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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에세이집 [즐거운 농락]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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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농락]
허봉조 에세이집 / 시와산문사(2012.09.25) / 값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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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농락
허봉조
살생을 하였습니다. 쌀통뚜껑을 여는 순간 내 살갗에 돋은 소름은 아마도 놈들의 수보다 몇 십, 몇 백 곱절은 더 되었을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살생을 하였습니다. 못 다한 죽음들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놈들을 쫓는 나의 눈에 살기殺氣가 가득했습니다. 나의 퍼런 서슬에 놈들은 활개를 치다말고 곡류의 낱알들 사이로 일제히 잠적을 해버렸습니다.
평소 하얀 쌀 위에 까만 콩 한 둘 섞여 적당히 자주 빛으로 물든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쌀밥을 즐기던 나는 몇 개월 전부터 푸석푸석하여 윤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잡곡밥을 먹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십 평생 잔병치레를 거의 할 줄 모르던 나의 건강에 약간의 적신호가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직장생활을 통해 매 2년마다 건강검진을 받아오다가, 지난번 검진 때는 귀찮기도 하고 나의 건강을 과신過信한 나머지 슬그머니 해를 넘기고 말았던 것이지요. 결국 4년 만에 건강검진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혈당수치가 정상치를 넘어 ‘2차 검진대상’이라는 경고문을 달고 성적표가 나왔지 않겠습니까. 때마침 증상이 좀 이상하기도 하였습니다. 잠을 자다가도 물을 마시기 위해 일어나야 했으며, 소변을 보기위해 잠자리에서 일어나기는 10년 전 임신기간 이후 거의 처음이었거든요.
시어머니께서 10여 년 전 당뇨와 그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셨다고 하니, 집안에 비상이 걸린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TV나 신문에서만 보고 듣던 당뇨, 남의 일인 줄만 알았던 당뇨가 아닙니까. 검사결과가 잘못 되었거나, 갑작스런 증상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얄팍한 속내를 숨기고 2차 검진을 받았습니다. 기대와는 달리, 보란 듯이 1차 검진 때와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부랴부랴 병원을 찾고, 관련 책자를 사서 읽으며, 인터넷을 통해 각종 경험담들을 섭렵하는 등 나도 어느덧 당뇨환자의 대열에 끼어 당뇨인에게 필수과정인 식이요법과 운동요법을 겸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주식主食부터 바꿔야 했습니다. 흰쌀만이 주인공이던 쌀통에는 어느덧 씨눈 달린 곡식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백미에다 찹쌀, 현미, 율무, 녹두, 수수 등 그야말로 각양각색으로 주인이 바뀌게 된 것이었습니다. 날씨가 더워지지 시작하면서 쌀통주위에 작은 파리 같은 곤충이 한 둘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그때 손바닥을 딱딱 마주쳐가면서 잡아버렸지요.
그러다가 일주일 집을 비우고 돌아왔던 날, 놈들은 아주 새까맣게 쌀통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무 놀라 쌀통 뚜껑을 열어놓고 마구 팔을 휘저었습니다. 평화스럽게 곡식을 갉아먹던 놈들 또한 갑작스런 소란에 놀라 황급히 낱알들의 한 가운데로 숨어 나의 눈을 감쪽같이 속이게 되면서부터 놈들과 나 사이의 전쟁에 불이 당겨진 것이었습니다.
나는 한 마리도 놓칠 수 없다는 심사로 청소를 하다가도, 신문을 읽다가도, TV를 보다가도 순간순간 쌀통 앞에 엎드려 보초를 서게 되었습니다. 곡류를 짓밟고 활보하던 놈들은 영락없이 멱살을 잡혀 끌려 나왔습니다. 그 뿐 아니었습니다. 내 손아귀에서 눈을 감지 않고 꼼지락거리며 발버둥을 치는 놈에게는 가차없이 더 센 힘이 가해졌습니다. 놈들은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다. 검은 껍질과 허연 내장이 전부일 뿐이었지요.
좁고 깊은 쌀통의 곡식들을 모두 넓고도 낮은 모양의 용기로 옮겼습니다. 놈들을 보다 쉽게 밖으로 끌어내기 위한 유인책이었지요. 죽은 듯 엎드려 있던 놈들은 나의 뜻대로 살금살금 외출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놈들 또한 만만하지 않아, 인기척이 들리면 그 자리에서 좁쌀만 한 곡식 모양으로 바짝 옹크리곤 하여 나의 칼날을 뭉개뜨리곤 하였습니다. 보아하니 놈들은 여러 가지로 혼합된 곡식들 중에서도 가장 비싸고 야무지고 색깔이 선명한 녹두만을 갉아먹고 사는 놈들이었습니다. 괘씸한 생각에 빨간 플라스틱 쌀통을 몇 번이고 세척을 하였습니다. 놈들의 씨를 말려야겠기에 고압의 물세례를 퍼부으며 더욱 세차게 헹구어 냈습니다.
