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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고린도전서 4장 7절
겸손
교회 역사 가운데 어거스틴(354-430)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가 교회 역사 가운데 미친 영향력은 상당합니다. 특히 칼빈과 대다수의 개혁주의자들이 ‘어거스틴이 우리의 모든 것(Augustinus totus noster)’이라고 말할 정도로 존중하였는데, 이는 펠라기안주의를 비판한 어거스틴의 신학에 동의와 존중을 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의 회심은 한국교회 안에서도 종종 언급이 됩니다. 한때 방탕하게 지낸 어거스틴, 어거스틴을 위해 기도한 어머니 모니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그의 회심을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말씀, 로마서 13장 13절과 14절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런데 방금도 말했지만 칼빈과 대다수의 개혁자들이 ‘어거스틴이 우리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때는 펠라기안주의를 비판한 어거스틴의 신학에 동의와 존중을 표한 것입니다. 그럼 펠라기안주의란 무엇인가? 그들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핵심 된 내용은 원죄를 부정한다는 데 있습니다. 원죄를 부정한다는 것은 아담의 타락 이후 일반적인 출생을 따라 나는 모든 자, 다시 말해 누구도 예외 없이 타락한 자로 태어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전면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본성은 전혀 부패하지 않았고 오염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성경의 가르침은 펠라기안주의의 가르침을 분명히 거절합니다. 고린도전서 바로 앞에 있는 로마서만 보더라도 분명합니다. 로마서 3장 10절 이하에 보면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5장에서는 이렇게 된 이유가 어디 있는가에 대해서도 밝혀줍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즉 아담은 모든 인류의 대표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창세기 2장에 있는 말씀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에 불순종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불순종은 아담 개인만의 불순종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함께 언약을 맺은 모든 인류의 불순종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펠라기안주의의 주장인 원죄를 부정하는 것, 인간 본성이 전혀 부패하지 않았다 혹은 오염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 역사는 이런 펠라기안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였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어거스틴이라는 사람은 펠라기안주의를 반박하는 다수의 책은 썼는데, 그때 여러 성경 구절들로 펠라기안주의를 반박했지만 그중에 유명한 한 구절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앞서 그의 회심에 큰 영향력을 준 구절이 로마서 13장 13절과 14절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의 신학적 회심에 있어 큰 영향력을 준 구절이 바로 고린도전서 4장 7절입니다. 그 말은 칼빈과 대다수의 개혁자들이 ‘어거스틴이 우리의 모든 것’이라는 말을 했지만 그의 모든 것을 다 받는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의 전기 신학이 있고 그의 후기 신학이 있다고 할 때 후기 신학을 의미합니다. 즉 어기스틴도 한 때 성경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펠라기안주의가 나오면서 수정된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성경의 여러 구절들이 있지만 특별히 고린도전서 4장 7절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고린도전서 4장의 맥락을 조금 살펴보면, 고린도전서 4장은 그리스도의 일꾼에 대한 말씀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직책과 관련해서 말씀합니다. 1절에 보시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목사만이 아니라 장로도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집사도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는 목사를 의미합니다. 그를 그리스도의 일꾼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시키시는 대로 일하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면 그 비밀을 드러내는 자로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2절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즉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할 때 충성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바를 그리스도의 뜻대로 행하는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맡기셨는데 내가 보기에는 저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한다면 그것은 결코 충성이 아닙니다.
