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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1920~1930년대 초반 일제의 민족분열정책과 친일세력의 동향 / 일제의 친일파 육성과 반민족 세력
어등산나무꾼 추천 0 조회 176 15.12.26 11: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3장 1920~1930년대 초반 일제의 민족분열정책과 친일세력의 동향

일제의 문화정치와 민족분열정책

친일단체의 조직과 활동



1. 일제의 문화정치와 민족분열정책


3·1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무력 대신 조선인을 회유하고 동화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는 통치방법과 지배정책의 수정을 통해 3·1운동으로 야기된 식민통치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3·1운동 직후 부임한 조선총독 재등실齋藤實은 ‘신시정방침’을 통해 문화정치의 취지와 목적을 “문화적 제도의 혁신에 의해 조선인을 유도하고 이끌어서 그들의 행복과 이익의 증진을 꾀하고 장차 문화의 발달과 민력의 충실에 맞추어 정치상·사회상의 대우에 있어서도 내지인과 동일하게 취급할 수 있는 궁극의 목적을 달성할 것” 註1)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총독직제 개정, 헌병경찰제 폐지, 언론·집회·출판 등의 제한 완화, 지방자치제 실시를 통한 조선인의 정치 참여, 관제 개혁, 산업 개발, 조선의 문화와 관습 존중 등 새로운 정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위기국면을 모면하기 위한 회유책일 뿐 조선지배의 근본 목표가 수정되었다거나 식민통치가 약화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문화정치’는 좀더 세련된 방법으로 조선 지배체제를 더욱 강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총독의 직제 개정을 통해 총독을 “육해군 대장으로 보임한다”는 조항을 없애고 문관도 총독에 임명될 수 있게 하였으나,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단 한명의 문관도 조선총독에 임명하지 않았다.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를 채택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1910년대의 헌병이 문화정치시기 보통경찰로 그대로 옮겨 앉은 것에 불과했고, 오히려 군과 경찰이 훨씬 증가하였다. 1918년 751개소였던 경찰관서는 1920년에 2,176개소로 증가했고, 경찰인원 5,400명에서 1 8,400명으로 증가했으며, 예산도 800만원에서 2,400만원으로 크게 증가했다. 조선인 헌병보조원도 1920년대에 들어 더욱 크게 증가하였다.

또한 언론·집회·출판 등의 제한을 완화하여 『조선일보』1920.3.5, 『동아일보』1920.4.1, 『시대일보』1924.3.31 등의 신문과 『개벽』1920.6.25, 『신생활』1922.3.11 등의 잡지 발간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그 목적은 조선인의 언론·출판 활동을 보장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전 검열을 철저히 하면서 조선어 신문·잡지 발행을 통해 조선인들의 민심 동향을 주시하고 그 저변의 흐름을 미리 알아내는데 더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나아가 일제는 1925년 치안유지법을 공포하여 반일운동과 사회주의운동 등은 물론 식민통치에 반하거나 저항하는 어떠한 결사나 운동을 철저히 탄압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놓았다.

일제는 또한 지방제도 개편을 통해 조선인을 정치에 참여시켜 지방자치에 대한 훈련을 한다고 선전하였다. 실제로 일제는 지방제도 개편을 통해 행정기관에 부협의회·면협의회·도평의회·학교평의회를 두고 제한선거 혹은 간접선거로서 의원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이 기관들은 의결기관이 아닌 자문기관으로서 정책을 결정하는데 아무런 권한이 없었고, 또한 선거권을 철저히 제한함으로써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친일조선인을 각 지역의 지배층으로 포섭하는 방책에 지나지 않았다. 즉 일제가 실시한 지방자치제는 민도의 차이를 지방자체제의 기준으로 삼아 註2) 일본인이

 

많이 살고 있는 부와 지정면은 제한선거를 실시하고, 조선인이 많이 거주하는 도와 일반면에서는 임명제를 채택했으며, 또한 의장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는 등의 차별적이고 불완전한 지방자치제에 불과했다.

문화정치는 겉으로는 조선인을 위한 정책을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식민통치체제를 더욱 강화하는데 목적을 둔 기만적인 정치였다. 그 기만성은 일제가 문화정치를 내걸면서 민족분열정책에 가장 역점을 두었다는 점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일제는 반일역량을 약화시키기 위해 한편으로는 친일파를 대량 양성하고 한편으로는 상층부 민족주의자들을 포섭하여 민족해방운동전선을 분열시키고자 하였다. 재등실은 ‘조선 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으로서 친일파 양성책, 민족주의세력의 포섭과 개량화, 종교단체의 분열과 어용화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조선인 관리를 재조사·검토해서 양부良否를 가려내어 상벌을 분명히 하고 관기를 숙정해서 일본에 절대 충성하는 자로서 관리를 굳힌다.

② 조선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분명히 가려내기 위해 몸과 마음을 걸고 일을 해낼 핵심적 친일인물을 골라 귀족·양반·부호·실업가·교육가·종교가 등에 침투시켜서 얼마간의 편의와 원조를 주어 친일단체를 만들게 한다.

③ 각종 종교단체도 중앙집권화해서 그 최고지도자에 친일파를 앉히고 일본인 고문을 붙여 어용화시킨다.

④ 조선문제 해결의 사활은 친일인물을 많이 얻는 데에 있음으로 친일 민간인에게 편의와 원조를 주어 수재교육의 이름 아래 많은 친일 지식인을 긴 안목으로 키운다.

⑤ 양반·유생 가운데 직업이 없는 자에게 생활방도를 주는 대가로 이들을 온갖 선전과 민정 염탐에 이용한다.

⑥ 조선인 부호에게는 노동쟁의·소작쟁의를 통해서 노동자·농민의 대립을 인식시키기도 하고, 또 일본 자본을 도입시켜 그것과의 맥락을 통해서 매판화시켜 일본쪽에 끌어들인다.

⑦ 농민을 통제·조종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유지가 이끄는 친일단체 교풍회·진흥회를 두게 하고 이에 국유림의 일부를 불하해 주는 한편 입회권入會權을 주어 회유·이용한다. 註3)



이러한 민족분열정책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직업적 친일파가 급속도로 양성되고 각 지역에 친일단체가 설치되어 친일여론이 확산되는가 하면 자산가와 노동자, 지주와 소작농 등 계급·계층간의 분열을 조장하여 민족해방운동전선을 약화시켰다.

