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원부 설원기 및 오산설림초고(저자:차전로)에 보이는 속칭 함흥차사와 조선왕조실록 비교
1. 차원부 설원기
태조와 태종이 남쪽과 북쪽으로 떨어져 있을 적에 권신(權臣)이 서로 유언비어를 퍼트리었다.
그런데 신성(神聖)께서 북쪽으로 가고 사성(嗣聖)께서 남쪽으로 갔을 때(신성은 태조, 사성은 태종) 권력이 아랫사람에게로 넘어가 사사로운 감정으로 사람을 살육하였는데 저 빙호(氷壺 마음이 결백함))같은 사람도 불행하게 뜻밖의 변을 당 하였다. 공교롭게 조준(-1405) 조반(1341-1401) 조영규(-1395) 정도전(1342-1398) 조민수(-1390)의 모함을 입었고 거기에다 남재(1351-1419) 유창(-1421) 정희계(-1396) 이승상(-1413) 함부림(1360-1410)이 사사로이 시기 했으며 먼저 이양우(1346-1417) 신극례(-1407) 등이 모의를 꾀하도록 하였고 그 뒤에는 하륜(1347-1416) 이종무(1360-1425) 등이 탄압하였다. 어찌하여 한 두 명의 간인(奸人) 모의가 10여명의 흉악한 자들이 죽게 됨을 피하도록 하였단 말입니까? (정도전이 죽은줄 알고 남재(1351-1419)와 정희계(?-1396)가 알고 피하였다.)
지난 날 태조와 태종이 남쪽과 북쪽으로 떨어져 있을 때 때마침 이 세 명의 흉칙한 자들이 발악하던 때였다.
용이 적전에서 튀어 오르자 신하들이 재앙을 받았다.「용」은 태조를 말한 것이다. 적전(赤田)이는 것은 태조가 살았던 함길도 덕원의 이름이다.「용이 적전에서 튀어 올랐다는」는 것은 태조가 봉이 적전에 있다는 말을 듣고 봉을 쫓아갔다는 뜻이다. 다만 변란이 일어난 날 태조가 태종만 원망 하였을 뿐 하륜의 음모가 안에서 움직인 것은 의심치 않은 채 궁중내관 가운데 태종과 연관된 자들을 모두 죽이니 그들이 토한 피가 5~6승(丞)이였다. 처음에는 궁실을 버리고 적전으로 들어가 의병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북적(北狄)으로 가려고 하였으며 또 중국으로 들어가려고 하였기 때문에 용이 적전에서 튀어 올랐다고 말한 것이다.「신하들이 재앙을 받았다는 것은」태종이 날마다 임시 행재소로 사자를 보내 문안 하였는데 태조가 분개하고 원망하여 수행한 사신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일국의 신민들이 태조가 죽인 것을 원망하지 않고 태조가 애통해 하는 것만 보아도 처절(悽絶)하게 여겨 따라 죽을 마음만 있었지 사는 낙은 생각하지 않았다. 이 변란에서 죽은 사람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태조가 임시 머물던 날 태종을 불러 볼 때에 태조가 태종을 향하여 활을 겨누자 하륜이 태종으로 하여금 기둥 밑에 엎드려 맞지 않게 하였는데 그의 본의를 따져본다면 태조가 활을 태종에게 겨눈 것이 아니라 실은 적신(賊臣) 하륜이 활을 태종에게 쏘았다는 뜻이다.
우리 태조가 분개하여 북적(北狄)으로 가 이 소식이 중국에 알려지면 우리나라의 명맥이 영구히 이어지겠는가?
태조가 진노하여 안팎에 사실을 알리고 대대적으로 병마를 동원하여 국가의 운명과 사생을 결정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 크게 삼키고 뱉는 듯으로 북적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조정을 어지럽히는 무리들의 죄악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며 도 여의치 않을 경우 중국으로 들어가 상황을 모두 알리고 명나라의 병력을 크게 동원하여 의리의 깃발을 들려고 하였다.
2. 오산설림초고(저자 : 차천로)
이방번(李芳蕃)과 이방석(李芳碩)의 난으로 태조가 함흥에 내려가 숨었다.
