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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2009. 5.1일 근무를 일찌감치 마치고 단미, 원중이와 함께 경주를 떠난다. 서울 무학국민학교 친구들과의 월출산 등반을 제외하고는 별 예정이 없는 이번 나들이는 장장 5일간이다. 결국 강원도로 가겠다던 5일간의 여행은 예정과는 다르게 광주-영암-서울-대전-김천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번에는 관광보다는 지인들 만나기에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하였다. 근래 생활이 안팎으로 힘들었던 터라 모처럼 긴장감을 풀어보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떠난 여행이었다. 우선 5.1일 저녁에 호남의 광주로 간다.
경주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대구까지 가서 88고속도로로 바꿔타고 전남지방으로 달리다가 잠시 지리산 휴게소에 멈춘다. 길이 1차선에다가 굴곡도 심해 몹시 싫어하는 88고속도로지만 호남지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별 다른 방법이 없다.
지리산 휴게소에서 사진 촬영에 신경을 쓰지 않는 원중이를 단미가 강제로 얼굴을 돌리려고 하고 있다. 때는 철쭉이 만발하는 계절이라 전국 어디에 가도 이렇듯 철쭉이 만개해 있다.
광주에는 밤에야 도착했다. 아는 지인들이 광주시 동구에 있어 우선 동구에 있는 광주 조선대학교에 들런다. 나의 첫째 딸 강규희가 이 조선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했다. 규희는 경주여고를 나왔는데 인문계 공부를 한 터라 자연계인 약대를 진학하려다 보니 교차지원이 가능한 조선대학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규희는 졸업할 때까지 내내 장학금을 받아 어려웠던 시절 나의 주머니 사정을 많이 가볍게 해 주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조선대학은 한강 이남의 3대 사립 명문이라나.......영남의 영남대학교, 호남의 조선대학교, 부산의 동아대학교라고.
조선대학교의 저 멀리 펼쳐져 있는 건물의 외양은 그 모습이 아주 특이하다. 유럽풍 건물이라고 한다.
이후에 우리는 숙소를 잡고 지인들을 만나서 광주의 번화가인 충장로 다운타운 지역으로 들어간다.
5.2일 새벽에 자고있는 원중이를 광주의 지인에게 맡겨 놓고 차를 달려 나주를 지나 영암으로 들어와 월출에서 서울의 무학동 친구들(좌로부터 전현수, 나, 김단미, 전종성, 문성호, 장병선, 반영환)을 만난다. 그들과 이날 월출을 산행하기로 약속을 했었다.
천황사 위에 있는 월출산의 명물, 구름다리. 한때는 대둔, 강천의 구름다리와 함께 3대 아슬아슬다리였지만 이제는 전국에 많이 생겼다. 대표적인 것이 청량산 구름다리이다.
나의 산 친구 전종성. 나를 서울 무학동 친구들과의 산행에 연계시켜준 친구가 전종성이다. 그는 서울의 성동고와 동국대학을 나온 친구로 나의 서울 무학국민학교 동기이다. 그는 최근에 산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이제 산행 경력에 막 불을 지피고 있는 중이었다. 내 경험으로 봐서 그의 산에 대한 애정과 집착(?)은 앞으로 몇 년은 갈 것 같다. 아마 그의 산에 대한 집착은 한국 100명산을 거의 섭렵하고 나서야 그 불이 잔잔해질 것 같다.
산행 도중 우스개하는 친구들. 이번 산행에서 반영환은 단연 물건(?)이다. 그는 쉴새 없는 개그와 재빠른 동작으로 친구들을 즐겁게 했는데 무슨 연유인지 쎈놈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었다. 지금 친구들 사진을 촬영해 준다고 계속 넋두리하는 반영환이다.
사자봉을 돌아 이제 월출산 정상이 가까워졌다.
뒤돌아보니 지나온 암봉들이다. 월출은 한국 3대 암산(설악, 주왕, 월출)답게 바위들의 위용이 대단하다.
드디어 월출산 정상. 여기서 우리는 하산하지 않고 월출 종주에 들어간다. 우리는 월출의 구정봉을 넘어 미왕재를 거쳐 도갑사로 하산할 것이다. 그리고는 오늘 저녁에 바로 서울 덕양으로 올라간다. 무학동 친구들이 덕양의 이정 친구집에서 기다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월출 종주 길. 뒤편 우측의 모자가 얹힌 듯한 바위가 구정봉이다. 그리고 그 뒤의 큰 바위군을 넘어서면 미왕재로 나아가는 길이 나온다.
