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고을 환히 밝힌 복음화 '불씨'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 33번지에 있는 북동성당은 '빛고을'에 설립된 첫번째 성당으로 이 지역 복음화의 모태이다.
복음이 '빛고을'에 처음 전래된 때는 신유박해(1801년) 당시 광주읍으로 귀양온 홍재영과 그 일가족에 의해서다. 그러나 기해박해(1839년)때 광주 신자 대부분이 체포돼 전주감영에서 순교함으로써 다시 신앙의 황무지가 되고 말았다.
이후 일제 강점기인 1926년 일본인 신자들이 광주에 진출하면서 천주교 신앙활동이 재개됐고, 1929년 1월 나주 노안 양천리본당 주임 박재수 신부가 광주에 사는 윤영호(베르나르도), 이빙판(바오로), 박재춘(요한) 등 신자 3가정 가족 10여명과 함께 첫 미사를 봉헌하고 공소를 설립하면서 이 지역 한국인에 대한 첫 사목을 시작했다.
그후 1933년 광주지역 첫 본당으로 설립된 북동본당은 이후 1967년까지 남동·곡성·화순·계림동·월산동·임동본당 등 6개 본당을 분할시키면서 명실상부한 광주지역 복음화와 신앙의 못자리 역할을 했다.
북동성당은 제4대 본당주임인 토마스 퀸란 신부(1940년 제2대 춘천교구장 주교가 됨)가 1937년 광주지목구 설립을 기념해 그해 10월에 착공, 1938년 6월에 완공했다. 총공사비는 미화 약 6000달러. 북동성당은 광주지역 첫 서양식 성당이자 골롬반외방전교회가 한국에서 지은 첫번째 성당으로 1999년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됐다.
중국인 가요셉이 설계와 시공을 맡은 북동성당은 대지 1300평에 폭 9.3m, 길이 25.5m로 앞부분에는 종탑이 있고, 뒷부분에는 모서리가 4각형으로 꺾여져 있고 그 자리에 제대와 감실이 설치돼 있다.
외벽은 45cm 높이의 큰 돌을 깔고 그 위에 붉은색 벽돌을 쌓아 치장을 했으며 종탑과 창틀, 문에는 화강석으로 원형 및 반원형 아치를 만들어 장식했다.
내벽과 천장은 어떠한 장식도 없이 흰색 회를 발라 마감해 전례에 참례한 신자들이 제대를 중심으로 예식에 집중할 수 있도록 단순하게 처리했다.
또 성당 내부 입구에 2개의 석조기둥만을 받쳐 놓았을 뿐 강당형으로 설계해 성당 공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수용인원은 500명 정도.
북동성당은 몇 차례 보수 공사를 거쳤다. 1987년 성당 건립 50주년을 기념해 당시 박영웅 주임신부 주도로 성당 왼편에 있던 제의실을 헐고 신자 3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50여평 규모의 소성당을 지었으며, 나무로 된 마루 바닥은 대리석으로 교체했다.
또 성당 창은 (주)한국스테인드글래스(대표 김철중 미카엘)에서 제작한 유리화로 새단장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일생을 작품화한 유리화는 세월이 흘러도 색이 변하지 않도록 전통기법에 특수안료를 사용, 화려함과 신비감을 더해주고 있다.
북동성당은 이후 1993년과 2002년에 두차례 지붕 수리를 했고, 지난해에는 광주시 문화재관리과 주도로 성당 내부 공사를 한 바 있다.
북동성당은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함께 한 성당으로 유명하다. 일제 강점기에는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신부들과 신자들이 간첩 혐의로 체포 억류돼 수모를 겪기도 했다.
또 제2대 광주교구장으로 부임한 와기다 몬시뇰은 일본어 통역을 두고 북동성당에서 강론과 미사를 해 신자들이 발길을 끊었다. 그래서 주일 미사 참례자가 겨우 100명 안팎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와기다 몬시뇰이 북동성당에 거주하는 덕에 1945년 4월부터 광주교구 모든 성당이 징발당해 일본군 병사(兵舍)로 사용됐지만 북동성당만은 그 화를 면했다.
북동성당은 이후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주둔지로 침탈되는 수난을 겪었는가 하면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에는 성당으로 피신온 시민과 학생들의 방패막이 되어 계엄군이 쏜 총탄을 몸으로 막아내기도 했다. 성당과 사제관 여기저기에는 민족사의 애환을 보여주듯 총탄 흔적들이 남아 있다.
광주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된 1957년 1월 대목구장으로 착좌한 현 헤롤드 대주교는 북동성당을 광주대목구 주교좌성당으로 축성했다. 북동성당은 1983년 새 주교좌성당으로 축성한 임동대성당과 함께 46년째 주교좌성당으로서 위상을 지켜오고 있다.
북동성당은 또 1992년 6월까지 광주공용터미널과 마주하고 있었던 탓에 지역민들에게는 '터미널성당'으로 더 알려지기도 했다. 외지에서 광주를 찾아온 신자들이 잠시 짬을 내 성당에서 성체조배와 기도를 하고 가기도 했지만, 외지인들과 행인들이 "'차비'가 떨어졌다" 며 수시로 본당 사무실을 찾아오기도 했다. 지금은 버스 터미널 자리에 대형 백화점이 들어서 '터미널성당'이라는 별칭을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신자들과 시민들의 쉼터로 사랑받고 있다.
북당성당 건립 70주년 행사를 치른 박상수 신부는 "성당 부근이 유동인구가 많은 상가 지역으로 변했지만 교회 기본 사명인 '선교'를 위해 본당 신자들이 일치 단결해 노력하고 있다"면서 "내년에는 북동성당 70년사를 발간해 성당 곳곳에 묻어 있는 희로애락의 추억들을 나눌 생각"이라고 밝혔다.
(사진설명)
1. 지방 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북동성당 전경. 한때 '터미널 성당'으로 불렸던 북동성당은 지금도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
2. 북동성당은 좁은 성당 공간을 최대한 자유롭고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기둥을 설치하지 않고 강당형 돔 형식으로 지은 것이 특징이다.
3. 북동성당 반원형 아치 창에 설치돼 있는 스테인드글라스. 제대를 중심으로 성당 왼쪽 벽면을 돌며 예수 생애를 작품화하고 있어 그림을 따라 가며 묵상할 수 있도록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