태조는 처음 덕원(德源)에 물러가 계시다가 또 함흥으로 갔다. 공정대왕(恭定大王 태종)이 사신이 보내어 문안을 드리자, 그 뒤부터 문안 행차가 그치지 아니하였는데, 태조는 사신을 보기만 하면 반드시 죽이니 죽는 사람이 잇달았다. 그 때 사람들이 죄 없이 죽는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태조가 마음에 두지 아니함을 슬피 여겼다. 공정대왕이 돌아오기를 청하고자 하였으나, 어떻게 나올는지 짐작 못하여 근심하고 있을 때, 어떤 이가 말하기를, “무학의 힘이면 태조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하였다. 공정대왕이 수소문하여 찾아 가지고 굳이 청하니, 무학이 말하기를, “부자지간에 어찌 이런 일이 있사옵니까. 내가 장차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고 개의(介意)치 않았다. 오래 되자 무학이 마지못해 그 말을 따르자, 태종이 가는 차비를 차려서 보냈다. 함흥에 이르러 태조를 뵈니, 태조는 노하여 말하기를, “너는 아무를 위하여 유세(遊說) 온 것이 아니냐.” 하였다. 무학이 웃으며 말하기를, “전하 왜 믿지 않으시나이까. 빈도(貧道)와 전하가 서로 알고 지낸 것이 몇 해이오니까. 오늘은 전하를 위하여 한 번 위로할 뿐입니다.” 하니, 태조의 얼굴빛이 약간 풀어졌다. 이렇게 되어 머물러 같이 자게 되었는데, 태종(太宗)의 단점을 말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같이 하기를 수십 일이 되니, 태조는 무학이 태종에게 가담하지 않은 사람으로 여겨 더욱 그를 믿게 되었다. 그 뒤 수십 일이 되어 무학이 태조를 모시고 같이 자게 되었다. 야밤에 무학이 태조에게 말하기를, “태종이 참으로 죄과가 있습니다, 그러하오나 전하께서 사랑하는 아들들은 다 이미 죽었습니다. 단지 이 사람만 남았사온데 만일 끊어 버리신다면, 전하께서 평생 고생하여 이룬 대업을 앞으로 누구에게 부탁할 것입니까. 남에게 부탁하기보다는 차라리 나의 혈속(血屬)에게 주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세 번 다시 생각하시기 원하옵니다.” 하니, 태조도 자못 그 말을 옳게 여겨, 마침내 환궁할 뜻을 가졌다. 무학이 이내 급히 돌아오기를 권하였으나, 태조께서 성안에 들고자 아니하므로, 처음에는 소요산(逍遙山에 이르러 수개월을 머무르다가, 마침내 풍양(豐壤 평양)으로 가서 궁을 짓고 지내셨다. 이 뒤로 무학의 종적은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3. 조선왕조실록 :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이성계의 행적(1398년까지는 상왕, 그이후는 태상왕)
1398.08.25. 제1차 왕자의 난 발생
1398.08.26. 제1차 왕자의 난. 정도전ㆍ남은ㆍ심효생 등이 숙청되다
1398.09.05. 왕위를 세자에게 선양하고자 하여, 이첨이 교서를 지어 바치다
1398.09.09. 상왕이 흥천사 부처의 공역을 마치라는 명을 임금에게 전하다.
1398.09.10. 밤에 부엉이가 경복궁(景福宮) 북원(北園)에서 울므로, 상왕(上王)이 북쪽 양정(涼亭)으로 옮겨 가서 거처하였다.
1398.10.11. 상왕의 탄신일이라 여러 종친과 함께 연향을 베풀다.
1398.12.23. 상왕이 사람을 시켜 후원(後園)에서 기르던 들짐승을 빈 넓은 땅에 내놓게 하였다.
1398.12.24. 임금이 여러 공(公)과 후(侯)를 거느리고 잔치를 베풀어 상왕을 접대하니, 상왕이 매우 즐거워하였다.
1399.01.01. 임금이 종친을 거느리고 태상전에 조회하고 하례를 행하다
1399.03.13. 태상왕이 옛수도(개성)에 돌아론 것을 부끄럽게 여겨 새벽 밝기 전에 시중 윤환의 옛집에 이어하다.