하루를 그렇게 씨름을 하다 저녁이 되자, 발버둥치는 놈들이 측은하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놈들을 죽이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는 것일까? 놈들과 나의 악연惡緣에 머리가 어지럽기도 하고, 어쩌면 내 건강을 지키지 못한 분풀이로 놈들을 하나, 둘, 셋 숫자를 세어가면서 죽이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나에게 조금 해(害)가 된다하여 이렇게 살생을 저질러도 되는 것일까? 좁쌀 같은 놈들 앞에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게 되다니, 갈수록 생각은 새끼줄 꼬듯 꼬이기만 하여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혼합된 곡식을 모두 버리고 말 것인지, 녹두만 제거할 것인지, 물에 들어가면 둥둥 떠오르는 손상된 녹두만 거르고 밥을 지을 것인지.
20킬로그램이 넘는 곡식을 모두 버리기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지배를 하여 차마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녹두만을 골라낸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지요. 결국 내키지는 않았지만 놈들에게 상해를 입은 녹두만을 버리고 밥을 짓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행여 끝까지 도망을 가지 못하고 함께 밥솥으로 들어가게 될 놈들이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가족들에게 미안한 노릇입니다만…….
또 다시 일주일 집을 비우고 돌아왔을 때, 몇 남지 않았던 놈들은 탈바꿈을 했는지 제법 날갯짓을 하는 놈들까지 식구를 불려 놓았습니다. 다시금 열이 오르기 시작했지만 나의 손으로 또 놈들을 죽게 하기는 마음이 편하질 않아, 낱알들과 함께 놈들을 까불어대기 시작했습니다. 혼절을 하였음인지 까불고 난 뒤의 키에는 축축 늘어진 놈들의 흔적이 보였고, 나는 신이 나서 더욱 높이 까불어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놈들도 더 이상 살아남을 재간이 없을 것이라 믿으며, 햇볕이 잘 드는 베란다의 한쪽에 임시로 보관을 해 두었습니다.
일주일은 한줄기 태풍같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챙긴 것이 놈들의 안부였다고나 할까요. 내리쬐는 햇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놈들은 나를 비웃듯 꼬물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뜨거운 맛을 모르는 놈들을 얼려버리리라 마음을 먹고 남은 곡식들을 죄다 냉장고에 밀어 넣고 와 버렸습니다.
나의 손에 꼼짝없이 으스러지는 놈들이 자신보다 열 배는 더 크고 단단한 녹두를 날카로운 드릴로 뚫어놓은 듯 정교하게 구멍을 내다니, 밥과 연관만 짓지 않았다면 놈들의 재주는 경탄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합니다. 그렇게 몇 주간을 두고 무아지경에 빠져 보기는 참 오랜만의 일인 것 같았습니다. 오직 한 마음으로 놈들과 전쟁을 벌이는 사이, 주중행사로 토요일마다 체크를 해오던 혈당은 어느덧 정상으로 들어서 있었습니다. 놈들의 출현으로 인해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놈들의 죽음 앞에 마음이 숙연해지고, 한번쯤 신명이 나기도 하고……. 결국 놈들에게 즐거운 농락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는 주말에는 제발 놈들을 만나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 이산가족의 휴가계획은 뒷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달콤한 땀방울
허봉조
유례없는 폭염과 열대야가 계속되던 7월 중순, ‘낙동강도보순례 행사’에 참가하게 되었다. 낙동강의 발원지인 강원도 태백 황지에서 강과 바다가 손을 맞잡는 부산 을숙도 하구언까지, 11박 12일간의 대장정. 모 사단법인과 민간단체가 공동주관하는 행사로, 내가 근무하는 직장에서는 첫 이틀간은 대여섯 명이 함께 참가를 하고, 다음날부터는 릴레이식으로 돌아가며 하루씩 걷기로 하였다.
멀고 가까움을 떠나 걷기를 위한 행사에 참가해보기는 처음이었던 만큼, 망설임 또한 없지 않았다. 2008년 7월 15일 오후 2시. 황지에서 점심을 먹고, 발대식과 함께 다짐의 힘찬 주먹을 들어올렸다. 펄럭이는 깃발을 앞세우고 하천변을 따라 출발. 순례단원은 20대부터 50대 사이의 남녀노소가 고루 분포되었으며, 그 중에는 초등학생도 끼여 있어 불안해하던 나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태백의 거리에는 벌개미취로 보이는 보라색의 키 작은 꽃들이 무리를 이루어 눈길을 끌었다. 아니, 어쩌면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한 쑥부쟁이인지도 모른다. 또한 군데군데 자유로이 펼쳐진 원추리와 천인국, 안개처럼 몽글몽글 피어오른 하얀 개망초와 입 다문 달맞이꽃이 조화를 이루었다. 다양한 계층과 연령의 사람들이 함께 땀을 흘리며 발을 맞추고, 자연과 호흡을 나눈다는 것은 오랜 직장생활로 격식과 규율에 젖은 나에게 색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특히 태백은 도시 전체가 해발 600~700m 사이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안성맞춤인 곳이라고 하니, 더욱 기분이 상쾌하였다. 그런데다 땀이 날만하면 하늘의 은총처럼 살짝살짝 빗방울이 몸을 적셔주었고, 적당한 구름과 바람이 50명 안팎의 순례단을 줄곧 따라 다녔다. 황지, 철암, 소도천 등 세 줄기 하천이 한곳에서 만나 낙동강으로 흘러든다는 태백의 구문소에서 첫 날의 도보일정은 마무리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억5천만년에서 3억 년 전 사이에 형성되었다고 하는 구문소求門沼. 황지에서 흘러오는 강물이 동점동에 이르러 큰 산을 뚫고 지나간 도강산맥渡江山脈이라는 특수한 지형을 갖춘 곳으로, 세계에서도 그 유형을 찾기 힘든 기이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또한 마당소, 자개문, 용소, 삼형제폭포, 여울목, 통소, 닭벼슬바위, 인공굴 혹은 용천 등으로 불리는 구문팔경求門八景의 기암절벽과 폭포가 어우러져 예부터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 하니, 나 역시 잠시나마 그들 시인묵객 중 한사람이 된 것 같은 흥분에 도취되었다.
