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500년 동안 망하지 않고 이어 내려온 데에는 인재를 양성하는 시스템이 있었고, 언로의 개방이 있었으며 기록을 중시하는 풍토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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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를 양성하는 것은 국가 경영의 근본이고, 언로의 개방은 여론을 수렴하는 소통 통로이며, 기록을 중시하는 것은 문화 국가를 지향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머리말, 4쪽)
절대 왕정 국가에서 임금은 곧 법이었다. 임금의 뜻을 어긴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상소문을 올려 유배당하거나 사약을 받아 죽음을 맞이한 신하들이 있다. 임금의 통치 방식에 반기를 든 셈이다. 그들의 상소문을 읽어보면 그 시대의 특징을 짐작할 수 있다.
인조의 반청 사상은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며 적극적으로 청나라와 화친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은 다른 동료 신하들의 모함을 받아 가문이 멸족당하거나 유배 또는 형벌을 피할 수 없었다.
모두가 침묵하고 있을 때 시정을 요구하는 그들의 목소리는 시대 양심이었다.
반대로, 상소문을 잘 올려 승승장구 한 이들도 있다. 임금(정조)을 잘 만났기 때문이다. 백성의 삶이 피폐한 것은 정책이 잘못된 것이므로 임금으로부터 시작하여 관료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는 상소문을 읽고 기분 나빠하지 않았던 왕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정치 탄압(천주교 관련)을 받게 되었을 때 자신의 주군 정조의 정치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 상소문을 활용하여 정조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전 국가가 위기 상태임을 알리고 대책을 꼼꼼하게 적어 올려 보낸 상소문은 제대로 읽혀 보지도 못한 체 버려지고 말았다. 만약, 상소문을 읽고 현실의 위태로움을 깨달았다면 전쟁에서 손쉽게 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들을 귀가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지도자는 여론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특히 충심어린 충고에는 민심이 담겨져 있다. 국가를 살릴 수 있는 기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