1400.02.04. 세자(이방원)가 태상전에 나아가 사은하니 태상왕이 임금노릇하는 도리를 논하다
1400.04.06. 임금이 태상전에 나아가 헌수하려 하니 태상왕이 가뭄으로 인해 정지시키다
1400.08.21. 임금이 세자와 더불어 덕수궁(德壽宮)에 나가 헌수하고, 지극히 즐기다가 파(罷)하였다. 처음에 태상왕이 몰래 신암사(新菴寺)에 갔는데, 세자가 친히 나아가 환궁하기를 청하였었다. 임금과 세자가 헌수하니,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ㆍ좌정승 성석린(成石璘)ㆍ청천백(淸川伯) 이거인(李居仁)ㆍ판승녕부사(判承寧府事) 우인렬(禹仁烈) 등이 모두 기구(耆舊) 대신으로 시연(侍宴)하였다. 번갈아 일어나 헌수하고 술이 취하니
1400.10.24. 태상왕이 정릉에 이르러 정근 법석을 베풀다. 오대산ㆍ낙산사 행차계획을 아무도 모르다
1400.10.26. 중 설오를 보내어 태상왕의 환가를 청하였으나 끝내 오대산으로 행차하다
1400.11.11. 임금이 왕세자가에게 선위하다.
1400.11.13. 태상왕이 오대산에서 돌아오니 임금이 각사 1원씩 거느리고 장단의 마천에 가서 맞이하다
1400.12.21. 임금이 덕수궁에 나아가 태상왕께 헌수하다
1401.01.01. 임금이 태상전(太上殿)에 조알(朝謁)하고, 또 상왕전(上王殿)에 이르러 하례를 행하였다. 태상왕께서 마침 신암사(神巖寺)에 거둥하시기 때문에, 다만 기견(綺絹) 표리(表裏)를 드리고 돌아왔다.
1401.02.07. 태상왕이 태평관에 가서 사신을 보고 돌아오다
1401.03.08. 태상전에 갔다가 태상왕이 편찮아서 상왕전으로 가다
1401.03.17. 태상왕이 보개산(寶蓋山)에 행차하니, 임금이 이를 따라 마이천(麻伊川)에 이르러 악차(幄次)에서 뵈었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숭인문(崇仁門) 밖에서 전송하려고 하였었는데, 태상왕이 밤중에 나갔기 때문에 미처 전송하지 못하였다.
1401.03.22. 태상왕이 보개산에서 돌아오다
1401.03.01.(윤) 태상왕이 흥천사에서 대장 불사를 베풀기 위해 새 도읍에 행차하다.
1401.03.11.(윤) 태상왕이 새 도읍에서 금강산으로 거둥하다
1401.04.10. 도승지 박석명(朴錫命)을 보내어 태상왕의 기거(起居)를 문안하였다. 이때에 태상왕이 안변부(安邊府)에 있었는데, 석명이 궁온(宮醞)을 싸 가지고 갔다.
1401.04.16. 임금이 상왕전(上王殿)에 나아가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이날에 박석명(朴錫命)이 안변(安邊)에서 돌아와서 아뢰기를,
“태상왕께서 신에게 이르기를, ‘환왕(桓王)의 기신(忌晨)을 지내고 돌아가겠다.’ 하였으나, 안변(安邊)ㆍ함주(咸州) 등처에 양정(涼亭)을 지으라고 명령하시니, 오래 머무르실 뜻이 있으신가 합니다.”
1401.04.17. 창녕 부원군 성석린을 안변에 보내 태상왕의 회가를 권유케 하다
1401.04.26. 태상왕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이천에 나가서 기다리다
1401.04.28. 태상왕이 안변(安邊)으로부터 이르니, 임금이 장전(帳殿)에 연향(宴享)을 베풀고, 종친(宗親)과 대신(大臣)들이 시연(侍宴)하였다. 조계승(曹溪僧) 익륜(益倫)도 또한 참예하여 극진히 즐기고 파하였다. 성석린(成石璘)에게 안마(鞍馬)를 내려 주었다. 태상왕이 먼저 서울로 들어오고, 임금이 따라 태상전(太上殿)에 이르러 문안하였다.
1401.08.03. 태상전에 조회하고 헌수하다
1401.09.06. 태상왕이 덕수궁에서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다
1401.09.14. 임금이 태상전(太上殿)에 조회하였다. 태상왕이 궁실(宮室)을 짓고 누(樓) 북쪽에 못을 파고, 또 전(殿) 서쪽에 별궁을 짓고, 궁 서쪽 봉우리의 허리에다 작은 불당을 지었다.
