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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학의 독전관(督戰官)!
고 채광석 시인(현, 한국작가회의 명예 사무총장)의 유해가 경기도 양평 <자하연팔당공원묘원>에서 이장, 광주 운정동의 <국립5.18민주묘지>에 새로이 안장됩니다.
♧ 서울 출발/ 2020년 8월 6일(목) 오전 8시, 양재역 서초구민회관에서 광주행 전세버스 출발.
♧ 오후 1시.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안장식 엄수.
♧연락처/
홍일선(서울) 010-8775-3277
주영국(광주) 010-4704-8144
♧ 묘지 이장 후원회비 계좌/ 농협(이승철) 217022 56 058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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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그 사람 채광석!
1980년대 한국 민족문학의 대표단수가 누구냐 했을 때 어떤 이는 김남주 시인을, 혹은 박노해 시인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김남주, 박노해 시인에 앞서 1980년대의 민족문학을 말할 때 그 첫 페이지에 다름아닌 ‘채광석’이라는 사람이 차지해야 한다고 평소 생각했던 사람이다.
채광석은 살아생전 민족민중운동권의 대표적인 활동가였다.
그는 <민통련> 중앙위원과 <민문협> 실행위원,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 현 한국작가회의 전신) 총무간사, 실행위원으로 그리고 <풀빛출판사>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하면서 전두환 5공정권의 폭압적 군사독재와 온몸으로 맞서 싸운 투사였다.
● 서울대 5.22 시위로 투옥되고, 1980년 5월 17일에 예비검속된 채광석
채광석은 1975년 5월 22일, 서울대 ‘김상진열사 장례식 사건(오둘둘 사건)’을 주도했다.
서울대생 1천여 명은 민주화를 외치며 할복자살한 ‘김상진 열사 장례식’을 거행한 후 "박정희 긴급조치 9호 철폐"를 외쳤다. 가장 강력한 반유신투쟁이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이 시위로 서울대생 200여 명이 대거 연행되었다. 채광석은 유상덕과 함께 5.22 시위의 사범대 책임자로 활동했는데, 유영표 이호웅 박성규 천희상 김도연 김정환 장만철 정병문 김동식 박부권 등 68명이 긴급조치 9호위반으로 구속되었고, 그 중 22명이 검찰에 기소되었다.
채광석은 선량한 교사의 길을 가고자 했으나, 악랄한 박정희를 만나 자신의 꿈을 접고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역사의 격랑 속으로 휘달려 갔던 것이다. 그는 시대의 아픔을 자기화하는 데 앞장선 열혈남아였고, 민주투사였다.
5.22시위 주동자로 구속된 채광석은 2년 1개월간 공주교도소에서 수형생활을 한 후 1977년 6월 24일, 석방되었다. 그는 수형생활 중 수많은 옥중시를 썼고, 훗날 아내가 되는 애인 강정숙에게 180여 통의 연서를 써서 보냈다.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이 찾아왔을 때 채광석은 서울대 사대 4학년생으로 복학했다.
그런데 12․12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는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1980년 5월 17일 밤, 이른바 <5․17쿠데타>를 획책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5월 17일 밤, 신군부는 김대중, 문익환, 한승헌, 이문영 김윤식 등 재야인사들과 고은, 구중서, 신경림, 조태일, 송기원 등 ‘자실’의 문인들, 그리고 전국 대학의 학생운동권 지도자들을 예비검속 조치로 일제히 검거, 체포했다.
그날 서울대생 채광석, 전남대생 김상윤 등이 전두환의 합수부 요원들에게 전격 피검되었다.
이제 막 신혼생활을 시작한 채광석의 아내 강정숙은 갑자기 실종된 남편을 찾아 서울 시내를 몇날 며칠 헤매 다녔지만 그 행방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계엄포고령 위반혐의>로 전격 체포된 채광석은 종로경찰서ㅡ관악경찰서ㅡ 서울합동수사본부ㅡ수방사ㅡ 안양 계엄사 등지로 끌려 다니며 모진 수사를 받았다. 그는 고문기술자 ‘검은 장갑’(이근안) 등에 의해 40여 일간 모진 고초를 당해야 했다. 채광석은 구속된 지 3개월 만인 1980년 8월 18일에 기소유예 조치로 석방될 수 있었다.