종주길은 편평한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만은 않다. 오르락 내리락 굴곡이 심한 편이다.
우리는 좀 전에 저 바위 사이길로 내려왔다.
구정봉이 점점 가까워진다. 구정봉으로 가려면 거대 남근석과 여성 성기를 닮은 베틀굴을 반드시 지나야 한다.
베틀굴을 앞에다 두고 한탄(?)하는 장병선과 궁금하게 들여다 보는 전종성
이제 구정봉. 이런 우물(井)이 아홉개가 있다고 해서 구정봉이란다. 실제로 세어보니 10개도 넘는다. 그래도 구정봉이라고 하자. 이름이 구정봉이니...........구멍 좋다. 여기저기서 뻐껌하게 뚫려 있다.
월출의 바위들
이제 저 뒷 봉우리만 넘어서면 멀리 미왕재가 보일 것이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영암들과 월출의 바위 무더기
급하게 달리다 뒤돌아다 보니 친구들이 미왕재로 내려오고 있다.
드디어 미왕재. 우리는 여기서 도갑사로 하산할 것이다.
도갑사로 내려가는 길. 오늘 산행에는 내내 단미가 선두에 서고 있다.
아름다운 도갑사 근처의 개울
드디어 도갑사. 고풍이 깃든 옛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새로 막 지어댄 불사들로 상업적 냄새가 난다. 하지만 크게 관여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사찰보다는 산을 보러 온 것이다.
도갑사 정문 일주문
도갑사 앞에서 묵을 쳐 내어 막걸리에 걸쳐 먹는다. 이제 서울로 가야지. 그런데 남부 지방 일부에 폭우가 쏟아진다고 한다. 서둘러야지. 친구들과의 약속만 아니었다면 홍도나 완도로 갔을텐데.........다음을 기약하자.
덕양 화정에서 무학동 친구들과 술을 실컷 먹고 이정이가 잡아다 주는 방에 들어가 꽥! 고꾸라진다. 아침에 깨어보니 해장국 먹자고 친구들이 기다린다. 어쨌든 속은 풀어야지.
얼큰한 동태탕이다. 속이 흐물흐물 풀리기 시작한다. 코에 진땀이 나고..............
강원도 평창으로 가려다가 차에 진동을 느끼고 차를 수리하기 위하여 수색의 단미 오빠 집으로 향한다. 일요일이라 부품점이 쉬는 바람에 차 수리가 원만하지 못하다. 가양대교를 건너면서 한 커트한다.
나의 차는 엔진의 헤드부분에 손상이 생겼다. 헤드에 바람이 새는 바람에 주행 중에 진동이 심하게 일어나 가속력이 약해지고 차 운전이 경쾌하지 못한 결함이 생겼다. 자세한 검사를 받기 위해서는 내일이라야 가능하다는데.......하는 수 없이 단미 오빠집에서 하루밤을 지내기로 했다. 단미 오빠와 올케가 내는 점심을 먹기 위해서 일산의 신토마을에 갔는데.............
이 집은 완전히 오리 한마당이다. 오리에 관련된 모든 요리들이 나오는데 우선 나온 것이 생오리구이, 그리고 다음이 양념오리구이였다.
그 다음에는 오리 수육이다. 맛있는 소스가 발라져 입맛에 찰 졌다.
열심히 드시는 단미 오빠와 올케. 두분이 다 남해 여수 출신이라 음식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 우리 경상도의 거칠은 입맛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 이외에도 오리죽과 여러가지가 나오고 마지막에 나온 것이 오리탕이었다. 이때쯤 되면 배가 불러 양도 적게 나온다. 점심부터 포식하니 무척 배가 불러 배를 두드리며 나온다.
배가 불러 끙끙대는 우리들을 단미 오빠는 가만두지 않았다. 저녁에는 강서 화곡에 가서 맛있는 회를 먹자고 했다. 회의 본고장에서 온 우리에게 회를 먹자고 한다. 좋지! 먹는 거라면 결코 뒤지지 않으니까.....ㅋㅋㅋ
광어와 우륵이 왕창 나왔다. 광어는 크게 썰어서 씹히는 맛이 좋았다. 특히 이 집에는 매운탕 맛이 일품이었다. 먹보 원중이는 한참 신이 났다. 쉴 새 없이 먹어대는 놈이고 보니 안전히 원중이의 전성기였다.
