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나기철의 시 '수선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시이다.
이 시야말로 감히 나기철의 대표작이라고 부르짖는 동료
작가들도 있다. 그러나
이 시가 고등학교 2학년 나기철이 쓴 시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몰랐다. 이 굉장한 시를 쓴 18살이라! 놀란
탄성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선화'에 누나 얘기 좀
고라줍서게."
이 시점에서 듣지 않을 수 없는
얘기였다.
나란히 앉은 우리들 앞에서 나기철 시인의 '그 누나'가
흘러 나왔다.
우리는 라디오 드라마에 귀를 기울이듯 서서히
까까머리 나기철의 그 시절로
젖어들었다.
문학 동아리에서 만났다 한다.
유난히 나 시인을 챙겨주던 누나라
한다.
공부도 잘해서 서울로 진학하려 하였으나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서울로의 진학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한다.
슬퍼하는 누나가 안쓰러워 나 시인은 어머니 장례식 내내
마음을 써 주었고 어느 날
수선화를 한가득 안고 그 누나가 나 시인의 집을
찾아주었다 한다.
수선화는 오래 나 시인의 방을 밝혔다
한다.
누나가 떠난 자리에서 수선화가 시들어가고 나 시인은 필을
들었다. 그리하여...
'수선화'가 태어난 방이 있던
자리다.
오막살이 방 한 칸에서 펜을 잡고 고뇌하던 우수에
찬 어린 나 시인을
우리는 봤다. 신촌을 지날 때마다 궁금했던 그곳을
오늘 드디어 봤다. 이제 신촌에
와서도
길을 헤매지 않을 것이다. 서울집을 찾고
어머니가 가꾸던 텃밭을 찾아 머물며 되는
것이다.
이제 신촌은 우리 신촌이 되었다.
'천생 시인 나기철'은 어쩌다가, 어떻게 시인이
되었을까?
나기철 시심의 시발은 고은 시인이다.
나 시인은 본의 아니게, 뜻하지 않게 고은 시인과 한
공간에 배치되었다.
1.4 후퇴 때 북녘에서 밀려온 부모님은 서울과 원주를
거치며 안간힘을 쓰다 결국 제주까지 밀려오게
되었다.
동부두 항구식당 2층 홀 한 구석을 빌려 거적대기를 덮고
살아야 했던 어려운 시절,
항구 식당 주인 딸과 함께 종종 등장하는 나 시인의
과거사는 들을 때마다 애잔하다. 하지만
나 시인이 그 날 들려준 어머님 이야기는 애잔하다기 보다
깜찍하고 당돌한 어머님이 느껴졌다.
지금 떠올려도 약이 오르는 듯 언성이 높아지는 나 시인
앞에서 우리는 슬며시 흐뭇한 긍정의 미소를
나누었다.
자식을 위하는 어머니라면 얼마든지 공감할만 한
사연이었다.
나 시인은 공부를 잘했다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제주신문에 장문의 편지를 띄웠다.
어머니 성함이 아니라 나기철 이름으로.
공부를 하고 싶지만 형편이 어렵다는
내용이다.
그 글을 읽은 원명사 주지가 나 시인을
거두었다.
그래서 나 시인은 중학교 1학년부터 2학년까지 2년간
원명사에서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켜 주었다.
그때 마침 고은 시인도 원명사에 계셨다.
고은 시인은 원명사에서 도서관을 만들고, 절 아이들의 교장을 맡아 하며,
시를 썼다 한다.
고은 시인이 괴이한 행적을 들으며, 고은 시인의 버려진 자필 원고를
살피며
나 시인의 시에 대한 호기심과 경이감이 키워졌다
한다.
이 건물이 고은 시인과 나 시인이 거처하던
건물이다.
지금은 허름하고 평범한 건물이지만 당시에는 보기드문
현대식 건물로 사람들이 이목을 끌었다 한다.
특히 2,3층의 난간은 전통 가옥에는 없는 구조라
신기했는지 아이들이 꽤 오르내렸다고 한다.
지금은 유치원으로 쓰이고 있어, 관리인의 허락을 얻어 조심스럽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고은 시인이
거처하던 1층 모퉁이 방은 욕실이 되어 있었다.
이 방에서
나체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시인에게 놀라
밥상을
들이던 공양주가 여러 번 밥상을 집어던졌다나,
뭐라나?
이곳에서
'묘지송', '이 만조에 노래하다' 등등의 고은 시가 탄생하였는데
나기철
시인은 이 시기의 고은 시가 제일 좋다는 평을 하였다.
나 시인이
살았던 2층 방은 지금도 동자 스님들의 거처였다.
"쌤, 여기
살 때 서글프진 않으셨어요?"
하고
물었더니 집이 그리운 것 빼고는 괜찮았다고, 스님이며 주위 분들이 잘해주셨다고 하셨다.
이곳에서 나
시인은 '별도봉 2'를 낭송하였다.
