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가의 죄는 사물들 자체나 그것들의 관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다. 그릇된 인식은 그 어떤 욕정에 의해서 생겨나거나 선을 위해서 사물을 탐구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43]
㈜ : 그릇된 인식은 참된 인식에 반대되는 모든 거짓 교설이나 이단을 나타내기 위하여 에바그리우스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다. 타락한 관상가는 이단의 지지자가 된다. 관상가의 죄는 더 이상 『프락티코스』75장에서 말하는 욕정적인 생각이 제시하는 금지된 쾌락에 동의하는 행위나 이성적 성격의 행위가 아니라 오류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오류는 단지 이성의 과실에만 기인하지 않고 관상가가 여전히 욕정에 매여 있는데서 유래한다. 그 오류는 세상에 대한 사랑에서 생겨난다.
우리는 의로운 그레고리우스에게서 관상을 위해서는 현명, 용기, 절제, 정의 이 네 가지 덕이 있다는 것도 배웠다. 그는 현명의 역할이 정신적이고 거룩한 능력들(천사들)의 존재이유와는 상관없이 그것들을 관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것들은 오직 지혜를 통해서만 계시된다고 그는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용기의 역할은 싸움의 순간에도 진리 안에 항구히 머무는 것이며, 실재하지 않는 것에 모험하지 않는 것이다. 처음에 씨 뿌리는 자에게 씨앗을 받는 것과 나중에 씨 뿌리는 자를 거부하는 것이 절제의 고유 역할이라고 그는 대답한다(마태 13,25 참조). 정의의 역할은 각 사람에게 그 수준에 따라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즉, 어떤 것들은 모호하게 말하고, 다른 것들은 비유들을 통해 알게 하고, 또 어떤 것들은 단순한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44]
진리의 기둥(1티모 3,15) 카파도키아의 바실리우스가 말했다. ‘사람들로부터 오는 인식은 공부와 꾸준한 훈련을 통해서 강화되지만,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인식은 정의, 분노의 억제, 자비로써 강화된다 첫 번째 인식은 여전히 욕정의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 인식은 오직 아파테이아(내적 평정)에 이른 사람들만이 얻을 수 있다. 게다가 그들은 기도 중에 자기를 비추는 정신의 고유한 빛을 관상한다. [45]
이집트의 거룩한 등불 아타나시우스가 말했다. '모세는 식탁을 북쪽으로 두라는 명령을 받는다(탈출 26,35 참조). 관상가는 누가 자기를 거슬러 말하는지 알아야 하며, 모든 유혹에 용감하게 맞서야 하고 나타나는 사람들(제자들)을 열성적으로 양육해야 한다.’* [46]
㈜ : 그레고리우스는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 이단을 거슬러 오랜 투쟁을 했기에 그를 일컬어 ‘교회의 기둥’이라고 했다. ‘등불’은 주교에게 사용되는 은유적 표현이다. 오리게네스는 등불을 남쪽에 두어 북쪽을 바라보고 거기서 오는 사람을 살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항상 깨어 부지런히 악마의 속임수를 살펴야 하는데, 이는 늘 유혹이 어디에서 오는지, 원수가 어디에서 나타나는지, 적이 어디에서 슬그머니 끼어드는지를 알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사실 악령(여기서는 북쪽에서 오는 자와 동일시됨)을 효과적으로 대적하기 위해서는 악령을 식별하는 일이 중요하다. 『안토니우스의 생애』 43장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어떤 환영이 나타나면 당황하지 말고 먼저 용기 있게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이렇게 질문하십시오. ‘너는 누구고 어디서 왔느냐?" 악령을 식별하는 것은 단지 그가 어떠한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관찰을 통해 그 악령에게 적절히 응수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참조: 『프락티코스』 43장, 50장, 51장).
세라피온이 말했다 ‘정신은 영적 인식을 마셨을 때 완전하게 정화되고, 애덕은 정념으로 불붙은 부분을 치유하며, 나쁜 욕망의 흐름은 고행을 통해 멈추어진다.* [47]
㈜ : 세라피온은 성 아타나시우스의 친구였다.
수행의 목적은 정신을 정화하여 욕정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자연학의 목적은 모든 존재 안에 감추어진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을 사물에서 멀어지게 하여 제일원인(第一原因)을 향해 돌아서게 하는 것, 그것은 신학의 한 선물이다.* [48]
㈜ : 수행은 영혼의 욕정부를 치유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수행의 목적은 수행을 통해 정신 그 자체를 정화하여 관상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다. 관상가는 어떤 사람에게는 수행을 가르치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영지적 진리를 가르치면서 불순한 자를 정화하고 순수한 자를 비추려 한다(3장 참조). 이는 그들을 신학에 적합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그러나 신학에의 접근이 단지 가르침에만 매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은총의 선물이기도 하다.
죄인을 구제하는데 도움이 되는 어떤 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항상 원형(原型)을 바라보면서 형상을 새기려고 노력하라.* [50]
㈜ : 관상가는 자기 가르침을 통해 죄인이 다시 일어나서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최초 상태로 돌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항상 원형이신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따라서 관상가는 어느 정도 신학자여야 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이다(창세 1,26 참조). 에바그리우스는 여기서 관상가 자신 안에 신적 유사성을 완성하도록 노력하라고 그를 초대하고 있다. 관상가는 원형이신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온전한 형상을 자신 안에 새김으로써 자기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형상을 보여주어야 한다.
첫댓글 "수행의 목적은 정신을 정화하여 욕정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관상을 위해서는
현명, 용기, 절제, 정의 이 네 가지 덕이 있다는것도 배웠다.
... 사실 그것들은 오직 "지혜"를 통해서만 계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