훗날 채광석은 이 일로 인해 <5.18민주유공자>로 예우될 수 있었다.
● <시와경제> 동인으로 "시의 시대"를 열고, <자실> 재창립을 주도한 채광석
1981년 12월에 김정환, 홍일선, 김도연, 황지우, 정규화, 박승옥, 나종영, 김사인 시인은 <시와경제>라는 동인을 결성하여 첫 동인지를 출간했다. <시와경제> 동인지 제1집(육문사 간행)이 출간되고 나서 채광석은 선명한(선경식), 김용택과 함께 동인으로 참여했고, 1983년 6월에 출간된 2집의 기획에 참가했다. 동인지 2집에 노동자 출신 박노해와 학생운동권 출신 조성우를 ‘신인’으로 발굴한 것은 채광석이었다.
1983년 벽두에 채광석은 한국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1983년 2월, 채광석은 실천문학사에서 발행된 김정환의 장편연작시집 <황색예수전>의 발문으로 날카로운 비평적 안목을 선보이더니, 3월에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한 신작평론집 <한국문학의 현단계2>에 신인으로 등단, <부끄러움과 힘의 부재>라는 평론을 발표했다. 이 평론은 문단에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5월에 조태일 시인이 주재하던 무크 <시인> 제1집(<움직이는 시>)에 <빈대가 전한 기쁜 소식> 등의 시편을 "신인"으로 발표함으로써 채광석은 평론과 시, 두 장르에서 ‘라이징선(Rising Sun)’이 되었다. 등단 이후 그는 날카로운 비평적 안목으로 민족문학을 힘차게 주도해 나갔다.
채광석은 백낙청 평론가에 의해 주도된 <시민적 민족문학>을 <민중적 민족문학>으로 그 외연과 깊이를 확장시키는 제반 활동을 열정적으로 전개했다. 각종 무크지와 대학신문에 그는 왕성한 필력을 과시했다.
채광석은 김종철, 김학민 등과 함께 1984년 4월 14일에 결성한 <민중문화운동협의회>(약칭 <민문협>, <민예총>의 전신)에 참여하여 이 조직의 실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이어 그는 6월 29일, 출범된 <민중민주운동협의회>에도 참여했다.
1984년 가을에 채광석은 <자실>(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재창립에 매진하고자 ‘신협 중앙회’ 간부직을 돌연 사직했다.
이후 그는 <시와경제>, <오월시>, <삶의문학>, <분단시대> 등 각 지역의 문학동인들과 젊은 문인들을 규합해 냈고, ‘새로운 작가조직 결성’에 박차를 가했다.
1984년 10월부터 3개월간 채광석은 실천문학사 사무실에서 1970년대 ‘자실’을 이끌었던 선배문인들을 끈질기게 설득하면서, ‘자실’ 개편 준비소위와 확대준비회의를 이끌었다.
그리하여 1984년 12월 19일 오후 6시, 전두환 정권의 폭압을 뚫고 서울 흥사단 강당에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새롭게 재출발했다.
문인들과 재야인사들이 운집한 가운데 <자유실천문인협의회 84회의>와 제1회 <민족문학의 밤>이 개최되었고, 1980년대 새로운 문학운동의 출발을 대내외에 알렸다.
채광석이 초안한 자실의 재출범 성명서 <84문학인 선언>에서 “김남주 시인 등 정치적 탄압으로 투옥된 모든 인사들 석방, 문학 표현의 자유 보장과 언론 출판 결사 집회 및 신앙 사상의 자유 보장, 노동3권 보장, 농민들의 생산비 보장과 농축산물 수입 즉각 중단, 반민중적 도시개발정책 즉각 폐기, 민주 민중운동 탄압중단, 노동관계법 언론기본법 집시법 등 모든 반민주적 반중적 법률과 제도 개정” 등 6개항의 결의사항을 천명함으로써 이 땅의 문인들이 전두환 정권의 타도에 분연히 떨쳐나섰다.