1401.09.27. 태상왕이 평주 온천에 가니, 임금이 금교에서 전송연을 베풀다
1401.10.04.환관 김완을 보내 평주 온천에 있는 태상왕을 문안하게 하다
1401.10.10. 임금이 온천에 이르러 태상왕께 뵙고, 의대(衣襨)를 드리고 헌수(獻壽)하였는데, 밤이 깊어서 파하였다.
1401.10.17. 태상왕이 평주(平州)에서 왔다.
1401.11.16. 밤중에 태상왕이 소요산(逍遙山)에 가니, 임금이 문밖에서 전송하려고 하였는데 미치지 못하였다.
1401.12.17. 승녕부 판사 정용수 등이 소요산의 태상왕 행재소에 문안가다
1401.12.21. 좌정승 김사형을 소요산에 보내 태상왕을 문안하다
1402.01.08. 임금이 소요산(逍遙山)으로 가서 태상왕에게 조회하려고 하였으나, 몸이 불편하여 행하지 못하자,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을 보내서 문안하였다. 태상왕이 말하였다.
“이 절에 명사(名師)가 있으니, 절 아래에다 집을 짓고 거처하고자 한다.”
1402.01.12. 대간(臺諫)이 상언(上言)하기를,
“늙고 친한 대신을 보내어 태상왕의 환궁(還宮)을 청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지(李至)ㆍ김이음(金爾音) 등이 대궐에 나와서 아뢰기를,
“때가 몹시 춥사온데, 태상왕께서 소요산에 계시는 지가 벌써 한 달이 넘었습니다. 모시는 사람들은 한데서 자고, 나무와 돌을 다듬는 사람은 모두 동상에 걸려서 살가죽이 얼어 터졌습니다. 또 경기(京畿)에서 공억(供億)으로 왕래가 번거로워 폐단이 되오니, 나이 많고 덕이 높으신 대신에게 명하여 간절히 청하여 모시고 돌아오도록 해야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경들의 말이 옳소. 내가 병이 나서 신년(新年)에 들어 아직 조알(朝謁)하지 못하였는데, 먼저 늙은 대신을 보내면 태상왕께서 마음속으로 어떻게 여기시겠소? 내가 친히 가 뵌 뒤에 경들의 말대로 하겠소.”
1402.01.28. 임금이 태상왕을 소요산에 가서 뵈었다. 임금이 조용히 헌수(獻壽)하였다. 태상왕과 임금은 술이 거나하자 시(詩)를 읊고 화답하였다. 시연(侍宴)하였던 종친(宗親)과 성석린(成石璘) 등이 태상왕의 환가(還駕)를 극력 청하였다. 또 사뢰기를,
“염불하고 불경을 읽음에 어찌 꼭 소요산이라야만 되겠습니까?”
하니, 태상왕이 말하기를,
“그대들의 뜻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다.”
하고, 공중에다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우리들도 이미 서방 정토(西方淨土)로 향하여 있다.”
고 하였다. 태상왕은 무인년에 병이 든 뒤로부터 마음이 항상 답답하여 즐겁지 아니하기 때문에, 유행(遊幸)이 점점 잦아졌다.
1402.01.29. 임금이 다시 태상왕에게 헌수(獻壽)하였다. 태상왕이 일어나 춤을 추니, 임금도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연구(聯句)로 화답하고, 매우 즐기었다. 대가(大駕)가 돌아오다가 장단(長湍)에 이르러서 행악(行幄)에 술자리를 베푸니, 민무구(閔無咎)ㆍ이저(李佇) 등이 취하여 소매를 맞잡고 여러번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임금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였다.
“태상왕께서 병이 없으시니 내 경들과 마음껏 즐기려 하오.”
1402.02.05. 창녕 부원군 성석린 등이 소요산에서 돌아와 태상왕의 환가 여부를 아뢰다
1402.02.11. 태상왕의 환가가 늦어짐을 걱정하다
1402.03.09. 태상왕이 소요산 아래에 별전을 짓다
1402.04.21.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 박만(朴蔓)이 소요산(逍遙山)으로 가서 하직을 고하니, 태상왕이 말하기를,
“동북면의 사람들은 모두 내 형제들이다. 지난번에 순문사(巡問使) 윤사덕(尹師德)이 매우 시끄럽게 굴었다. 경이 편안하게 어루만져 줌이 좋겠다.”
하매, 박만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기를,
“신이 마땅히 마음을 다하겠습니다.”
