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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두 얼굴] 하느님의 큰형- 레프 톨스토이(1)
레프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y, 1828-1910)는 우리가 검토하는 지식인 중에서 가장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그의 뻔뻔함 앞에서는 경외심이 생겨나고, 이따금은 두려움까지 생겨난다. 그는 자신의 지성을 원천 삼아, 내면에서 분출하는 영적인 힘으로 사회를 도덕적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적었듯, 그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을 지상에서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모세, 이사야, 공자, 초기의 그리스 현인, 부처, 소크라테스, 파스칼, 스피노자, 포이어바흐, 그리고 기존의 가르침을 무턱대고 수용하지 않고 인생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고 고민하고 설파했지만 세상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이름도 얻지 못한 이들”을 포함한 구세주의 사도라 할 수 있는 지식인 계보의 일부분으로 간주했다. 그렇지만 톨스토이는 “세상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이름도 얻지 못한 이”로 남아 있을 의향은 전혀 없었다. 스물다섯 살 때 쓴 일기는 그가 특별한 권능과 뛰어난 도덕적 숙명을 늘 자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오늘 천재에 대한 문학적 성격 묘사를 다룬 작품을 읽었다. 읽고 났더니 나 자신이 일을 하는 역량이나 일하려는 열망 모두에서 비범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마음속에서 다시 깨어났다.” “나만큼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을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내가 언제나 선한 것에 끌려 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돼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도 만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이루 가늠하지 못할 만큼 위대하다”고 느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의 특성을 파악하지 못했을 때는 당혹해했다. “왜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바보도 아니고, 기형아도 아니고, 악당도 아니고, 무지렁이도 아닌데. 이해가 안 된다.” 톨스토이는 남들에게 공감하고 그들과 일체감을 느끼려고 노력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늘 거리감을 느꼈다. 기이하게도 그는 자신이 도덕적 재판권을 행사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판결을 내리는 자리에 앉아 있다고 느꼈다. 소설가가 됐을 때, 아마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가 됐을 때, 그는 이런 신과 같은 권능을 아주 수월하게 행사했다. 그는 막심 고리키에게 이렇게 말했다. “글을 쓸 때, 어떤 캐릭터에게 갑자기 동정심이 들기도 한다네. 그러면 그 캐릭터에게 훌륭한 성품을 안겨 주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서 훌륭한 성품을 빼앗아버리기도 해. 다른 캐릭터와 비교했을 때 그가 너무 흉악해 보이지 않도록 말일세.” 스스로를 하느님과 동일시하는 그의 경향은 사회개혁가가 되면서 점점 강해졋다. 그의 실제 행동 강령은 그가 규정한 신성과 같은 수준에 놓여 있었다. “보편적 행복을 향한 갈망은……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자신을 신성의 소유자라고 느낀 톨스토이는 일기에도 그 사실을 기록했다. “도와주소서, 아버지시여. 오셔서 제 안에 거하소서. 당신께서는 이미 제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당신께서는 이미 ‘저’입니다.” 그런데 고리키가 기록했듯, 톨스토이와 하느님이 같은 영혼 안에서 거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은 그가 조물주를 극도로 의심했다는 데 있었다. 톨스토이의 얘기에 따르면, 그것은 “같은 우리에 갇힌 곰 두 마리”를 연상시켰다. 톨스토이는 스스로를 하느님의 형제, 그중에서도 형에 해당한다고 생각한 듯한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 줬다.
