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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참빛학교 열린교육강좌 2강 - 2부
행복한 아이 행복한 부모 교육 – 발달을 알면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다.
강사: 진병찬 선생님
일시: 2022년 6월 29일(수)
저녁7시30분~9시30분
2강 - 2부. 슈타이너의 인간이해와 발달론 – 앞서서 발달의 보호막을 깨트리지 마라.
서점에 가서 발달에 관한 책을 찾아보면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많습니다. 가장 많은 것이 ‘인지발달’에 관한 것입니다. 모든 부모님들의 관심사이기 때문에 돈이 좀 됩니다. 어떻게 하면 머리가 좋아지는지, 어떻게 하면 국어를, 수학을, 외국어를 잘 배울 수 있는지에 대해 인지발달론에서 답을 주고 있거든요. 언어발달 서적도 한때는 유행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성 발달, 감성 발달, 신체 발달에 이어 요즘은 다중지능이론이란 것도 유행이라고 합니다. 아직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에스큐(SQ)도 있습니다. 영성지수라고들 하지요. 이러한 기존의 발달론은 ‘발달을 알아서 발달 시기를 당기거나 발달의 정도를 수치적으로 높이려는 데’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제대로 된 발달, 아이의 행복한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야기하려는, 슈타이너는 인간존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발달론을 정리합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런 질문으로 시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의 발달에 대한 이해는 여기에 많이 빚지고 있습니다. 슈타이너처럼 발달을 본다면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을 나름대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 간략하게 소개를 해보려고 합니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인간은 네 개의 체(씨앗)를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첫 번째는 ‘물질체’입니다. 인간의 ‘육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생명체’입니다. 생명이 없는 돌과 생명이 있는 식물의 차이입니다. 과학은 ‘에너지’라는 말로, 동양에서는 ‘기’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슈타이너는 ‘의지’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세 번째는 감성체입니다. 식물과 동물의 차이입니다. 식물과 달리 동물은 희노애락의 감성을 표현합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자아체입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입니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나’에 대한 자각과 생각이나 정신과 같은 고차원적인 세계를 갖는 존재입니다.
발달론에서 이러한 슈타이너의 인간 이해에 대한 이론을 다음과 같이 가져옵니다. 아이를 이해하고 발달을 돕는 데에 도움이 많이 됩니다.
물질체는 10개월 동안 엄마 뱃속에서 양수로 보호를 받다가 탄생하게 됩니다. 건강한 아이의 탄생을 위해서 엄마는 많은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자궁 속 아이에게 양수를 통해 어떤 외부적인 조치를 취하면 더 좋은 아이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 같은가요? 슈타이너는 양수막으로 보호되고 있는 상태, 그 이상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준비를 하는 거라고 말합니다.
양수막으로 잘 보호되다가 10개월 후 물질체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후 7년 주기로 생명체, 감성체, 자아체가 차례로 탄생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 단계가 다음 단계의 보호막 안에서 다음 단계를 준비하며 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7세에 탄생하는 생명체는 감성체의 보호막 안에서 7년 동안 감성체의 탄생을 준비하고, 감성체는 자아체의 보호막 안에서 7년 동안 자아체의 탄생을 준비합니다. 그렇게 해서 스물 한 살이 되는 해에 자아체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각 단계에서 보호막을 뚫고 일찍 다른 조치를 (인위적으로)하는 것은 양수막을 뚫고 태아에게 외부적 조치를 취하는 일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현실 교육은 자아체를 깨우는 작업만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 의지가 죽고, 감성이 죽고, 정신만 깨어나는 인간이 된다는 말입니다.
의지가 없는 인간은 자기 신체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뭔가 하고 싶어도 몸을 움직이기는 싫어해서 빨리 포기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머리만 자꾸 키워서 지식교육을 시키면 의지의 무기력화를 조장하게 됩니다. 감성이 죽으면 상상력도, 상대에 대한 배려도, 감동도 없는 인간을 만듭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려면, 한마디로 양수(보호막)를 뚫고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요. 모든 단계가 마찬가지입니다.
