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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봉(2002). 『현대 교육철학 탐구: 자유교육에 대한 비판 및 대안 탐색』. 교육과학사.
pp. 204-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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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즈는 사실상 그의 마지막 학술 논문(1983)에서 영국 교육철학의 동향을 개관하는 가운데 자유교육이 가진 오류를 지적하면서, 누군가가 허스트의 ‘지식의 형식’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그러한 대안의 가능성으로 ‘실제’에 기반을 둔 교육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놀랍게도, 허스트 자신이 그의 권고를 충실히 받아들여 종전의 ‘이론적 학문이나 지식(의 형식)’을 추구하는 (자유)교육 대신에 ‘사회적 실제에의 입문’으로서의 교육을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교육에 관한 생각의 변화가 구체적으로 표방된 것은 1990년대에 발표한 일련의 논문들(1992; 1993a; 1993b; 1998; 1999a; 1999b)에서이다. […]
허스트는 그의 정년퇴임 논문집에 기고한 『교육, 지식 그리고 사회적 실제』(Education, Knowledge and Practices, 1993a)라는 논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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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 합리성을 강조하는 자유교육과 인간의 욕구 혹은 욕망의 충족을 강조하는 공리주의 교육의 문제점을 의식하면서 이 두 입장간의 변증법적인 통합을 이루는 ‘사회적 실제’에 기반을 둔 교육을 주장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자유교육은 인간의 보편적 합리성과 이성을 강조한 나머지 주어진 인간의 욕구 혹은 욕망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으며, 공리주의는 주어진 인간의 욕구 혹은 욕망의 충족을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고등 정신인 합리적 능력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교육과 공리주의 교육을 단순히 절충하기만 하면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편인가 하면, 그러한 교육 아이디어는 양쪽 모두 문제를 안고 있어서 변증법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자유교육에서는 이성이나 합리성을 강조하지만 이론적 이성이나 이론적 합리성에 한정함으로써 ‘실천적’ 이성 혹은 ‘실천적’ 합리성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교육이 근본적으로 좋은 삶을 영위하는 일과 관련이 있고, 좋은 삶은 인간이 이성과 합리성을 충분히 발휘하며 사는 삶이라고 할 때, 그 때의 이성과 합리성은 초월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 우리가 실지로 살아가는 삶과 사회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교육에서 강조되어야 할 이성이나 합리성은 자유교육론자가 말하는 ‘이론적’ 이성 혹은 합리성이라기보다는 ‘실천적’ 이성 혹은 합리성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공리주의 교육에서는 주어진 인간의 욕구 혹은 욕망의 만족을 최대화시키는 것을 강조한다. 이때 공리주의자가 말하는 욕구 혹은 욕망의 만족은 일반적으로 개인의 심리적 욕구 혹은 욕망의 만족을 일컫기 때문에 합리적인 욕구나 사회적인 욕구의 만족이 간과된다. 그러나 좋은 삶이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추구하는 데에는 여전히 이성의 역할이 요구되고, 이때의 이성은 현재의 사회적인 실제에 종사함으로써만 획득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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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적 이성이다. 그러므로 교육에서 추구해야 할 가치는 단순히 순간적인 개인의 심리적인 욕망의 충족을 극대화하기보다는 한 사회 내에서의 인간의 전반적인 욕구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최대한 만족시키는 일로 볼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고 종사하고 있는 합리적인 사회적 실제에 입문함으로써 실제적인 삶을 사는 데 요구되는 실천적 이성이나 판단력을 기르는 일이 요구된다.