또한 문화정치의 공간 내에서 민족운동을 개량주의운동으로 유도하였으며, 동요하는 민족주의자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여 대일 타협화 여론에 앞장서게 하였다. 일제는 이들에게 조선인에게도 경제·문화 등의 분야에 참여할 기회를 부여하는 회유정책을 실시하면서, 또 한편으로 당장은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공공연히 선전했다. 조선인의 민족성 자체가 독립할 능력이 없고 조선의 역사는 식민지의 역사뿐이며, 나아가 조선에 독립을 부여한다고 해도 조선인은 그것을 유지해나갈 실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일제는 조선이 독립하려면 충분한 실력을 양성하고 문화 역시 충분히 발전한 뒤에야 가능하다고 설득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제는 당시 민족주의자들이 벌이고 있던 교육·문화운동도 완전히 없애버리기보다는 이를 적절히 활용했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3·1운동 이후 실력양성, 청년의 자각, 민족정신 앙양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육진흥과 문화운동을 민족독립의 우선 과제로 꼽고 있던 민족주의자들에게 일제의 민족분열정책은 상당한 영향을 주었고, 이 중 일부는 일제에 타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다. 특히 3·1운동 이후 동요하던 민족주의자들은 기만적인 문화정치에 현혹되어 민족주의의 변질인 민족개량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주어진 문화통치의 공간에서 일제와 투쟁을 벌이기보다는 적극적인 타협을 통해 실력을 양성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또한 교육과 산업을 진흥해 일제로부터 식민통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얻고, 최종적으로 자치권을 획득한다는 생각이었다.

민족개량주의자들은 당시 총독부가 문화운동의 목표로 설정하고 지원했던 실력양성·민족성 개조·참정권 획득 청원 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더욱이 일제가 문화정치를 실시하면서 부분적으로 허용했던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와 회사령의 철폐 등은 이들을 현혹시켜 일제와 정면대결을 피하고 타협하는 계기로 작용했고, 1920년대 초반부터 등장한 많은 합법적 문화운동단체들은 저항보다는 대일 타협화 여론을 조성하는데 앞장섰다. 일제가 정치단체를 빼놓고 각종 사회·문화단체를 허용한 것도 반일운동을 진정시키고 대일 타협화 여론을 확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註4)


내선일체를 강요한 최린·최남선·이광수·김활란


또한 이들이 일제의 회유에 쉽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3·1운동 실패와 서구 열강에 대한 기대 좌절, 반일독립운동의 전략과 전술을 둘러싼 의견 대립 등으로 끊임없이 동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의 희망이 좌절된 상태에서 이들 민족주의세력은 타협과 저항의 갈림길에서 동요할 수밖에 없었고, 일제는 그 틈을 이용해 문화정치를 내걸고 이들을 회유내지는 포섭했다. 특히 민족주의세력 중에서도 일제가 적극적으로 포섭의 대상으로 삼은 자들은 이광수·최남선·최린 등 영향력 있는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일제는 이들을 이용하여 민족개량주의를 유포하고 대일 타협화 여론을 조성하였다. 언론을 통해 발표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1922·「민족적 경륜」1924, 최남선 「조선민시론」 등은 민족개량주의 논리로서 일제가 내건 문화운동의 논리자치, 실력양성, 민족성 개량 등를 그대로 반영한 내용이었고, 특히 이광수는 앞장서서 일제의 문화운동 방책을 제시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최린을 통해 당시 교세가 가장 컸던 천도교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민족개량주의를 선전하였다.

이렇게 문화정치는 3·1운동 당시 표출되었던 반일투쟁 역량을 약화시키기 위해 친일세력을 대량 양성하고 교묘히 민족내부의 분열을 조장하는 민족분열정책이 핵심이었다. 포섭된 민족주의자들을 이용한 대일 타협화 여론의 조성은 민족 내부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켰다.


2. 친일단체의 조직과 활동


재등실 총독은 부임하자마자 광범위한 친일인물의 확보와 활용 방안을 담은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러한 구상은 친일세력의 육성을 통한 분할통치와 민족분열 정책 없이는 조선지배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 주요 내용은 각계각층의 친일인물을 포섭하여 편의와 원조를 주고, 이들을 앞세워 친일여론 조성, 친일단체 조직, 계층 간의 분열 조장, 민족주의자의 정보 수집과 회유 등을 은밀히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친일인물들에게 편의와 원조를 제공하고 각계각층에 침투시켜 각종 친일단체를 조직케 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3·1운동 이후 각종 친일단체가 속속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국민협회와 같은 전국적인 정치단체를 비롯해서 특정 계층과 특수 업무를 위한 단체, 지역 단체 등 각계각층의 많은 친일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이들 친일단체들은 겉으로는 자발적 민간조직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대부분 일제의 지원과 협조로 조직·운영되는 어용단체들이었다. 그 목적 또한 겉으로는 일선융화·공존공영 등을 내걸고 있으나, 실은 친일여론을 확산시키고 민족분열을 획책하는데 있었다.

 

1920년대에 들어 다수의 친일단체들이 나타나게 된 것은 이러한 일제의 지배정책 때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친일세력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주요 인물의 상당수는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민감한 지주·자본가·지식인층 등 조선인 상층부들이었다. 이들은 이전부터 일본의 조선 지배를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체제협력을 통해 자신들의 권익을 보장받고자 했다. 그러나 1910년대 무단통치 하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권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거의 없었다. 일제는 무단통치를 통해 조선인의 집회·결사를 비롯한 정치·사회·경제적 활동을 봉쇄한데다 의견을 개진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3·1운동과 일제 통치방식의 변화는 이들이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들은 3·1운동을 반대하는 정치활동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이어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집회·결사의 자유를 허용하고 친일단체 조직에 적극적으로 나서자, 능동적으로 일제의 정책에 호응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와 권익을 대변하고 세력화 할 수 있는 친일단체 조직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1920년대에 활동했던 주요 친일단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국민협회

국민협회國民協會는 1920년 1월에 조직된 단체로, ‘국민정신 발양’·‘사상 선도’·‘입헌사상의 계몽과 민권신장’·‘자치정신 배양’을 강령으로 내건 대표적인 신일본주의 단체다. 1940년대 초까지 존속했다. 여기서 ‘신일본주의’란 “한일합병으로 신일본이 태어났기 때문에 이제는 일본을 위한 조선도 아니고 조선을 위한 일본도 아니며, 신일본은 양 민족의 공동책임과 의무로서 건설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며, 실질적으로는 조선인이 일본인으로 완전히 동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신본일본주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 민족의 합체와 동화공존은 정말로 하늘의 뜻이고 시세에 순응하는 것이다. 일선 민족이 도리에 따라 일선병합 즉 양 민족의 합체라는 사실을 존중함으로써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한다. 우리는 이러한 취지를 신일본주의라고 부르고 다음과 같은 주장을 분명히 밝힌다. 조선 민족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이기 때문에 합리적이고 합법적 노력으로 민권의 신장을 도모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국가적 사상을 품거나 혹은 조선의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대의를 어그러트리는 명분에 반할 뿐만 아니라, 1천 7백만의 복지를 저해하는 폭거일 뿐이다. 조선 민족은 국가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고 정당한 노력을 통해 생활을 확충하여 문명국민으로서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 한다. 註5)