별도봉 2
봉은 푸르러 정상 가까이 비석이 여럿인 무덤, 그 아래
길과
무덤들 밀려 없어져 30년 전 고은이 오가던, 나도 오가던
열세 살 길, 이 세상 와 십삼년이였을 때, 그보다 세 배나
더
지났는데 이렇게 내려다 볼 줄 알았을까. 브르도자에 밀려
어디로들? 지난 달 보트 피플, 어디선가 새 한 마리 휙
날아가고.
(동영상으로
담아두었지만 마침 방역하는 시끄로운 소리가 같이 담겨 시만 소개한다.)
벽에 붙은 동자스님의 계율 속에
13살 나기철이 보인다.
서글프지 않았다 하니
햇살처럼 밝게 보인다.
햇살처럼 밝게 살아
햇살처럼 밝은 시인이
된 듯 싶다.
출타하셨던 원명사 주지 대효 스님이 급히 돌아와
부득불
귀한 다과상을 차려 주신다.
손수 내려주신 차와 고운 다과가
따습다.
하지만 따습지 못한 소식도 있다.
고은 시인과 나기철 시인의 거처였던 그 건물을
관에서
허물려고 한다는 것이다. 상습 침수 지역이라 그래야
한다는데
스님은 어떻게든 그 건물을 지키려
한다고
힘을 실어달라고 하셨다.
철거 비용까지 내밀었다는데 그 철거
비용으로
건물을 지킬 방도를 세워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싶다.
고은 가지고는 의미가 약하고, 나기철은 거론도 안될
정도로 미미한 가치라니!
건물 주인이 원치 않고, 지금까지 잘 버텨온 건물을
허무는 게 옳은 것인지?
과연 고은과 나기철은 그리 미미한 존재인지? 묻고
싶다.
기행 참석자 8명의 서명을 내밀었지만 너무나 미미한
글쟁이들 서명이
힘이 되기나 할런지...
다시 '수선화'의 집
이곳에서 나 시인의 어머니는 '서울집'이라는 구멍가게를
했었다 한다.
어느 비 오는 날, 비를 피해 찾아든 두 손님 중 한
아가씨가 물건 싸주는 잡기장을 뒤적거리더니
기어코 그 잡기장을 얻어갔다고 한다.
"아니 그 잡기장은 뭐 하려고?" 어머니가 물었고
"나기철이 노벨문학상 받으면 빛 보게 할 거예요."라고
당차게 피력했다고 하는데
세월을 지킨 그 아가씨가 다시 서울집의 문을 열고 있다.
그날 오성찬 소설가와 동행했었고 그 잡기장은 아직도 잘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한 한림화 선생님은 "수선화를 읽은 그때
소견으로는 나기철이 노벨상만 타?" 하시며
때늦은 소견을 다시 밝히셨다.
우리는 '서울집'의 옆집 향사에 나란히
앉아
나기철 첫시집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수선화'를 펴 한 소절씩 나눠
읊었다.
수선화 위로 빗방울이
들었다.
수선화 향기가 더욱
짙었다.
'서울집'에서 이사해 어머니가 사셨던 집으로 이동하며
만난
신촌 바다 앞에서도 우리는
"수선화~~~!" 하며 사진을 찍었다.
모두
고운 수선화로 피었다.
"꼭
쌤이 옷 벗은 자리에서 폼 잡읍서예."
남자
물통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섬이 나 시인을 주저앉혔다.
물통에 옷 벗고 앉아 있어도 나 시인은 해맑기만 하다.
어머님이 오래 사셨던 집 텃밭은
잘 가꿔져 있었다.
아니 누군가가 그 밭에
있다.
"아, 우리 집사람
와있네!"
나 시인이 소리친다. 같이
오겠다는 걸 말렸다기에 그렇지 않아도
다같이 한 소리 하던
참이었다.
사이좋게 늙어가는 부부가 좋아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걸어오며 소리치던 작당을
밝혔다.
"아니, 나기철의 시 산실 서울집을 저렇게 폐가로 놔둘
거꽈?"
"얼른 찾앙 수선화도 심곡, 초가집도 지성, 서울집을
살려살 거 아니꽈?"
우리 모두의 작당을 사모님이 순순히 받는다.
"나는
아방이 허렌 허믄 허쿠다게."
우리는 박수로 환호했다. 우리에게 진정 소중한 사람은
우리와 나란히 걷는 글동지, 작가
나기철이기에.
첫댓글 감동입니다. 바뿐와중에도 이렇게 생생하게 사진과 들을 올려주어서 김섬샘 너무너무 수고가 많으십니다.
잘 보고 갑니다. 다음도 무척 기대가 됩니다.^^
수업하는 바쁜 와중에도
답글 고맙습니다^^
다음에도 같이 걷게예?
잘 읽었습니다. 김섬 님, 쓰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사진, 활자화 된 걸 보니, 그 예전이 새록새록 합니다.
좀 늦어수다마는
애가 쓰게 써시난
봐주십서^^
덕분에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우리도 덕분에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자주 같이 걷게예^^
모두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나기철 선생님의 오래 전의 어린 시인을 만나는 시간은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모두 감사드려요. 우리 나기철 선생님~짱~!!^^
순란 쌤 차량 봉사 덕에 잘 다녀왔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