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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頂髻布施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布施乞者連膚頂髻호대 如寶髻王菩薩과 勝妙身菩薩과 及餘無量諸菩薩等하야 菩薩이 是時에 見乞者來하고 心生歡喜하야 而語之言호대 汝今若須連膚頂髻인댄 可就我取하라 我此頂髻가 閻浮提中에 最爲第一이라하고 作是語時에 心無動亂하야 不念餘業하며 捨離世間하고 志求寂靜하야 究竟淸淨하며 精勤質直하야 向一切智하고 便執利刀하야 割其頭上에 連膚頂髻하야 右膝着地하고 合十指掌하야 一心施與하며 正念三世一切諸佛菩薩所行하야 發大歡喜增上志樂하며 於諸法中에 意善開解하야 不取於苦하야 了知苦受가 無相無生하며 諸受互起에 無有常住라 是故로 我應同去來今一切菩薩의 修行大捨하야 發深信樂하야 求一切智하야 無有退轉이요 不由他敎善知識力이니라 菩薩摩訶薩이 作是施時에 以諸善根으로 如是廻向하나니 所謂願一切衆生이 得無見頂하야 成就菩薩如塔之髻하며 願一切衆生이 得紺靑髮과 金剛髮과 細軟髮하야 能滅衆生의 一切煩惱하며 願一切衆生이 得潤澤髮과 密緻髮과 不侵鬢額髮하며 願一切衆生이 得柔軟髮과 盡於鬢額而生髮하며 願一切衆生이 得如卍字髮과 螺文右旋髮하며 願一切衆生이 得佛相髮하야 永離一切煩惱結習하며 願一切衆生이 得光明髮하야 其光이 普照十方世界하며 願一切衆生이 得無亂髮하야 如如來髮의 淨妙無雜하며 願一切衆生이 得成應供頂塔之髮하야 令其見者로 如見佛髮하며 願一切衆生이 皆得如來無染着髮하야 永離一切闇翳塵垢니라 是爲菩薩摩訶薩의 施連膚髻時에 善根廻向이니 爲令衆生으로 其心寂靜하야 皆得圓滿諸陀羅尼하야 究竟如來의 一切種智와 十種力故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구걸하는 이에게 살갗이 붙은 정수리의 육계(肉髻)를 보시하되, 보계왕(寶髻王)보살과 승묘신(勝妙身)보살과 다른 한량없는 보살들과 같이 하느니라. 보살이 그때에 구걸하는 이가 오는 것을 보고는 환희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그대가 지금 만약 살갗이 붙은 육계를 요구하거든 나에게 와서 가져가라. 나의 육계는 남섬부주에서 제일이니라' 라고 하느니라.
이렇게 말할 적에 마음이 어지럽지도 않고 다른 일을 생각지도 않으며, 세간을 버리고 고요함을 구하며, 끝까지 청정하여 정근하고 순박하고 올곧아서 일체 지혜에 향하는 것이며, 문득 날카로운 칼을 들고 정수리에서 살갗이 붙은 육계를 베어들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여 일심으로 보시하느니라.
삼세의 일체 부처님과 보살들이 행하신 것을 생각하고 크게 환희함을 내어 좋아하는 생각이 더하며, 모든 법 가운데서 뜻이 환히 열리어 괴로움을 취하지 아니하며, 괴로운 감각[苦受]이 모양도 없고 나지도 않는 줄을 알며, 모든 감각이 번갈아 일어나고 항상 머물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나도 응당 과거 미래 현재의 일체 보살들과 같이 크게 버리는 일을 닦아서 깊이 믿고 좋아하는 마음을 내고, 일체 지혜를 구하여 퇴전하지 않으며, 다른 이의 가르침을 의지하지 않고 잘 아는 힘[善知識力]으로써 함이니라. 보살마하살이 이렇게 보시할 때에 모든 선근으로 이와 같이 회향하느니라.
이른바 ‘원컨대 일체중생이 볼 수 없는 정수리[無見頂]를 얻어 보살의 탑과 같이 여기는 상투를 성취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윤택한 머리털과 빽빽한 머리털과 귀 밑과 이마를 침범하지 않는 머리털을 갖게 되어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유연한 머리털과 귀 밑과 이마를 피하여 나는 머리털을 갖게 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 중생이 만(卍)자와 같은 머리털과 소라무늬처럼 오른쪽으로 도는 머리털을 가져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부처님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을 가지고 일체 번뇌의 버릇을 떠나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빛나는 머리털을 가지어 그 광명이 시방세계에 비치어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헝클어지지 않는 머리털을 갖게 되어 여래의 두발(頭髮)이 깨끗하고 흐트러지지 않는 것과 같아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공양받는 탑과 같은 머리털을 이루어 보는 이로 하여금 부처님의 두발을 보는 것 같게 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여래의 물들지 않는 머리털을 가지고 온갖 어두운 티끌을 여의어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살이 붙은 육계(肉髻)를 보시할 때에 선근으로 회향하는 것이니, 중생들로 하여금 마음에 고요하고, 모두 원만한 다라니를 얻어, 여래의 일체 종지와 열 가지 힘을 끝까지 얻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大方廣佛華嚴經 券第 二十七
十廻向品 弟二十五之五
대방광불화엄경 제27권으로 넘어갔다.
