 채로 두어선 안 된다.
서일과이름이 미처 적히지 못한 수많은 무명의 대종교 교우들.
그들이 한 사회의 칼끝 뒤에 있던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