5.3일 우리는 강남으로 나와 나의 경주고 동기이자 죽마고우인 김병은을 서초구 그의 사무실에서 만난다. 김병은은 서울에서 치타에셑이라는 금융회사를 차려 선물을 취급하고 있는데, 이번의 이 사업은 예전 포항의 큰손이었다가 크게 망했던 이 친구의 재기판이었다. 금융으로 끝나지 않고 대형회사에서 퇴직한 전문가들과 결탁하여 금융, 식품, 건설까지 손대는 회사를 현재 구성해 가고 있었다. 서울에 왔는데 왜 처음 시작하는 친구의 회사를 방문하지 않느냐고 닥달을 해서 할 수 없이 친구를 만나고 내려가려고 서초에 들렀다.
우리는 강원도로 가려다가 영동고속도로가 막히는 바람에 대전으로 방향을 바꾼다. 에라! 우리에게 목적지가 어딨냐? 편하게 자고 맛있게 먹고 지인을 만나는 즐거움만 있으면 어디인들 어떠랴? 우리는 대전으로 와서 유성에 모텔을 잡고, 옛날 강원도 철원에서 군생활할 때 절친했던 조종복씨를 만난다. 그는 KT에서 퇴직하고 고물상을 차려 고철 취급으로 돈을 좀 번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가 연락하자 마자 달려와 대전의 고급 식당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조종복씨. 그도 많이 늙었다. 그는 내가 군생활했던 강원도 철원 문혜리의 제5군단 포병직할대대인 98포병대대(3사단 지원 포대)의 브라보포대의 전우이다. 나보다 좀 고참이었고 나보다 1살 연배였는데 교회에 다니는 바람에 나하고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일을 대단히 잘 해서 포대의 모든 일들은 그의 차지였고 간부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심지어 전봇대를 맨손으로 세우는 괴력을 발휘하기도 했는데............그가 못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사병들 머리 깎는 것부터 시작하여 옷 다림질, 목수, 조적 세면일들을 망라하여 거의 만능이었다. 교회에서는 오르간을 연주하기도 했는데 한때 이름을 드날렸던 포성중창단의 오르간 연주자였다. 지금은 대전 모 교회의 장로님이라는데...........그도 나름대로는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의 부인도 같이 나왔는데 그의 부인 정경은씨는 군생활할 당시에 편지로 연애를 시작했는데 중간중간 휴가 때에 내가 만나서 안부를 전해주던 사이였다.
우리는 대전의 고급식당인 <노송>에서 최고급 쇠고기 <명품>을 먹었다. 위 사진에는 고기가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아주 품질이 좋은 양질의 고기였다.
대전 유성의 밤거리. 나도 술에 취하고 거리도 술에 취한 것 같다.
대전에 하루밤 보내고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김천으로 와 바로 직지사로 들어왔다. 입구에 <동국제일가람황악산문>이라고 쓰여있다. 조선 최고의 대 사찰 황악산파.....라는 얘기겠지.
직지사에 들어가면서 포즈를 취한 단미와 원중이. 원중이의 큰 앞이빨은 멀리서도 표시난다. 사실 저 큰 앞이빨 두개는 우리 姜氏문중의 혈통에서 내려오는 유전적 모양새다. 姜가들은 거의 가 저런 큰 앞이빨을 가지고 있다.
직지사 내의 약수
직지사는 규모 면에서 한국의 어느 사찰보다도 큰 사찰이었다. 둘러보는 데에만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이제 사찰 입구. 황악산 직지사
며칠전 석가탄신일이라 아직 그 행사의 흔적이 있다. 원중이가 대웅전 앞에서 배를 불룩이며 서 있다.
보물 606호인 직지사 대웅전 앞 삼층석탑. 이 탑은 통일신라 말기(9세기)의 석탑이다. 비로전 앞 삼층석탑과 함께 원래는 경북 문경군 산북면 서중리의 도천사터에 쓰러져 있던 것인데, 1974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탑들은 대체로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삼층석탑에서 보이는 이중기단이 아니라 단층기단인 것이 특이하다.