하니, 태상왕이 웃었다. 박만이 울면서 아뢰기를,
“지금 도망온 군대가 많이 양계(兩界)에 이르러 국가에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합니다. 모두가 전하의 환궁(還宮)을 바라고 있사온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속히 환궁하시지 아니하옵니까?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전하께서 나라 일을 염려하지 않는다고 여기옵니다.”
하니, 태상왕이 말하였다.
“옳다. 내 장차 돌아가겠다.”
1402.05.01. 태상왕이 소요산으로 다시 행차하다
1402.08.02. 임금이 회암사(檜巖寺)로 가서 태상왕을 조알(朝謁)하였다. 처음에 태상왕이 왕사(王師) 자초(自超)의 계(戒)를 받아 육선(肉膳)을 들지 아니하여, 날로 파리하고 야위어졌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환관(宦官)을 시켜 자초에게 말하기를,
“내가 태상전(太上殿)에 나가서 헌수(獻壽)하고자 하는데, 만일 태상왕께서 육선(肉膳)을 자시지 않는다면, 내가 장차 왕사(王師)에게 허물을 돌리겠다.”
하였다. 자초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회암사를 사양하고 작은 암자에 나가 있었다. 임금이 이른다는 말을 듣고 회암사 주지(住持) 조선(祖禪)과 더불어 태상왕께 고하기를,
“상(上)께서 육선(肉膳)을 드시지 아니하여, 안색이 파리하고 야위어지십니다. 우리들이 오로지 상위(上位)께서 부처를 좋아하시는 은혜를 입어서 미천한 생(生)을 편안히 지내는데, 지금 상(上)의 안색이 파리하고 야위신 것을 보니, 우리들의 생이 오래지 않은 것을 알겠습니다.”
하였다. 태상왕이 말하기를,
“국왕이 만일 나처럼 부처를 숭상한다면, 내가 마땅히 고기를 먹겠다.”
하였다. 임금이 들어가 술잔을 올리니, 태상왕이 허락하고 얼굴빛이 안화(安和)해졌다. 임금이 기뻐하여 삼현(三絃)을 들여와 연주하도록 명하고, 소선(素膳)을 올리었으니, 태상왕의 뜻을 거스를까 두려워함이었다. 태상왕이 조용히 임금에게 말씀하기를,
“왕사의 말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면 후생에 반드시 머리 없는 벌레가 된다’고 하기에, 내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
하였다. 임금이 말 네 필을 태상전에 바치었다.
1402.10.01. 지신사 박석명을 보내 태상왕께 명 사신이 왔음을 알리고 환궁을 청하다
1402.10.10.임금이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을 회암사(檜巖寺)에 보내어 태상왕께 의대(衣襨)를 드리게 하였으니, 태상왕의 탄신일(誕辰日)이 11일이기 때문이었다.
1402.10.27. 태상왕이 사신 온전에게 징파 나루에서 잔치를 베풀다
1402.11.01. 태상왕이 동북면(東北面)으로 향하였다.
1402.11.03.환관(宦官) 김완(金完)을 태상왕의 행재소(行在所)에 보내어 문안하였다.
1402.11.04. 태상왕의 행차가 김화현(金化縣)에 머물렀다.
1402.11.05. 안변 부사 조사의가 군사를 일으키다
1402.11.05. 환관 김완(金完)이 태상왕의 행재소에서 돌아왔다. 완이 아뢰기를,
“태상 전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즉위한 이래로 조종(祖宗)의 능(陵)에 한번도 참배하지 못하여 일찍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다행히 한가한 몸이 되었으니, 동북면(東北面)에 가서 선릉(先陵)에 참배한 뒤에 금강산을 유람코자 한다. 서울에 들어가면 잠시도 문(門)을 나서지 않겠다. 만일 내가 선릉에 참배하지 않으면, 어찌 다른 날에 지하(地下)에서 조종(祖宗)을 뵈올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나의 이번 행차를 미쳤다고 할 것이다. 그들도 부모가 있는 자들이니, 자기 마음속으로 헤아려 보면 내 마음을 알 것이다.’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가마를 메는 군사들의 의관(衣冠)이 다 떨어졌으니, 의관 각각 26벌을 빨리 판비(辦備)하여 보내라.’ 하시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곧 유사(攸司)에 명하여 보내게 하였다.
