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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광명시의 위인과 인물을 알아볼려고 하는데..
쳐보니 뭔 문화재 밖에 없더라구요..
1. 광명시 위인 - 5~7명
2. 광명시의 문화재
내공 50겁니다.
그리고 질문과 관계없는 말 신고하고 내공냠냠 등 쓸때없는 소리는
신고갑니다.
<답변>
광명시의 위인은 광명시청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광명시청 홈페이지에 3분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광명시의 위인)
1.이원익(1547~1634)
조선시대의 이름난 학자이며 정치가인 오리 이원익 선생은 1547년(명종 2년) 함천군 이억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자는 공려, 호는 오리, 시호는 문충으로 4대조가 태종의 아들인 익녕군입니다.
1569년(선조 2년)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였습니다. 안주목사로 있을 때는 중앙정부에서 양곡 1만석을 지원받아 백성들에게 씨앗으로 나누어주어 가난을 구제했고, 군인의 의무도 줄여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안주 지방에 처음으로 뽕을 심어 누에를 치게 하여 백성들의 살림을 윤택하게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도순찰사가 되어 왜병토벌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되찾은 공으로 호성공신 완평부원군에 책봉되었습니다. 광해군이 즉위하던 해에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는데 광해군이 난폭해지자 목숨을 걸고 부모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우애, 방탕한 생활에 대한 경계, 국가재정의 절약 등을 요구하였습니다. 이후 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하다가 홍천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영의정에 복귀한 후 자신을 박해한 광해군의 처형을 반대하여 유배에 그치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오리 이원익 선생은 성품이 강직하고, 생활이 소박했으며, 맡은 일에 충실했고 정의감이 투철하였습니다. 특히 선조, 광해군, 인조 등 3대에 걸쳐 다섯차례 영의정을 지냈으나 집은 두어 칸의 초가였으며,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청빈하여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정묘호란 후 인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향인 소하동으로 내려가 말년을 보냈습니다. 저서로는 「오리집」, 「오리일기」가 있고 작품으로는 「고공답주인가」가 있습니다.
2.정원용 (1783~1873)
본관 동래. 자 선지. 호 경산. 시호 문충. 1802년(순조 2)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를 거쳐 검열·대사간 등을 지내고 1821년 관서위유사로서 평안도의 민폐 실정을 조사·보고하였다. 1831년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1837년(헌종 3) 예조판서에 승진한 뒤 이조판서를 거쳐 1841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1849년 헌종이 승하하자 영의정으로서 강화에 사는 덕완군 원범의 영립을 주장, 철종으로 즉위하게 하였다.
그후 중추부영사·총호사 등을 지내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1863년 철종이 승하하자 원상이 되어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정사를 맡아 보았으며, 이듬해 실록청 총재관으로 《철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하였다. 저서에 《경산집》 《황각장주》 《북정록》 《문헌촬요》 《수향편》 등이 있다.
3.이순신 (1554~1611)
충무공 이순신과의 구별을 위해 무의공 이순신, 입부 이순신으로 불린다.
본관 전주, 자 입부, 시호 무의이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 의주판관으로 있다가 상관의 뜻에 거슬려 해임당하고 집에 돌아와 있었는데, 북변이 소란하자 혜산진 첨절제사로 특명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휘하의 중위장으로 옥포 등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뒤로는 항상 선봉장이 되어 부산·안골포 등지에서 적군을 무찔렀다.
왕의 특지로 호서수군절도사가 되었으나 얼마 후 좌천되고, 1년 만에 유도방호대장에 오르고 충무공 이순신이 원균의 후임으로 다시 통제사가 되자, 또 휘하의 중위장으로 활약하였다.
1598년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한 후 모든 군사를 이끌고 개선하니 선무공신이 되고 완천군에 피봉되었으며, 그후 전라도병마절도사로 재임 중 병사하였다.
(광명시의 문화재)
1.이원익 초상
종 목 보물 제1435호
지 정 일 2005.07.07
소 재 지 경기 광명시 소하2동 1086 충현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이 영정은 오리 이원익(1547~1634)이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녹훈된 것을 기념해 제작된 것으로 같은 해 조성된 청난공신과 선무공신의 도상에 비해 사모의 모양이 다소 변한 것으로 보아 책록된 시기보다 몇 년 뒤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영정의 주인공인 오리 이원익의 자는 공려, 호는 오리, 본관은 전주이며 태종의 아들 익녕군 치의 현손이며 이억재의 아들로 태어났다. 1569년(선조 2년)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호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백리로 유명하다.
영정의 형태는 축으로 장정되어 있으며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의 전신상으로 그 모습은 오사모에 흑단령을 입고 공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사모의 양쪽에는 운문이 들어가 있다. 얼굴에는 음영 효과가 거의 들어가 있지 않고 이목구비의 형용은 선묘 위주로 되어 있으며 족좌대 위에 흑피혜와 채전이 깔려 있어 공신상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2.영회원
종 목 사적 제357호
지 정 일 1991.10.25
소 재 지 경기 광명시 노온사동 산141-20
시 대 조선시대
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의 무덤이다.