아직도 십회향품의 제육수순견고일체선근회향(第六隨順堅固一切善根廻向)의 계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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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보시(頂髻布施): 정수리의 육계(肉髻)를 보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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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보시는 이마와 상투를 보시하는 것이다. 본문에는 연부정계라는 말이 나온다. 살갗이 붙어있는 이마와 상투를 보시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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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보시걸자연부정계(布施乞者連膚頂髻)호대 : 연부정계 말하자면 피부가 붙어있는 그러니까 이마를 자르거나 상투를 자르거나 하려면 거기에 피부가 저절로 딸려오는 상황이다.연부정계를 구걸하는 사람에게 보시를 하되. 과거에 또 이런 보시를 하는 보살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보계왕보살(如寶髻王菩薩)과 : 보계왕보살과
승묘신보살(勝妙身菩薩)과 : 승묘신보살과
급여무량제보살등(及餘無量諸菩薩等)하야 : 그리고 그 나머지 한량없는 모든 보살 등과 같이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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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이 : 보살이
시시(是時)에 : 이러한 때에
견걸자래(見乞者來)하고: 걸자가 오는 것을 보고, 그런 사람이 구걸하러 오는 것을 보고
심생환희(心生歡喜)하야: 마음에 환희심을 낸다. 가끔 내 방에 차비를 얻으러 오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선방에 가서도 차비를 받는다. 내가 작은 돈을 주면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아이구 내가 가서 드려야 되는데 여기까지 오게 해서 죄송하다”고 말했더니 이 사람이 선방 책임자인 수좌스님에게 가서 “그 스님이 화엄경 도리로 내한테 이런 이야기를 합디다.” 하고 자랑을 했다는 것이다. 수좌 스님이 나를 만났을 때 “스님은 전국구한테 화엄경 도리로 보시한다면서?”하고 물었다.
“아니 그 화엄경 도리가 뭔데요?” 하고 내가 물었더니 ‘가서 드려도 드릴 판인데 여기까지 와서 받아가니까 얼마나 환희롭고 고맙습니까?’하고 내가 이야기 하더라고 전국구스님이 깜짝 놀라서 말했다는 것이다. 내 말에 감동을 했는지 기가 찼는지 그 속은 모르겠지만 그 이야기를 전하는 것을 듣고는 아마 선방에서도 자기들끼리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
‘그 스님 화엄경 이야기 잘하니까 화엄경식 보시인가 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왕 보시를 하려면 자주 온다고 얼굴 찌푸릴 것이 아니라 여기 나오는 대로 심생환희의 마음으로 주면 좋다. 구걸을 하러 오는 사람들을 보고는 마음에 환희심을 내어서
이어지언(而語之言)호대: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여금약수연부정계(汝今若須連膚頂髻)인댄: 그대가 지금 만약에 연부정계에 피부가 붙어 있는 이마를 구할진댄 수(須)자가 구할진댄 하는 뜻이다.
가취아취(可就我取)하라: 가히 나에게 나아가서 취하라. 내 이마를 벗겨가라는 말이다.
아차정계(我此頂髻)가 : 나의 이 이마가
염부제중(閻浮提中)에: 염부제 가운데
최위제일(最爲第一)이라하고: 최위제일이라. 내 이마가 제일 좋으니까 내 이마를 잘라가라.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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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시어시(作是語時)에 : 이러한 말을 할 때에
심무동란(心無動亂)하야 : 마음에 하나도 움직이는 바가 없어서
불념여업(不念餘業)하며: 남은 업을 생각하지도 아니하며
사리세간(捨離世間)하고 : 세간을 다 떠나 버리고
지구적정(志求寂靜)하야: 고요한 상태만 뜻으로 구해서
구경청정(究竟淸淨)하며 : 끝까지 청정하며
정근질직(精勤質直)하야 : 부지런히 정근해서 아주 순박하고 곧아서
향일체지(向一切智)하고 : 일체지를 향하고
변집이도(便執利刀)하야 : 곧 날카로운 칼을 잡아서
할기두상(割其頭上)에 : 그 두상을 베매
연부정계(連膚頂髻)하야 : 두상에 있는 연부정계 피부가 붙어 있는 이마를 베어서
우슬착지(右膝着地)하고 : 오른쪽 무릎까지 꿇고
합십지장(合十指掌)하야: 합장을 딱 하고
일심시여(一心施與)하며: 일심으로 부처님께 바치듯이 보시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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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념삼세일체제불보살소행(正念三世一切諸佛菩薩所行)하야 :삼세 일체 제불 보살의 소행을 바르게 생각해서 ‘과거 일체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은 전부 이렇게 했는데’ 라는 생각을 해서
발대환희증상지락(發大歡喜增上志樂)하며 : 큰 환희심과 가장 높은 뜻을 바라며
어제법중(於諸法中)에: 모든 법 가운데서
의선개해(意善開解)하야 : 뜻이 잘 열리고 풀어져서 이해되어서
불취어고(不取於苦)하야 : 고를 취하지 아니하고
요지고수(了知苦受)가 : 고통을 받는 것이
무상무생(無相無生)하며: 상도 없고 생도 없으며
제수호기(諸受互起)에 : 모든 감각이 서로 일어남에. 사실 우리 삶이라고 하는 것은 수(受)자 하나로 설명이 다 된다.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이다. 색은 육신이고 수는 춥다 덥다에서부터 고통스럽다 즐겁다 좋다 나쁘다 등등 우리의 정신을 활용해서 느끼고 받아들이고 감정을 표현하는 모든 것이다. 수(受)가 있음으로써 상행식(想行識)이 연달아 일어난다.