힘든 줄 모르고 무사히 하루 일정을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계산된 보폭과 속도를 적절히 조절해가며 가끔씩은 쉬어가는 여유도 함께 배려해준 주최 측의 능숙한 운영 덕분이었다. 황지에서 구문소까지 13.5㎞이 거리에 나의 발자국을 남겼다고 생각하니, 달포가 지난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숙소는 둘째 날의 도보가 시작되는 석포에서 마련하였다. 욱신욱신 저려오는 발가락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정성껏 주무르는 일을 잊지 않았다. 시원한 맥주 한 잔에 달궈진 대지를 식히려는 듯 갑작스레 쏟아지는 빗줄기에 귀를 기울인 것이 숙소에서 한 일의 전부였다. 언제 어떻게 잠이 들었을까. 새벽 5시에 맞춰놓은 알람이, 달콤한 잠을 앗아가고 새 하루를 데리고 온 버거움이라니……. 한 컵의 물이 식도를 통해 위를 훑는 동안, 건재함을 확인하였다고 할까. 아침에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나는 멀쩡하게 서서 움직이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6시 30분, 몸 풀기와 함께 시작된 이틀째의 행군. 석포제련소를 지나 승부역까지 7㎞ 숲이 울창한 산을 중심으로 시원스런 물소리와 폭넓은 하천변을 지날 때는, 알 수 없는 제목의 영화 한 장면을 떠올리는 듯 추억을 더듬으며 힘껏 양팔을 휘저었다. 그러나 약간의 오르막을 만났을 때,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가 스스로 걷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하늘을 오려다보기도 하고, 앞서가는 이와의 거리를 좁히려 진땀 흘리기도 하였다.
마침내 당도한 승부역사 앞에는 ‘승부역은 하늘도 세평이요 꽃밭도 세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기념비 같은 바위가 옆으로 뉘어져 있었다. 규모는 작지만, 중요한 곳이라는 뜻일까. 인도도 없고 차도도 없는, 오로지 철로만이 살아있는 ‘승부역’에서 한차례 숨고르기를 하며 기념사진을 찍는 여유를 만끽했다.
춘양으로 가기 위해, 예정보다 약간 늦게 도착한 영동선 열차에 몸을 맡기고 어떤 이는 좌석에 기대어 눈을 감기고 하고, 어떤 이는 하나의 풍경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촬영에 애를 쓰기도 하였다. 춘양역에 내려 대기하고 있던 차로 이동, 시장통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땀 흘리고 난 뒤, 꿀맛이라는 것이 마로 그 맛이었다. 게 눈 감추듯 삼켜버린 된장찌개의 구수함에 입맛을 다시며, 다시 차로 이동을 하다 내려다본 봉하협곡, 산을 한 바퀴 휘돌아나가는 하천의 모습이 한 폭 그림을 감상하는 것처럼 신비하였다.
다시 ‘삼동소수력발전소’까지 차로 이동. 현대그룹에서 매호 유원지 낙동강상류 1㎞ 지점에 소수력발전소를 건설하여, 전량 한전에 납품을 하고 있다는 곳이다. 거기서부터 매호유원지를 따라 걸은 10리 길. 태백에서부터 봉화까지 낙동강변을 따라 걸으며, 흙을 만난 것은 이 구간이 유일하였다.
봉화군 명호면사무소 앞 정자에 이르러 잠시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날의 숙소로 예정된 안동 농암종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누군가 준비해 온 수박으로 땀을 식혔다. 농암聾巖이현보 선생은 조선시대 사람으로 퇴계 선생의 선배이며, 가단歌壇을 형성할 정도로 우리 노래에 대한 애정이 지극한 분이었다고 한다. 그가 남긴 대표작으로 ‘농암가’가 있는데,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인간 세상에 비해 늘 한결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자연의 모습을 대비시켜 노래한 작품’이라고 하니, 낙동강변을 따라 걷던 그날의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컸다 하겠다.