민회빈 강씨는 강감찬의 19대 손녀이기도 하며,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로 끌려가 많은 고생을 하기도 했다. 귀국 후 소현세자가 죽자 인조의 후궁 조씨 등이 민회빈이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왕실을 저주한다는 모함을 하여, 궁궐에서 쫓겨나 1646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숙종 44년(1718)에 죄가 없음이 밝혀져 다시 복위되고, 고종 7년(1903)에는 무덤을 영희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무덤 주변에는 많은 석물들이 있으며 비석과 정자각은 남아있지 않다.
3.이원익선생 영정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0호
지 정 일 1978.11.10
소 재 지 경기 광명시 소하동 1086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원익(1547∼1634) 선생의 초상화이다. 선생은 임진왜란 때 왕을 모시고 의주까지 피난시킨 공을 세워 호성공신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림은 머리에 검은 사모를 쓰고, 관복을 차려 입고 호랑이 가죽이 깔린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으로, 가로 70㎝, 세로 150㎝의 크기이다. 초상화를 그린 양식이 언뜻 공신에 오른 것을 기념하는 공신도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관복의 가슴에 있는 학무늬의 흉배로 보아 당하관 재직시에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은 오른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오른손에 부채를 쥔 채 왼손에 대를 잡고 있는데 손의 표현이 미숙하다. 얼굴에는 음영효과를 주었으며, 수염·눈썹·뺨 등은 묵으로 엷게 칠한 후 묵선으로 다시 덧칠하였다. 눈은 금가루에 아교를 개어 칠한 것으로 보일 만큼 눈동자 주위에 금니가 남아있다.
선생이 공신의 서열을 받기 전인 선조 13년(1580)에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대부분이 왼쪽으로 얼굴을 돌린데 비해 얼굴을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어 주목되는 작품이다.
4.오리 이원익 영우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1호
지 정 일 1996.12.24
소 재 지 경기 광명시 소하2동 1084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문신 오리 이원익(1547∼1634)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이원익 선생은 선조∼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분으로 성품이 소박하고 청렴 결백한 삶을 살았다.
이 사당은 충현서원 안에 선생의 종택과 함께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숙종 19년(1693)에 지었다고 한다. ‘오리영우’라는 현판은 숙종이 내린 것이다.
규모는 앞면 1칸·옆면 2칸이고,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평면은 정사각형인데 앞면에 퇴칸을 두어 출입구가 안쪽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옆면이 2칸이 되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장식한 익공계 양식으로 19세기 말의 수법을 보이고 있다. 옆면에 만든 방화벽, 건축재료의 단면 역시 조선 후기의 수법을 나타내고 있으나 기단과 기둥을 받친 초석은 17세기 것으로 추정한다.
작은 크기의 건물이지만 조선 후기 사당 형식을 잘 갖추고 있다.
5.충현서원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80호
지 정 일 1985.06.28
소 재 지 경기 광명시 소하2동
시 대 조선시대
이원익을 비롯하여 강감찬·서견의 뜻을 기리며 제사 지내던 곳이다.
이원익(1547∼1634)은 선조 2년(1569)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이후 다섯 차례 영의정을 지냈으나 일생을 청백리로 꼽힐만큼 검소하게 살았다. 이곳은 원래 이원익이 고려의 강감찬과 서견을 모실 사당을 세우려 했던 곳이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효종 9년(1658) 후학들이 사당을 지어 이원익을 같이 모시고 삼현사라 하였다. 이후 충현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숙종 2년(1676) 나라에서 ‘충현서원’이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현재 서원은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았는데 이는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페령으로 철거된 것으로 추정한다.
6.이원익선생묘 및 신도비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85호
지 정 일 1985.09.20
소 재 지 경기 광명시 소하동 산137-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 문신인 오리 이원익(1547∼1634)의 묘이다.
선조 2년(1569)에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임진왜란 때는 평양탈환 작전에 성공하여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대동법을 건의하여 불합리한 조세제도를 시정하고 백성의 부담을 덜었다.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지만 오막살이 초가에서 청빈하게 살아 청백리에 선정되었다.
그의 묘는 부인과의 합장묘이며 봉분이 2기인 쌍분이다. 봉분 앞에 묘비·상석·향로석 등이 있고, 좌우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 1쌍씩 서 있다.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던 비)는 묘역 아래 길가에 있는데, 비석 윗부분에는 두마리 용이 여의주를 물고 다투는 모양이 생동감있게 표현되었다. 이준이 글을 짓고 허목이 글씨를 쓴 비문은 마모가 심해 내용을 알기 어렵다.