자실 재창립 후 채광석 시인은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된 김남주 시인의 석방을 위해 혼신의 힘을 바쳤다.
채광석이 출간한 옥중 서간문집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와 사회평론집 <물길처럼 불길처럼> 첫시집 <밧줄을 타며> 등의 저서는 문단적 화제가 되었고, 대학가 운동권의 필독서가 되었다.
문학평론가 임헌영은 1985년에 출간된 첫시집 <밧줄을 타며> 발문에서 "그의 시에서는 어쩔수없이 인생 전체를 민중과 민족과 민주화의 대열에 투신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본능으로서의 체질화된 행동적 민중상을 느낀다."고 평한 바 있다.
● <자실> 기관지 발간, <민족문학의 밤>, <민족문학교실>을 주도한 채광석
<자실>이 재창립된 후 채광석은 초대 총무간사와 집행위원으로 자실 활동의 실질적 리더로서 이 조직을 이끌었다. 또한 그는 풀빛출판사 편집주간으로 나병식 사장, 김명인(문학평론가) 편집장과 함께 출판문화운동을 펼쳤다.
광주 5월 민중항쟁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등과 1980년대 민중시 운동을 주도한 <풀빛 판화시선> 발간을 주도했다. 채광석 편집주간에 의해 김지하의 첫시집 <황토>가 금기의 영역에서 탈출해 독자대중의 품에 안길 수 있었고, 박노해의 첫시집 <노동의 새벽>이 출간될 수 있었다. 그는 출판을 통한 민주화운동에도 헌신했던 것이다.
채광석이 자실의 총무간사로서 맨 먼저 한 일은 ‘도서출판 이삭’(대표: 소병훈, 현 민주당 국회의원)에서 문고판 형식의 기관지를 발간하는 사업이었다.
<문학의 자유와 실천을 위하여>라는 부제로 출간된 자실 기관지 제1집 <민족의 문학 민중의 문학>(1985년 2월 5일 발행)을 시작으로 제2집 <자유의 문학 실천의 문학>, 제3집 <노동의 문학 문학의 새벽>, 제4집 <5월의 노래 5월의 문학>, 제5집 <민족문학>을 연속 간행했고, 지양사에서 <민족문학선집>을 기획출판하여 문단과 독자들의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때 나는 김남일 작가, 강태형 시인과 함께 자실 기관지 편집간사로 활동했는데, 이삭출판사 소병훈 대표(현재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민주당 8·29 전당대회에 최고위원으로 출마했다)와 지양사 박경희 대표의 희생과 헌신을 잊을 수 없다.
5공치하 경찰은 <자실> 기관지가 출간될 때마다 판금조치와 함께 전국 서점에서 압수조치를 강행했다.
1985년 8월 27일, 서울시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기관지를 5회에 걸쳐 계속적으로 불법 발행하여 언론기본법을 위반한 이삭출판사의 출판등록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자실은 즉각 항의성명서를 발표했고 기자회견을 했다.
이후 이삭출판사는 산하출판사로 새롭게 재출발해 출판활동을 전개했다.
‘자실 기관지’ 발간 사업과 함께 채광석은 <민족문학의 밤>을 연속 개최했다. 경찰의 집회장 원천 봉쇄조치로 행사가 무산된 적도 있지만, 그는 이 사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1986년 9월부터 10월까지 1개월 동안 여의도 여성백인회관 강당에서 10회에 걸쳐 <제1회 민족문학교실>을 개최하는 기획력과 기동성을 보여주었다. <민족문학교실>이 개최된 서울 여의도 여성백인회관 강당에는 500여 명이 넘는 수강생들이 자리를 가득 채웠고, 그 열기는 매우 뜨거웠다.
