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想錄, 22 潇灑園에서
필자가 갔을때는 한 여름이었다.
대나무숲이 소쇄원의 풍광이 아름다웠다.
조선의 한량되는 사람이 학문을 논하고 우의를 맺었던 곳이기도하다.
대나무는 사군자(매화, 난, 대나무, 국화)_다.
君子를 지칭하여, 절게를 지키는 뜻이고 볼 수있고, 추운 겨울을 이겨네고 꽃피운다는 깊은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를 위해 목숨을 받친다,
그런데 이는 조선시대는 통했으나, 지금은 하루밤 자고나면 배신하는 세상이 되였다.
소쇄원(瀟灑園)은 양산보가 은사 조광조(趙光祖)가 남곤(南袞) 등의 훈구파에게 몰려렸다.
전라남도 화순 능주로 유배되자되었다,
세상의 뜻을 버렸다.
낙향하여 향리인 지석마을에 숨어살면서 계곡을 중심으로 조영한 원림(園林)이다.
양산보(梁山甫)의 은둔생활(隱遁生活) 기간 중인 1520년부터 1557년 사이에 조성된 것이다.
양산보는 제주사람(제주 양씨)이다.
소쇄원의 ‘소쇄’는 본래 공덕장(孔德璋)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말로서 깨끗하고 시원함을 의미 한다.
양산보는 이러한 명칭을 붙인 정원의 주인이라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소쇄옹(瀟灑翁)이라 하였다.
소쇄원의 조성사상을 보면 주자(朱子)가 중국(中國) 숭안현(崇安縣) 무이산(武夷山)계곡의 경승지인 무이구곡(武夷九曲)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현실(現實)을 도피하여 은둔하는 행동양식이 깔려 있다.
당시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80년쯤 전에 중수하여 현재 2동이 남아 있다.
소쇄원에는 김인후(金麟厚)가 1548년(명종 3)에 지은 오언절구(五言絶句)의 48영(詠) 시(詩)가 남아 있다.
고경명(高敬命) 이 1574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광주목사(光州牧使) 임훈(林薰)과 함께 광주 무등산(無等山)을 유락(遊樂)하면서 4월 23일소쇄원에 들려서 보았던 계원(溪園)의 사실적 묘사가 「유서석록(遊瑞石錄)」에 남아 있다.
또 소쇄원의 배치를 목판(木板)으로 새긴 「소쇄원도(瀟灑園圖)」가 남아 있다.
이 목판은 가로가 35㎝, 세로가 25㎝로 양각으로 판각되어 있다.
오른쪽 외곽에는 「창암촌 고암동 소쇄원 제월당 광풍각 오곡문 애양단 대봉대 옹정봉 황금정 유 우암선생필(蒼巖村창암촌 鼓巖고암동洞 瀟灑園소쇄원 齊月堂제월당 光風閣광풍각 五曲門오곡문 愛陽壇애양단 待鳳臺득봉대 瓮井峰와정봉 黃金亭황금정 有 尤菴先生筆유 우암선생필)이라 새겨있다.
우암(尤菴)은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호이다.
소쇄원도(瀟灑園圖)에는 건물의 명칭 식물의 명칭 지당(池塘) 계류의 조담(槽潭)이나 바위 다리 물레방아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소새원 에 들어가는 입간판 설명서에 는 양산보는 제주 사람으로 설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