7.가학동지석묘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8호
지 정 일 1985.06.28
소 재 지 경기 광명시 가학동 산104
시 대 청동기시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가학동 고인돌은 탁자식으로 원래 10기 정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1기만 남아 있다. 덮개돌의 길이는 2.9m이며 4개의 받침돌 중 3개는 무너졌다. 주변 지역의 고인돌에서 가락바퀴·돌화살촉·반달돌칼 등과 청동기시대의 집터 1기가 조사되었다.
이곳은 고인돌 위에서 학들이 놀았다고 하여 마을 이름이 가학동이 됐다고 하며,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마을의 번영과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8.오리 이원익종택 및 관감당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0호
지 정 일 1996.12.24
소 재 지 경기 광명시 소하2동 1086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선조(재위 1567∼1608), 인조(재위 1623∼1649)때 영의정을 지내고, 청백리로 이름 높던 오리 이원익 선생의 종가이다. 인조 8년(1630)에 2칸 초가인 선생의 집에 비가 새자 왕이 새 집을 하사하였다. 효종 9년(1658)에는 사당을 짓고, ‘충현서원’이란 현판을 받기도 하였으나 후에 서원은 철거되었다. 옛 집터에 1916년 사랑채인 관감당을 새로 짓고, 이듬해에는 안채를 들이고, 1940년에는 문간채를 새로 지었다고 한다.
안채와 문간채가 튼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사랑채는 그 옆에 따로 떨어져 자리잡고 있다. 안채는 13칸 반 규모에 ㄱ자형 구조를 이루어 건넌방 2칸·대청마루 3칸·안방 2칸을 배치하였고, 안방 앞쪽에서 꺾여 부엌 3칸·온돌방 1칸이 놓여 있다. 문간채는 13칸 규모로, 대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부엌·광이 있다.
현대식으로 고친 부분도 있으나, 20세기에 세운 경기지역 살림집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9. 철산동 지석묘
종 목 광명시 향토유적 제1호
지 정 일 1985.12.24
소 재 지 경기 광명시 철산동 222-1번지(시민회관 앞)
시 대 청동기시대
거석숭배 신앙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는 청동기 시대의 묘제 또는 제천단으로서 외형상으로는 남,북 2개의 지석이 개석을 떠받치고 있는 탁자식 지석묘이다.
1985년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발굴 이전복원작업을 의뢰하여 광명고등학교 교정 입구에 이전 복원하였다가 1990년 8월 시민회관 옆의 장소로 이전 관리하고 있다.
10. 정원용 묘
종 목 광명시 향토유적 제2호
지 정 일 1985.12.24
소 재 지 경기 광명시 노온사동 산 178-3번지
시 대 조선시대
조선후기의 문신 정원용(1783~1873)의 묘소로 정원용은 순조 2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쳤으며 철종13년(1862)에 궤장을 하사받았다.
묘는 정경부인 강릉김씨와 합장되어 있으며 묘 앞에는 묘비와 상석 향로석이, 좌우에는 망주석이 있다. 묘비는 화강암 비석에 옥개를 얹었으며 비문은 맏아들인 우찬성 기세가 짓고 글씨는 손자인 홍문관 부제학 범조가 썼다.
11. 이순신 묘
종 목 광명시 향토유적 제4호
지 정 일 1987.09.10
소 재 지 경기 광명시 일직동 산26-7번지
시 대 조선시대
무의공 이순신(1554~1611)은 조선중기 선조 때의 무신으로 양녕대군의 후손이다. 선조11 년(1578년) 무과에 급제한 후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무공 이순신의 중위장 이 되어 당황포 싸움과 한산도 해전, 부산포 해전에서 왜선을 크게 격파하였다. 선조 31년(1598년)에는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서 노량해전에 참전하여 충무공이 전사하자 전군을 지휘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604년 선무공신 3등에 책록되고 완천군에 봉해졌다.
묘소는 장대석으로 호서을 둘렀는데 직사각형(방형)으로 되어있다.
묘 앞에는 상석, 향로석, 문방석, 그리고 좌, 우에는 망주석과 문안석이 있다.
12. 영모재 및 분성군 김응수 가전고문서
종 목 광명시 향토유적 제5호
지 정 일 2005.01.21
소 재 지 경기 광명시 노온사동 648-1번지(동창골)
시 대 조선시대
노온사동 동창골에 있는 분성군 김응수(1565~?)를 기리는 사당인 영모재와 집안에 가전되어오던 15점의 고문서를 일괄 지정하여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하였다.
김응수는 임진왜란 시 호성공신 3등에 책록된 충신으로 묵묵히 국가를 지키는데 헌신한 인물이다. 영모재는 1850년대 건립 이후 1940년 개축한 것으로 문화말살이 자행되던 일제강점기에 전통 양식을 지켜 건립한 건축물로서의 의의가 잇다. 이외에도 같이 지정된 15점의 가 전고문서는 김응수의 한성판윤 증직교지 및 아들인 김몽상의 무과 급제교지 등이다.
집에서 하는 부업/재택알바 ... ... http://www.alv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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