국민협회의 모태는 1919년 8월에 결성된 협성구락부協成俱樂部였다. 민원식閔元植·이동우李東雨·김환金丸·김태영金泰榮·김명준金明濬·황석교黃錫翹·김석태金錫泰·김형복金亨復·민석현閔奭鉉 등이 중심이 된 협성구락부는 3·1운동의 원인 제거, 민심 수습, 조선민족의 번영과 행복 도모 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를 위해 협성구락부는 설립 직후인 1919년 10월 민원식의 이름으로 ‘신일본주의’를 선언하였다. 협성구락부는 이러한 ‘신일본주의’의 선전을 위해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고, 민원식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관계 유력자를 만나 여론을 조성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1월 협성구락부는 국민협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정세 변화에 대응하여 구락부보다 규모가 큰 본격적인 정치단체로 개편하여 주의·주장을 관철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총독부의 지도와 지원이 큰 몫을 했다. 개편 이후 국민협회는 ‘신일본주의’를 보다 더 선명히 하고, 강령으로 ‘시대의 추세에 따른 국민일치 정신의 발양’·‘국민의 자각 호소와 선도’·‘참정권 행사 촉진’·‘지방자치 실시 촉진’·‘교육의 발달과 보급 도모’·‘산업의 진흥과 부원富源의 개발 도모’·‘노자勞資의 조화 도모’·‘납세의무의 이행’ 등을 내걸었다. 결의사항은 다음과 같다.



一. 온건한 사상과 실질質實한 기풍을 함육양성하야 입헌국민된 자각을 환기함에 노력할 일

一. 조선주민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도록 중앙정부에 건백하고 제국의회에 청원하야 국민된 권리를 획득함을 기할 일

一. 지방자치제도의 실시를 촉진하도록 운동할 일

一. 오인의 실생활상 필수한 제사항에 대하야 넓히 실제적 지도유액指導誘掖을 할 일 註6)



출범 당시 회장은 민원식, 총무는 김명준·정병조鄭丙朝·황석교黃錫翹·권태전, 평의원은 김환·이겸제李謙濟·한기준韓基準·이동우·김우식金禹植·장영한張永翰·이영석李永錫·문창규文昌奎·김형복金亨復·양건식梁建植·강성구康星九·백대진白大鎭·박정래朴廷來·이교헌李敎憲·이수룡李秀龍 등이었다. 이후 김명준·윤갑병尹甲炳·신석린申錫麟·이병렬李炳烈 등이 회장을 맡았으며, 김갑순金甲淳·엄준원嚴俊源·고희준高羲駿·정규환鄭圭煥·전부일全富一·박춘금朴春琴·이병학李炳學·신석우申錫雨·한영원韓永源·박봉주朴鳳柱 등이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 이들은 대부분 한말 엘리트 출신, 현직 관료, 지역 대지주 등 조선인 유력자들이었다. 각계각층의 유력자들이 망라되면서 그 세도 크게 확장되어, 출범 당시 100여 명이던 회원이 1921년 7월경에는 6,000여 명, 1923년에는 1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핵심적인 활동은 참정권 청원운동이었다. 창립 직후인 1920년 2월에 100여 명의 연서를 받아 조선에 중의원 선거법을 시행할 것을 요망하는 참정권 청원을 제42회 제국의회에 처음으로 제출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여 일본인으로서의 권리를 점차 향상시켜야 한다는 명목 하에 매년 일본의회에 참정권 청원서를 냈다. 참정권 청원운동의 주요 논리는 참정권 실현을 통한 ‘내선인 차별 철폐’와 ‘조선독립불가론’이었다. 1920년 7월에는 644명의 연서를 받아 일본의회에 참정권을 청원했고, 1921년 1월에는 일본 정부에 “중의원 의원선거법을 조선에 시행한다는 칙령을 발포할 것”을 요망하는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했다.

또한 1921년 2월에는 3,000명이 연서한 청원서를 제44회 제국의회에 세 번째로 제출했으며, 중의원에서 이를 의제로 채택하여 ‘조선에서 의원을 선출할 필요가 있다’고 공식 인정하기도 했다. 특히 민원식이 1921년 2월 16일에 피살되자 바로 다음날 중의원에서 만장일치로 청원서를 의제로 채택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어 1921년 3월에 12,600명의 연서를 얻어 참정권 요구의 건백서를 조선총독부를 경유하여 내각총리대신 가등우삼랑加藤友三郞에게 제출했으며, 1922년 1월에는 회장 김명준 이하 약 8,000명의 연서를 받아 건백서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하여 내각에 내도록 청원하였다.

청원운동은 193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1938년 3월에는 조선 각도의 도회 의원 29명과 국민협회 간부 13명의 찬성·조인을 받은 건백서를 박춘금을 통해 의회에 제출하고 근위독마近衛篤? 수상 등 각 방면에 건백서 전달을 시도하기도 했다. 1939년 1월에도 국민협회 대표를 동경에 파견, 수옥영부守屋榮夫가 박춘금을 대신하여 의회에서 청원 내용을 설명하기도 했다. 註7) 그러나 일제는 민도民度의 차이를 들어 계속 참정권 실시를 미루었고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45년 4월 11일 조선인과 대만인에게 중의원 선거·피선거권을 부여한다는 정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실제로 식민통치가 끝날 때까지 조선인들의 참정권은 실현되지 않았다.

국민협회가 일관되게 참정권을 요구한 것은 조선인들도 일본국민이라는 자각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국민협회사』에 따르면 조선인들이 병합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일본에 반감을 갖고 부화뇌동하는 데는 일본국민이라는 자각이 없기 때문이며, 조선통치의 근본 방향도 조선인이 일본국민이라는 자각을 갖도록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 최선의 방책이 참정권 부여라는 것이다.



