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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8일 주일 낮예배 설교
본문: 계 20: 7-`5
제목: 내 이름은 어느 책에 기록되어 있는가?
I. 들어가는 말
추석을 앞두고 마음이 분주하시죠? 마음이 이렇게 바쁜데 지금 대한민국에는 두 개의 거대한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하나는 링링, 또 하는 소위 '조국 청문회'입니다. 두 거대한 폭풍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진행 방향의 범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어제 바람이 한참 세게 불 때, 아이파크 입주자 차량 출입구 쪽에 있떤 가로수 하나가 넘어졌습니다. 경찰이 교통을 통제하고, 소방대원과 119 구급 차량까지 출동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이 많이 다쳤나 싶어 걱정이 되더군요. 조국 청문회도 잠깐 시청했는데, 조국 바람이 잦아들든지 아니면 누군가 그 바람에 날라가던지 할 정도로 심각하더군요.
이때, 중요한 것은 방심해도 안 되지만, 너무 겁을 먹는 것도 불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바람이 되었든 바람이 아무리 거세다고 하더라도 이 또한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정신차리고 잘 준비해서 대비한다면 그렇게 큰 피해는 입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20:1-6의 말씀을 가지고 末世之末에 일어날 사탄의 마지막 발악에 대해서 살펴 보았지요. 그것은 창세기 3::15에서 예언하신 것처럼 머리가 상한 뱀의 마지막 발버둥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보다는 뛰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비록 발버둥이라고 하더라도 그 강도나 범위가 우리 입장에선 태풍 링링보다도 더 강력하다는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탄의 마지막 발악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태풍에 대비하기 위해 경고방송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 발악이 마지막이라면 그 다음에 일어날 일도 알아야 합니다. 알야야 대처를 할 수 있기 때문이죠.
II. 곡과 마곡의 전쟁
천 년이 되어 사탄이 그 옥에서 잠깐 놓여나옵니다. 그는 7절을 보면, 곡과 마곡을 미혹하여 싸움을 벌입니다. 이 곡과 마곡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리고 누구와 싸우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왜 이 전쟁을 허용하시는 것이겠습니까?
1. 곡과 마곡의 정체
구약성경 겔 38:2을 봅니다.
인자야 너는 마곡 땅에 있는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곧 곡에게로 얼굴을 향하고 그에게 예언하여
그 지역과 이름이 요한계시록에 다시 등장한 것입니다. 1980년대에는 본문 8절과 겔38:2의 구절로 인해서 온 교계가 떠들썩했습니다. 에스겔서에서 마곡은 북쪽 끝에 있는 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스는 러시아, 마곡은 모스크바를 의미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유는 발음이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이 사람 아시죠. 구 쏘련의 마지막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쵸프입니다. 1980년대 초 이 사람이 러시아 정계에 등장하면서 이 주장은 더욱 더 기승을 부려요. 왜 그렇겠습니까? 곡이 바로 고르바쵸프 이 사람이라는 거죠. 이 기류를 기가 막히게 이용해서 한 몫 크게 잡은 사람이 바로 ‘이장림’ 이라는 사람입니다. 다미선교회를 조직해서 시한부 종말론으로 성도들을 끌어 모은 거지요. 기성 교회에서 마곡이 모스크바라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무런 저항도 비판도 하지 않고 너무 쉽게 다미 선교회를 끌려 들어갑니다.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가족 버리고, 직장 버리고, 재산 팔아서 몽땅 다 다미선교회에 헌납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1992년 10월 24일 주님이 재림하신다는데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거였죠.
고르바쵸프가 예상대로 1985년에 쏘련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을 때는 난리가 났죠. 예언 좀 한다는 분들은 ‘봐라. 이제 종말이 올 것이다. 고르바초프가 큰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라면서 목청을 높였습니다. 그런데 이 곡이 전쟁을 일으킨 게 아니라 갑자기 1년 뒤인 1986년 4월에 개방정책을 펼칩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경제 개방이었고, 글라스노스트는 정치개방이었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기독교도 허용한 거예요. 예언이 허망해진 거죠.