이러한 자실의 활동은 언론과 문단 안팎의 관심과 주목을 받았고, 정치권력에 의해 수난 받고 있는 문인단체로서의 위상을 대내외에 보여줬다.
그 결과 ‘자실’은 전두환 군사정권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한국의 대표적 문인단체로 자리매김될 수 있었다.
● <4․13호헌조치> 반대 성명으로 직선제 투쟁을 이끈 채광석
전두환 정권이 1987년 <4․13호헌조치>로 대통령 직선제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염원을 깡그리 짓밟자 채광석은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그는 <4․13호헌조치>에 반대하는 문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넣어 성명서를 발표하고자 했다.
이는 재야 사회단체에서 최초로 시도한 기명(記名)의 성명서였다.
문인들이 자신의 실명을 담보로 전두환에 저항하고자 했다. 당시 대통령 직선제를 염원하는 국민들과 재야 세력을 압살하기 위해 전두환이 군대를 출동시킨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을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광석은 <4․13호헌조치> 발표되자마자 곧바로 서명운동에 착수했고, 그 결과 1987년 4월 29일, <4․13조치에 대한 문학인 193인의 견해>라는 호헌반대 문학인 성명서를 언론에 발표했다.
동아일보 등은 <문학인 193명 개헌촉구 성명> 제하의 기사를 사회면 톱기사로 즉각 보도했고, 서명자 전원의 이름을 게재했다. 자실의 성명서가 발표된 후 각 사회단체의 호헌반대 성명이 연이어 쏟아져 나왔다.
이로써 자실은 1987년 ‘6월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수행했다. 6월항쟁 당시 ‘자실’ 문인들은 채광석의 독려 아래 골방에서 뛰쳐나와 거리와 광장에서 시와 소설을 썼던 것이다.
● 민중적 민족문학의 독전관, 채광석
김남일 작가가 언급한 바처럼 채광석에게 문학은 곧 삶이요 싸움이요, 끊임없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운동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는 기존의 문단적 타성과 관념에 철저히 도전했다. 억압된 정치질서와 거짓 문학정서에 맞서서 사투를 벌였으며, 그 판갈이 작업에 앞장섰다.
아울러 황지우 시인의 표현에 따르면 채광석은 <민중적 민족문학의 독전관(督戰官)>으로서 한국 민족문학의 맥통을 계승했고, 그 재창조 작업에 떨쳐나섰다.
1948년 7월 11일 충남 태안군 안면도에서 태어나 1987년 7월 12일, 서른아홉의 나이로 요절했던 채광석 시인….
그의 문단활동은 5년 남짓에 불과했지만, 채광석은 ‘운동으로서의 문학’에 적극 매진하면서,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민중문학’ 혹은 ‘민중적 민족문학’을 1980년대 문학의 주류로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채광석의 헌신과 희생으로 <자실>은 명실공히 한국의 대표적 문인단체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1987년 7월 12일 새벽 2시, 서울 마포 아현동에서 채광석 시인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했다는 그날의 부음(訃音)은 문단과 재야 운동권에 큰 충격파를 안겨주었다.
● 아, 차마 실감할 수 없었던 채광석 시인의 죽음
우린 채광석의 죽음에 전혀 실감할 수 없었다. 김정환 시인의 표현처럼 그는 우리에게 슬퍼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모든 사람이 맞은 그 죽음을 그 누구보다도 어이없게 맞이했다.
그의 장례가 치러진 <세브란스병원> 영안실은 피울음과 통곡과 아우성이 그칠 줄 몰랐다.
조문객들은 한없이 울다가 까무러치다가 그의 돌연한 죽음을 원망했다. 1987년 7월 14일,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민통련> 주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주언론운동협의회, 민족미술인협회,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 민중문화운동연합 등 재야사회단체가 망라된 가운데 <민족시인 故채광석 민주문화인장>이 엄수되었다.
채광석 시인 타계 후 문단과 재야사회단체는 장례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때 이문구 작가는 묘자리를 정하는 ‘치산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지관을 대동하여 <팔당 공원묘지>(현, ‘자하연 팔당묘원’)에 묫자리를 잡았다.