1402.11.08. 상호군(上護軍) 박순(朴淳)을 동북면(東北面)에 보내었는데, 저쪽 군중(軍中)에서 피살되었다. 순(淳)이 함주(咸州)에 이르러 도순문사(都巡問使) 박만(朴蔓)과 주군(州郡) 수령(守令)에게 ‘사의(思義)를 따르지 말라’고 교유(敎諭)하다가, 마침내 저쪽 군중(軍中)에 피살되었다
1402.11.08. 태상왕의 거가가 철령을 지났다고 전한 회양 부사에게 말 1필을 내려 주다
1402.11.09.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태상왕께서 춘추(春秋)가 이미 높으시고 또 풍질(風疾)이 있으신데, 지금 깊이 동북면(東北面)에 들어가셨고, 조사의(趙思義) 등이 군사를 일으키어 가로막았으니, 원컨대 전하께서 깊이 생각하소서. 또 전일에 대간(臺諫)이 교장(交章)하여 이방간(李芳幹)을 제주(濟州)에 옮겨 두기를 청하였으되,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전하가 윤허하지 않으시니, 신 등은 대간의 청하는 바가 심히 의리에 합한다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부왕(父王)께서 멀리 가셔서 아직 돌아오지 않으시니, 사모하는 마음 이기지 못하겠고, 회안(懷安)의 일은 마땅히 다시 생각하여 조처하겠다.”
하고, 지승추부사(知承樞府事) 이숙번(李叔蕃)과 더불어 말하기를,
“회안군은 동복형(同腹兄)인데, 왕위에 있는 까닭으로 이같은 변(變)이 있는가?”
하고, 이내 눈물을 흘렸다.
1402.11.09. 태상왕이 역마(驛馬)를 타고 함주(咸州)로 향하였다. 임금이 왕사(王師) 무학(無學)을 태상왕의 행재소에 보내었으니, 무학은 태상왕께서 공경하고 믿는 자이기 때문에, 주상의 뜻을 상달하여 속히 환가(還駕)하기를 청하도록 함이었다.
1402.11.11. 호군(護軍) 김옥겸(金玉謙)이 동북면에서 왔다. 처음에 옥겸을 동북면에 보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와서 아뢰었다.
“처음에 안변(安邊)에 이르러 부사(府使) 조사의(趙思義)를 보니, 사의가 흘겨보고 예(禮)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시켜 신의 칼과 마패(馬牌)를 빼앗았습니다. 신이 잠행(潛行)하여 문주(文州)에 이르러, 박양(朴陽)이 고을에 들어와서 군사를 조련(調練)한다는 말을 듣고 들어가 보니, 양(陽)이 또한 흘겨보고 더불어 말도 하지 아니하고, 다만 조병첩(調兵牒)에 서명(署名)만 하고 있었습니다. 영흥부(永興府)에 이르러 부윤(府尹) 박만(朴蔓)을 보니, 만(蔓)이 울며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군사를 조련하라는 사의(思義)의 통첩을 보고 사람을 보내어 아뢰었고, 또 갑옷과 무기를 실어 보내라는 통첩을 보고 사람을 보내어 아뢰었는데, 그대가 보았는가?’ 하였습니다. 내가 보지 못하였다고 대답하니, 만이 말하기를, ‘그 사람들이 반드시 잡힌 것이니, 내가 위태하다.’ 하고, 만이 또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장수(將帥)로서 번진(藩鎭)을 가볍게 버릴 수가 없으니, 그대는 샛길로 돌아가서 주상께 진달하라. 그대가 만일 잡히면, 그대와 나는 해를 당할 것이다.’ 하고, 인하여 칼을 주고 상등마(上等馬)를 주었습니다. 떠나서 영풍(永豊)에 이르러 길에서 한방(韓方)을 만났습니다. 방이 잠깐 더불어 말하고 지나갔습니다. 신이 영풍의 촌가(村家)에 이르러 자는데, 방이 사람을 시켜 그 집에 이르러, 신의 손을 묶어 방 가운데에 가두고 10여 인이 지켰습니다. 밤이 깊어 지키는 자가 잠이 들었기에, 가만히 도망하여 나오니, 지키는 자가 이를 깨닫고 쫓아와 높은 산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산으로 기어올라 도망하여 왔습니다.”
1402.11.18. 태상왕의 거가가 서북면의 옛 맹주로 향하다
1402.11.19. 이천우가 옛 맹주로 보낸 기마유격대 백여 인이 조사의에게 잡히다
1402.11.20. 이천우(李天祐)가 조사의(趙思義)의 군사와 더불어 옛 맹주(孟州)의 애전(艾田)에서 싸워 패하여, 천우가 포위를 당하였다. 아들 이밀(李密) 등 10여 기(騎)와 함께 역전(力戰)하여 포위를 뚫고 나왔다.