그러면 곡과 마곡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에스겔서의 마곡은 땅이름이고 곡은 임금 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본문 8절을 보면, 그들의 본질은 “땅의 사방 백성”입니다.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고 말씀하니 단수가 아니라 복수, 그것도 엄청난 수의 복수잖아요.
그러면 왜 곡과 마곡의 이름을 가져왔느냐? 겔 39:6을 보면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또 불을 마곡과 및 섬에 평안히 거주하는 자에게 내리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그들은 9절 하반절 말씀처럼 허무하게 불에 타죽는 공통된 종말을 맞이합니다. 왜 불에 타서 소멸합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기 때문인 것이죠. 결국 곡과 마곡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대적하는 모든 자를 상징한 것입니다.
2. 곡과 마곡이 미혹당하여 저지른 일은 무엇인가?
사탄이 왜 곡과 마곡을 미혹합니까? 본문 8절 하반절을 보면, “싸움을 붙이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곡과 마곡이 서로 싸우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 둘은 한 패거리인 것입니다. 그들은 힘을 합쳐 누군가와 전쟁을 벌이려고 합니다. 9절을 보면, 역시 사방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포위합니다.
성도들의 진은 교회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겠는데, “사랑하시는 성”은 조금 난감합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눅 19:41의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라는 구절과 연관지어 예루살렘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히 8:13을 보면, 초대교회의 예루살렘에 대한 생각은 옛것으로 완전히 소멸되어 간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본 것이 예언이 된 것처럼 예루살렘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소멸되어 버립니다.
그 ‘사랑하시는 성이 어디인지’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세에는 성도들이 교회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엄청난 숫자의 군중들로부터 받는 것이지요.
이렇게 사탄의 마지막 발버둥은 교회들로 하여금 심각한 절대절망을 느끼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배교, 즉 교회를 떠나라고 하는 의미이고, 겁을 먹고 자기편으로 귀순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3. 곡과 마곡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거대한 부대로 포위하여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할 때, 9절 하반절 말씀처럼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다 태워버립니다. 그리고 최후의 발악을 한 사탄은 체포됩니다. 그가 묶여있던 곳이 어디지요? 무저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무저갱으로 안 가고 바로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지는 형벌이 남은 것이죠.
그 불과 유황으로 타는 싸우나 땅에는 이미 먼저 온 손님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짐승이었고, 하나는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이들이 불 못으로 들어간 것은 계19:20에 기록되어 있죠. 오랜만에 만났으니 기쁨의 재회식이라도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아마도 죽지도 않는 불 못에서 서로의 잘못을 탓하고 있을 것입니다. ‘네 탓이요’ 하는 것은 지옥의 특징이니까요.
III. 백 보좌 심판
사탄이 최종적으로 불못에 던져졌고, 미혹당한 자들은 불에 타 소멸되어 버렸습니다. 종말에 반드시 있을 것으로 기대해야 되는 것은 심판입니다. 본문 11-15절은 심판의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1. 신앙은 관점을 바꾸는 것이다.(11)
사도 요한의 시선이 11절에서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에게로 바뀌었습니다. 이 때, 동시에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없어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이 의미를 이해하려면 로마시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로마 황제는 보좌에 앉아서 로마제국을 통치하였습니다. 통치의 수단 가운데 중요한 것이 심판이지요. 사도 바울은 로마시민권이 있었기 때문에, 황제에게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장군과 그 부대는 보좌에 앉은 왕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보좌에 앉은 로마제국의 황제 앞에 서면, 그 어느 나라에서 온 왕이라도 무릎을 꿇고 절을 함으로 복종을 표시하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즉, 황제의 보좌 앞에서는 그 어느 것도 권위를 내 세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백 보좌의 의미는 전 우주의 중심이 되어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 그리고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보좌 앞에서 그 어떤 것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시선을 두는 것이지요. 하나님께 시선을 두었을 때, 세상의 모든 것은 의미가 없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시선, 즉 관점을 바꾸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 앞에 섰는데도 다른 것이 보인다면, 그것이 하나님보다 귀하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우상인 것입니다.