명호면 이나리 강변에서 래프팅 장소로 잘 알려진 청량산 계곡을 따라 다시 걸은 것이 6㎞라는 사람도 있고 8㎞라는 사람도 있었으나, 나에게는 60㎞가 훨씬 넘는 듯 멀기만 하였다. 그늘 한 점 없는 뙤약볕아래 2차선 포장도록 위를 걷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걷기로 한 마지막 구간, 해이해진 마음이 긴장의 끈을 놓쳐버린 것일까. 어깨를 펴고 선두를 잃지 않았던 전날의 용맹은 어디로 가고, 나는 점점 뒤처지고 있었다.
어렵사리 도착한 청량산 입구에서 비빔밥을 먹으며, 우리 일행은 도보순례단원들에게 아쉬움을 고했다. 7월 16일 오후 2시에 헤어지게 되었으니, 만 하루만의 이별인 것이었다. 땀으로 맺은 인연은 특별한 훈기를 더해주는 것 같았다. 남은 일정 무사히 다녀가시라며, 젖은 손으로 악수를 하고 우리는 떠나왔다. 산세가 수려하여 소금강小金剛이라고 할 만큼 경치가 빼어난 산, 청량산을 옆에 두고 우리는 떠나온 것이다.
돌아오는 차 속에서 일행들 모두 곤히 잠이 들었지만, 나의 머릿속은 생각들로 북적댔다. 이틀간의 짧은 도보는 나에게 진한 교훈을 주었다. 해냈다는 것, 할 수 있음을 실감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몇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난생 처음 참여하게 된 걷기행사에서 프로들과 나란히 발걸음을 맞추었다는 사실은 나의 사전事典에 기록할만한 일임에 틀림없다.
늦게 낳은 아들 녀석이 백일을 지나 무더운 여름 안간힘 쓰며 누워있던 몸을 뒤집었을 때, 우리는 박수를 쳤었다. 또한 기어다니던 녀석이 돌 잔칫상 앞에서 기어코 일어나 첫발자국 떼었을 때, 우리는 모두 손을 들어 환호했었다. 그날의 나의 기분이 이 박수와 환호를 받던 아들 녀석의 그때 그 기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별것도 아닌 일에 호돌갑을 떤다고 나무라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반 이상의 삶을 살아버린 사람이, 어느 날 문득 자신에 대한 ‘새로움’을 발견했다고 생각해 보라.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 같은, 붉은 잇몸을 뚫고 올라온 아기들의 새하얀 이빨 같은, 그 ‘새로움’이란 살아감에 있어 보약보다 훨씬 더 큰 윤활유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살림만 하던 친구가 쉰이 자나 인라인스케이트를 배운다고 뒤뚱거리는 모습, 기타의 묘미에 손가락이 부르트는 줄도 모르고 흥얼거리는 친구의 용기가 더욱 커 보이는 것도, 걸어보지 않고 두려움에 떨던 달포전의 우스웠던 기억 때문이 아닐까. 아니, 평소 규칙적인 운동이라면 아침에 일어나 꽈배기 꼬듯 몸을 비트는 스트레칭이 전부였던 내가, 도중하차 하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는 가능성과 땀방울의 달콤함을 맛보게 된 때문인지도 모른다.
낙동강도보순례 일정이 마무리되던 날, 참가자들의 협조에 감사드린다는 주최측으로부터의 문자메시지에 반가움을 넘어 감동의 눈물이 핑 돌았다. 무더위가 연일 기승을 부리는 여름, 뙤약볕 아래서 한번쯤 걸어보시라. 그리고 땀 흘려보시라.♠
어머니의 밥맛
허봉조
사람이 혀로 느낄 수 있는 맛의 기본에는 단맛과 쓴맛, 신맛과 짠맛 등 네 가지가 있다. 몇 년 전 미국의 어떤 과학 잡지에서는 ‘감미’라고 하는 맛을 새로이 추가하여 맛의 기본을 다섯 가지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한다. 그러나 그 몇 가지 맛이라는 것은 크레용의 색깔처럼 학문적으로 정해놓은 것일 뿐, 가슴으로 느끼는 맛의 종류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사는 것이 즐겁거나 괴로울 때 달콤 쌉싸름한 맛도 있고, 떫은맛도 있다. 혀를 감아 도는 감칠맛이 있는가하면, 한줄기 전율을 느끼게 하는 짜릿한 맛에, 눈물이 나도록 매캐하고 알싸한 맛도 있다. 사람에게도 잘 버무려진 반죽 같은 찰진 맛과 눅진한 맛이 있다. 그 뿐일까. 갓 지어낸 쌀밥 같은 고슬고슬한 맛과 얼음 같이 차가운 시니컬한 맛도 있고, 똑 부러지듯 칼칼한 맛도 이도저도 아닌 찝질한 맛도 있다.
