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언 1
나이가 들면서
눈이 침침한 것은
필요 없는 작은 것은 보지 말고
필요한 큰 것만 보라는 것이며
귀가 잘 안 들리는 것은,
필요 없는 작은 말은 듣지 말고,
필요한 큰 말만 들으라는 것이고
이가 시린 것은,
연한 음식만 먹고 소화불량 없게 하려 함이고.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운 것은,
매사에 조심하고 멀리 가지 말라는 것이지요.
머리가 하얗게 되는 것은,
멀리 있어도 나이든 사람인 것을 알아보게 하기 위한 조물주의 배려랍니다.
정신이 깜박거리는 것은,
살아온 세월을 다 기억하지 말라는 것이니
지나온 세월을 다 기억하면 아마도 머리가 핑 할 터이니
좋은 기억, 아름다운 추억만 기억할 터이고,
바람처럼 다가오는 시간을
선물처럼 받아들여,
가끔 힘들면 한숨 한 번 쉬고 하늘을 볼 것이라
멈추면 보이는 것이 참 많소이다.
명언 2
겸손은 사람을 머물게 하고,
칭찬은 사람을 가깝게 하고,
넓음은 사람을 따르게 하고,
깊음은 사람을 감동케한다.
명언 3
세상에서 지극히 천하고 하소연할 곳 없는 자도 백성이지만..
세상에서 무겁기가 높은 산과 같은 백성이다.
백성을 떠받들면 세상에 무서울 것도 못할 것도 없다.
명언 4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은 절용(아껴 씀)에 있고 절용의 근본은 검소함에 있다.
검소한 후에라야 청렴할 수 있고 청렴한 후에라야 자애로울 수 있으니
검소야말로 목민하는 데 가장 힘써야 할 일이다.
어리석은 자는 불학무식해서 산뜻한 옥에 좋은 갓을 쓰고
좋은 안장에 날랜 말을 타는 것으로 위풍을 떨치려고 한다.
그런데 신관의 태도를 살피는 아전들은
먼저 신관의 의복과 안마(鞍馬)의 차림새를 알아보고,
만약 사치스럽고 화려하면 생긋 웃으면서 "알 만하다"고 하고
만약 검소하고 질박하면 놀라면서" 두렵다"고 한다.
-정약용의 목민심서 중에서-
500권이 넘는 정약용의 방대한 저서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목민심서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듬뿍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목민'이란,
백성을 기르는 것, 즉 백성을 다스리는것을 뜻하며
당시 유배중이었던 정약용은 마음으로나마
백성을 다스리고자 [목민심서]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자서를 보면 정약용이 [목민심서]를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는지,
그가 백성들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정약용이 살았던 조선 후기는
탐관오리의 횡포가 심했고,
흉년에 전염병까지 도라 백성들의 삶이 고달팠던 시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약용은 백성을 가장 가까이에서 다스리는
목민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오랜연구 끝에 목민심서를 펴냈습니다.
목민심서에는 목민관이 임명을 받고
고을에 부임할 때부터 임기를 마치고
고을을 떠날 때까지 수행해야 할 주요 업무와 자세가 담겨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그동안 직접보고 들었던 지방관리들의
횡포를 관리가 아닌 백성의 입장에서 낱낱이 폭로했다는 점입니다.
[목민심서]에는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나라에 봉사하며,
백성을 사랑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자세는 당시 수령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이기도 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인격을 수양하고 현명하게 문제를 해결하는데
훌륭한 지침이 될 수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시련
1800년, 정약용이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힘이 되어준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조정에서 권력을 잡은 세반대파를 내치기 위해
조선의 유교 이념과 많이 다르다는 이유를 들어
1801년 천주교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이때를 [신유박해]라고 하며
많은 천주교 신자가 순교했습니다.
한때 천주교를 접했던 정약용 역시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를 가야만 했습니다.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학문연구에 몰두하였고
500여권의 책과 2500여 수의 시를 지었습니다.
1818년, 18년의 귀양살이를 끝내고
고향에 돌아온 후에도 그는 꾸준히 학문을 연구하며
책을 펴냈고, 1836년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