1402.11.24. 상호군(上護軍) 김계지(金繼志)로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삼았다.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가 보고하였다.
“조사의(趙思義)의 군사는 덕주(德州)에, 이천우(李天祐)의 군사는 자성(慈城)에, 이빈(李彬)의 군사는 강동(江東)에 있습니다.”
1402.11.27. 조사의(趙思義)의 군사가 안주(安州)에 이르렀는데, 밤에 궤멸(潰滅)되었다. 사의의 군사가 살수(薩水) 가에 주둔하였었는데, 밤에 스스로 궤멸되어 물을 건너다가, 얼음이 꺼져서 죽은 자가 수백여 인이었다. 처음에 김천우(金天祐)란 자가 사의(思義)의 군사에게 잡혔었는데, 그 군사가 아군(我軍)의 수를 물으니, 천우가 말하기를,
“조영무(趙英茂)는 동북면으로 향하였고, 이천우(李天祐)ㆍ이빈(李彬)ㆍ김영렬(金英烈)ㆍ최운해(崔雲海) 등은 맹주(孟州)에 이르렀고, 또 황주(黃州)ㆍ봉주(鳳州) 사이로 군사 4만여 명이 나왔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이를 당하려는가?”
하였다. 군사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두려워서 얼굴빛이 변하였다. 조화(趙和)가 군중(軍中)에서 도망하려고 꾀하여, 밤에 군막에 불을 지르고 크게 소리치니, 군사들이 모두 놀라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1402.11.28. 임금이 안평 부원군(安平府院君) 이서(李舒)와 중[釋] 설오(雪悟)에게 궁온(宮醞)을 가지고 태상왕(太上王)의 행재소에 가서 문안하게 하였다.
1402.11.28. 연산 부사(延山府使) 우박(禹博)에게 구마(廐馬) 1필을 내려 주었다. 박(博)이 역마(驛馬)를 타고 와서 태상왕이 회가(回駕)한다고 하였으므로, 임금이 기뻐서 내려 주었다.
1402.12.02. 태상왕의 거가(車駕)가 평양부(平壤府)에 머물렀다. 태상왕이 말하기를,
“내가 동북면(東北面)에 있을 때에 국왕이 사람을 보내지 않았고, 맹주(孟州)에 있을 때도 역시 사람을 보내지 않았으니, 감정이 없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시자(侍者)가 말하기를,
“주상께서 전 정승(政丞) 이서(李舒)와 대선사(大禪師) 익륜(益倫)ㆍ설오(雪悟)를 시켜 문안하게 하였사온데, 길이 막혀서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하니, 태상왕이 말하였다.
“모두 내가 믿고 중하게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보낸 것이다.”
1402.12.03. 정용수(鄭龍壽)ㆍ신효창(申孝昌)을 순위부(巡衛府)에 가두었다. 용수와 효창은 승녕부(承寧府) 당상관(堂上官)으로서 태상왕(太上王)을 호종(扈從)하여 동북면에 이르러 조사의(趙思義)의 역모(逆謀)에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1402.12.06. 풍해도 도관찰사 한상경이 태상왕께 연향을 드리다
1402.12.08. 임금이 금교역(金郊驛)에 나가서 태상왕을 맞이하고, 장전(帳殿)으로 들어가서 헌수(獻壽)하였다.
1402.12.08. 태상왕이 서울로 돌아왔다.