생각건대 일·한 양국의 합일은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귀결로 일반 조선인도 양해하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내심 일본의 치하에 있다는 것을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아 자칫하면 반국가적 언동을 일부러 일삼는 자가 있다. 특히 나이 어린 학생이 이에 뇌동하는 자가 있다는 것은 실로 태평한 세상의 불상사이다. 이는 필경 일본국민이라는 자각이 없기 때문이다. … 국민이라는 자각은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생겨난다. 그런데 조선인은 국민의 중요 권리인 참정권이 없다. 즉 제국의회가 있고 내지에 거주하는 인민은 선거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의원을 선출하여 국정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럼에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선거법이 시행되지 않고 의원을 선출할 수 없다. 조선에 관한 사항일지라도 모두 내지 선출의 의원에 의해 결정된다. 다른 말로 한다면 일본제국의 정치는 내지인의 정치로 조선인은 전혀 참가할 수 없다. 우리는 조선인이 국민이라는 자각을 갖지 못하는 원인은 바로 이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참정권 부여가 가장 급무임과 동시에 하루라도 빨리 부여할 문제이다. 註8)


이와 함께 국민협회는 각 지부 활동과 강연 등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켜 나가는 한편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선전 활동에도 열을 올렸다. 1923년 5월에는 평남지부 총회를 개최하고 참정권과 보통교육 보급, 노자 협조 등을 주장하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1923년 6월에는 황주·사리원·신천·안악 등지에서 관민 유지를 모아 강연회를 개최하고, 조선민족이 일본 통치를 받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과 “독립의 허명虛名을 득得한”다 해도 국력이 따르지 못하면 “독립의 유해무익함”이 크고 “속히 참정권을 획득하야 일시동인의 성조聖詔를 받들어 내지인과 동일한 권리를 향유하는 것이 조선민족의 책임”이라는 취지의 강연을 하였다. 또한 황해도 송화에서도 “일본의 조선통치는 간섭주의 보호정책이다. 조선은 식민지가 아니고, 내지의 연장이며 통치의 근본 의의는 일시동인一視同仁에 있다”·“조선은 병합 전에 비해 장족의 발전”을 했다는 취지로 강연을 하였다.

또한 1927년 11월에는 국민협회 회장 김명준이 갑자구락부 등 경성지역 7개 친일단체와 평양의 대동동지회의 간부를 초청하여 시국간담회를 개최하고 ‘참정권’·‘사상 선도’·‘금융조합개혁’·‘내선공학內鮮共學’ 문제 등을 결의하였다. 1929년 6월에는 전중田中 내각에서 척식성拓殖省을 설치하려는데 대해 국민협회는 “조선은 식민지가 아니다”라며 다른 단체와 함께 운동을 일으켜 척무성拓務省으로 이름을 바꾸도록 했다. 1930년 1월 ‘전선대표자대회’에 150명이 모여 참정권과 지방자치제 등을 주장하고 계급투쟁을 경계하는 선언문과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또한 국민협회는 기관지 『시사평론』을 비롯해서 『매일신보』·『시사신문』·『조선사상통신』 등의 매체를 통해 그들의 주장과 논리를 확산시키는데 주력했다. 주요 논객은 김상회金尙會·김환·고희준高羲駿 등이었다. 주요 글은 김상회의 「조선통치에 관한 사견」 註9)·「문화정치의 근본정신」 註10)·

 



국민협회 기관지 『시사평론』의 주요 논객 김상회의 글


「여사如斯히 하여 아사회我社會를 부활하라」 註11), 김환의 「조선시국사관」, 註12) 고희준의 「여余의 신국가관」, 註13) 김의용金義用의 「참정권에 대한 오인의 의식」 註14)·「정치적 신앙의 파악」 註15), 김아연金阿然의 「조선에 참정권을 부여하라」 등이다.이 글들은 국민협회 세력의 참정권 청원운동의 논리를 비롯한 현실인식을 대변한 것으로서 국민협회의 친일논리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글들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참정권 청원운동 논리는 일제 지배체제에 절대적으로 순응하고 의존해야 한다는 현실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약육강식의 세계질서 속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당연한 현상이며, 현실적으로 조선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일본에 의존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 이들의 현실인식이었다. 또한 국민협회 세력은 조선인 개개인의 행복과 생활향상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강한 국가에 의존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합병을 숙명적인 상황으로만 인식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합병을 강한 국가의 국민으로 살 수 있는 기회로, 일시동인의 원칙에 따라 양 민족이 공동 번영하는 계기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들이 제기한 문제는 통치방식이었다. 합병이 조선인에게 큰 혜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치방식이 잘못되어 일시동인의 원칙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3·1운동이 발생한 것도 이러한 잘못된 통치방식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일제가 통치방식을 문화정치로 바꾸고 그 틀 속에서 ‘내지연장주의’를 표방하자, 이들은 합병의 근본 취지를 살리고 통치방식을 개선하기 위한 최선의 방책으로서 참정권 부여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당연히 독립불능론으로 귀결되었다. 독립이 불가하고 무의미하다는 주장은 참정권 청원의 근거 이유로서 대표적 논객인 김상회·김환·고희준 등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부분이었다. 이들은 3·1운동 주도세력들이 승전국이 패전국의 권리를 뺏기 위한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워 무지몽매한 인민을 동원하는 것은 무고한 희생만을 치를 뿐이며, 세계정세가 그들이 인식하는 것처럼 이상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세계개조론을 식민지 해방의 논리가 아닌 강대국 내부의 정치질서 변화 논리로 인식하고 오히려 조선인의 정치적 지위 향상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또한 독립운동은 조선민족의 정치적 또는 사회적 생활개선의 요구를 충족시킬 유일 또는 최선의 방법도 아니며 행복과 광영을 가져다주는 길도 아니기 때문에, 독립운동보다는 현재의 위치에서 진보 발전을 위한 합리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독립이 된다 하더라도 현재의 상황으로는 스스로 독립국가를 유지할 능력도 없어 오히려 유해무익하다고 주장하였다. 유해무익한 독립보다는 참정권을 속히 획득하여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향유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였다.

이들은 또한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갖기 위해서는 참정권만이 유일한 선택이라며, 또 다른 대안인 자치제에 대해서는 확고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자치라 할지라도 사실상 독립국가에 준하는 실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독립이 불가능하면 자치도 불가능하다며, 자치제 주장은 실상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더구나 조선은 자치제를 소화할 능력도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그들의 계급적 기반과 현실상황에 대한 판단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국민협회 세력은 대개 자산가·지주층으로서 경제적 부는 가지고 있지만 정치적 입지와 기반은 약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조선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힘든 그들로서는 자치제는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이들이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며 자신들의 계급적 성장을 안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적 지위를 확보하는 최선의 길은 참정권 획득이었다.

국민협회는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1920년대 참정권 청원운동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1930년대 들어 조선총독부의 친일단체에 대한 정책 변화, 만성적 재정적자, 정세 변화에 따른 영향력 감소 등으로 점차 세력이 약화되면서 명맥만을 유지하는 단체로 전락하였다.

2. 동민회

동민회同民會는 1924년 4월 조선인과 일본인 유력자들이 내선융화를 표방하며 결성한 친일단체였다. 1940년대 초까지 존속했지만 註16) 활동이 활발했던 시기는 1920년대였다. 동민회 창립식은 4월 15일 경성공회당에서 아시아 민족의 결합, 내선융화, 사상선도 등을 창립 목적으로 내걸고 280명의 정·관계, 재계 등 유력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창립취지는 “안으로는 내선융화가 정착되지 않고 밖으로는 과격한 사상이 유입되어, 조선인과 일본인이 서로 대립하고 민심이 피폐해지고 있는 현실에 즈음하여 서로 단결하고 근면 성실한 습관을 키워 국가의 백년대계를 세우자는 것” 註17)이었다.