2. 신앙은 뿌리를 어디에 내리느냐 하는 것입니다.(12)
a. 심판의 대상은 모든 자들이다.
사도 요한은 12절에서 보좌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디서 와서 보좌 앞에 서 있는 것입니까? 13절을 보면, 바다와 사망과 음부에서 뱉어낸 자들입니다.
12절을 보면, “큰 자나 작은 자나”라는 표현이 있지요. 키가 큰 자나, 작은 자라는 의미보다는 권세와 부, 지식, 그리고 명예 같은 것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의미한다고 봐야겠지요. 세상의 기준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자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b. 심판의 기준은 책들에 기록된 행위이다.
그들이 심판받을 기준은 무엇입니까? 12절을 보면,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라고 말씀하고 있고, 13절 하반절에서도 “각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심판을 받게 된다. 이 구절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과연 이 생각도 타당하다고 봐야할까요? 우선 12절을 다시 한 번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중간을 보면,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는데 곧 생명책이라”는 구절이 보이십니까? 몇 종류의 책이 있습니까? 책들과 다른 책, 즉 생명책입니다. 책들은 복수인데, 생명책은 단 한 권 단수로 되어 있지요?
여기서 주의깊게 봐야 할 것은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라고 할 때, 죽은 자들의 행위는 생명책이 아닌 “책들”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책들에 그 행위가 기록된 자들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불못에 던져진 자들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인 것입니다.
c.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근본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 즉 두 책들의 차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에 대한 해답은 마 7:18에서 24절까지가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사람들은 20절에서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하는 말씀 때문에,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7:18의 말씀은 열매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무의 차이, 즉 포도나무가 사과를 열리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21절에서 반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시지 않으셨냐는 것이지요. 주님은 그러한 반론을 의식하셔서 22-23절을 덧붙이셨습니다.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고 신유의 기적도 베풀었지만, 그것은 그래봤자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24절입니다. 한 번 읽어봅시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것”과 “집을 그 반석 위에 짓는 것”을 동일시하고 있는 비유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터를 어디에 닦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래 위에 터를 닦고 집을 짓느냐, 아니면 반석 위에 터를 닦고 집을 짓느냐 하는 차이를 말씀하시기 위해 24절의 비유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나의 이 말”은 2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잘 아시는 요3:16을 암송해 볼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즉,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알고 믿는 그 터 위에 무엇을 해도 해야 영생을 얻는 것이지, 그 외에 다른 터 위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멸망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믿지 않는 사람, 특히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항의를 합니다. 배타적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고 교회 다닌다고 해서 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완벽한 것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구제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좋은 일을 하는 경우도 숫하게 많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 그리스도를 꼭 믿어야만 불못에 안 들어가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까?
신약성경은 거의 모든 말씀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으로 딤전4:6을 보겠습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뿌리를 하나님의 뜻에 내리는 것이 됩니다. 뿌리를 내리게 되면 땅에서 영양분을 공급받듯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양식을 공급받아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생명의 양식입니다. 하나님은 양식만 공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태풍이 불거나, 가뭄이 올 때, 나무를 지켜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나무는 좋을 때는 똑같이 성장하는 것 같지만, 조만간 기생식물이 달라붙고, 가뭄에도 수분을 공급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태풍이 불면 혼자서 버티다가 견디지 못하면 쓰러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고백했다면, 비록 지금은 신앙적으로 어린 아이 같거나, 혹은 윤리, 도적적으로 미흡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결국 왕 같은 제사장으로 길러내신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보게 될 21:6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의 의미는 계획한 것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제일 교회 형제 자매들이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으십니까? 저도 예수님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확실히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나중에 불못에서 재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잔치자리에서 기쁨을 나누며 만나게 될 것입니다.