톨스토이는 어떻게 해서 스스로를 이런 식으로 느끼게 됐을까? 그의 고귀함에 기여한 가장 큰 단일 요인은 그의 출신 배경일 것이다. 그는 입센과 같은 해인 1828년에 태어났다. 그는 대대로 광활한 농촌 지대를 통치하는 계급의 일원이었는데, 그의 고향은 이후 30년 동안 농노제라는 노예 제도를 유지했다. 농노제하에서 농노 가족의 남녀노소는 그들이 경작하는 영토의 법령에 묶여 있었고, 그들의 소유권은 증서에 따라 오갔다. 농노제가 폐지된 1861년에 몇몇 귀족 가문은 농노 20만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톨스토이 가문은 그리 부유한 편은 아니었다. 톨스토이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낭비벽이 있었다. 아버지는 볼콘스키 왕자의 못생긴 딸과 결혼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러시아 왕국의 공동 창립자인 볼콘스키 가문은 로마노프 왕조가 1613년에 왕조를 건립했을 때부터 왕실과 동등한 사회적 반열에 올라 있던 최상류층이었다. 톨스토이의 외할아버지는 예카테리나 대제의 참모총장이었다. 톨스토이의 어머니의 결혼 지참금에는 툴라 인근의 사유지인 야스나야 폴랴나도 들어 있는데, 톨스토이는 토지 400에이커와 농노 330명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
젊은 시절, 부동산에 대한 책임감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 톨스토이는 노름빚을 갚기 위해 토지의 일부를 팔아치웠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귀족 신분과 혈통, 그리고 그로 인해 얻은 상류 사회 사교 모임 출입 자격에 대해서는 헛된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겉만 번지르르한 속물근성으로 문학계 동료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투르게네프는 “보잘 것 없는 귀족 작위에 대한 이런 우스꽝스러운 애착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썼다. 네크라소프는 “우리는 모두 그를 메스꺼워했다”고 논평했다. 사람들은 상류 사회와 보헤미아 사회 양쪽에서 최고의 것만을 뽑아 먹으려고 애쓰는 톨스토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투르게네프는 “자네가 우리들하고 어울리는 이유가 뭔가?”하고 물으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여기는 자네를 위한 자리가 아니야. 자네 공주님에게나 찾아가게.” 톨스토이는 나이를 먹으면서 사회적 지위에 대한 저속한 태도를 포기했지만, 그 대신 토지에 대한 갈망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그는 글을 써서 얻은 수입을 토지를 구입하는 데 썼고, 스스로의 힘으로 왕국을 건국한 사람이 갖는 포악한 욕망을 모조리 발휘하면서 영토를 꾸준히 넓혀갔다. 그가 모든 것을 단념할 시점이 될 때까지, 그는 단순한 땅주인이 아니라 통치자였다. 그의 권위주의적인 영혼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와 그 땅을 경작하는 사람에 대한 권리로부터 생겨났다. “세상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그의 아들 일리야가 쓴 글이다. “한쪽은 우리들로 이뤄진 세상이고, 다른 쪽은 나머지 사람들로 이뤄졌다. 우리는 특별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와 동등하지 않다…….(아버지는) 우리가 자랄 때 주입받은 이유 없는 오만과 자존심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 나는 그런 오만과 자존심에서 벗어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 톨스토이는 그가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믿음을 마지막 순간까지도 유지했다. 노년의 톨스토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소망에 즉각 복종하기를 기대하는 주인님이자 귀족으로 남아 있었다고 고리키는 적었다.
이런 타고난 지배욕에 남들로부터 지배받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성향이 덧붙여졌다. 톨스토이는 불굴의 의지의 소유자였는데, 그가 처한 상황은 그가 의지를 굳히는 것을 도왔다. 그의 부모는 그가 어렸을 때 모두 세상을 떠났다. 형 세 명은 허약하고 불행하고 방탕했다. 그는 무일푼인 친척 타티아나 아주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녀는 톨스토이에게 의무감과 이타심을 가르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그에게 별 권위를 행사하지는 못했다. 초년기에 대해 그가 집필한 <소년 시대>와 일기는 루소의 <고백록>이 그랬듯이, 겉으로 보기에는 솔직해 보이지만 드러낸 것보다 감춘 것이 더 많다는 점에서 독자들을 오도한다. 예를 들어, 그는 사나운 가정 교사인 생 토마 씨에게 얻어맞은 것을 묘사했는데, 이 사건은 “내가 살아오는 내내 모든 종류의 폭력을 두려워하고 형오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다양한 종류의 폭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거기에는 자신의 폭력적 본성도 포함돼 있는데 톨스토이는 이에 대해서는 말년이 될 때까지도 놀라워하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아홉 살 무렵에는 생 토마를 이기게 됐고, 이후에는 그가 원하는 대로 지낼 수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읽고 싶은 것만 읽고 공부하고 싶을 때만 공부했다(때로는 정말 열심히 했다). 열두 살 무렵, 그는 시를 썼다. 