동민회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일본 재계의 거물들이었다. 이들은 관동대지진 이후 반일감정이 격화되고 여기에 사회주의 사상의 확산으로 통치체제가 불안해지자, 조선인 유력자들과 연합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지배질서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 동민회를 창립하게 된 것이다. 조선인 유력자 또한 대개 대지주·자산가 등 재계 인물이 주축을 이루었다. 출범 당시의 조선인 임원들을 살펴보면 이재극李載克·이완용李完用·박영효朴泳孝·송병준宋秉畯·유맹劉猛·조진태趙鎭泰·신석린申錫麟·이병렬李炳烈·방규환方奎煥·이범승李範昇·유전劉銓·조병상曺秉相·원덕상元悳常·이진호李軫鎬·전성욱全聖旭·이승현李升鉉·한상룡韓相龍·김영한金榮漢·장도張燾·신응희申應熙·장두현張斗鉉·박승직朴承稷·김한목金漢睦·민대식閔大植·김한규金漢奎·유일선柳一宣·유해종劉海鐘·채기두蔡基斗·고희준高羲駿·어윤적魚允迪·현동익玄東翊·박동규朴東奎·오태환吳台煥·이원석李元錫 등 대다수가 재계의 거물들이었다. 재계 인물이 대거 참여한 이유는 사회주의운동의 확산과 급증하는 농민·노동운동 등에 대처하고 총독부의 산업정책에 적극 호응하기 위해서는 재계의 공동대응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 대응이란 교화와 사상 선도였다.

동민회는 강령을 통해서도 내선융화를 중심으로 사회 교화와 사상 선도에 나설 것을 분명히 강조하였다. 註18) 또한 창립 당시 막후에서 큰 역할을 했던 고도평삼랑高島平三郞은 『동민』 창간호에 실린 「동민회의 근본정신」에서 사상 선도의 중요성을 피력하면서 나아가 동민회는 국가를 주체로 한 단체이며 그 근본정신은 국가에 최선을 다하는 국민정신임을 강조했다. 註19) 그는 일본의 황민회皇民會 간부로서 조선과 일본에서 사상 선도에 관한 많은 강연을 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취지와 강령을 바탕으로 동민회는 강연회·강습회·좌담회·전람회·활동사진회의 개최, 회보 및 기타 간행물의 발행, ‘내선만지內鮮滿支 사정’의 소개와 선전, 국방사상 및 방공방로防共防露 지식의 철저한 보급, 미풍양속·사회개선에 관한 방법의 강구 실시, 관혼상제 기타 생활개선에 관한 지도 장려, 내선일체에 관한 공로 또는 업적 있는 자의 표창, 본회와 취지를 함께 하는 각종단체와의 연락협조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일본정부의 ‘척식성 관제안’에 대한 반대활동을 전개하였다.

동민회는 국민협회·대정친목회·교육협성회·갑자구락부 등의 단체와 함께 ‘척식성조선제외동맹’을 결성하고 “척식성이 아니라 척무성이라는 명칭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을 척식성에 속하게 하여 식민지와 동일한 취급을 하는 것은 병합의 정신에 반한다”는 이유였다. 또한 동민회는 선도 대상을 청소년에게까지 확대하여 1930년대 후반까지 매년 강의록을 발행하여 배포하였다. 이 강의록은 보통학교 5~6학년용 강의록과 고등보통학교용 강의록 등 두 종류였는데, 보통학교 5~6학년용 강의록은 보통학교 4학년까지 수료하고 가정이나 기타 사정 때문에 5~6학년에 진급할 수 없는 학생을 위한 것이었고, 고등보통학교용 강의록은 보통학교 교육을 수료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학생을 위한 것이었다. 1926년부터 1938년 현재까지 배포된 부수는 총 162, 210권에 달했다.

이와 함께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각종 강연회와 행사 등을 통해 부인들의 시국인식 강화와 총후보국 실천에 주력하였다. 1938년 4~5월에는 ‘시국의 중대성 인식과 총후의 적성을 실현하자’는 취지로 경성의 각 학교에서 부인들을 대상으로 ‘총후보국 부인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이어 8월에는 휘문중학교에서 총독부의 지원 하에 ‘동민부인 하계 대강연회’를 열었다. 강사로는 신석린·한규복韓圭復·김복인金福仁·이대영李大永·이숙종李淑鍾·김대우金大羽 등이 참여하였다. 또한 8월 말부터 9월 말까지 ‘경제전 강조 주간’에 발맞추어 가정부인들에게 물자절약과 근검저축을 권장하는 ‘경제전 강조 강연회’를 각 학교에서 열었다. 동원된 청강자는 총 3,850명이었으며, 강사는 한규복·고영균高永均·조병렬趙炳烈·장홍식張弘植·박노일朴魯一·남궁영南宮營·양재창梁在昶·황우찬黃祐璨 등이었다. 이 외에도 소규모 가정강습회 개최, 국방헌금 모금, ‘일본 부인의 부도婦道’·‘비상시국과 생활’ 같은 팜플릿 제작 등 총동원체제에 적극 호응하는 각종 활동을 벌였다.

동민회는 또한 기관지 『동민』을 통해 일선융화를 비롯한 자신들의 주의 주장을 선전·홍보했다. 주요 글로는 최정호崔定浩의 「내선융화론」, 註20)

 

이승현의 「일선융화는 실행방법 여하에 있음」, 註21) 이상하李相夏의 「송파씨松波氏의 내선융화요체를 읽고서」, 註22) 이태성李泰聖의 「내선융화를 포와布?에 선전하라」, 註23) 최헌식崔憲軾의 「재등실 총독을 맞이하며」, 註24) 조병상의 「신일본의 20년을 맞이하는 사이에」, 註25) 이동화李東華의 「내지와 조선인간이 결속한 미담」, 註26) 박영철朴榮喆의 「내지에 여행다녀와서」 註27) 등이다.

대부분 내선융화를 강조한 글들로서 필자들이 주장하는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최정호는 “내선융화는 시정의 근본적 개혁과 함께 먼저 일본인의 반성과 실행을 통해 조선인의 의혹을 해소하고 속마음을 헤아려 장단점을 서로 보완해야 하며, 상호간의 이해와 온정이 있어야 비로소 그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승현은 “많은 주장과 광범한 선전에도 불구하고 내선융화가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은 구체적 실행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혼인의 공통에 의한 민족·가정적 결합, 학교 공학에 의한 정신·지식적 결합, 사업의 공영에 의한 재정·경제적 결합” 등을 제시했다.