간혹 열심 혹은 진심 자체를 충성으로 보는 경우들이 있는데, 열심과 진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의 말씀대로 그리고 주의 진리대로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10:2) 때문에 주의 말씀대로, 주의 진리대로 행하는 것을 충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습니다. 주를 위하되 열심이 극심이 될 정도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대로, 주의 진리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충성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거짓 선지자에 대한 말씀인데, 그들이 행하는 것도 다 무엇입니까? 주의 이름으로 행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합니다. 거기에 열심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 앞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대로, 주의 진리대로 행하는 거기에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충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목사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도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말씀 사역자가 주의 말씀으로 주의 뜻대로 가르치는 모든 방향은 모든 성도 역시 주의 뜻을 따라서만 행하도록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여러분도 충성하셔야 합니다. 내 열심, 내 진심이 아니라 주의 말씀대로, 주의 진리대로 충성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에게 요구되는 것이 충성이라고 할 때 이어지는 3절에서는 사람에게서 판단 받는 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장에서 고린도교회의 문제 가운데 하나인 파당에 대해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 나는 베드로에게 속했다, 그러면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식으로 나뉜 것입니다. 나눴다는 것은 여기에 어떤 판단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판단들이 주의 말씀을 따른 판단인가, 주의 진리를 따른 판단인가? 지금 고린도교회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판단 기준에 따라 나뉘고 또 그런 식으로 받는 판단에 대해서는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자신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괜찮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괜찮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4절에 보시면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고 말하는데, 사람들이 보기에 자책할 아무 것도 없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의에 만족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아무리 선하더라도, 아무리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다 하더라도 인간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의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은 충성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판단의 기준은 하나님이 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완전하고 절대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사도 바울은 4절 마지막 부분에서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만 모든 판단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5절의 권면을 합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이어 6절에서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판단이 마지막 날에 드러날 것이지만, 그렇기에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를 위하여 본을 보인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파냐, 아볼로퍄냐로 나뉘었지만, 3장에서 바울은 무엇을 말합니까? 5절 이하를 보시면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3:5-9)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사, 아볼로에게 주신 은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나는 심는 자이나 아볼로는 물 주는 자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 이것보다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7절을 다시 보시면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심는 것 없이 어떻게 자랄 수 있는가? 물 주는 것 없이 어떻게 자랄 수 있는가? 이런 쪽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개척했다. 개척한 교회를 내가 받아서 성장시켰다. 우리 교회를 건축하는 데 있어 내 몫이 상당하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말을 깊이 새기셔야 합니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사도 바울이나 아볼로나 말씀 사역자입니다. 말씀으로 심고, 말씀으로 물을 줍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목회자의 사역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게 아닙니다. 목회자의 사역에 대한 가치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기도 합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5:17) 심지어 고린도전서 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상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도 하십니다(고전3:8).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없이는 그들의 수고조차 헛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요, 그들로 하여금 수고하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앞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상을 주신다고 할 때 상의 본질에 대한 개혁자들의 공통점은 결코 공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은혜의 상급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내가 받을 만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조차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선물로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본을 보였다고 할 때 그가 보인 본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충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아볼로 역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권면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요, 이것을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5절, 6절을 정리하자면 모든 판단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때까지 함부로 판단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을 보인 것이 있는데, 한 마디로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충성이란 어디에 있는가? 말씀 안에 있는 것으로만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 밖에서 열심을 다한다? 말씀 밖에서 최선을 다한다? 말씀 밖에서 진심을 다한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란 말씀을 들을 뿐입니다(롬10:2).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고린도전서 4장 7절입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지금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서 인간적인 모든 판단에 대하여 그것을 교만이라고 칭합니다. 