열여섯 살에 볼가강 유역의 카잔대학에 진학한 그는 외교관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한동안 동양의 언어를 공부하다가, 나중에 법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열아홉 살에 대학을 포기한 그는 야스나야 폴랴나에 돌아와서 독학을 했다. 그는 드 코크, 뒤마, 외젠 쉬 등 당시 유행하던 소설을 읽었다. 그는 또한 데카르트를 읽었고, 그 무엇보다도 루소를 읽었다. 몇가지 중요한 점에서 톨스토이는 루소가 사후에 얻은 제자였다. 톨스토이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면, 루소가 그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말년에 말했다. 그는 루소를 자신과 막상막하인 인물로, 지고의 선을 깨닫고는 그것을 세상에 가르치려고 열망했던 또 다른 거대한 존재로 간주했다. 루소처럼 그는 본질적으로 독학을 했고, 독학을 한 사람들이 품는 자부심과 불안정함, 지적인 예민함을 모두 갖고 있었다. 루소처럼 그는 작가로 자리 잡기 전에 외교, 법률, 교육 개혁, 농업, 군, 음악 등 많은 직업을 시도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진정한 재능을 군에서 장교 후보생으로 복무할 때 아주 우연히 찾아냈다. 스물두 살 때인 1851년, 그는 형 니콜라이가 현역으로 복무 중인 카프카스로 갔다. 딱히 뭘 하겠다는 생각으로 그곳에 간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시간이나 때우고 사교계에서 그의 위상을 높여 줄 훈장을 따기 위해 간 것이었다. 그는 군에서 5년간의 전성기를 보냈다. 첫 해는 변경의 전장에서 보냈고, 나머지 해는 크림반도에서 영국, 프랑스, 터키에 맞서 싸우면서 보냈다. 그는 러시아 제국주의자의 거만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입대 허가를 받고 포병중대에 배치된 것에 대해 형 세르게이에게 편지를 썼다(원주민들은 대포가 없었다). “탐욕스럽고 사나운 아시아 놈들을 내 대포로 때려잡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할 것입니다.” 사실, 그는 러시아 제국주의나 광신적 애국주의처럼 러시아인은 비길 바 없는 도덕적 품성(소작농은 이 품성의 화신이다)을 지니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이 명령하신 역할을 수행하는 특별한 인종이라는 믿음을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이런 믿음은 그의 동료 장교들도 품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은 천진난만한 믿음이었다. 톨스토이는 그런 믿음을 곰곰이 숙고했다. 그런데 그는 몇 가지 점에서 자신이 동료 장교들과는 다르다고 느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예외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에, 내 또래보다 앞서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그리고 주위와 어울리지 못하고 적응하지 못하면서도 결코 만족을 모르는 성격의 소유자라는 사실에 이번만은 스스로 익숙해져야만 한다.” 그에 대한 군의 견해는 달랐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겸손하다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거만하고 자기만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고 봤다. 톨스토이의 사납고 무자비한 눈빛, 때로는 무시무시하기까지 한 눈매에 대해서는 그들 모두 언급했다. 그는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가 작전 중에나 평시에나 용감한 군인이라는 사실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용맹성은 그이 어마어마한 의지가 작동한 결과였다. 소년이었을 때 그는 말을 타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그는 수줍음을 극복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사냥을 배웠는데, 그중에는 곰 사냥과 같은 위험한 오락거리도 있었다. 곰 사냥에 처음 나섰을 때, 그는 그 특유의 오만한 부주의의 결과로 곰에게 심하게 할퀴어서 거의 죽을 뻔했다. 그는 군대에서도 포화 속에서 용맹을 떨쳤고, 그 결과 대위로 진급했다. 그렇지만 훈장을 받으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는 훈장 수여 대상자로 세 차례나 상신됐지만, 훈장으로 가는 길목은 어느 단계에서 막혀버리곤 했다. 군인들은 훈장을 받으려는 동료의 열망을 쉽게 감지했고, 그런 열망을 품은 사람은 미움의 대상이 됐다. 사실, 톨스토이는 좋은 장교는 아니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기꺼이 복종하고 배우려는 겸손함과 적극성뿐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전우애도 부족했다. 그는 외톨이였고 혼자서 외출을 나갔다. 출세에 도움이 될만한 일이 없으면 허락을 받거나 누구에게 얘기도 하지 않고 전선을 이탈했다. 그를 거느리고 있던 대령은 다음과 같이 말햇다. “톨스토이는 너무나 열심히 화약 냄새를 맡고 싶어 하지만 변덕도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는 “전쟁에 흔히 따라다니는 곤경과 고초”를 피하려 들었다. “그는 여행객처럼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발포하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전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러다가 포화가 멎으면 다시 전장을 떠나서 마음 내키는 대로 쏘다녔다.”