이상의 자유교육과 공리주의 교육의 변증법적인 통일을 시도한 허스트의 최근 교육적 아이디어에는 다음과 같은 사회관과 인간관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그의 사회관은 근본적으로 자유교육관과 공리주의 교육관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회관, 즉 사회를 단순히 개인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원자적 개인의 집합체로 보고 있는 데 대한 불만과 관련이 있다. 자유교육은 개개인의 독립된 이성의 발달을 강조함으로써 이성의 발달이 근본적으로 사회의 맥락 안에서 구성된 것이라는 것을 과소평가하며, 공리주의는 자연적인 개인의 욕구나 원망(願望)의 만족을 강조함으로써 사회와의 관련성을 기껏해야 우연적이다. 그러나 개인은 근본적으로 사회의 구성물이며, 사회 자체도 개개인의 우연적인 집합이나 결합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개인들의 네트워크로 보아야 한다. 개인은 그러한 네트워크 안에서 자신의 삶의 패턴을 형성하기도 하고, 나아가 사회적 네트워크를 바꾸기도 하는 것이다. 교육에서 추구하는 좋은 삶도, 근본적으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주어진 사회 안에서 자신의 욕구를 최대한 만족시키는 일과 관련이 있으며, 따라서 그것의 실현은 우리가 실지로 살고, 종사하고 있는 사회와 사회의 전통, 즉 사회적으로 구성된 합리적인 실제에 종사하고 입문하는 일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때의 ‘사회적 실제’ 그 자체도 실제 안에서 합리적으로 발달될 수 있으며, 다른 사회적 실제와 밀접하게 서로 관련되어 있다(Hirst, 1993a, pp. 194-195).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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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스트가 교육받은 인간의 구체적인 특성을 드러내거나 교육에서 추구해야 할 특정 인간상을 주장하기보다는 학생을 좋은 삶을 구성하는 지배적이고 합리적인 사회적 실제에 입문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허스트의 입장은 일차적으로 학생을 합리적 실제에 입문시키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교육받은 인간의 모습에 대한 가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느 편인가 하면, 허스트의 인간관은 그의 교육에 관한 주장 속에 암묵적으로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교육은 근본적인 면에서 좋은 삶을 실현하는 일이며, 좋은 삶은 전반적인 인간의 욕구를 장기적인 안목에서 최대한 실현하는 일이다. 이때 ‘인간의 전반적인 욕구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최대한 만족시키는 일’은 자유교육론자들이 주장하듯이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떠나서 혹은 추상적인 이론적 합리성이나 지성을 만족시킴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계속되어 온 합리적 실제에 입문함으로써,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요구되고 길러지는 실천적 이성 혹은 판단력에 의해 가능하다. 아닌게 아니라, 허스트에 있어서 실천적 지식에 기반을 둔 실천적 이성 혹은 합리성은 ‘현재의 즉각적인 원함이나 미래의 좋은 삶의 발달’을 위해 가장 잘 방어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1993a, p. 195). 허스트의 이러한 주장 속에 가정되어 있는 인간은 ‘실천적 지성인’, 즉 사회적 실제에 종사함을 통해 실천적 이성을 최대한 발휘하며, 그에 상응하는 좋은 삶을 사는 인간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교육의 역할은 한 사람의 욕구나 좋은 삶의 개념에 비추어 가장 잘 방어할 수 있는 사회적 실제를 선택하고 다양한 사회적 실제를 비판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능력을 발달시키는 일, 즉 실천적 지식과 이성을 발달시키는 일이다.
허스트가 말하는 ‘사회적 실제에의 입문’으로서의 교육의 특징을 밝히는 것은 복잡한 논의를 필요로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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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편리한 방식은, 종전의 그의 자유교육 아이디어(1965; 1974)와 비교하는 일이다. 이러한 일에는 사회적 실제에 기반을 둔 교육이 자유교육과 어떤 점에서 다르고, 왜 그가 그러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탐색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하에서 몇 가지 측면에서 사회적 실제에 기반을 둔 교육의 특징을 자유교육과 관련하여 드러내어 보자.