그런 교만으로 말미암아 서로 대적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따른 것이 아니라, 그 모든 판단이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고 있기에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 사도 바울은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는지 생각해 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는 선천적인 것이든 후천적인 것이든 상관이 없이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왜냐하면 욥기에서 욥이 고백한 바가 진실로 있기 때문입니다. 욥기 1장 21절입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여러분, 여러분이 모태에서 나올 때 알몸이 아닌 채로 나온 사람이 있습니까? 인식할 수도 없기 때문에 모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자녀가 나올 때 알몸이 아닌 상태로 나온 사람이 있습니까? 나올 때부터 돈을 가지고 나온다든가, 나올 때부터 옷을 입고 나온다든가, 나올 때부터 뭔가를 가지고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욥이 고백하는 것처럼 알몸으로 나올 뿐입니다. 갈 때는 어떠합니까? 부자라고 해서 자신의 부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명예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명예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없습니다. 알몸으로 왔다고 알몸으로 갈 뿐입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괜찮은 집안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금수저, 은수저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나도 저렇게 태어났으면 남달랐을 것인데...’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반면 자수성가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말 그대로 혼자 힘으로 집안을 일으킨 것입니다. 금수저, 은수저가 아니지만 남다른 지혜와 지식으로, 남다른 재능과 능력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명기 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8:17-18)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달라지는 게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수고하여 무엇을 얻는 방식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주시는 것을 얻을 뿐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면 그런 방식이 아니라 수고를 하는 방식입니다. 이때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재물을 얻는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 너희가 그럴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서도 동일하게 생각하고 있는 바입니다. 자수성가하면 다 그 사람의 재능과 능력을 봅니다. 그러나 그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8:18)
다시 본문으로 와서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알몸으로 왔다고 할 때 그 알몸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내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죄와 관련된 것만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특히 여러분의 노력과 수고로 얻은 모든 재능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남보다 부한 상태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수고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수고까지 주셔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남보다 좀 더 학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여러분의 열심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열심까지 주셔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입니다. 교회 안에 직분을 세울 때 비상직분인 사도 이후로는 투표의 방식으로 행하도록 합니다. 사도행전 14장 23절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라고 할 때 택하다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손을 든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쓰일 때는 ‘투표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를 세우고, 장로를 세우는 등 직분자를 세울 때 투표 방식을 행하게 됩니다. 이때 인간적인 판단에 따라 세우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리고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 대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 심지어 창조하지 않은 죄조차 그의 섭리 속에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그의 섭리 가운데 그를 세우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세움 받은 자 쪽에서 내가 교회 안에서 인기가 많기 때문에, 내가 교회 안에서 이런 저런 열심을 가지고 때문에 세움을 받았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인기가 많든, 이런 저런 열심을 가지든 그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요, 하나님께서 그런 방식을 통해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는 말씀 앞에서 우리의 답은 무엇입니까? 역대상 29장 14절로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습니다. 이 사실을 어떤 경우에서도 인정해야 합니다. 죄를 제외한 모든 선한 것이 주께로부터 왔습니다. 지금 읽어 드린 말씀으로 하자면 여러분이 하나님께 많은 물질을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자신의 재능으로 이런 저런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드릴 때 억지로, 인색함으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의 공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는 이 말씀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어떤 내용으로든 거절한다면 거기에는 교만이 자리해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서두에 펠라기안주의를 말했지만, 왜 펠라기안주의가 이단입니까? 오늘 본문으로 하자면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는 말씀 앞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답이 아니라, 마치 인간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선과 악을 택할 수 있고, 그렇게 택할 수 있는 부패하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중세로 와서 교황주의자들의 칭의 교리는 어떠합니까? 그들은 우리가 말하는 이신칭의를 거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을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신칭의를 말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실 때 이 의는 믿음 자체 때문에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옵니다. 이신칭의라 말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에 초점을 두기 쉽지만, 믿음 자체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의 근거입니다.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은 이신칭의가 아니라, 믿음 +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도 있어야 하겠지만, 우리의 공로 없이는 결코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 데 열심입니다. 선행이 곧 의롭다 하심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는 말씀 앞에서 선행조차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그 선행은 결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셔서 다시금 그분에게 올려드리는 것 외에 받지 않으십니다.