톨스토이는 군 시절 이후로는 항상 드라마를 좋아했다. 사람들의 눈길을 한데 모을 만큼 화려하고 극적인 동작으로 행해질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는 안락함과 쾌락,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희생하려 들었다. 학창시절에 그는 자신이 불요불굴의 러시아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외투와 슬리핑백이 결합된 옷가지를 몸소 만들었다. 이 의도적인 행위는 입소문을 탔다. 군대에서 그는 임무는 기꺼이 수행하려 들었지만, 상관들을 모시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주목도 거의 하지 않는 군대 생활의 불편하고 힘든 일상사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군 생활은 한결같았다. 그의 영웅적 행위, 미덕, 신성한 의무 수행은 대중을 향한 공연용이었지, 기록에도 남지 않는 따분한 하루하루의 일상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의 군 생활은 딱 한가지 점에서는 진정으로 웅대했다. 그는 군에 있는 동안 경이적인 능력을 가진 작가로 스스로 변신했다. 돌이켜 보면 톨스토이가 타고난 작가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가 훗날 기록한 것처럼, 그가 아주 어린 나이였을 때부터 어느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을 만큼 세밀하고 정확하게 자연과 인간을 관찰했다는 것도 분명했다. 그런데 작가로 타고났다고 해서 반드시 타고난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톨스토이의 두 가지 빼어난 재능이 한꺼번에 피어난 시점은 입대를 하러 가던 그가 카프카스산맥을 처음 본 때였다. 눈앞에 펼쳐진 초자연적인 장관은 그의 강렬한 시각적 욕구를 자극하면서 그 장관을 글로 적어야겠다는 그때까지는 잠복하고 있던 충동을 각성시켰다. 그뿐 아니라 그의 세 번째 빼어난 특징인 하느님의 위엄에 대한 관념과 그 관념을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과 뒤섞고 싶어 하는 욕망을 일깨웠다. 얼마 안 있어 그는 <유년 시대>를 썼고, <습격>, <코사크인들>, <나무 베기>, <당구 기록원의 수기>, 세 편의 <세바스토폴 이야기>, (<청년 시대>의 일부인) <소년 시대>, <지주의 아침>, <크리스마스 이브> 등 군 생활을 스케치하는 이야기들을 썼다. <유년 시대>는 1852년 7월에 출판사에 보내져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코사크인들>은 이후 10년 동안 완성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이브>는 결국 완성되지 않았다. 체첸의 지도자 사밀을 상대로 한 작전과 같은 소재 몇 가지는 훗날을 위해 비축해 뒀는데, 톨스토이는 노인이 돼서야 그것을 바탕으로 최후의 빼어난 소설 <하지 무라드>를 썼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렇듯 상당한 양의 작품들이 그가 군인으로 복무하던 중에, 심지어는 전선에 있는 동안의 짧은 휴식기에 창작됐고, 톨스토이 본인의 설명에 의하면 그는 글을 쓰는 동시에 코사크 여자들을 쫓아다니고 노름하고 술을 마시기도 했다는 것이다. 글을 쓰겠다는 본능적 욕구는 너무나 강렬했고,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노력과 의지는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였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글을 쓰겠다는 욕구는 간헐적으로만 솟구쳤다. 톨스토이의 비극은 거기 있었다. 그는 때때로 자신의 능력을 자랑스럽게 의식하면서 흥에 겨워 글을 썼다. 예를 들어, 그는 1858년 19월에 “나는 처음도 없고 끝도 없을 그런 이야기를 짜낼 것이다.”라고 썼다. 1860년 초엽에는 “나에게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이야기를 집필 중이다. 욕먹을 정도로 큰 자부심을 갖고 고백하자면, 이 작품 덕에 나는 세상 사람 모두를 굽어볼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썼다. 