고수(苦受), 고통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형상도 없고 어디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무상 무생이다. 이런 일체 고통을 받아들이는 뿐만 아니라 낙수(樂受)도 마찬가지다. 그런 모든 수가 서로서로 일어남에
무유상주(無有常住)라: 항상 머무는 것이 없다. 모든 감각은 늘 변하고 머물지 않는다. 추운 듯 하면 금방 덥고 더운가 하면 또 춥다. 나처럼 비염을 오래 앓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안다. 따뜻한 곳에 있다가 밖에 나가면 콧물이 흐르고 재채기가 나온다. 밖이라도 그 온도에 적응을 하면 괜찮고 말짱하다. 그런데 그렇게 바깥온도에 잘 적응했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오면 또 공기가 변하니까 콧물이 나고 재채기가 나서 죽을 지경이 된다.
그런 것이 전부 어떤 상황에 따라서 느끼는 바다. 수(受)하는 것이지 실체는 없다. 그래서 무유상주(無有常住)다. 항상 머무는 것은 없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서 말씀드렸지만 우리 일체생활이 다 그렇다.
스님들이 처음 출가해서 절에 오면 얼마나 환희롭고 기쁨에 넘치는가? 그런데 세월이 가다보면 죽을 맛일 때도 있고 왜 이런 길을 걸었던가 싶을 때도 있다. 그러다가 또 그런 생각이 변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보다 더 깊은 신심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불법을 통해서 우리 인생사를 가만히 음미해 보고 사량하고 분별하고 탐구해 보면 인생사라는 것이 참으로 기가 막히다. 불법이 개재되어 있지 않으면 그 사실을 모른다. 세상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그냥 넘어간다. 우리가 불법을 공부해서 불법과 인생사와 연관시켜서 하나하나 뜯어보고 음미해보면 기묘하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수(受) 하나만 하더라도 역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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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고(是故)로
아응동거래금일체보살(我應同去來今一切菩薩)의 : 나는 응당 과거 미래 현재 모든 보살의
수행대사(修行大捨)하야 : 크게 보시하는 것을 수행하는 것과 같이 해서
발심신락(發深信樂)하야 : 깊은 믿음과 즐거움을 발해서
구일체지(求一切智)하야 : 일체 지혜를 구해서
무유퇴전(無有退轉)이요 : 퇴전함이 없으며
불유타교선지신력(不由他敎善知識力)이니라: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는 선지식의 힘이다. 불유타교선지신력이 중요한 말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누구에게 배우고 화엄경에게 배우고 어디서 듣고 안다. 하지만 궁극적인 가르침은 불유타교다.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는다. 전부 내 자신 속에서 나오는 것이고 자신 속에서 계발하는 것이고 자신이 눈을 뜨는 것이다. 그러한 선지식의 힘이다.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이
작시시시(作是施時)에 : 이와 같이 보시할 때에
이제선근(以諸善根)으로 : 모든 선근으로써
여시회향(如是廻向)하나니: 이와 같이 회향하나니
소위원일체중생(所謂願一切衆生)이 : 소위 일체 중생이
득무견정(得無見頂)하야: 볼 수 없는 이마를 얻는다. 부처님을 무견정이라고 부른다. 마야부인이 싯달타를 낳아서 그 이마를 보려고 하니까 이마가 계속 높이 올라가서 도저히 부처님 이마를 볼 수가 없어서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가장 존귀하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다. 무견정, 볼 수 없는 이마라는 말이 그런 말이다. 어머니도 당신이 낳은 자식의 이마를 못 본 것이다. 가장 높은 정상을 못봤다는 것은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일체중생이 다 그런 부처님이 되어서
성취보살여탑지계(成就菩薩如塔之髻)하며 : 보살의 탑과 같은 상투 성취하기를 원한다.
탑은 뾰족하게 높이 올라가서 탑의 끝을 우리가 거의 못본다. 못보도록 최대한 뾰족하게 해 놓았다. 탑의 옆도 보고 중간도 보고 하지만 정상적으로 만들어진 탑 꼭대기는 쇠붙이를 마지막에 꽂아도 가장 뾰족하게 해서 어디가 끝인지를 못보게 해놓은 것이다. 그런 것이 다 이런 데서 나온 것이다. 보살의 탑과 같은 상투를 성취하기를 원하며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득감청발(得紺靑髮)과 : 감청색 발과
금강발(金剛髮)과 : 금강같은 머리카락과
세연발(細軟髮)하야 : 아주 가늘고 머리카락을 얻는다. 머리카락이 굵고 거칠고 뻣뻣하면 좋은 머리카락이 아니다. 세연의 머리카락을 얻어서
능멸중생(能滅衆生)의 : 중생들의
일체번뇌(一切煩惱)하며: 일체 번뇌 능히 멸하기를 원하며. 머리카락 좋은 것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참 중요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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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 중생이
득윤택발(得潤澤髮)과 : 아주 윤택한 머리카락과
밀치발(密緻髮)과 : 치밀한 머리카락과
불침빈액발(不侵鬢額髮)하며 : 귀밑을 침범하지 아니하는 머리털이다.