0세~7세까지는(생명체 탄생전까지는) 생명작용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때의 교육은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방’으로 배우게 해야 합니다. 하루의 리듬을 자연스럽게 모범으로 보여주면 됩니다. 이때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거나 설득하기보다 ‘권위’로 교육해야 합니다. 해야할 것은 확실하게 권위를 가지고 지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도 안정감을 갖습니다. 이 시기에 일찍 생명체의 보호막을 깨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른의 권위 안에서 따뜻함과 안정감을 갖고 자라도록 해야 합니다. 이때는 온전하게 자기 신체를 키우는 데에 집중하는 시기입니다. 앞서서 보호막을 깨면 아이들이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됩니다.
7세~14세까지는 7세에 탄생한 생명체가 감성체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감성교육이 일어나야합니다. 예술교육은 물론이고, 상상과 호기심으로 배우고 관심에서 욕구가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이미지로 배우고 이미지로 정리합니다. 이 시기에는 생명체 안에서 이미지로 상상하는 감성적인 배움으로 감성체의 탄생을 준비합니다. 이때 이성을 마구 깨우면 감성은 죽습니다. 그냥 상상해서 그려보라고 하는 것 보다는 교사가 칠판에 먼저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이들에게 안정감을 줍니다. 그림을 그릴 때도 구체적인 형태를 그리는 것은 이성을 깨우는 활동에 가깝습니다. 빛그림은 젖은 종이위에서 물감이 퍼지면서 아이의 의도나 능력에 상관없이 형태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갑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기 아이들에게 빛그림이 도움을 줍니다. 순위를 매길 수 있거나 잘하고 못한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것보다 모두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아이가 경외로움을 느끼거나 감탄할 수 있는 것을 제안하는 것이 좋습니다. 안정감과 상상력 속에서 배우는 시기입니다. 예술과 감성교육을 통해 지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4세~21세까지는 지성의 힘으로 자아체의 탄생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감성체는 탄생해서 자라면서 자아체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전문적인 것과 지식에 대한 욕구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사춘기라는 혁명적인 시기를 겪습니다. 집단적인 갱문화나 약물 중독과 같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갈 수도 있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앞선 시기의 감성교육이 잘 보호되지 않고 머리만 앞서서 깨워져서 생기는 현상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긍정적인 예로는 이성적으로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연구와 탐색의 욕구가 생겨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겠지요.
(이상으로 슈타이너의 인간이해에 따른 발달론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아보았습니다.)
기존의 다른 발달론들은 아이가 보이는 문제적 행동에 대한 문제해결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그 문제해결 방법이라는 것이 결국 슈타이너가 말하는 보호막을 깨는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보호막은 아이가 그 시기 동안 충분히 성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 예를 들면, 남을 배려할 줄 알아야하고, 상황에 따라 현명한 판단도 좀 했으면 좋겠고.. 이런 생각이 이른 시기에 지도되면 보호막을 깨는 일일 수 있습니다.