첫째, 자유교육 아이디어와 허스트의 사회적 실제에 기반을 둔 교육 아이디어는 공히 교육이 좋은 삶을 지향하고 있다는 보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그 좋은 삶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에 관해서는 판이한 입장을 취한다. 자유교육에서의 좋은 삶이 ‘이론적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면, 사회적 실제에 기반을 둔 교육에서의 좋은 삶은 ‘사회적 실제에 종사함으로써 실천적 이성에 입각한 전반적인 인간욕구를 장기적인 안목에서 최대한 만족시키는 것’이다. 허스트가 보기에, 자유교육에서 좋은 삶으로 상정하는 합리적 마음을 계발하는 일은 인간의 전체적인 측면의 발달을 포괄하는 것이 아니며, 유독 합리성을 계발하는 것이 인간의 다른 부분을 발달시키는 것보다 좋은 삶을 사는 데 나은 것도 아니다. 더구나, 이러한 일이 인간의 실제적인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보장이 없으며, 오히려 이론적 합리성의 추구는 우리가 살고 종사하고 있는 사회의 실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삶의 실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좋은 삶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실제에 종사함으로써 인간의 전반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을 떠나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허스트가 교육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나 실지의 삶을 초월한 합리성을 함양하는 일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욕구나 관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종사하는 활동의 패턴인 사회적 실제에 종사하는 일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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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자유교육의 목적이 ‘이론적인 삶을 위한 합리적 마음 혹은 합리성을 계발’하는 데 있다면, 사회적 실제에 기반을 둔 교육에서는 사회적으로 발달된 합리적인 실제에 학생을 입문시킴으로써 ‘실천적 이성에 따른 실질적인 좋은 삶을 영위’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허스트의 종전 입장의 중대한 오류는, 그가 고백하고 있듯이, 이론적 지식과 합리성을 좋은 삶을 결정하는 유일한 지식의 형태로 보거나 논리적 토대로 본 데 있었다(1993a, p. 197). 지금 그가 보기에, 이론적 지식과 합리성이 실제적 지식이나 합리적 인간 발달의 논리적 기반인 것도, 좋은 삶을 영위하거나 그러한 교육을 추구하는 데에 근본적인 것도 아니다. 물론 이론적 지식은 좋은 삶을 영위하는 데 요구되는 비판적 반성을 발달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론적 지식 그 자체가 한 사람의 좋은 삶을 실지로 영위하는 필수조건인 것은 아니다(1993a, p. 196). 오히려 실제와 실제적 지식이 보다 근본적이므로, 교육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필요한 다양한 사회적 실제에 일차적인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발달하는 실천적 이성에 충실한 좋은 삶을 영위하게 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1998, p. 19).
셋째, 자유교육에서는 이론적 합리성을 추구하기 위해서 인류문화 유산의 정수인 몇 가지의 ‘지식의 형식’에 입문시키는 것을 강조하는 데 비해, 사회적 실제에 기반을 둔 교육에서는 좋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 종사하는 활동의 패턴인 ‘사회적 실제’에 학생을 입문시키는 것을 강조한다. 자유교육에서 강조하는 지식 혹은 학문의 형식은 인간 삶의 일단을 보여 줄지 몰라도 삶의 형식 전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기 어려우며, 이론적 교과에 입문시키는 것이 학생이 좋은 삶을 사는 것과 그다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어느 편인가 하면, 이론적 교과를 가르치다 보면 오로지 인지적 만족만을 추구하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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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도 특히 명제적 지식의 성취를 추구하기 때문에 ‘이중적인 추상성’을 가지게 된다(1999a, p. 111). 그리하여 이론적 교과를 추구하면 할수록 실제의 삶과의 관련성이 드러나기보다는 오히려 더 멀어지게 되고, 우리가 종사하고 있는 사회 안에서 실질적인 좋은 삶을 추구하는 데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실질적인 좋은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교육과정이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중요하고 지배적인 사회적 실제에 비추어 조직되어야 한다는 것은 ‘우연적인 문제’라기보다는 ‘필연적인 요구’라고 볼 수 있다(1993a, p. 197).
넷째, 교육의 정당화 방식의 면에서, 자유교육은 소극적인 정당화 방식인 ‘선험적 논의’(transcendental argument)에 의존한다면, 사회적 실제에 기반을 둔 교육은 이론적 활동을 포함한 우리가 살아가고 종사하고 있는 모든 활동의 기반인 사회적 실제 그 자체에 의존하는 실제적인 정당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자유교육의 ‘선험적 정당화’ 방식은 ‘합리적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어째서 가치로운가’라고 질문하는 사람은 이미 어떤 형태로건 합리적인 삶에 이미 헌신하고 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가정하고 있다는 순환논리에 의존하며, 이러한 정당화 방식은 왜 합리성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관한 적극적인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 점에서 기껏해야 소극적인 정당화 방식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반면, 실제적 정당화 방식은 사회적 실제가 교육의 근본적인 토대를 제공해 줌으로써 우리가 종사하고 있는 특정 활동이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있다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를 말해 줄 뿐만 아니라 무슨 활동이 종사할 만한 가치를 가진 활동인가를 말해 준다는 점에서 보다 강력한 정당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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