만약에 머리털이 귀밑으로까지 둘러서 얼굴과 입을 감싸면 관상학적으로 안좋은 상이다. 이런 것을 봉구((封口), 복면(覆面)이라고도 하는데 털이 둘러서 얼굴을 감싸면 복면 이고 입을 검은 털이 전부 감싸면 봉구다. 여기 불침빈액이라고 하는 것이 복면이다. 머리카락이 내려와서 수염하고 연결 되어 버리니까 관상학적으로 복면이 된다. 그렇게 빈액을 침범하지 않는 머리카락 얻기를 원하며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득유연발(得柔軟髮)과 : 유연발과
진어빈액이생발(盡於鬢額而生髮)하며: 귀밑과 이마를 피하여 나는 머리털을 얻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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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 중생이
득여만자발(得如卍字髮)과 : 만자처럼 생긴 머리카락과
불교에서 만자는 시계 방향으로 되어 있다. 우요삼잡(右繞三匝)이라고 할 때도 전부 시계 방향으로 알면 간단하다. 우만, 좌만이라고 해서 오른쪽으로 돌리면 우만 왼쪽으로 돌면 좌만인데 좌만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대개 우만으로 통일하는 것이 좋다. 탑을 돌아도 오른 쪽으로, 시계방향으로 도는 것이다. 시계방향으로 도는 것을 우요라고 한다.
오른쪽으로 도는 만자와 같이 돌아가는 머리털과
나문우선발(螺文右旋髮)하며 : 나문 우선, 여기는 우선이라고 했다. 소라 무늬와 같은 오른 쪽으로 돌아가는 털 얻기를 원한다.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중생이
득불상발(得佛相髮)하야: 불상의 발을 얻는다.
부처님은 출가했을 때 머리를 깎아 놓고 정작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을 때는 머리를 한 번도 안깎았다. 그것도 문제라고 할까. 그래놓고 우리는 깎으라고 하였다.
부처님이 성불하고 나서는 머리를 깎았다는 기록이 없다. 불상을 보면 전부 털이 길게 자라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여기도 털이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또 이것은 대승경전이니까 대승경전에서는 머리 깎고 출가한 것을 그렇게 좋게 생각 안한다. 대승경전은 승속을 총망라한 가르침이다.
소승경전과 대승경전의 두드러진 특징은 출가중심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초기불교 내지 부파불교까지는 전부 출가중심이고 교단중심이다. 수행도 출가를 해야만 할 수가 있다. 신도는 무조건 수행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으로 끝나고 자기들이 수행을 하는 것을 엄두도 못낸다. 출가를 해서 아무것도 안하고 명상에 들어있어도 명상이 될까말까 하는데 세속살림 다 하면서 무슨 명상을 하는가? 처음부터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불교 부파불교와 대승불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내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이 엄청난 차이를 우리가 제대로 파악해야 된다. 천하에 모든 사람은 평등한데 가장 바람직한 불교가 왜 차별을 하겠는가? 불멸 후 500년까지는 늘 그렇게 교단중심으로 머리 깎고 출가 했다고 해서 특별하고, 출가 안한 이는 출가한 이를 시봉하고 도움주는 역할만을 하게 했다.
그래서 ‘이건 아니다, 부처님 뜻에 맞는 불교가 아니다’ 하고 개혁운동을 일으킨 것이 대승불교 운동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불교는 만인이 평등한 불교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근래에 부파불교 초기불교 근본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일반 신도들에게나 스님들에게나 똑같이 자기들 교리를 가르친다. 그런데 그것은 소승교리로 치면 엉터리고 얼토당토 않은 것이다. 근본불교의 교리대로 라면 승속을 똑같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출가한 사람들만 딱 앉혀놓고 가르쳐야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남방에서 유명한 스님들을 모셔다가 법회를 열고 신도들이 많이 모이면 좋아하는 것은 근본불교 교리에 맞지 않다. 그러한 관용도 사실은 대승 불교의 영향이다. 대승불교가 아니면 그런 관용이 있을 수가 없다.
태국이나 미얀마 같은 데서 어떻게 신도나 스님을 같이 앉혀놓고 법문을 하는가? 어림도 없고 말도 안되는 소리다.