미로 찾기를 하듯 세상의 좁은 틈새를 비집고 살아가는 인생살이를 통해 감지할 수 있는 맛을 열거하다 보니, ‘밥맛’에 대해 느끼는 바가 남다른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주말마다 친정나들이를 하게 된 것이, 꼬박 두 달 째다. 결혼 이후 년 중 대여섯 번으로 족하던 친정 방문이 앞으로도 당분간은 계속될 전망이다. 친정에는 팔순의 부모님이 계신다. 아버지께서는 마른 체구에 스스로 운동을 하시는 분이라 걱정이 덜 하건만, 어머니께서는 작년 여름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받으신 후 해가 바뀌도록 떨어진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여 생활이 몹시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늙으면 어린아이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듯이, 늙음은 어쩌면 소심이 극에 달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하긴 어린아이의 두려움과 늙은이의 두려움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의 두려움 속에는 경험해보지 못함으로 인한 경계심이 있을 것이고, 늙은이의 두려움 속에는 경험으로 인한 노파심이라고 할까. 생로병사의 고정 중 이미 두 모롱이를 돌아 병들고 죽는 일밖에 남지 않은 데 대한 불안이 자신감을 잃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이제 팔다리에 힘이 없음은 물론이고, 손이나 발을 움직이는 일 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버렸다. 무릎의 관절과 관절 사이 연골이 닳아,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걸음걸이가 불편하시던 어머니를 수술대에 눕게 한 것은 순전히 우리 4남매의 결정에 따를 것이었다. 어머니는 거절할 명분을 찾지 못해 따라가기만 하셨을 뿐, 무플수술로 인해 다리가 아프지 않게 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몸전체를 두고 보았을 때는 ‘과연’이라고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생겼다.
수술 전까지만 하여도 어머니는 ‘밥맛이 꿀맛’이라고 걱정 아닌 걱정을 하셨다. 허리는 자꾸 굵어지는데 밥맛이 너무 좋아 참을 수가 없다는 즐거운 불평이었다. 그러나 백일이 넘는 병원생활은 어머니로 하여금 밥맛을 잃게 하였고, 그로인해 떨어진 기력은 생활을 온통 어둠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야 만 것이다.
한 술 더 떠 어머니는 이제 매사에 자신을 잃은 어린아이가 되어버렸다. 허리 구부려 스스로 머리를 감지 못하고, 목욕을 할 수 없으며, 손발톱을 깎지 못하고, 빨래를 하는 일 조차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로 포기를 해버린 것이다. 어린아이라도 그런 어린아이가 또 있을까? 같은 음식을 두 번 이상 입에 댈 수 없다고 칭얼거리고, 세 번째부터는 구역질이 음식을 밀어낸다고 지레 고개를 흔들어버리는 것이다.
주말이 되기 전, 나는 어머니의 먹을거리를 위해 무엇을 준비할까 고민해야 한다. 한 번은 뿌리가 발그레하여 군침이 도는 시금치를 살짝 데쳐, 사열査閱을 받는 병사들처럼 가지런히 줄을 세워 플라스틱 반찬통에 넣어간 적이 있었다. 당신께서는
“아이구, 내가 시금치 먹고 싶었던 거 우째 알았노?” 라고 반색을 하며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명치끝까지 울컥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반기던 시금치도 한 끼로 족하고, “더는 못 먹겠더라.”는 말씀에 내 마음은 흐린 먹구름일 수밖에.
‘밥이 보약’이라는 말처럼, 별 것 아닌 줄 알았던 밥맛은 어쩌면 사는 맛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밥으로 인해 어머니는 힘을 얻으셨고, 그 힘으로 가족을 돌보신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제 깔끔하기가 결벽에 가까울 정도의 어머니가 스스로 치우고, 쓸고, 닦을 구 없으니 그 허탈과 실망스러움을 어디에 비유할까?
밥맛을 잃음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라고 하여도 좋을 것 같다. 진작부터 효자 노릇을 하지 못했던 자식들은 서둘러 밥을 대신할 건강보조식품들을 보내드린다. 기력을 돋워줄 보약에다 감기예방과 혈액순환에 좋다는 칡즙, 식욕을 증진시키는 토마토즙, 혈당관리와 혈압조절에 효과가 탁월하다는 양파즙에다 홍삼원액 등등. 그러나 줄을 서서 어머니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보조식품들의 효능이 제아무리 힘을 합하여도 어머니의 그 ‘밥맛’을 따라가지 못한다.
나는 내일도 부산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야한다. 허울을 훌훌 벗어버리고 욕실로 들어가 목덜미부터 한 바가지씩 더운 물을 쏴아아 내려드리면 “아이구우, 시원해라. 천국이 따로 없다.”고 감탄을 연발하시는 어머니, 당신께서는 직장생활 하는 딸이 주말을 쉬지 못하고 멀리서 찾아오는 걸 안타까워하신다. 그러면서도 주말이 가까워 올 무렵, 내용 없는 한통의 전화만으로도 기다림이 얼마나 역력한지 알 수가 있다.
그동안 어머니의 밥맛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지은 밥에다 단맛과 쓴맛, 신맛과 짠맛이 고루 담긴 삶이라는 소화효소가 가미되어, 씹으면 씹을수록 달착지근하고 구수한 여유를 느끼게 하는 자양분이 함께 어우러졌던 것이 아니었을까. 어머니의 밥맛은 이제 완행열차를 타고, 아주 조금씩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듯하다.
아니, 어쩌면 어머니께서는 어린아이가 된 척, 효녀 노릇을 못해 애가 타던 여식에게 당신의 육체를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네덜란드의 사진사
허봉조
웃음도 전염이 된다고 했던가. 상대가 누구이거나 밝게 웃는 얼굴을 보면, 기분도 절로 좋아진다. 예를 들자면『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등 책을 펴낸 오지탐험가이며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한비야 씨의 사진을 보면 언제나 더 이상 입을 벌릴 수 없도록 활짝 웃고 있다.