종교개혁 시대로 오면 신율법주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반율법주의(율법폐기론)와 반대되는 것인데, 반율법주의가 칭의를 강조하면서 성화와 관련된 율법을 버리는 쪽으로 갔다면, 신율법주의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가면서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게 됩니다. 얼마나 강조하느냐? 이들은 칭의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에 두지 않습니다. 비록 불완전하지만 신자 자신의 신실한 의에 둡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모든 사람들의 죄를 속량했고,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그들 모두를 ‘구원 가능 상태’로 인도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옛 율법인 행위언약으로서의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완전한 의를 요구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가 믿음과 회개, 비록 불완전하지만 참회하는 죄인의 신실한 순종에 만족하는 ‘새로운 법’인 은혜의 법을 도입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새로운 법에 대한 우리의 순종, 즉 우리의 믿음과 회개를 통해 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과 회개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는 말씀으로 보자면 믿음도 선물입니다. 회개도 선물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교회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떤 방법으로든 인간의 자리를 마련하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칭의든, 성화든 성경은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쪽으로 가는데, 그 사실을 이런 저런 방식으로 거절하고자 한다는 데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 앞에서는 다 이단입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의지가 있습니다. 그 의지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합니다. 그러나 의지까지도 준비시킬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 의지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다음의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처음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원수였지만 그런 그가 구원을 받고 심지어 사도로 세우심을 받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고백합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여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열심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말하는 충성도 있습니다. 수고도 있고, 노력도 있습니다. 당연히 의지가 있습니다. 의지 없이 어떻게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고백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한 것이 아니요’라는 고백입니다.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 은혜라고 말합니다.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도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라는 이 고백이 없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앞서 언급한 펠라기안주의, 교황주의, 신율법주의, 다 무엇입니까? 인간의 자리를 마련하려고 할 뿐, 사도 바울의 고백 ‘내가 한 것이 아니요’라는 이 고백이 없습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이 고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은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 말씀하시는데, 받았다가 답입니다. 그런데도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는 것은 무엇이냐? 6절 후반부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교만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 할 때 모든 것을 다 받았다, 그래서 은혜라고 말하는 그가 겸손한 자인 겁니다. 그리고 이때 중요한 것은 받았다, 은혜라고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은혜를 ‘내가 한 것이 아니요’라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겸손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겸손이라는 말은 내 수준은 이정도 되지만 이정도 되는 나를 그것보다 낮추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겸손의 국어사전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가 있음’이라고 정의하고 있지만, 이것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겸손의 의미는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겸손의 참된 의미는 내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다, 받은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랑할 수 없다는 자리까지 가는 것입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라는 책의 내용을 일부 인용하면서 마치고자 합니다. 기독교강요 최종판(1559) 3권 12장에 보면 이신칭의와 관련해서 하나님 앞에서는 무엇이 겸손인가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데,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겸손하게 되는 방법은, 철저하게 가난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자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기가 아직 무엇을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을 겸손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께서 겸손한 백성을 구원하시며 교만한 눈을 낮추시리라는(시 18:27, 라틴역 17:28 참조) 예언자의 말을 들을 때에, 첫째로, 우리는 모든 자랑을 버리고 완전히 겸손하게 되지 않으면 우리 앞에는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닫힐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둘째로, 이 겸손은 어떤 점잖은 행동으로 우리의 권리의 털끝만한 부분을 주에게 양보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어느 정도의 우월감을 가졌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교만하거나 모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겸손하다고 본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다는 것은 우리 마음을 정직하게 바치며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6항)
여기서 우리 마음을 정직하게 바치며 복종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 할 때 모든 선한 것을 다 받았다고 인정하는 것, 이것이 정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으로 그에게 올려드리는 것, 이것이 복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는, 참되게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 자들은 이 사실을 근거로 해서 겸손한 자로 있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과 주의 진리를 따라 충성하시되 겸손하게 충성하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한 일을 왜 알아주지 않는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데, 왜 내 수고를 인정하지 않는가? 사람이기에 섭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섭섭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행한 일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생각을 바꾸셔야 합니다. 오히려 나를 판단하시되 마지막 날에 판단하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그 판단 앞에서 하나님이 주셔서 행한 것 밖에 없다고 고백하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에 대하여 칭찬하시고 상을 주시리라고 약속하신 사실, 그 사실을 붙드시면서 묵묵히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는 주의 모든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