스님들과 신도들을 다 같이 앉혀놓고 불교를 이야기 했다면 무슨 불교를 이야기 했든 그 분위기는 이미 대승화된 분위기다.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소승불교는 출가한 사람에게만 명상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우리 프로들 전문가인 스님들은 그러한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개인이나 각자 절의 상황에 따라서 어떻게 법회를 하는지는 상관이 없지만 알기는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일체 중생이 불상발을 얻어서
영리일체번뇌결습(永離一切煩惱結習)하며 : 번뇌의 맺힌 습기를 영원히 소멸하기를 떠나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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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중생이
득광명발(得光明髮)하야 : 광명발을 얻어서
기광(其光)이 : 그 광명이
보조시방세계(普照十方世界)하며 : 시방 세계를 보조하기를 원하며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중생이
득무난발(得無亂髮)하야 : 어지럽지 않은 머리카락을 얻어서
여여래발(如如來髮)의 : 여래의 발을
정묘무잡(淨妙無雜)하며 : 정묘하고 잡됨이 없는 것과 같이 되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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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중생이
득성응공정탑지발(得成應供頂塔之髮)하야 : 부처님의 이마를 모셔놓은 탑의 발을 성취해서 이로써
영기견자(令其見者)로 :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견불발(如見佛髮)하며 : 부처님의 머리카락을 보는 것과 같이 하기를 원하며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개득여래무염착발(皆得如來無染着髮)하야: 여래의 염착이 없는 머리카락을 얻어서
영리일체암예진구(永離一切闇翳塵垢)니라 : 일체 암예진구를 영원히 떠나기를 원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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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보살마하살(是爲菩薩摩訶薩)의 :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시연부계시(施連膚髻時)에 : 피부가 붙어있는 상투를 보시할 때의
선근회향(善根廻向)이니 : 선근회향 하는 것이니
위령중생(爲令衆生)으로 : 중생으로 하여금
기심적정(其心寂靜)하야 : 그 마음이 적정해서
개득원만제다라니(皆得圓滿諸陀羅尼)하야 : 다 원만한 모든 다라니를 얻어서
구경여래(究竟如來)의 : 여래의
일체종지(一切種智)와 : 일체 종지와
십종력고(十種力故)니라: 십종력을 성취하게 하는 까닭이니라. 구경은 성취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된다.
(32) 眼布施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以眼으로 布施諸來乞者호대 如歡喜行菩薩과 月光王菩薩과 及餘無量諸菩薩等의 所行惠施하야 菩薩摩訶薩이 布施眼時에 起淸淨施眼心하며 起淸淨智眼心하며 起依止法光明心하며 起現觀無上佛道心하며 發廻向廣大智慧心하며 發與三世菩薩平等捨施心하며 發於無礙眼에 起不壞淨信心과 於其乞者에 起歡喜攝受心하나니 爲究竟一切神通故며 爲生佛眼故며 爲增廣大菩提心故며 爲修習大慈悲故며 爲制伏六根故로 於如是法에 而生其心이니라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布施眼時에 於其乞者에 心生愛樂하야 爲設施會호대 增長法力하야 捨離世間愛見放逸하며 除斷欲縛하고 修習菩提하며 隨彼所求하야 心安不動하며 不違其意하야 皆令滿足하야 而常隨順無二捨行하고 以此善根으로 如是廻向하나니 所謂願一切衆生이 得最勝眼하야 示導一切하며 願一切衆生이 得無礙眼하야 開廣智藏하며 願一切衆生이 得淨肉眼하야 光明鑑照하야 無能蔽者하며 願一切衆生이 得淨天眼하야 悉見衆生의 生死業果하며 願一切衆生이 得淨法眼하야 能隨順入如來境界하며 願一切衆生이 得智慧眼하야 捨離一切分別取着하며 願一切衆生이 具足佛眼하야 悉能覺悟一切諸法하며 願一切衆生이 成就普眼하야 盡諸境界하야 無所障礙
하며 願一切衆生이 成就淸淨離癡翳眼하야 了衆生界가 空無所有하며 願一切衆生이 具足淸淨無障礙眼하야 皆得究竟如來十力이니라 是爲菩薩摩訶薩의 布施眼時에 善根廻向이니 爲令衆生으로 得一切智淸淨眼故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구걸하는 이에게 눈을 보시할 적에 환희행(歡喜行)보살과 월광왕(月光王)보살과 다른 무량한 보살들이 보시를 하던 일과 같이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이 눈을 보시할 적에 보시하는 눈을 청정히 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며, 지혜의 눈을 청정히 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며, 법의 광명을 의지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며, 위없는 부처님의 도(道)를 환하게 보려는 마음을 일으키며, 광대한 지혜에 회향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삼세의 보살들과 더불어 평등하게 보시하려는 마음을 내며, 장애 없는 눈을 내는 데 깨끗한 신심을 깨뜨리지 않는 마음을 일으키며, 구걸하는 이에게 환희하게 섭수하는 마음을 일으키느니라.
일체 신통을 끝까지 얻기 위함이며, 불안(佛眼)을 내게 하기 위함이며, 큰 보리심을 증대하기 위함이며, 대자비심을 닦기 위함이며, 육근(六根)을 조복하기 위하는 연고로 이러한 법에 마음을 내느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눈을 보시할 때에 구걸하는 이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내고, 보시하는 모임을 베풀어 법의 힘을 증장하며, 세간의 애착하는 소견과 방일함을 버리고 탐욕의 속박을 끊으며, 보리를 닦아서 그들의 요구함을 따르되, 마음이 동요하지 아니하고 그의 뜻을 거스르지 아니하여 만족케 하면서도 둘이 없이 버리는 행(行)을 항상 따르느니라.
