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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와 도요히코 (0점) | 만나2(:영성자료) | 2007-10-07 오후 3:44: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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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와
도요히코 :1888. 7. 10 일본 고베[神戶]~1960. 4. 23 도쿄.] 청년시절 영어를 배우기 위해 성경반에 들어간 것이 계기가 되어 그리스도교도가 되었으며 그뒤 일본과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뒤 노동운동 및 사회복지사업에 뛰어들었고 고베의 빈민가에 들어가 살았다. 남자 보통선거권 쟁취운동에도 참여했는데 이 선거권은 1925년 입법화되었다. 일본 노동조합 총동맹의 결성을 돕는 등 노동운동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1921년과 1922년, 2차례에 걸쳐 투옥되기도 했으며 석방된 뒤에는 일본과 외국의 주요도시에서 대대적인 복음 선교운동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평화주의자로서 1928년 전국반전동맹을 결성하였으며 1940년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해 중국측에게 사과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이듬해 전쟁을 막기 위해 다른 사람들 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제2차 세계대전 뒤 일본으로 돌아와 여성 참정권 쟁취운동을 지도했다. 1921년과 1922년 감옥에 있을 때 처음으로 발표한 소설 〈사선(死線)을 넘어〉· <태양을 쏘며〉는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다. 〈새벽이 오기 전에〉(1924) 등의 소설 을 비롯하여 사회학연구서, 종교서, 알베르트 슈바이처 저작의 번역물 등 150권 이상의 저서가 있다.
그가 신학교 재학 때, 그는 학교에서 도보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빈민굴과 신학교 학장은 마이어스란 분이었는데, 이 가가와라는 학생을
무척 사랑했다. 가가와는 늘 허름한 복장을 하고 있어서 그가 새 양복을 사주었다. 그런데 가가와는 그날로 그 당부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날로 또 빈민굴로 내려가서 그 새 양복을 주고 돌아왔다. 그 빈민굴에 결핵 환자들이 많았는데 매일같이 그곳에 가서 같이 먹고 같이 자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그도 결핵에 걸리고 각혈까지 한 일도 있었다. 그는 선천적으로 이웃사랑 의 정신이 투철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 보여준 분으로 생각한다.
*********************************************************************** 가가와 도요히코 - 단
1명의 회심자 이 분은 중국에서 까지 빈민사역을 했던 크게 존경 받으셨던 분이셨는데 어느 정도로 가난한 사람을 사랑했는지는 일화에서도 볼 수 있다. 아주 심한 변비환자가 변비때문에 거의 숨이 끊어지는 그런 위급한 상황이 되자 그 환자 항문에 자기 입을 대고 침으로 그것을 녹이면서 빨아내어 사람을 살린 일화이다. 그런데 이런 가가와 도요히코를 만들어낸 분이 일본의 나가노라는 젊은 목사였다. 그가 북쪽의 카나사와 지역에 텐트를 치고 교회를 개척했는데 5년이 지나도 교인이 없었다.5년 만에 한 폐병환자가 찾아왔는데 그가 바로 가가와 도요히코였다. 처음엔 폐병환자인지 몰랐고 같이 식사를 하는데 청년이 기침을 하다가 피를 밥상에 쏟아 놓았다. 순간 나가노 목사님이 이걸 쫓아내야 하나 아니면 씻겨주고 밥을 먹여야 하나 고민을 하다그래도 5년 만에 제발로 찾아온 사람인데 내가 내쫓을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세수대야와 수건을 가져다 그것을 다 치우고 씻어주고 같이 밥을 먹었다. 그리고 폐병환자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가 방황하다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고 주님께 자기 생애를 드렸으며 신학교에 다니다가 폐병환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정학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가노 목사님이 그 청년을 위해 기도해주었는데 그날 밤 성령이 임해서 그가 예수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고 주님을 만나면서 그의 생애를 그렇게 괴롭게 했던 폐병도 완전히 치유를 받게 되었다.그리고 그는 다시 신학교 에 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평생 병들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사역을 하며 일본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까지도 큰 존경을 받았다. 나가노 목사님에게는 그가 평생 사역하는 동안에 회심시킨 오직 한사람이 가가와 도요 히코였다.그는 비록 한사람을 회심시켰지만 그 한사람은 너무나 큰 인물이었다. 일본 사회에 기독교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무엇이 진정한 예수그리스 도의 정신인가를 온 몸으로 보여준 한사람의 성자가 나가노 한사람을 통해서 마침내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었다. 헌신된 사람은 또 다른 헌신된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오늘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 을 더 넓혀주길 원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되길 원하고,날마다 하루하루의 자신의 삶이 생생한 하나님의 능력의 증언의 날이 되길 원한다면 먼저 우리에게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자신을 날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여야 한다. [글쓴이 : 다음카페'예훈~'임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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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삶!!!....<가가와 도요히코> 내어노았습니다. 후벼 냅니다. 니다. 변을 침으로 녹여서 빨아냈습니다. 하신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가 중국으로 건너 갔습니다.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당하는 사건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일본 패망당시에 중국 땅에 있던 일본인의 숫자는 200만 명에 달했으나, 그 중에 한 사람도 테러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있었던 것은 물론 입니다. 목사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나가노 목사가 더 위대하다하고 쓰고 있습니다.