또한 최헌식은 “일한병합의 정신은 동양평화를 위해, 아니 양 민족의 행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이 정신을 망각하여 감정에 흐르고 편견에 사로잡히는 것은 정말로 불행이다. 제일선에 서있는 우리는 어디까지나 어려움을 헤치고 내선 양 민족의 융합과 행복을 도모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특히 조병상은 일본과 조선과의 관계는 다른 열강과 같이 본국과 식민지 관계가 아닌 동양평화를 위한 일한병합 정신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조선인의 진정한 민족애는 일본 그 자체를 조선인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註28)

3. 대정친목회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는 1916년 11월 조중응의 주창으로 조선인 전직 관료·귀족·대지주·실업가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조선인들의 단체활동이 거의 불가능했던 1910년대에 조선인 단체로는 종교단체 이외에 대정실업친목회가 거의 유일했다. 설립 당시 ‘국가경축일과 경성번영에 관한 일, 경제 및 근검저축 및 식산흥업에 관한 일, 법령을 주지시키고 납세의무·위생근행衛生勤行에 관한 일, 예의질서 공사도덕에 관한 일, 풍속교정 및 내선인 융합 일치에 관한 일’ 등을 연구사항으로 두긴 했으나 친목사교단체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주요 인물은 회장 조중응 외에 예종석芮宗錫·유해종劉海鍾·홍충현洪忠鉉·최강崔岡·김린金麟·방태영方台榮·사일환史一煥·안순환安淳煥·한상룡韓相龍·박제빈朴齊斌·백완혁白完爀·김중환金重煥·김용제金鎔濟·정구창鄭求昌·주성근朱性根·김한규金漢奎·유병필劉秉珌·김성기金性璂·민유식閔裕植·안상호安商浩·선우일鮮于日·박승기朴承夔·이강혁李康爀·엄주익嚴柱益·최진崔鎭·윤치호尹致昊·백형수白瀅洙 등이다. 송병준宋秉畯도 깊숙이 관여했으나 임원직을 맡지는 않았다.

대정친목회는 조중응의 사망 등으로 명맥만 유지하다가 1920년대 초반 활동방향과 조직을 새롭게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1921년 1월 주요 간부들이 모여 앞으로의 발전방향과 활동방침을 논의한 결과, 조직의 발전과 내선융화의 실천을 위해서 그동안 조선인만의 단체에서 벗어나 일본인도 회원으로 가입시키고 주요 인물은 고문으로 둔다는 결정을 했다. 강령도 새롭게 채택하여 “실력양성을 주창하고 내선인의 융화를 도모하여 동양 전민족의 번영과 강녕을 기함”을 목적으로 내걸고, “내선인이 상호 친목하야 덕업을 상려相勵하고 환난을 상구相救할 것, 산업발달 증식에 노력하야 생활을 안고安固 건전케 할 것, 교육보급에 노력하고 문화향상에 공헌할 것” 등을 내걸었다. 이에 대해 『매일신보』는 사설을 통해 대정친목회가 내선융화의 측면에서 진보를 이루었다고 평가했다. 조선의 처지와 실력을 진정으로 이해하려고 하고 있으며, 내선융화를 지금까지 일본인들이 주창한 것과는 달리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에게 제창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임원진도 새롭게 정비하였다. 조선인 임원은 다음과 같다.



회장 : 민영기閔泳綺 부회장 : 조진태趙鎭泰

고문 : 이완용·민영휘閔泳徽·이윤용李允用

이사 : 사일환·주성근朱性根·최강·백형수白瀅洙·홍은주洪殷柱·유해종·김용태金溶泰·유문환劉文煥·방태영·장홍식張弘植·이강혁李康爀·권병하權丙夏·전성욱全聖旭,

평의원 : 백완혁·조대호趙大鎬·엄주익嚴柱益·윤치호·조병택趙秉澤·홍충현·김한규·장도張燾·유병필·안순환·석진형石鎭衡·안영기安永基·원덕상元德常·최사영崔思永·한상룡韓龍植·고윤묵高允默·김동완金東完·한익교韓翼敎·김용집金用集·백시용白時鏞·고응원高應源·백윤수白潤洙·천영기千英基·신승균申昇均·김성기金性璂·박승기朴承夔·김영두金永斗·김진옥金鎭玉·구자욱具滋旭·김문환金文煥



하지만 대정친목회는 회관 설립 추진이 재정 문제로 중단되고 회장의 진퇴 문제 등 내부 갈등을 겪으면서 활동이 크게 부진하게 되었다. 만주동포 구제책 외에는 특별한 대외 활동이 없었다. 조직을 쇄신하기 위해 1922년 11월 사단법인으로 변경하기도 했으나 그 효과는 크지 않았다. 이후 1929년 국민협회·동민회·교육협성회·갑자구락부 등과 함께 일본정부의 ‘척식성 관제안’ 반대운동을 벌이기도 했으나 두드러진 활동 없이 명맥만을 유지하는 단체로 전락하였다. 인적 구성으로 보면 가장 대표적인 친일단체였으나, 조직적인 단체 활동 보다는 회원간의 친목 도모와 정관계 유력자와의 사교에 중점을 둔 단체였다.

4. 갑자구락부

갑자구락부甲子俱樂部는 1924년 8월 조선인과 일본인의 합작으로 조직된 정치운동단체였다. 창립 동기는 1924년 6월에 경성에서 개최된 ‘전선공직자연합간담회’ 결의사항인 참정권 청원 등을 진정하기 위해 동경에 갔던 경성상업회의소의 도변정일랑渡邊定一郞 등 3명이 귀환한 뒤, 앞으로 정치현안에 대해 연구하고 건의할 상설 운동단체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따라 경성 거주 공직자와 시민 유지 약 40명으로 정치결사인 갑자구락부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갑자구락부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은 1923년 10월 경성에서 열린 시민대회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당시 시민대회는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정부의 재정 긴축에 반대하는 집회로서 강점 이후 최초의 정치적 집회였다. 또 그 결의사항을 진정하고자 동경에 진정위원을 파견하기도 했다.