그런가하면, 저녁 무렵 스포츠 뉴스를 전해주는 여성 앵커들의 환한 표정은 또 어떤가. 그들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지친 몸을 다독거리는 샐러리맨들에게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긍정의 힘을 가져다주는 전령사라고 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들이 남달리 웃기를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밝음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은 존중할만한 일임에 틀림없다.
안으로만 수그러들던 내성적인 성격 탓이었을까. 나에게는 학창시절 사진 찍는 것을 몹시 싫어한 어두운 기억이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생활의 범위가 차츰 넓어지게 되면서, 한겨울 빨랫줄에 널린 뒤틀려 펄럭이던 내복처럼 단단히 얼어붙었던 마음이 봄눈 녹듯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나도 그들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마술 같은 얼굴로 사진에 담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보았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 설 때 활짝 웃는 표정을 지어 보았다. 하지만 일부러 지어내는 표정이 자연스럽지 못하였음인지, 웃음 뒤에는 늘 무언지 모를 작은 수군거림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운 때도 있었다.
지난가을 유럽여행 중, 물의 나라 네델란드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동화 속 같은 마을 ‘잔세 스칸스(Zanse S초문)’ 에는 사진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마지막 관광지로 향하는 전용버스에서였다.
마을 입구를 들어설 때 찍힌 사진은 나막신 제작공정과 치즈 만드는 공장 등을 구경하며 풍차마을을 관광하는 동안 현상과 인화를 거쳐 한 장의 캘린더로 제작이 되어, 전시판에 걸려있을 것이라고 현지가이드는 알려주었다. 사진이 마음에 들면 5유로를 주고 찾으면 된다는 말도 함께 하였다.
한 그룹의 관광객이 도착을 하자, 사진사는 가이드와 즐거운 표정으로 농을 주고받을 정도로 낯익은 사이 같았다. 시범으로 가이드가 두 팔을 벌리고 우스꽝스런 피에로 같은 포즈를 취해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행 중 제일 앞에 섰던 나는 익숙하지 못한 광경에 어쩔 줄 몰라, 사진모델로서의 가이드라인을 훌쩍 넘어서버리고 말았다. 사진사는 예상치 못했던 나의 행동에, 규칙을 위반한 학생 바라보듯 의아해하며 막무가내 사진을 찍으려하였다. 나는 노(No), 노(No)라고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비켜섰고, 민첩한 사진사는 기어이 순간포착을 한 것인지 카메라 플러시가 터지고 말았다.
여행의 즐거움에 실랑이도 잠시, 지난 일 모두 잊고 가이드가 안내하는 순서에 따라 관광에 열중하다 돌아 나왔을 때, 퉁퉁하고 익살스런 사진사는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반가움의 손짓을 들어보였다. 원치 않게 찍힌 사진, 전시판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지나치려하였다. 그런데, 웬걸! 사진속의 여인이 나를 보고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쉰을 갓 넘어선 여인은 나와 같은 머리카락에, 나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내 마음속의 눈에 반짝 빛이 나면서, 오른손이 주머니를 뒤지고 있음을 감지한 것은 짧은 순간이었다. 여행의 마지막 코스였던 만큼 주머니 속에는 동전 몇 푼만 짤랑거리고 있었다. 동전은 모두 합쳐 2유로를 조금 넘었을까. 움츠린 손을 사진사에게 내밀면서 ‘디스카운트discount' 라고 귓속말을 해보았다. 눈치 빠른 사진사가 어찌 숨겨진 내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였을까. 그는 나의 손바닥에 있는 동전을 덥석 받아 쥐며 사진을 챙기는 듯 하였다. 그러는 중에 일행 한 명이 자기 사진도 있다며, 나처럼 동전을 보여주었다. 사진사는 만면의 미소를 띠며 일행의 손바닥에 놓인 동전을 긁어가더니, 우리 두 사람의 동전을 합치는 것이었다. 그는 돌아서서 열심히 동전을 세더니, 작은 동전 하나를 돌려주었다. 우리가 이상하다며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는 사이, 돌아온 것은 한 장의 사진 뿐.
그제야 우리는 사태를 알아차리고, 동전을 도로 내놓으라며 얼굴을 붉혔다. 사람이 다른데 동전을 왜 합쳤느냐고 벌겋게 항의를 하자,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두 손바닥만 내밀었다. 모른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그까짓 사진 안 찾아가면 버리는 것을, 에누리를 조금 한들 어떠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5유로짜리 지폐를 흔들며 이렇게 생긴 것을 내놓으라고 느물거렸다.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일행에게 5유로를 빌려, 두 장의 사진을 찾게 되었다. 사진사는 회심의 미소에 승리의 나팔을 불며 “사랑해요”를 연발하였고, 우리는 “사랑 안 해”로 응수하였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결국 얕은꾀를 부리던 우리가 역공을 당한 셈이었다.