이런 선근으로 이렇게 회향하느니라.
이른바 ‘원컨대 일체중생이 가장 좋은 눈을 얻어 모든 이를 인도하여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장애 없는 눈을 얻어 넓은 지혜의 장을 열어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청정한 육안(肉眼)을 얻어 광명으로 비치는 것을 능히 가리울 이가 없어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청정한 천안(天眼)을 얻어 중생의 나고 죽는 업(業)과 과보를 다 보아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청정한 법안(法眼)을 얻어 여래의 경계에 순응하여 들어가지이다.’라고 하느니라.‘원컨대 일체중생이 지혜안(智慧眼)을 얻어 모든 분별과 집착을 버려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불안(佛眼)을 구족하여 모든 법을 능히 깨달아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두루 보는 눈[普眼]을 성취하여 모든 경계를 당하여도 장애될 것이 없어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청정하여 어리석고 가림이 없는 눈을 성취하여 중생계가 텅 비어 아주 없는 것으로 알아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원컨대 일체중생이 청정하고 막힘이 없는 눈을 구족하여 여래의 십력을 끝까지 얻어지이다.’라고 하느니라.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눈을 보시할 때에 선근으로 회향하는 것이니라. 중생들로 하여금 온갖 지혜의 청정한 눈을 얻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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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시(眼布施) :눈을 보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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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이
이안(以眼)으로 : 눈으로써
보시제래걸자(布施諸來乞者)호대 : 와서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보시하기를 원하대
여환희행보살(如歡喜行菩薩)과 : 저 환희행 보살과
월광왕보살(月光王菩薩)과 : 월광왕 보살과
급여무량제보살등(及餘無量諸菩薩等)의: 그리고 나머지 무량 모든 보살 등의
소행혜시(所行惠施)하야 : 행한 바 보시하는 것과 같이 해서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이
보시안시(布施眼時)에 : 눈을 보시함에
기청정시안심(起淸淨施眼心)하며 : 청정한 눈을 보시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기청정지안심(起淸淨智眼心)하며 : 청정한 지혜 있는 마음을 일으키며
기의지법광명심(起依止法光明心)하며 : 법광명에 의지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기현관무상불도심(起現觀無上佛道心)하며 : 무상불도를 환하게 관찰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발회향광대지혜심(發廻向廣大智慧心)하며 : 광대지혜에 회향하는 마음을 내며, 발(發)자나 기(起)자나 같은 뜻이다.
발여삼세보살평등사시심(發與三世菩薩平等捨施心)하며: 삼세보살로 더불어 평등하게 보시하는 마음을 발하며
발어무애안(發於無礙眼)에 : 걸림이 없는 눈에
기불괴정신심(起不壞淨信心)과 : 무너지지 않고 청정한 믿음을 일으키는 마음과
어기걸자(於其乞者)에 : 또 와서 구걸하는 사람에게
기환희섭수심(起歡喜攝受心)하나니: 환희 섭수하는 마음을 일으키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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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경일체신통고(爲究竟一切神通故)며: 일체 신통을 완성하는 연고며
위생불안고(爲生佛眼故)며: 부처의 눈을 내게 하기 위한 까닭이며
위증광대보리심고(爲增廣大菩提心故)며: 대보리심을 증장하게 하기 위한 까닭이며
위수습대자비고(爲修習大慈悲故)며: 대자비를 수습하기 위한 까닭이며
위제복육근고(爲制伏六根故)로 : 육근을 항복하기 위한 까닭으로
어여시법(於如是法)에 : 이와 같은 법에
이생기심(而生其心)이니라 : 그 마음을 내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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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보살 마하살이
보시안시(布施眼時)에 : 눈을 보시할 때에
어기걸자(於其乞者)에 : 와서 구걸하는 자에게
심생애락(心生愛樂)하야 : 마음에 사랑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내어서
위설시회(爲設施會)호대 : 시회를 베풀되 요즘 우리가 급식소 차려놓고 음식을 보시한다. 시회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눈을 보시하는 그런 모임, 법회를 개설하되
증장법력(增長法力)하야 : 법력을 증장시켜서
사리세간애견방일(捨離世間愛見放逸)하며: 세간의 애견과 방일을 다 버려서 떠나며
제단욕박(除斷欲縛)하고 : 욕심의 속박을 끊어서 제거하고
수습보리(修習菩提)하며 : 보리를 수습하며
수피소구(隨彼所求)하야 : 저 구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서
심안부동(心安不動)하며 : 마음에 편안하야 동하지 아니하며
불위기의(不違其意)하야 : 그 뜻을 어기지도 아니해서
개령만족(皆令滿足)하야: 다 만족케 해서
이상수순무이사행(而常隨順無二捨行)하고 : 항상 둘이 없는 버리는 행, 보시하는 행을 따른다. 시자와 수자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둘이 없는 하나라고 하는 사실, 그러한 사행을 수순한다. 우리는 삼륜청정을 이야기 하지만 여기서는 받는 자와 주는 자가 둘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주는 자가 받는 자고 받는 자가 주는 자다’라는 보시의 행이다.