1402.12.09. 태상왕을 시위한 이천우와 이빈에게 안마를, 최운해에게 말을 하사하다. 완산군(完山君) 이천우(李天祐)ㆍ사평 좌사(司平左使) 이빈(李彬)에게 안마(鞍馬)를 내려 주고, 이성도 절제사(泥城道節制使) 최운해(崔雲海)에게 말을 내려 주었으니, 태상왕을 시위(侍衛)하고 왔기 때문이었다
1403.01.18. 태상왕이 내관 만세영을 시켜 태평관에서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다
1403.03.08. 태상왕이 덕수궁으로 이어하다
1405.08.09.거처를 다시 경덕궁으로 옮기다. 한양 환도의 의지를 밝히다
1405.09.06. 태상왕이 온천에 가는 것을 전송키 위해, 임금이 금교역에 머무르다
1405.09.27. 태상왕이 평주에서 오니, 임금이 금교역에 나가 영접하다
1405.10.05. 임금이 태상전에 나아가 한양 환도를 고하니, 술자리를 베풀다
1406.09.20. 안암동의 임시 처소로 돌아왔다가, 태상왕의 온천 행차를 전송하다
1408.05.24. 태상왕이 별전에서 승하하시다
4. 결론
(1) 차원부 설원기는 왕명에 의하여 1456년 당시 당대 석학들에 의하여 쓰여진 공문서라고하여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차원부 설원기는 1456년 5월에 최종적으로 작성되었다고 하나 차원부 설원기를 보면 수년전부터 왕명등에 의하여 준비되어 왔음을 시사하고 있고 이에 비추어 보면 상당히 오래동안 준비기간을 걸쳐 작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흔히들 우리가 알고 있는 함흥차사라는 내용이 차원부 설원기에도 등장하고 차천로가 쓴 오산설림초고에도 등장(아마도 함흥차사 관련한 야사의 기록중 제일 빠른 기록으로 보여짐)하고 있는데 이를 조선왕조실록 정사와 비교해 보면 함흥차사라는 내용이 후대에 꾸며진 이야기임을 금방 알 수 있다.
(3) 역사학자들은 함흥차사의 하나의 야사로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하고 있다. 어찌 조선왕조실록의 정사에 반하여 박팽년등이 차원부 설원기를 쓸 수 있다 말인가?
(4)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이후 줄곧 한양 또는 개경에 있었고 가끔씩 주변의 절이나 온천을 방문하였고 1402년 11월에 이르러 함경도 동북면, 서북면을 방문하고 12월 초에 평양을 걸쳐 12.08. 개경으로 환궁하였다. 이와중에 1402.11.05. 안변부사 조사의가 반란을 일으켰고 태종은 이성계가 방문한 곳이라 이성계의 신변에 매우 걱정을 하였고 다행히 별 문제없이 방문을 마치고 개경으로 돌아 온 것이다. 아마도 돌아올때 조사의 반란군을 진압한 이천우등과 같이 개경으로 돌아왔고 이에 이성계는 12.09. 말을 한필 하사하였다.
(5) 왕명에 의하여 쓰여지고 왕에게 보고 될 공문서에 조선왕조실록의 정사에 직접적으로 반(反)하여 제1차 왕자의 난이후 태조 이성계가 함흥으로 가서 여진족과 명나라에 의지하여 태종 이방원을 제거하려고 했다는 야사(野史) 따위를 1456년 박팽년등이 쓸 수 있단 말인가? 차원부 설원기외에 함흥차사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차천로의 오산설림초고에서 처음 나온 것으로 보아서는 추론해본건데 차원부설원기는 1580년대 무렵에 누군가 왕명과 박팽년등의 명의를 도용하여 누군가 쓴 것이 분명하다.
(6) 가사, 제1차의 왕자 난 이후 태조 이성계의 행적등이 차원부 설원기와 차천로의 오산설림초고에 나오는 내용이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 즉 제1차 왕자의 난이후 이성계가 함흥으로 갔고 거기에서 여진족과 명나라에 의지하여 태종 이방원을 제거하려고 하였던 것이 사실이었는데 태조,정종,태종실록의 원시 자료를 기록했던 사관 및 왕들의 사후에 실록을 편찬자들이 당시 권력자들에 의해 사실과 다르게 의도적으로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을 우호적으로 기록하라고 명령하여 어쩔 수 없이 차원부 설원기 및 오산설림초고에 나오는 내용과는 다르게 역사적 사실을 실록에 기록할 여지는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것은 차원부 설원기 및 오산설림초고에 나오는 것처럼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 즉 갈등관계는 함부러 다루어서는 안될 절대적 금기사항이며 비밀이었을 것인데 이러한 절대적 금기 사항을 공식적으로 권력자차원에서 금기사항을 풀고 있는 공식적으로 공론화하여 사실대로 기록하자는 논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왕에게 바쳐질 공문서에 기록한다는 것은 대역죄에 해당될 것이다. 이러한 금기를 누설한 박팽년,하위지등은 1456년 사육신의 난 이전에 이미 능지처참을 당하였을 것이다. 동시에 신숙주,최항도 죽음을 당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