집필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가 스스로 설정한 기준은 높았다. 집필은 고되고 힘들었다. 방대한 분량의 <전쟁과 평화>의 대부분은 최소한 7번은 다시 쓰였다. <안나 카레니나>는 더 많은 수정 작업을 거쳤는데, 그 과정에서 변화된 요소들은 굉장이 중요하다. 거듭되는 수정을 거치면서, 안나는 마음에 안 드는 고급 매춘부에서 우리가 아는 비극적 여주인공으로 변신한다. 톨스토이가 최고의 작품을 얻기 위해 엄청난 고생을 감내했다는 점을 놓고 볼 때, 그가 자시의 예술가로서의 고결한 소명을 깨닫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지구상에 살았던 그 누구보다도 글을 잘 쓰던 시절이 있었다. 확실히 그 누구도 그토록 시종일관 진실하고 완벽하게 자연을 그려내지는 못했다. 1856년 작품 <눈보라>는 그가 카프카스에서 야스나야로 돌아오던 중에 눈보라에 갇혀 거의 죽을 뻔했던 일을 기록한 작품으로 독자에게 최면을 걸어 버릴 것처럼 성숙한 그의 글쓰기 기법을 선보인 초기작이다. 그는 세밀한 부분을 선택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기법을 통해 이런 성과를 이뤄 냈다. 그는 강렬한 표현이나 밋밋한 표현, 시적인 기법이나 암시 등은 사용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크랜쇼가 지적했듯, 톨스토이는 음영과 명암 대조법을 멸시하면서 철두철미하게 명쾌하고 확연한 묘사만을 활용한 화가와 비슷했다. 다른 비평가는 톨스토이를 라파엘 이전의 화가에 비교했다. 형체, 감촉, 톤과 색채, 음향, 냄새 등의 모든 감각이 수정처럼 투명하고 직접적으로 전달됐다. 여기 표본 두 개가 있다. 둘 다 많은 수정 과정을 거친 문장이다. 앞의 것은 외향적인 브론스키다.
“좋았어. 훌륭해!” 그는 혼잣말을 하며 다리를 꼬고 손으로 발을 잡으면서, 전날 낙상해서 멍이 든 장따닞의 탄력 있는 근육을 느꼈다…….그는 건장한 다리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아픔을 즐겼다. 그는 숨을 쉴 때 가슴이 움직이면서 느껴지는 근육의 감각을 즐겼다. 화창하고 쌀쌀한 8월의 낮, 안나에게 절망을 느끼도록 만들었던 그 낮이 그에게는 상쾌한 듯했다……..황혼 속에서 반짝거리는 집들의 지붕, 울타리의 날카로운 윤곽과 빌딩들의 모서리, 심지어는 감자밭까지. 마차 창문을 통해 그가 보는 모든 것은 그 자신만큼이나 상큼하고 유쾌하고 활기찼다. 화가의 붓끝에서 신선하게 피어났다가 최근에 다시 꾸며진 사랑스러운 풍경화처럼,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다음은 개 라스카와 함께 도요새를 사냥하는 레빈이다.
빛을 모두 잃은 달은 하늘에 뜬 흰 구름 같았다. 별은 하나도 볼 수 없었다. 은백색이던 사초는 이제는 황금처럼 빛났다. 괴어 있는 웅덩이들은 모두 호박(琥珀)같았다. 풀잎의 파란색은 황록색으로 변했다….매 한 마리가 깨어나 건초더미에 내려앉고는 이쪽저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불만스럽게 늪을 바라봤다. 까마귀들은 들판을 날아다녔고, 맨발의 소년은 코트 아래서 몸을 일으키고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노인은 향해 말을 몰았다. 총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푸르른 풀밭을 흐르는 우유처럼 희었다.
톨스토이의 문장력이 자연을 숭배하는 그의 성향에서 직접 솟구친 것이고, 그가 그런 문장력과 자연에 대한 흥분을 간헐적이라도 죽을 때까지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는 1896년 7월 19일에 쓴 일기에 갈아엎어진 들판에서 여전히 살아서 작은 싹을 틔운 우엉을 본 것을 기록했다.
“흙먼지 속에서 까맣게 돋아났지만 여전히 살아 있고, 가운데는 빨갛다…우엉을 보니 글을 쓰고 싶어졌다. 우엉은 끝까지, 틀판 한가운데에서 혼자서라도 살아남아야겠다고, 어떻게 해서든지 살겠다고 주장했다.” 그 차갑고 무시무시하며 꼼꼼한 눈으로 자연을 관찰할 때, 그리고 정확하고 고도로 정밀한 펜으로 자연을 글로 옮길 때, 톨스토이는 행복감을 느꼈다. 아니면 최소한 그이 성격이 허용하는 한에서는 영혼의 평화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