귀국을 위해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 고자질하는 유치원생처럼 가이드를 향해 억울하다 합창을 했더니, 당연한 결과라고 웃는 것이 아닌가. 유럽에는 에누리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남은 사진은, 세무당국에 신고를 하여 소모한 필름과 대조를 한 다음, 세금감면을 받으면 된다는 설명에야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리. 우리의 정서에 비추어 자신만의 잇속을 차림 그런 계산법을 본받아야할지, 몰인정하다고 나무라야 할지. ‘준법’과 ‘인정’이라는 명제 앞에 새로운 고민이 똬리를 틀었다.
아무튼 나는 꾸밈없이 밝은 표정의 사진을 갖는데 성공을 하였다. 네덜란드의 풍차마을 잔세 스칸스의 얄미운 사진사는 그냥 무의식적으로 셔터를 누른 것이 아니었나보다. 그는 하늘을 맴돌던 독수리가 한순간에 목표물을 낚아채듯, 자연스fp 웃는 나의 표정을 낚아챘던 프로였음에 뒤늦은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19세기 프랑스의 문호 발자크는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다. 한 권의 책이다’라고 말하였다 한다. 사람의 얼굴은 단순한 생김새보다, 그 이상의 다양한 삶과 폭넓은 감정이 듬뿍 밴 인품을 나타내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나도 이제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전염시키기 위해, 마음에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 틈날 때마다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도록 밝은 표정을 연습해보아야겠다. 거울 앞에서, 카메라의 조리개 앞에서, 나아가 일상생활 중에도 항상 밝음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보아야겠다.♠
친구여! 파이팅
허봉조
햇살 따스한 봄, 예식장 뷔페에서 친구들이 만났다. 쉰하고도 두 살을 더 먹게 된 친구들이 3개월만에 만난 것이다. 그새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어 미뤄둔 말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하지만 비교적 조용한 성향의 친구들이라 그다지 주변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다행이었다.
여러 명의 친구들이 같은 화제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던 다섯 명의 친구들. 이십대에는 주로 신혼의 달콤하고도 쓴 이야기에 열중하다가, 삼십대에는 그런대로 맛이 여물어가는 살림살이와 아이 키우는 이야기 또는 시집살이의 흉허물을 털어놓았다. 사십대에는 우리나라의 부동산정책이나 교육정책에 열을 올렸고, 쉰이 지난 지금은 아들딸 시집 장가보내는 이야기들로 다함께 죽이 맞아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만혼(晩婚)으로, 마흔에 간신히 독신을 면한 나는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거의 말문을 열지 못한다. 살아있는 인형처럼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웃거나, 화낼 자리에 함께 화를 내어주기만 하면 그뿐. 그날도 친구들은 자리고비 내 아들에겐 통 큰 여자가 곁에 있어야 한다느니, 상대가 너무 어리다느니, 요즘 젊은이들에 대한 패션이나 문화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습게도 나는 이제 겨우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을 두고 있으니, 격세지감이 따로 있을까?
생각해보면, 이삼십년 전 산으로 들로 놀이마당이나 영화관으로 어울려 다닐 때만 해도 우리는 하나 같이 비슷한 생각, 비슷한 느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결혼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부터 친구들은 가정을 지키는 주부로, 나는 경제활동을 하는 직장인으로 생활이 나뉘게 되면서, 친구들과 나 사이엔는 눈에 띄게 많은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살림을 하는 데 있어서 친구들은 프로다. 아니 프로의 경지를 넘어 그 비방을 전수하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부동산을 움직이거나 부(富)를 늘리는 일에 있어서도, 직장에 얽매어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나보다는 몸이 가벼운 친구들이 한 수 위다. 생활의 지혜를 이야기할 때, 나는 반쯤 입을 벌리고 친구들을 하늘 같이 우러러보아야 한다.
이왕에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약속시간에 늦은 지각생처럼 매사에 뒤처진 것 같은 나에게도 한 편의 콩트 같은 재미있는 일이 생각이 난다.
달포 전의 일이었다. 30년 가까이 살림만 하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무소식이 희소식인 줄 알면서 지내오던 사이인지라, 반가우면서도 조금은 놀라운 목소리로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상기된 친구는 안부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나의 전자우편 주소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긴히 전할 소식이라도 있나 싶어, 자주 사용하는 메일주소를 알려주었다. 한참이 지난 후, 더듬거리며 열심히 보낸 편지가 돌아왔다는 연락이 왔다. 새로운 조소를 알려 주었건만, 역시 보내기에 실패를 했다는 것이었다.
주소를 잘못 입력하였거나, 회선에 문제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 가 먼저 편지를 보낼 테니, 너는 답장만 보내라”고 말을 하였다 새털처럼 가벼이 날던 친구의 목소리는 먹구름처럼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다. “아들의 컴퓨터에서 어떻게 나의 편지를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 아닌가. 폭소가 터져 나왔지만, 그냥 웃을 수만은 없었던 것은, 친구와 나 사이에 벌어진 오랜 세월의 틈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7,80년대 여성들은 대부분 결혼을 앞두고 직장을 그만두는 게 보통이었다. 내가 컴퓨터라는 괴물과 불가분의 관계로 지낼 수밖에 없게 된 것이 불과 10여 년, 직장생화을 계속해왔던 덕분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살림꾼 쉰 세대 친구들에게는 컴퓨터 다루기가 맹수보다 더 두려운 컴맹세대가 아니던가.