이차선근(以此善根)으로 : 이차선근으로써
여시회향(如是廻向)하나니: 이와 같이 회향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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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원일체중생(所謂願一切衆生)이 : 소위 일체 중생이
득최승안(得最勝眼)하야: 가장 수승한 눈을 얻어서
시도일체(示導一切)하며 : 일체 중생들을 전부 인도하기를 원하며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 중생이
득무애안(得無礙眼)하야 : 걸림이 없는 눈을 얻어서
개광지장(開廣智藏)하며 : 지혜의 창고를 널리 열어서 넓게 하기를 원하며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득정육안(得淨肉眼)하야: 청정한 육안을 얻어서, 여기 최승안 무애안 다음에 육안이 나왔다. 앞으로 오안이 다 나온다.
광명감조(光明鑑照)하야: 광명으로 밝게 사무쳐서
무능폐자(無能蔽者)하며: 능히 그를 가릴 자가 없게 하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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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득정천안(得淨天眼)하야 : 청정한 천안을 얻어서
실견중생(悉見衆生)의: 중생의
생사업과(生死業果)하며: 생사 업과를 다 보기를 원하며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중생이
득정법안(得淨法眼)하야: 청정한 법의 눈을 얻어서
능수순입여래경계(能隨順入如來境界)하며 : 능히 수순해서 여래의 경계에 들어가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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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 중생이
득지혜안(得智慧眼)하야: 지혜의 눈을 얻어서
사리일체분별취착(捨離一切分別取着)하며 : 일체 분별 취착 사리하기를 원하며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 중생이
구족불안(具足佛眼)하야 : 부처의 눈을 구족해서
실능각오일체제법(悉能覺悟一切諸法)하며 : 일체 모든 법 각오하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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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성취보안(成就普眼)하야 : 널리 보는 눈을 성취해서
진제경계(盡諸境界)하야 : 모든 경계를 다해서
무소장애(無所障礙)하며: 장애가 없기를 원하며
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 일체 중생이
성취청정이치예안(成就淸淨離癡翳眼)하야 : 청정해서 텅 비어서 어리석고 가림이 없는 눈을 성취해서
요중생계(了衆生界)가 : 중생계가
공무소유(空無所有)하며 : 공무소유함을 깨닫기를 원한다. 중생계가 텅 비어서 있는 바가 없음을, 공무소유함을 알기를 원한다. 중생계가 텅 비어서 있는 바가 없는데도 우리는 오온과 육근이 나라고 한정지어 보는 습관이 견고하다. 도저히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이 어리석음이다. 어리석음의 눈을 떠나서 중생계가 공무소유함을 깨닫기를 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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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일체중생(願一切衆生)이: 일체 중생이
구족청정무장애안(具足淸淨無障礙眼)하야: 청정 무장애안을 구족해서
개득구경여래십력(皆得究竟如來十力)이니라: 구경에 여래 십력 얻기를 원할지니라.
시위보살마하살(是爲菩薩摩訶薩)의 : 이것이 보살 마하살의
보시안시(布施眼時)에 : 눈을 보시할 때에 하는
선근회향(善根廻向)이니 : 선근회향이니
위령중생(爲令衆生)으로: 중생으로 하여금
득일체지청정안고(得一切智淸淨眼故)니라: 일체지 청정안을 얻게 하기 위한 까닭이니라.
눈을 보시할 때 궁극적으로 모든 중생이 다 일체지 청정안을 얻기를 바란다. 중생을 위한 바램이다. 곁들여서 더 말씀드리면 불교의 진정한 화두는 일체 중생이다. 처음도 그렇고 끝도 그렇고 끊임없이 중생을 향해서 보살행을 하는 것이다.
보살행을 하는 것이 불교의 진정한 화두다.
이 시대에 와서는 화두가 바뀌어져야 된다. 진짜 화두로 돌아가야 한다.
불보살이 무슨 화두를 들었는가를 알아야 한다. 밑도 끝도 없고, 이미 답이 다 되어 있는데 답이 다 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답이 없는 것처럼 눈감고 아옹 하는 식으로 드는 화두는 사실 진짜 화두가 아니다.
부처님의 관심사는 처음부터 세상의 어려움이었고, 고통받는 중생들이었다.
불교의 출발이 거기부터였다. 그래서 중생이 진짜 불교의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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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늘 말한다. 이미 용성(用性)하고 있는데 견성할게 뭐 있느냐? 성품을 왜 따로 보느냐? 성품을 우리가 지금 쓰고 있다. 불성을 안쓰고는 이런 말을 할 수가 없고 이런 말을 들을 수가 없다. 그토록 보고자 하고 찾고자 하는 그 불성을 가지고 우리는 하루종일 생활해 나간다.
고무장갑을 끼었다면 하루종일 무 만지고 배추만지고 양념만지고 땔나무를 만졌다고 해도 결국 우리는 하루종일 고무장갑만을 만진 것이다. 그러면서도 무 만졌다고 하고 배추를 만졌다고 한다. 그 이치다.