창립 목적은 조선 통치와 관련하여 관민 공동의 책임을 자각하고, 나아가 조선에서의 시무時務를 조사·연구하여 이를 총독부에 건의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창립선언서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강점 초기에는 총독정치에 의존했지만, 정세가 바뀌고 민간의 자각 또한 높아졌기 때문에 총독정치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註29) 하지만 갑자구락부의 정치적 입장은 조선 내 일본인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갑자구락부가 중점을 둔 참정권 청원운동도 국민협회의 활동과 상당 부분 중복되었으나 조선 내 일본인들의 이해를 더욱 적극적으로 대변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즉 이들의 참정권 청원 활동은 ‘내선의 상호이해와 접촉’을 도모하여 조선의 독립운동을 마비시키는 ‘사상의 안전판’을 만들고, 또한 조선에 사는 일본인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이 주장한 참정권은 보통선거가 아니라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경성·부산·대구·평양에서만 이루어지고 유권자의 범위를 극히 제한하는 선거를 실시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자치론에 대해서도 조선자치가 독립의 전제가 된다는 이유에서 강력하게 반대했다. 어디까지나 내지연장주의에 입각하여 일본 국회에 조선 내 일본인이 중심이 되고 극소수의 조선인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갑자구락부는 각종 정치현안에 대해 조사하고 이를 진정, 또는 청원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창립 직후인 1924년 9월에는 총독부 예산 절감 방안에 대해 “내지인 관리의 가봉加俸을 삭제할 것, 도청·군아郡衙를 폐합할 것, 중추원을 폐지할 것, 지방자치제를 시행할 것, 관리의 여비를 감액할 것, 홍삼사업을 개방하고 경쟁입찰을 통해 민간에게 불하할 것, 보류 광구鑛口를 개방하여 대자본가를 유치할 것, 영림창을 폐지하고 사업을 민간에게 이전할 것, 사회교화사업을 해당 회사로 이전할 것, 잡지 『조선』을 폐간할 것, 관리 수를 감소할 것” 등 11개 항목의 진언서進言書를 총독부에 제출했다.

1924년 11월에는 송달섭宋達燮·조병상·예종석 등 조선인 3명과 일본인 13명이 참석한 가운데 총회를 개최하고 ‘조선철도의 철도성 이관 반대, 귀족원령 및 중의원선거법의 개정, 조선의 체신사무의 체신성 이관’ 등을 결의하고 총독부에 진정했다. 1925년 2월과 1926년 1월에는 일본의회에 귀족원령 및 중의원선거법 개정을 청원했다.

이어 1926년 6월에는 임시대회를 개최하여 참정권 청원과 관련하여 3개항을 총독부에 진언하였다. 註30) 그 내용은 “① 귀족원령을 개정하여 조선귀족에게 내지 화족華族과 동일한 권리를 부여할 것. 조선 재주자 중 내지와 동일한 자격에 따라 귀족원 의원 칙선의 길을 열어줄 것, ② 중의원의원선거법 중에 경성부·부산부·대구부·평양부를 더하고, 의원 수는 내지인의 비례에 따라 이를 정할 것, 별도로 피선거의 자격 및 선거방법 등은 조선의 사정에 접합한 법규를 정할 것, ③ 조선의 구관舊慣에 준거한 지방부락의 자치제도를 정하여 공동 작업을 장려하고 공존공영의 기초를 확립함과 동시에 산업을 발전시켜 국정 참여의 의의를 자각시킬 것” 등이다.

또한 1930년 2월에는 광주학생운동의 원인과 대책을 비롯한 교육개혁 결의안을 내놓았다. 학생사건의 원인을 ‘교육에 대한 당국자의 통치방침 결함’·‘한글신문의 정책적 선전’·‘교육의 소질 부족’ 등으로 보고, 그 대책으로 “당국은 일정한 교육방침에 의거하여 학교당국자에게 학칙을 엄수하도록 하고, 만약 위반자가 생겼을 때에는 그 직원과 학생을 불문하고 지극히 엄정하고 명확한 방법에 따라 곧바로 처단할 필요가 있다”고 결의하였다. 이와함께 교육개혁책으로 “현재 중등학교 교육을 축소하고, 국민의 실생활에 직접 필요한 실업교육 또는 직업교육의 충실을 도모하여 지방청년의 도시 집중을 방어함과 동시에 국민생활의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갑자구락부는 만주사변과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에 대해서 중국을 비난하고 국제연맹 탈퇴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시국대회·결의대회 등을 개최하는가 하면 총독부와 일본정부에 대해서도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을 진정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갑자구락부의 활동은 일본 국내보다 더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여론을 환기시키는데 큰 효과를 거두었다. 또한 중일전쟁 이후 중국을 지원하는 영국에 대해 시국간담회를 개최하는 등 배영排英 분위기 조성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1939년 11월에는 ‘조선민사령’ 개정을 통한 창씨개명에 대해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갑자구락부는 1930년대 중반 이후 국내외 정세의 변화와 이에 따른 총독부의 친일단체 정책 변화, 조선인들의 외면 등으로 회원 수가 급격히 감소하는 등 점차 퇴조하였다. 남차랑南次郞 총독 부임 이후 세력 만회에 노력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5. 각파유지연맹

각파유지연맹各派有志聯盟은 1924년 3월에 결성된 연합단체로서 관동대지진 이후 민심 수습과 민족운동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결성되었다. 참여단체는 국민협회·조선소작인상조회朝鮮小作人相助會·유민회維民會·동광회同光會·노농회勞農會·조선경제회朝鮮經濟會·교풍회矯風會·노동상애회勞動相愛會·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동민회同民會·유도진흥회儒道振興會·청림교靑林敎 등 12개 단체였다. 처음 발기인회에는 국민협회·조선소작인상조회·유민회·동광회·노농회·조선경제회 등 6개 단체만이 참여했으나, 이후 나머지 6개 단체가 참여하면서 각파유지연맹이 출범하게 된 것이다.

1924년 1월에 열린 발기인회에서 각 단체들은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사상선도에 관한 실행조건’을 채택하고 “관민일치의 노력으로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독립사상과 공산주의로 빚어진 과격사상에 대한 선도방법을 마련해서 시국을 바로잡는데 이바지 하겠다”고 선언하고 다음과 같은 실행조건을 제시했다. ① 각파 및 유지의 연명 선언서를 발표한다. ② 각 단체 및 유지연합의 대강연회를 수시로 개최한다. ③ 내선인 융화에 필요한 연극 및 음악을 장려한다. ④ 내선인 관민 유지 간친회를 수시로 개최한다. ⑤ 일본 내지에 각파 유력자를 수시로 파견해서 내선인 사이의 각종 오해를 없앤다.