친구는 이제 자식 농사 끝내고 살림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여가선용 삼아 평생교육원 수강을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전자우편 주고받는 법에 대해 강의를 듣고 실습을 해가며 새로운 재미를 느끼게 된, 칭찬이 그리운 유치원생 같았다. 인터넷 검색을 하는 방법이라도 배우고 나면, 친구의 생활은 얼마나 더 활기가 넘칠까.
다시 친구들의 만남으로 돌아가 보자.
결혼, 출산, 사회 활동 등 생활방식이 산천이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을 정도로 바뀌었다. 그렇기로서니 친구들 사이에서 내가 물 위에 뜬 기름 신세로 겉돌지 않고, 아직도 잘 버무려진 비빔밥처럼 어울리고 있는 것은 친구들과 나 사이를 이어주는 ‘우정’이라는 이름의 중화제 적분이 아니었을까. 아니,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좋은 면을 알아주고 닮아가기 위해 애쓰고 있는 끈끈한 접착제로 묶여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친구는 옛 친구가 좋고, 옷은 새 옷이 좋다’ 고 하였던가. 부모형제에게도 보일 수 없는 어두운 속내를, 친구에게는 먼지를 털어 내듯 스스럼없이 헤집어 보여줄 수 있었던 내 추억의 산실. 격세지감의 벽이 제아무리 높다 한들, 우정의 힘 앞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30년 지기 진한 우정 속에 우리들의 정신적인 성장과 행복의 일기장이 고이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친구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와 관계 맺지 않은 백만 송이 장미보다, 나와 관계 맺은 한 송이 장미가 더 소중하다’는 말이 생각난다. 나에게 친구는 고귀한 재산이며, 든든한 무기다. 또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얽히고 설킨 매듭을 풀어줄 수 있는 해결의 열쇠꾸러미다. 어떤 연구에 의하면, 친구 특히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들과 강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장수 확률이 확실이 높은 결과가 나왔다고 하니,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진다.
바람이 많은 달이라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음력 2월의 예식장 뷔페는 마침 반값 할인행사를 하고 있어, 우리는 더욱 기분이 좋았다. 달포 전에 보낸 전자우편의 답장이 아직도 나에게 도착을 하지 못하고 오리무중으로 허공을 떠다니고 있다 해도, ‘가장 늦은 때를 가장 이른 때라고 생각하라’는 옛 성현의 말씀 잊지 않고 실행에 옮기는 친구여,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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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머리에
1956년 가을에 태어난 여자가, 쉰여섯 돌을 맞이하여 56편의 글을 한 데 묶어 보았습니다. 문학수업을 단 한 차례도 받지 못하고, 거듭된 습작만으로 지난 10여 년 문예지와 정지간행물 등의 지면을 통해 발표했던 글과 쓰다가 보관만 하고 있던 글들을 끄집어내어 어색한 부분을 수정하기도 했습니다. 글을 쓸 때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이지만, 다시 읽고 수정을 하는 과정에서 늦깎이 인생에 대한 이야기와 마흔 한 살에 얻은 아들 이야기가 많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엄마와 꽃나무, 여행 관련 이야기들도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보람 또한 큰 것 같습니다. 우선 솔직해집니다. 거짓으로 글을 쓸 수 없으니까요.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사물에 대해 깊이 알고자 하며,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게도 됩니다. 화를 내는 일이 줄고,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결국 정신이 부유해진 것이겠지요.
주변의 격려와 칭찬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특별한 것 없는 일상에 의미를 부여한 도전과 끈기에 손뼉을 쳐주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할 방법을 찾다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글을 모아보자는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오매불망 자식 위해 애정으로 보살펴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가족과 친지, 직장 동료와 선후배 그리고 글의 소재가 되어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결실의 계절 가을을 맞이하여 첫 수필집을 상재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주신 시와 산문사에 깊은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12년 9월
柔心 허 봉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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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글을 쓴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보람 또한 큰 것 같습니다. 우선 솔직해집니다. 거짓으로 글을 쓸 수 없으니까요.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사물에 대해 깊이 알고자 하며,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게도 됩니다. 화를 내는 일이 줄고,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결국 정신이 부유해진 것이겠지요.
주변의 격려와 칭찬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특별한 것 없는 일상에 의미를 부여한 도전과 끈기에 손뼉을 쳐주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할 방법을 찾다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글을 모아보자는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 책머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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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가 허봉조∥
∙1956년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부산진 여상, 한국방송통신대, 경희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
∙2004년부터 <자동차는 방귀쟁이> <습관을 바꿔요> 등 환경 노래를 작사했으며,
∙2007년 제5회 설중매문학신춘문예 수필부문에 당선되어
∙2008년『시와산문』수필부문 신인추천완료로 문단에 나왔다.
∙2012년 대통령표창을 받았으며
∙시와산문문학회, 한국녹색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대구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대구지방환경청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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