발인후 장지인 <팔당 공원묘지>에 도착해 보니 뜻밖에도 묘소는 산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가파른 산정 위로 운구를 해야 했기에 그날 젊은 문인들은 고생깨나 했다.
그 전날에 폭우가 엄청 쏟아진 탓에 산언덕으로 올라가는 비포장 황톳길은 숫제 뻘밭 구렁이었다. 이 때문에 운구를 담당한 젊은 문인들은 땀투성이가 되었다. 몇 발자국을 걷다가 이내 힘에 부쳐 수시로 운구위원을 교대했지만 숫제 제자리 걸음이었다.
ㅡ “야 뭣들 해, 빨리 좀 가봐! 왜들 그러는 거야!”
산언덕 위로 올라채어
운구해야 하니, 하중이 뒷사람들에게 급속히 쏠린 탓에 빨리 좀 가라고 뒤에서 아우성을 쳐댔다. 그날 문인들은 “아따 살아서도 무지하게 고생시키더니, 형님 너무하오, 너무해!” 하면서 거의 울상이었다.
<통일문화의 큰일꾼 민족시인 채광석의 묘>라는 그의 묘비명.
작가회의 문인들은 채광석 시인이 타계한 후 주기 때마다 버스를 대절하여 묘소참배를 했다. 참배 후 뒤풀이는 팔당의 붕어찜 식당에서 했다. 붕어찜에 소주라! 그 뒷풀이에서 우리는 채광석 형과 얽힌 여러 일화를 쏟아내기도 했다.
1989년 7월, 타계 후 2주기에 맞춰 풀빛출판사에서 <채광석 전집>이 전 5권으로 완간되었고, 2000년 7월 12일, 채광석 시인의 시비(詩碑)가 그의 고향인 충남 태안군 안면읍의 자연휴양림 안에 건립될 수 있었다. 13주기가 되는 그날 채광석의 시 <기다림>을 수록한 시비 제막식을 가졌던 것이다. 광산 구중서 선생의 글씨, 조각가 김운성 (평화의 소녀상 조각가)의 제작으로 충남 안면도 휴양림의 푸른 솔밭 사이에 우리는 채광석 시비를 세울 수 있었다.
지난 2017년 7월 11일, 30주기를 맞아 나는 한국작가회의 문인들과 5.22사건의 주역들, 유족인 강정숙 여사와 아들 수왕과 함께 팔당 자하연 묘소를 참배한 적이 있었다.
● 5월 민주영령 곁으로 되돌아온
고 채광석 선생이여
고 채광석 시인 33주기를 맞아 2020년 8월 6일 오후 1시, 광주 운정동의 <국립 5.18민주묘지>로 이장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뜻깊은 일인가.
문학평론가 구중서 선생이 평가했듯이 채광석은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았지만 80년대 민중문학의 기수로서 그가 온몸으로 추구했던 민족문학, 민주화, 민족통일의 큰길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아, 그 사람 채광석! 그는 안면도의 푸른 솔, 금강송 같은 사내였다.
파란과 격동의 1980년대를 그와 함께 통과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지금도 나는 ‘채광석’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한없이 울렁거린다.
그가 타계한지 33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그는 우리들 심장 속에 살아 꿈틀거린다.
그야말로 전방위적, 전천후적, 전무후무한 인생을 살다가 어느 날 거짓말처럼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난 채광석 시인!
살아남은 우리가 그의 이름을 다시금 호명하는 것은 그가 남긴 숙제를 우리들이 마저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없는 우리들의 모임, 그가 없는 우리들의 운동/그가 없는 우리들의 사랑, 그가 없는 우리들의 투쟁/그가 없는 우리들의 죽음, 그가 없는 우리들의 부활/그가 없는 우리들의 건설은 상상할 수 없다" ㅡ 김정환 시 <채광석> 중에서
ㅡ펌; 페이스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