직지사 대웅전이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건물이다. 직지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조선 전기에는 대웅대광명전이란 건물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선조 35년(1602)에 대웅전을 새로 지었다. 이후 인조 27년(1649)에 중영이 있었고 영조 11년(1735)에 다시 중창하였다. 건물의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이며 지붕형식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직지사 대웅전 내에는 보물 670호인 직지사 대웅전 삼존불탱화가 있는데 대웅전 수미단 위에 있는 석가모니불, 약사불, 아미타불이 있는데, 불상 뒷벽에는 각 부처들의 설법 장면을 그린 석가모니후불탱, 약사후불탱, 아미타후불탱 등 3폭의 불화가 걸려 있다. 비단 바탕에 그린 이 불화들은 모두 길이 6m가 넘는 거작으로 영조 20년에 직지사의 세관스님을 비롯한 16명의 화승들이 그린 것이다.
직지사 대웅전 앞에 부처님 오신날 행사 때 걸렸던 등불들이 아직도 그대로 있다.
대웅전 좌측으로 나아가다 보면 비로전이 나온다. 불교 사찰의 차분하게 정돈된 환경이 나의 마음을 가라 앉힌다.
보물 607호인 직지사 비로전 앞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이다. 대웅전 앞에 서 있는 2기의 삼층석탑과 함께 문경군 산북면 서중리 도천사터에 있던 3기의 석탑 중 하나이다. 이 탑은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들과 그 크기와 양식, 세부가 거의 같은데 이런 같은 형태의 탑들이 3기가 나란히 있는 것은 드문 일이다. 또 이 탑은 삼층석탑이면서도 이중기단이 아닌 단층기단 석탑이다.
직지사 뒤로 보이는 김천의 진산 황악산(1,111m). 백두대간 상에 있는 명산으로 백두대간은 이 산을 지나 추풍령으로 떨어졌다가 한동안 낮은 형세로 나아가다가 속리산에서부터 솟구친다.
직지사 바로 앞에 있는 백수문학관.
백수 정완영은 한국의 60년대를 대표하는 시조시인으로, 투철한 자연 관조와 전통적 서정세계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을 <현대문학>, <시인> 등의 문예지를 통해 잇달아 발표해 한국 현대시조의 중흥기를 여는 데 크게 이바지한 시인이다. 호는 백수(白水)로, 경북 금릉 출신이다. 1946년 향리에서 동인지 <오동(梧桐)>을 발간하며 문필활동을 시작하여, 1960년 <국제신보> 신춘문예에 <해바라기>가 당선되고, 같은 해 <현대문학>에 시조 <애모(愛慕)>, <어제 오늘>, <강> 등이 추천되었다. 1962년 <현대문학>의 추천 완료를 거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조국>이 당선되어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작품활동 외에 한국시조시인협회 부회장(1965)과 한국문인협회 이사(1976),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회장(1979),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장(1992), 육당문학상 운영위원장, 한국시조시인협회 상임고문(1994), 온겨레시조짓기추진회 회장(1996) 등을 역임하는 등 한국의 시조문학 발전을 위한 사회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1960년대 신춘문예 등단 이후 거의 매일 일기 형식의 글을 써오고 있으며, 80세를 넘긴 나이에도 시조집 《이승의 등불》(2001)을 새로 발간해 깨달음에 이른 선사(禪師)의 오도송(悟道頌)과도 같은 정화된 시어의 세계를 선보였다.
저서에 시조집 <채춘보>, <묵로도>, <실일의 명>, <나비야 청산가자>, <엄마 목소리>, <세월이 무엇입니까>, <이승의 등불> 등이 있고, 시선집으로는 <산이 나를 따라와서>, <꽃가지를 흔들듯이>, <연과 바람>, <난보다 푸른 돌>, <오동잎 그늘에 서서> 등이 있다. 이 밖에 <시조창작법>, <고시조감상>, <시조산책> 등의 이론서와 산문집 <다홍치마에 씨 받아라>, <차 한 잔의 갈증> 등이 있다.
김천에만 이렇게 유명한 문인이 나온 것은 아니다. 우리 고향 경주에도 저 유명한 김동리와 박목월이 있다. 유치환도 한동안 경주에 계셨고.............
현대시조의 선구자로 중흥기를 열었던 한국 시조계의 거봉, 백수 정완영
백수 정완영의 흉상.
이제 경주로 가자. 고향 떠난지 5일째 되니 집에 별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긴 여행에서도 아직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