(앞서서 보호막을 깨트리지 않기는) 정말 쉬운 방법인데, 왜 안 되는 걸까요? 다 부모의 욕구나 열망이 훨씬 크기 때문이겠지요. 그 욕심과 열망이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것들을 버리고 발달론 공부를 아이를 이해하는 데에 두는)발달론 공부라면 한번 해 볼만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슈타이너의 발달론에 대한 공부조차도 아이에게 도움이 안 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외국에서 온 강사(슈타이너 발달론 강사)가, 보호막이 잘 보호되려면 플라스틱 인형 같은 것은 좋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이 집에 있는 프라스틱 인형과 장난감을 다 버립니다. 아이는 울고불고합니다. 특별히 한 인형에 대한 애착을 많이 가지고 있던 아이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 강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인형에 아이가 영혼을 불어 넣었군요.” 이런 부모의 행동은 아이에 대해서는 폭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런 모습도 발달론 교육을 (잘못) 받아서 생기는 일이라고 할 수 있지요. 슈타이너의 발달조차도 우리가 머리로 이해하고 아이를 지도한다면 아이의 발달을 저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발달론은 아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아이를 이해하면 아이가 자기의 결대로 잘 자라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발달론을 깊이 공부하기 위해서는 큰 다짐을 해야 합니다. 먼저, 지금 내가 걱정하는 아이의 모습, 이것이 진정한 아이의 모습인지 내 마음이 만든 모습인지 구별해보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렇게 한 다음) 문제로 보이는 것이 지금 해결되는 거라고 판단되면 내 중심을 가지고 해결하고,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같은 갈등을 계속 겪더라도 아이를 믿으면서 가야합니다. (그럴 때라도) ‘꼭 된다’는 생각보다는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가는게 좋겠습니다. 두 번째는, 발달론 공부를 내가 생각하는 대로 아이를 바꾸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나와 아이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해보겠다는 다짐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질문있으면 해주십시오.
<질문1>
저는 과거에 그렇게 못했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더 애를 쓰면, 그 노력은 의미가 있을까요?
<진병찬 선생님>
그런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과거는 지금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지금까지 아이와 함께 걸어 온 이 길과 이 자리는 모두 최선을 다해 노력한 결과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시작하면 됩니다.
지금 현재, 만약 내가 만14세 이전에 아이의 이성을 깨우는 교육을 하고 있다면 지금부터 안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초등시기 아이들에게는 이성을 깨우는 공부는 안 하는 게 좋지만, 하더라도 감성적으로 예술활동으로 재미있게 즐기도록 해 주는 면 좋겠습니다. 하기 싫은 일, 특별히 지적 교육은 이성을 각성시키는 일과 같습니다. 호기심과 경외로움과 즐거움으로 하는 일이 되도록 하는 게 중요합니다. 보통 보면, 학원을 많이 다니는 아이일수록 자기 속에 경외심이나 호기심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 어쨌든지 주어진 것 빨리 끝내고 자기가 하고 싶은 다른 일, 예를 들면, 스마트폰 게임 같은 것으로 빠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과거에 못한 것 후회하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질문2>
설명해주신 슈타이너의 발달론처럼 자라면 행복할 것 같긴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자라서 21살이 되었을 때 지적 수준은 얼마나 될까요?
<진병찬 선생님>
지적수준이란 게 무엇인가요? 무엇을 위한 지식인가요?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서기 위한 지식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지적 수준은 비교할 수 없이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현재 보통의 21세 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끌고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이나 직장이 요구하는 스팩이 자기 삶을 끌고 갑니다. 대안학교도 완전히 자유롭지 않습니다. 대안학교 아이들도 집에서 학원에서 따로 학습을 시키곤 합니다. 만약에 올곧게 21살에 자아체가 탄생하게 된다면, 그 아이는 ‘누구처럼’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끌고 가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아이든 행복해야할 권리가 있습니다. 누구에 의해서든, 행복이 저지당해서는 안 됩니다. 행복이란, 있는 그대로 봐줘야 가능합니다. 자아체가 탄생한다는 것은 자기답게 자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보호막이 잘 보호된 아이는 ‘누구처럼’이 아니라 ‘나’답게 사는 것을 배워 온 아이고 그런 아이가 되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행복해지는 길이 있다면 다 젖혀놓고 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는 이유는 나의 경험치에서 나온 욕심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아이를 독립시킬 수 없는 경우도 있어서 그런 상황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는 또 다른 고민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아이는 자립과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겠지요. 앞으로 우리의 과제는 아이를 날려 보내주는 것이고, 혼자 날 수 없는 아이들은 함께 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교육으로 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교육을 통해 행복해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