3. 둘째 사망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입니다.
사탄도 던져졌고,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들어간 불못에는 백 보좌 앞에 서있던 죽은 자들이 모두 보내질 것입니다. 8절에서 마지막으로 미혹 당한 곡과 마곡도 살아나서 심판대 앞을 거친 뒤에 불못으로 보내지겠지요.
그런데, 이 불못에 들어간 것을 14절은 둘째 사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둘째 사망이란, 영원히 죽지 않고, 불못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했을까요? 그 의미는 다음 장에서 심도 있게 다루려고 합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오직 하나, 불못에 들어가는 것이 둘째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IV. 나가는 말
본문과 관련하여 그림 한 장 소개하고 싶습니다. Edvard Munch라는 화가가 그린 <시계와 침대 사이에 있는 자화상>이라는 그림입니다. Munch 하면 이 그림을 한 번 소개시켜 드린 적이 있습니다. <절규>라는 제목의 그림이죠. 이 화가의 그림 중에 자화상이 가장 마지막에 죽기 전에 그린 그림입니다. 그는 81살로 별세하게 되는데, 당시로서는 상당히 오래 산 편이지요.
그런데 뭉크의 그림을 보면, 대부분이 <절규>에서 보는 것과 같이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귀신같은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절규의 구도를 보면,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의 그림 중에서는 그래도 마지막에 그린 자화상이 가장 사람다운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림의 얼굴을 보십시오. 거의 해골에 근접해 있고, 무표정합니다. 어깨는 축 늘어져 있습니다. 그의 오른편에 세워져 있는 긴 궤짝 같은 것이 시계인데 초침도 분침도 없습니다.
뭉크는 평생 이렇게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았습니다. 어머니와 누나가 일찍 죽고, 사랑은 언제나 불행하게 끝났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해도 꼭 해서는 안 되는 사랑만 하는 것 같아요. 남의 부인을 사랑하니 그 사랑이 온전히 지속되겠습니까?
뭉크는 그림으로 성공했고, 많은 돈을 벌어서 풍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림에서 보듯이 그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돈이 죽음에 대한 그의 공포는 해결해 주지 못했던 것이지요. 세상만 바라보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절망적인 일에 그의ㅡ 시선이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그는 절대로 행복해 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Marc Chagall이라는 화가의 그림은 따뜻하고, 사랑이 있고, 생명력이 넘치면서 세상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그림 중에 한 폭인 <아담과 이브의 낙원>입니다. 그가 이렇게 밝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 그가 부유하고 풍족한 삶을 살아서가 아닙니다. 그는 제정 러시아가 유대인들을 핍박하던 시대에 게토, 즉 유대인 거주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러시아가 공산당으로 바뀌고 나서도 무시당했고, 독일이 그의 고향을 침범했을 때, 유대인인 그가 어떤 수모를 당했을지 상상이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마치 천상의 삶을 보는 듯한 밝음이 있습니다. 그림의 제목에서 보듯이 그는 구약성경에 그의 생각의 뿌리를 심어 놓고 살았던 것입니다.
생각의 뿌리가 어디에 박혀 있느냐에 따라서 삶이 달라지고, 삶의 열매가 달라집니다. 조국 청문회를 보면서 놀란 것은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다르다고 해서 한 사람을 평가하는 데 한 쪽은 세상에서 제일 죽일 놈 취급을 하고, 한 쪽에선 세상에서 제일 유능한 사람 대접을 하더군요. 그림도 그렇고 정치도 그런데 신앙은 오죽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에 뿌리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뿌리 박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는 신앙에 뿌리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힘이고, 그것이 둘째 사망에 들어가지 않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