 

발기인은 각 단체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박병철朴炳哲, 유민회, 박해원朴海遠, 조선경제회, 박해묵朴海默, 조선소작인상조회, 박춘금朴春琴, 노동상애회, 이풍재李豊載, 유민회, 이병렬李炳烈, 국민협회, 이동우李東雨, 국민협회, 이동혁李東爀, 조선소작인상조회, 이창환李昌煥, 조선소작인상조회, 이승현조선경제회, 이용한李容漢, 조선소작인상조회, 이계호李啓浩, 조선소작인상조회, 이희간李喜侃, 국광회, 유병룡柳秉龍, 유민회, 이영석李永錫, 국민협회, 유문환柳文煥, 교풍회, 유병필柳秉珌, 교풍회, 나홍석羅弘錫, 조선소작인상조회, 우성현禹成鉉, 국민협회, 고희준국민협회, 정규환鄭圭煥, 국광회, 정진홍鄭鎭弘, 유도진흥회, 채기두蔡基斗, 조선소작인상조회, 김환국민협회, 김우식金禹植, 국민협회, 김명준金明濬, 국민협회, 김상설金相卨, 청림교, 김태훈金泰勳, 유민회, 강인우姜麟祐, 국민협회, 김중환교풍회, 민갑식閔甲植, 유민회, 신석린동민회, 예종석대정친목회, 천영기千英基, 대정친목회 등이다.이어 1924년 3월에 열린 창립총회에서 “천박한 사상이 스며들어오는 것을 막고, 내선 두 민족의 융합에 힘쓰며 일한병합의 대원칙을 본받자”는 요지의 선언문과 함께, “① 관민일치와 시정개선, ② 대동단결과 사상선도, ③ 노자勞資협조와 생활안정“ 등의 3대 강령을 채택했다.

그러나 각파유지연맹에 참여한 단체가 모두 친일성향이 뚜렷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경제회는 각파유지연맹에 대한 여론의 비난이 거세지자 각파유지연맹에 참가한 일이 없다고 물러났으며 유민회의 경우도 일제에 타협적이기는 하나 소극적이었다. 그럼에도 언론들은 각파유지연맹은 친일단체들이 단합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참여한 대가로 일제로부터 국유미간지·삼림·광산 등의 각종 이권을 얻는 것이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각파유지연맹은 결성 초기부터 여론의 거센 비난을 받았으며 여기에 『동아일보』 폭행사건이 발생하면서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 때문에 일부 간부가 사퇴하기도 했다. 조선노농총동맹·조선청년총동맹 등은 각파유지연맹을 분쇄할 것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처음부터 안팎으로 어려움에 직면한 각파유지연맹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도 못한 채 곧바로 쇠퇴했으며, 몇 년 되지 않아 명맥만 유지하는 단체로 전락하였다.


6. 시국대동단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은 1925년 1월 각파유지연맹의 일부 세력이 보천교와 합작하여 조직한 단체였다. 내선융화를 표방하며 “내선인의 정신적 결합을 견고케 할 것, 대동단결하여 문화의 향상을 기할 것” 등을 강령으로 내걸었다. 중심인물은 고희준·채기두蔡基斗 등이었다.

시국대동단의 활동은 내선융화의 취지를 일반인에게 알리고 친일여론을 확산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 창립 직후부터 15명의 집행위원을 선정하고 선전대 8대를 조직하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선전강연을 실시하였다. 이들이 지방 순회강연에 역점을 둔 것은 각파유지연맹이 경성에서 선전 활동을 하다가 일반인의 배척을 당하면서 효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연사는 고희준·채기두·임경호林敬鎬·이계호李啓浩·나홍석羅弘錫·박병철朴炳哲·지동섭池東?·이창환李昌煥·이동혁李東爀·이풍재李豊載·오태환吳台煥·김상찬金尙燦 등이었다. 이들은 1월 10일부터 1월 말까지 전국을 돌아다니며 내선융화와 대동단결의 취지로 강연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의도와는 달리 강연회는 대중들의 외면을 받았다. 곳곳에서 봉변을 당하기 일쑤였고 일반 보천교도들로부터도 원성을 들었다. 군산 강연에서는 “내선인의 모든 오해와 감정을 초월하야 형식적 융화는 버리고 정신적 결합을 하여 공존공영하자”는 연사의 말에 청중들이 분개하여 큰 소란이 일어나 경관이 개입하는 일까지 벌어졌으며, 포항 강연에서도 청중들의 반발로 강연이 중지되기까지 하였다. 또한 각 지역에서 강연을 방해하는 일이 속출했고, 조선청년총동맹과 조선노농총동맹 등의 단체를 중심으로 시국대동단에 반대하는 조직적인 활동도 나타났다. 여기에 “직업적 부일도당附日徒黨인 각파유지연맹과 미신의 장발요적長髮妖賊 보천교도가 서로 결부되야 악마단을 조직했다”는 등의 시국대동단을 비난하는 여론이 비등했다.

또한 채기두 등이 각파유지연맹 내에서 자금을 유용하고 비밀리에 보천교와의 합동을 추진한 일 등으로 자체 내의 반목도 심했다. 결국 시국대동단도 각파유지연맹과 마찬가지로 조직이 오래 가지 못했다.

7. 대동동지회

대동동지회大同同志會는 1920년 10월에 평양에서 조직된 대표적인 지역 친일단체였다. 평안남도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단체로서 중심인물은 회장 선우순鮮于金筍을 비롯해 김흥건全興鍵·나일봉羅一鳳 등이다. 1920년대 전반기에는 “경성에는 국민협회, 평양에는 대동동지회”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표적인 친일단체로 알려졌다. 기관지 『공영共榮』의 발간과 강연회 등을 통해 일선융화를 표방하며 3·1운동 이후 조선의 사상계를 선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회장인 선우순은 1921년 중추원 참의가 된 인물로 1920년대부터 철저한 내선일체를 강조한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민족과 야마토민족은 이해관계가 공통되기 때문에 조선과 일본은 함께 나가야 하며, 조선인은 일본인을 믿고 일본은 조선인을 향상시켜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내선일체는 영국 대 스코틀랜드·웨일즈와 같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재등실 총독과도 자주 만났으며 일본 재계의 거물들에 조선인의 사상을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자금 원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1921년 6월에는 대동동지회 회장 자격으로 약 1개월간 동경에 체류하며 수상 등 일본정부의 관료들을 만나 대동동지회 활동에 대한 협조를 구하기도 했다.

대동동지회는 1921년 8월부터 9월까지 약 한 달간 평안남도의 21개 지역에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연사는 회장 선우순을 비롯해 나일봉·김흥건 등이며, 주제는 ‘군축회의와 관련한 태평양회의에 대하여’·‘국제공법으로부터 본 태평양회의’ 등 국제정세에 관한 내용이었다. 또한 1921년 9월부터 기관지인 월간 『공영』을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공영』은 평양 최초의 조선인 경영 잡지이다.

그러나 대동동지회는 조선인 내부에서 적극적인 지지를 끌어내는데 실패하여 1920년대 중반 이후 점차 퇴조하기 시작했고, 1933년 선우순이 사망한 뒤에는 명맥만을 유지하는 단체로 전락하였다. 대동동지회의 활동이 미약하자, 평양에서는 1935년 2월 대동동지회로부터 분립한 동유회同維會가 조직되었다. 동유회는 대아시아주의를 표방한 단체로서 설립 당시 회원은 조선인 64명이었다.


〈박 수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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