내가 산천을 보고 산천이 내 눈에 다가오고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주고 받고 하는 이것은 전부 우리 마음이 하는 일이다. 고무장갑을 가지고 사물을 만지는 것과 똑같다. 저것도 나고 보는 나도 나고 보이는 대상도 나다.
손에 끼고 있는 것도 고무장갑이고 만져지는 것도 고무장갑인 것과 같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 불성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간단하다.
이미 우리는 그렇게 사용하고 있다. 마음없이 어떻게 우리가 일분일초라도 생활할 수 있겠는가? 불성없이는 일분일초도 생활할 수가 없다. 그렇게 잘 활용하고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따로 보려고 하는 것은 옛날 구시대에 어리석을 때나 하는 일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수없이 해왔는데 누구 하나 항의해 오는 사람이 없다.
앉아있기만 하지 실제로 견성에는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다.
견성에 관심 있다면 이런 소리를 더러 들을 텐데 내 말을 듣고 항의라도 해와야 할 것이 아닌가? 아니면 ‘아 맞아 바로 그건데’ 하고 깨달았던지 둘 중 하나다.
오늘 공부 여기까지 하겠다.
(박수소리)
하강례
올 때도 꽃 갈 때도 꽃
“공부 아주 잘하는 스님이다.”
하고 소개하신 큰스님의 제자스님이 살고 계신 토굴 사진을 휴대폰으로 큰스님께 보여드렸다.
“사람들이 법당에 안가고 정자 좋다고 정자에만 갑니다.”
큰스님도 언제 가서 국수를 드시겠다고 했다. 제자스님이 자신 있는 얼굴로 주변에 맛있는 국수집이 있다고 하자 큰스님은 그냥 집에서 마는 국수도 맛있다고 하셨다.
*
“입승스님, 여기 스님들 회비 받아서 내한테 강의료도 파격적으로 많이 주고 또 설이다 추석이다 생일이다 스승의 날이다 금일봉도 거금으로 해서 주고 내가 공적으로 쓰는 돈을 한 번 발표를 할까?”
중간 쉬는 시간에 큰스님이 회장스님에게 물으셨다.
“지나치게 주는 게 아닌가 하고.”
“전혀 생각도 마십시오. 여기 회비를 처음에 30만원 했는데 20만으로 감했기 때문에 1년에 40만원입니다. 회비도 적습니다.”
“그게 내 나름대로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약간 깔려있고.”
그러면 큰스님의 생신이 있는 달에 한 번 정리를 해서 대중스님께 발표를 하겠다고 회장스님이 말씀하셨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 두 가지 반응이 주로 나오는데 평소에 그런 것을 안하는 사람은 아주 기분이 상하는 경우가 많아. 어떤 사람들은 반대로 환희심을 내고.”
“여기는 다 환희심 낼 사람들 뿐입니다.”
하고 회장스님이 문득 생각난 듯이 말씀하셨다.
“화엄경 공부하러 오는 열기가 대단합니다. 한 달에 한 번이지만 쉬운 것 같아도 쉽지 않거든요.”
“쉽지 않아. 등록된 사람들이 350명 넘어.” 하고 큰스님이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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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과 회장스님이 오늘 경전에 나온 보살님들의 보시에 대해 말씀하셨다.
갈수록 너무 어려운 보시라고 말씀드리자
“현재 중생의 마음으로는 그렇지. 그런데 한 생각 일으키면 또 하게 되어 있어.”
라고 큰스님이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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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회장스님은 서울에서 오신 보살님을 큰스님께 인사시켜 드렸다. 지난 겨울 거사님과 사별을 하고 많이 힘들어 하셔서 천곡사에 내려오라고 하셔서 부처님 오신날을 함께 지내셨다고 했다. 큰스님의 비비에스 화엄경 강의를 열심히 듣고 있다고 하셨다.
“고맙습니다. 불자가 되어 갖고 화엄경 공부밖에 더 있습니까?”
하고 큰스님이 위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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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님은 젊은 날 큰스님과 홍원사 회주스님과 어느 건설회사 사장님의 병문안을 갔던 일화를 말씀하시면서 세월이 갑자기 느껴져서 눈물이 났다고 하셨다.
‘그런가 보다 하면 되지 왜 우나’ 라고 하시면서 회장스님은 몇 년 전 가을에 꽃도 잎도 다 떨어진 화분을 사왔는데 올해 천곡사에서 하늘매발톱꽃이 싱싱하고 예쁘게 꽃을 피웠다고 하셨다. 부산 내려가는 길에 창밖으로는 가도 가도 걷히지 않는 전국의 뿌연 미세먼지와 버스 실내 티비로는 계속되는 강원도 산불 뉴스 때문에 심란할 때, 그 꽃사진을 문자로 받았다. 돌아가는 길에 다시보니 <늘 미소 짓게 하는 것들 중...>이라는 글자도 꽃사진 아래 한 줄 적혀 있었다.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과 같이
가르침을 구하라 선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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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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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 장갑의 비유...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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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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