"사선을 넘어서"를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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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천풍언
4살 때 아버지를 잃고 5살 때 어머니마저 잃어 본처 자녀들과 한 집에서 자라면서 얼마나 구박을 받고 학대를 당했는지 그는 살 의욕이 없었습니다. 그는 배다른 형제들 틈에서 갖은 구박을 받으면서 성장하였습니다. 늘 형제들로부터 ‘너는 기생의 아들이지!’ 하는 조롱과 비웃음이 따라왔습니다. 죽으려고 몇 번 생각했습니다. 그는 성격이 삐뚤어지기 시작했고 생각이 부정적이 되면서 점점 소외당하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규칙적으로 불교의 교훈을 철저하게 가르치기 위해 가문에서는 그를 절간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는 그곳 에서 불교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교훈을 철저하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가 열두 살 되든 해 어느 날 양지바른 곳에 앉아 있다가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어 토해보니 붉은 핏덩이였습니다. 검사를 해보니 폐결핵 3기였습니다. 그후 그는 10대 후반인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고 하루하루 희망 없이 살았습니다. 어느 날도 맥없이 마루턱에 앉아 있는데 어디서 북소리와 노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는 성탄절 날 구세군이 나팔을 불면서 노방전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하고 소리치며 지나갑니다. 어린 소년은 가까이 다가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서자도 사랑하십니까?’ ‘그럼요, 저 감옥에 있는 죄수도 사랑하십니다.’ 이 때 그는 성탄절날 예수님을 영접하고 즉시 그 대열에 따라 나섰고 전도 대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병엔 전혀 차도가 없었습니다. 대학 2학년 때에는 그는 폐병이 급격히 악화되어, 각혈하게 되었고, 그는 사선을 몇 차례나 넘는 극렬한 투병 속에서도 그는 성경이 손에서 떨어진 날이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병세가 악화되어 죽을 운명 내 인생의 마지막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자’ 하고, 1909년 크리스마스 전야에 그는 신가와 빈민굴 한 평짜리 오두막으로 이사하여 빈대와 벼룩이 우굴 거리는 빈민굴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엔 1) 병든 걸인 2) 폐결핵 환자 3) 버림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그들과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입고 있었던 옷가지마저 그들에게 벗어주며 간절히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돈이 모자랄 때는 굴뚝청소 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자기 밥으로 죽을 쑤어 함께 먹었습니다. 불량배들에게 맞아 앞니 4개가 부러지는 핍박을 이기고 주일학교를 세웠으며 그가 휴지를 주워 쓴 소설 ‘사선을 넘어서’가 베스트셀러 (당시 25만부)가 되자 그 인세를 모두 빈민들에게 나눠줬습니다. 다음해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처럼, 살아났고, 그는 일본 고오베 신학교에 들어갔고,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몇 개월도 살기 힘들다던 폐병 말기의 환자, 그는 그 뒤로도 수 십년을 더 살아 70을 훌쩍 넘겼고, 그의 삶은 일본을 넘어 중국과 한국의 상처 난 사람들에게까지 촉촉하게 젖어들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엄청난 저술을 했는데, 그가 저술했거나 번역한 서적은 자그마치 150권이 넘었습니다. 1927년 일본 노조를 최초로 설립하였고 1929년에는 일본 군부에 항거, 투옥되었다가 종전 후 실명상태에서 다시 빈민굴로 돌아와 사랑의 봉사를 계속했습니다. ‘당신 자신을 주시오’ 이것이 그의 신조입니다. 그가 바로 일본교회가 자랑하는 ‘가가와 도요히코’(하천풍언)목사님입니다. (1888-19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